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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칼럼

김병헌의 다시 짚어보는 우리 역사 (1)

운요호 사건에 대한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 무엇이 문제인가?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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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2월 3일 조선은 일본국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조일 수호 조규(朝日修好條規, 속칭 강화도 조약, 이하 ‘조규’로 약칭함)를 체결하게 된다.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조일 관계는 1609년 기유 약조(己酉約條)를 맺음으로써 회복된 이후 1868년 메이지[明治] 유신(維新) 이전까지 지속되어왔다. 하지만,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대조선 창구가 쓰시마번주에서 일본 외무성(外務省)으로 바뀌면서 서계(書契)에서도 변화가 불가피하였다. 이에 전통적으로 조선의 대일외교 창구를 담당했던 동래부에서는 일본의 서계 접수를 거부함으로써 일본 내에서 정한론(征韓論)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이후 1873년 흥선대원군이 정치 일선에서 배제되면서 이를 기회로 판단한 일본은 1875년 2월 다시 서계를 조선측에 전달하였으나 여전히 조선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후 양국 관계는 운요호 사건을 거쳐 1876년 2월 3일 조일 수호 조규를 체결하기에 이르는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모든 한국사 교과서에서 서술되어 있다. 그 중 하나를 들어 살펴보도록 한다.
 
'1875년 8월 강화도 초지진 포대에서 조선군은 정지 명령에 불응하는 국적 불명의 이양선에 포격을 가하였다. 이양선도 초지진에 보복 포격을 가하는 한편, 영종도에 상륙하여 약탈과 방화를 저지른 뒤 돌아갔다. 이 이양선은 일본 군함 운요호로, 일본은 자국의 배가 포격 당하였다는 것을 구실로 외교적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운요호 사건 당시 조선과 일본은 군사적 충돌을 벌일 만큼 긴장된 상황은 아니었다. 동래에서는 일본에서 파견된 외교관과 조선의 관원이 막후에서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이 외교관은 조선 조정에 개국론이 제기되고 있음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의 결단을 앞당기기 위해 무력시위를 벌일 것을 본국 정부에 건의하였으며, 이에 따라 운요호가 파견되었다. 일본은 과거 미국이 자국에 강요하였던 방식을 그대로 조선에 사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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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출판사, 229쪽

이 글은 일견 하나의 사건으로 보이나 앞 문장은 1875년 8월 강화도에서 발생한 운요호 사건이며, 아래 문장은 같은 해 4월 부산 앞바다에서 발생한 일본 군함의 무력시위 사건에 대한 서술이다.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이라면 모두 일본 군함 운요호가 등장한다는 점이며, 차이가 있다면 부산 앞바다 사건은 일본 정부에 의해 계획적으로 감행된 무력시위인 반면, 강화도 사건은 강화도 초지진에서 촉발되어 영종도로 확산된 돌발적 충돌사건이라 할 수 있다.
 
먼저 강화도 운요호 사건보다 넉 달 앞서 발생한 부산 앞바다의 무력시위 사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은 위에서 ‘일본에서 파견된 외교관’이라고 언급된 일본 외무성의 외무 소승(外務少丞)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다.
 
1873년 최익현(崔益鉉)의 상소로 흥선대원군이 정치 일선에서 축출된 소식을 접한 일본 정부는 즉각 외무 6등 출사(出仕) 모리야마를 조선에 파견하여 왜학훈도 현석운과 국교 재개 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1874년 9월 3일 이루어진 이 회담은 메이지유신 이후 조선과 일본 양국 관리 사이에 이뤄진 최초의 공식회담이었다. 이 회담에서 일본은 외무성 외무경 명의의 서계와 구(舊) 쓰시마번주 명의의 서계를 함께 보내기로 합의하였다. 이 합의에 따라 모리야마는 1875년 2월 부산에 도착하여 서계를 제출하고 다시 교섭을 시작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서계에 여전히 ‘大日本’과 ‘皇上’ 등의 용어와 그 본문이 일본어로 쓰여 진 점, 그리고 조선에서 쓰시마에 주었던 도서(圖書:인장)의 환납(還納), 사신접대를 위한 연회석상의 양복 착용 등의 이유를 들어 접수를 거부하였다. 조선정부의 거부 입장을 확인한 모리야마 일행은 그동안의 협상결과를 보고함과 동시에 히로츠 명의로 아래와 같은 정책을 제안한다.
 
 지금 저들이 서로 싸우고, 쇄국파가 아직 그 기세를 되찾지 못하고 있을 때에 힘을 사용한다면 가벼운 힘의 과시로도 목적을 이루기는 용이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 군함 한두 척을 급파하여 쓰시마와 이 나라 사이를 드나들게 하고, 숨었다 나타났다 하면서 해로를 측량하는 체하며 저들로 하여금 우리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게 하는 한편, 가끔 우리 정부가 우리들 사신의 협상 처리의 지연을 힐책하는 듯한 표시를 보임으로써 저들에게 위협적으로 받아들여질 언사를 쓴다면, 안팎으로부터의 성원을 방패삼아 일 처리를 제촉할 뿐만 아니라 국교 체결 상 어느 정도의 권리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는 것도 틀림없습니다. 메이지[明治] 8년 4월 외무성 6등 출사 히로츠 노부히로. (『日本外交文書』)
<위 인용 자료의 오른쪽에 첨부된 ‘운요호 사건의 의도’는 이 문서를 요약한 것임>
 
이에 일본정부는 모리야마의 건의를 받아들여 해로 측량이라는 빌미를 대고 해군 군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4월 20일 해군함 운요호가 부산에 입항하고, 5월 9일에는 군함 제2 테이묘호(丁卯號)가 입항하여 운요호와 함께 무력시위를 감행하였다. 이에 대해 동래부는 신임 왜학훈도 현석운을 파견하여 항의와 함께 퇴거를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석운 일행이 군함에 승선하였을 때 사격 연습을 핑계로 동시에 함포를 발사함으로써 부산과 동래부민들로 하여금 위기감을 갖게 하였다.(이상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한국사 요약)
 
이것이 4월에 있었던 부산 앞바다의 운요호 무력시위 사건으로 일본은 과거 미국에게 당했던 포함 외교 방식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한 것이다.
 
다음은 8월에 있었던 강화도의 운요호 사건으로 이에 대한 전후 상황은 1934년 동아일보에 <속조선최근세사(續朝鮮最近世史)>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이선근(李瑄根) 박사의 기록이 비교적 자세하다.
 
일본 군함 운양호(雲揚號)는 황해 연안 항로 측량의 명령을 받아 청국(淸國)의 우장(牛莊)으로 향하던 도중 음료수가 결핍(缺乏)하게 되자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일시 투묘(投錨:닻을 내림)한 후 단정(短艇)을 내리어 함장 이하 수십 명 수병이 한강의 수로를 소상(遡上)하였던 바 초지진 포대를 지키던 조선측 수병(守兵)이 그들을 포격한데서 사단은 발생된 것이다. 그리하여 포격(砲擊)을 받았지만 별단(別段) 손해(損害)도 받지 않은 운양호의 단정이 전진을 단념하고 본함(本艦)으로 회항케 되자 이 보고를 받은 운양호의 함장 이노우에 요시키(井上良馨:당시 육군소좌)는 함수를 돌려 초진 포대에 대한 보복적 행동으로 초지진과 영종도의 양 포대를 함께 포격하게 되었으니 이 당시 이미 정예한 무기를 갖추어 사기왕성한 일본해군과 새끼오리에 화승총을 매고 대하는 조선군과는 피차 상대가 되지를 않았다. 수삼 십분 맹렬한 포격이 계속되자 영종도를 지키던 조선수병은 모두 다 패주해 버리고 뒤쫓아 상륙한 50명 못 되는 일본육전대에서 영종성이 일시 점령당하게 되었으며 파괴당한 포대에서 대포 삼십육문과 화승총 백삼십여 정 및 다수한 창검 등속은 전리품으로 빼앗기게 되었다.<동아일보 1934. 1. 9. 雲揚號事件의 全貌, 현대어로 순화함>
 
이선근 박사의 이 글은 조선 말기에 정교(鄭喬:1856-1925)가 저술한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 수록된 아래 기록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해(1875) 8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청나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인천 외양(外樣)에 정박(碇泊)하고 함장인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가 단정(端整:短艇)을 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자 강화도 수병(守兵)이 발포하여 공격하였는데 사실 그 배가 일본 군함인지 몰랐다. 초9일 일본인이 드디어 영종진의 포대를 포격하여 공략(攻掠)하자 수장(守將)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 버리고 일본인이 드디어 입성하여 불태우고 노략질한 다음 돌아갔다.(前年八月日本軍艦雲揚號, 還自淸國, 碇泊于仁川外洋, 艦長井上良馨, 乘端艇, 溯上漢江, 江華島守兵, 發砲擊之, 實不知其爲日本艦也. 初九日 日本人遂砲擊永宗砲臺, 拔之, 守將棄城而走, 日本人遂入城, 焚掠而去)
 
이를 정리하면, 일본 군함 운요호가 서해의 항로를 측량하면서 요하 하구에 위치한 우장(牛莊)으로 가는 도중 담수(淡水)를 공급받기 위해 모함인 운요호는 난지도 부근에 정박시켜 놓고, 작은 배로 강화 해협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초지진의 수병(守兵)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자 전진을 포기하고 곧바로 모함(母艦)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에 격분한 이노우에 함장은 피격에 대한 보복으로 초지진을 공격하고 이어서 영종진의 포대를 공격하는가 하면 일부는 영종도에 상륙하여 방화와 약탈을 자행한 후 돌아갔다. 이때 조선인 사망자는 35명이나 되는 반면 일본인 패해자는 경상자 2명에 그쳤다. 그리고 운요호는 우장으로 가던 길을 포기하고 곧장 나가사끼[長崎]로 돌아가 사건의 전말을 토오쿄[東京] 정부에 보고하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두 차례의 운요호 사건 중 4월에 있었던 부산항 운요호 사건은 국교 재개를 위한 계획된 무력시위라고 할 수 있으나, 8월에 발생한 강화도의 운요호 사건은 무력시위나 개항 요구가 없었던 단순 군사적 충돌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강화도의 운요호 사건은 이듬해 1월에 진행된 조일 수호 조규 협상 과정에서 일본측의 압력 수단으로 이용되었음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두 건의 운요호 사건을 토대로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을 살펴보고 필자의 의견을 보태고자 한다.
 
조선이 외교 문서의 수리를 거부하자 일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군사적 수단을 강구하였다. 미국으로부터 얻은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조선을 상대로 포함 외교를 준비하였다. 일본은 강화도에서 운요호를 앞세워 무력시위를 벌였다.(운요호 사건)
【의견】 강화도에서 운요호를 앞세워 무력시위를 벌였다고 했으나, 앞 부분은 4월에 일어난 부산항 앞바다의 운요호 사건에 해당한다.
 
‘이후 일본은 운요호를 강화도로 보내 초지진을 공격하고, 영종도에 상륙하여 관아와 민가를 노략질하며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였다.’<비상교육, 205>
【의견】 운요호는 초지진과 영종도에서 공격과 약탈을 자행하기는 했으나 개항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300년 동안 통신사를 교환하고 왜관을 설치하여 교역해 왔다. 비록 최근 몇 년간 외교 격식을 두고 서로 버티어 왔으나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처지에 통상을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다. 통상 조약 등의 절차를 잘 협상하여 조치하라.”(승정원일기)
‘이 무렵 일본은 운요호를 조선에 보내 무력시위를 하며 통상 수교할 것을 강요하였다. 일본의 통상 요구에 조선에서는 찬반 논란이 있었으나, 박규수, 신헌 등의 의견을 들어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하였다.’<지학사, 216>
【의견】 인용된 ‘승정원일기’는 마치 고종이 내린 명(命)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이는 의정부에서 보고한 내용으로 고종은 이 보고를 받고 그대로 시행하도록 윤허하였다. 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운요호는 강화도에서 무력시위를 하며 통상 수교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일본은 이를 틈타 1875년 운요호를 보내 강제로 개항시키고자 하였다. 일본군대는 허락도 없이 강화도에 접근하여 포격을 가하고 초지진과 영종도를 공격하였다. 결국 일본의 강제적인 요구를 받아들여 1876년 일본과 수호 조규를 체결하였다.’<동아출판, 160>
【의견】 조선 수병의 일본 단정 공격에 대한 언급이 없이 곧바로 운요호의 초지진과 영종도 포격을 서술함으로써 조선이 일방적으로 포격을 당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며, 이어진 글에서는 조선이 마치 운요호의 포격에 굴복하여 조약을 체결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서술이다.
 
‘1875년 8월 강화도 초지진 포대에서 조선군은 정지 명령에 불응하는 국적 불명의 이양선에 포격을 가하였다. 이양선도 초지진에 보복 포격을 가하는 한편, 영종도에 상륙하여 약탈과 방화를 저지른 뒤 돌아갔다. 이 이양선은 일본 군함 운요호로, 일본은 자국의 배가 포격 당하였다는 것을 구실로 외교적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금성출판, 229>
【의견】 조선 수병이 공격한 것은 단정이지 모함인 운요호가 아니다.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명분을 찾기 위해 1875년 군함 운요호를 강화도에 파견하였다. 운요호는 해로를 탐사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강화도 초지진 포대로 접근하여 들어와 조선 수비군의 발포를 유도하였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구실 삼아 1876년 강화도 일대를 침입하여 무력시위를 벌였고, 굴욕적인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리베르스쿨, 207>
【의견】 ‘조선을 침략할 명분을 찾기 위해’는 아래 미래엔의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와 유사한 서술로 다소 지나친 해석으로 여겨진다. 일부 계획된 도발이라는 연구 성과도 있기는 하나 ‘개항의 명분을 찾기 위해’ 정도가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다음의 ‘운요호 사건을 구실 삼아 1876년 강화도 일대를 침입하여 무력시위를 벌였다’고 한 것은 분명한 오류다. 서술대로라면 1876년 1월이 되는데, 그 때는 양국간에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던 때로 강화도 일대를 침입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운요호가 허락도 없이 강화도로 다가오자 강화 수비대는 위협 포격을 가하였다. 일본은 이 과정에서 조선 수비대가 일본 국기를 모독했다고 억지를 부리며, 군대를 영종도에 상륙시켜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다. 그 후 대규모 군함과 병력을 보내 조선에 문호 개방을 강요하였다.’<미래엔, 179>
【의견】 ‘국기를 모독했다고 억지를 부리며’는 이 교과서에만 있는 서술이다. 일본 국기(國旗)에 대해서는 1876년 1월에 진행된 협상 때 언급된다. 그때 일본국 대표 구로다가 운요호의 돛 세 개에 모두 국기를 달아 표시를 하였는데도 왜 포격 했는지 추궁하자, 신헌은 ‘그 배에 단 것은 황색 깃발이어서 다른 나라 배인 줄 알았으며, 설령 귀국의 국기라 하더라도 수병(守兵)들은 모를 수 있다.’고 반박하였다. 이에 구로다가 ‘우리나라 깃발이 무슨 색인지 이미 알려줬는데 왜 연해(淵海)의 각처(各處)에 통보하지 않았는가.’라고 다시 반박한다. 운요호 사건 당시에 포격을 받은 일본 단정이 모함으로 돌아간 뒤 바로 초지진을 공격했기 때문에 국기를 모독했다고 억지를 부릴 만한 시간이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가운데 고종의 친정 이후 조선의 외교 정책에 변화의 기운이 나타나자, 일본은 조선에 문호 개방을 요구하기 위해 군함을 파견하였다. 강화도에 나타난 일본 군함 운요호는 경고 사격을 받자 함포를 발사한 뒤, 영종도에 상륙하여 살인과 약탈을 저지른 후 돌아갔다.’(운요호 사건, 1875)
‘일본은 운요호 사건 당시 조선이 국기를 게양한 군함에 포격을 가한 것은 주권 침해라고 주장하고, 이를 구실로 다시 군함을 보내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에 조선은 강화도에서 일본과 회담을 열어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을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하였다.(1876)’<천재교육,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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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사진 자료) 일본 군함 운요호는 조선의 연안에서 수심을 측량하고 무력시위를 벌였다.

【의견】 ‘조선이 국기를 게양한 군함에 포격을 가한 것은 주권 침해라고 주장하고’라 하였으나, 위의 국기 모독과 같은 맥락으로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 위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운요호로 알려져 있으나 돛이 두 개 밖에 없어서 ‘세 개의 돛[三帆]’으로 기록된 고종실록의 문답구어(問答句語)와 차이가 있다.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자 일본은 미국의 포함 외교를 모방하여 운요호를 강화도에 파견하였다. 운요호가 강화도에 무단으로 접근하자, 조선군은 경고 포격을 가하였다. 그러자 운요호는 초지진을 공격하고 영종도에 상륙하여 관민을 살상하였다.’(운요호 사건, 1875)<2016년 국정 한국사, 168>
【의견】 미국의 포함 외교를 모방한 것은 4월에 있었던 부산항 운요호 사건이며, 조선군이 포격한 대상도 운요호가 아닌 단정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모든 한국사 교과서의 운요호 사건 서술은 부산 앞바다의 무력시위 사건과 강화도의 충돌사건을 구분하지 않고 이를 섞어서 ‘강화도 운요호 사건’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는 분명 서술 오류다. 특히 일부 교과서에서 ‘침략할 명분을 찾기 위해’나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것으로 서술하고 있는 점은 다소 지나친 해석으로 여겨진다.

입력 : 2017.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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