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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칼럼

김병헌의 다시 짚어보는 우리 역사(13)

1882년 조・청 무역 장정에서 청에 내지통상을 허용했다는 교과서 서술은 오류!

한국사 교과서, 이대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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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제4조 ……조선 상인이 북경에서 규정에 따라 허락된 교역과, 중국 상인이 조선의 양화진과 한성에서 개설이 허락된 영업소를 제외하고 각종 화물을 내지로 운입(運入)하여 상점을 차리고 판매하는 것은 승인하지 않는다……’(第四條 ……朝鮮商民, 除在北京例准交易, 與中國商民, 准入朝鮮楊花津漢城, 開設行棧外, 不准將各色貨物, 運入內地, 坐肆售賣.……>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 제4조에서는 양화진과 한성에서 개설이 허락된 행잔(行棧:영업소)에서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외에 내지로 상품을 운입(運入)하여 판매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즉 개잔(開棧) 무역은 허용하고 내지 무역[통상]은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현행 검정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1882년 「조・청 무역 장정」에서 처음으로 청나라에 내지 통상을 허용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한문으로 된 조약 원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전혀 반대로 해석한 데서 기인한다. 원문 이해의 부족은 ‘楊花津漢城(양화진한성)’에 대한 서술에서도 나타난다.
 
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
교학사
213
 
금성출판
271
청 상인들이 개항장을 벗어나 서울을 비롯한 내륙에서 영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동아출판
165
이 장정으로 청 상인은 치외 법권, 서울과 양화진에 상점을 개설할 수 있는 권한, 내지 통상권, 가까운 바다에 어업과 항해를 할 수 있는 권리 등을 갖게 되었다.
리베르
208
 
미래엔
187
청 상인이 서울에서 상점을 개설하고 내륙에서도 활동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비상교육
241
 
지학사
253
청을 비롯한 외국 상인들이 서울에서 점포를 개설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개항장을 벗어나 내지 통상이 가능해졌다.
천재교육
195
1882년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이 체결되면서 한성에서의 점포 개설과 내륙에서의 통상이 허용되자, 청 상인들은 자금력과 뛰어난 상술로 급속히 상권을 확대해 나갔다.
 
「조・청 무역 장정」에는 분명 ‘楊花津漢城’이라고 되어 있으나 교과서에는 ‘서울과 양화진’이나 ‘한성’이라 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대부분 그냥 ‘서울’이라고 하였다. 이 교과서로 공부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마도 서술 중의 ‘서울’을 현재의 서울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양화진한성’이 곧 서울인가? 아니면 한성이 곧 서울인가? 어느 쪽이든 현재의 서울은 「조・청 무역 장정」이 체결될 때의 ‘양화진한성’과는 그 범위가 현저히 다르다. 따라서, 막연히 서울이라고만 했을 때는 ‘양화진한성’에 대한 개념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에 대한 개념이 분명해야 무역을 위한 행잔(行棧)을 어디에 개설했는지 알 수 있으며, 나아가 「조・청 무역 장정」 제4조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한성과 양화진에 대한 불분명한 번역은 「조・청 무역 장정」 이후 체결된 여타 외국과의 조약문에서도 나타난다. 아래는 1883년 영국과 체결된 ‘조・영 수호 조약’ 제4관에 대한 번역이다.
 
‘제4관: 양국이 체결한 조약을 시행하는 날로부터 조선국 인천부의 제물포, 원산과 부산 등 각 항구와 함께 경성인 한양의 양화진을 모두 통상하는 장소로 삼고 영국 사람들이 오가면서 무역하도록 허가한다.’
(第四款: 一, 兩國所立條約, 從施行之日起, 朝鮮國 仁川府之濟物浦元山釜山各口, 竝漢陽京城楊花津, 皆作爲通商之處, 任聽英民來往貿易.)<「朝英修好條約」, 『고종 실록』 1883. 10. 27.>
 
이 번역에서는 원문의 ‘漢陽京城楊花津’을 ‘경성인 한양의 양화진’이라 하였다. 얼핏 봐서는 한양이 곧 경성인지, 양화진이 곧 경성인지 모호하다. 그럼에도 양화진이라는 하나의 지명을 가리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번역은 여타의 조약문에서도 비슷하다.
 
漢陽京城楊花津에 대한 고종실록번역
朝英修好條約
영국
1883. 10. 27
경성인 한양의 양화진
朝德修好條約
독일
1883. 10. 27
수도인 한양의 양화진
朝義條約
이탈리아
1884. 5. 4.
수도인 한양의 양화진
朝俄條約
러시아
1884. 5. 15.
한양 경성의 양화진
朝法條約
프랑스
1886. 5. 3.
한양 경성의 양화진
韓比通商條約
벨기에
1901. 3. 23.
경성인 한양의 양화진
韓丹通商條約
덴마크
1902. 7. 15
서울의 양화진
 
모든 번역이 ‘한양의 양화진’, 또는 ‘경성의 양화진’이라 하여 양화진을 한양 또는 경성에 포함된 것으로 번역하였다. 하지만, 이는 ‘한양 경성과 양화진’으로 번역하여 두 지역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한양 경성과 양화진은 서로 다른 지역이기 때문이다.
 
본문이미지
▲ 한양경성도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여기서 우리가 막연하게 그냥 서울로 인식하고 있는 한양과 그와 관련된 지명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한다. ‘漢陽(한양)’의 ‘漢’은 한강(漢江)을, ‘陽’은 ‘산의 남쪽 물의 북쪽[山南水北]’을 뜻하는 글자로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 강북(江北)을 이른다. 이와 연관 지어 한강 이남을 漢陰(한음)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명칭은 아니다. 또, 한성(漢城)은 한양 도성(都城)의 준말로 사대문(四大門)을 중심으로 각종 성문과 성곽으로 둘러싸인 곳을 이르며 한양이나 경성(京城)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양화진은 한양 도성 즉, 한성의 남서쪽 한강 가에 있어서 한성에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漢陽京城楊花津’은 ‘한양 경성과 양화진’으로 번역하여 반드시 둘로 구분해야 한다.
 
1888년 러시아와 체결한 ‘조・아 육로 통상 장정’에는 한양 경성과 양화진을 구분해야 하는 이유가 담겨 있다.
 
‘러시아 인민은 조선국에서 제물포, 원산, 부산 등 각 항구와 한양 경성과 양화진 다섯 곳에서 통상을 하는 외에 함경도 경흥 한 곳의 통상도 승인한다.’
(俄國人民, 在朝鮮國通商濟物浦・元山・釜山各海口, 竝漢陽京城楊花津 五處之外, 咸鏡道 慶興一處, 亦準其通商.)<『고종실록』 1888. 7. 13.>
 
이 조문에는 제물포・원산・부산을 포함하여 다섯 곳[五處]이라고 하였으므로 ‘漢陽京城楊花津’을 반드시 두 지역으로 나누어 ‘한양 경성과 양화진’으로 번역하여야 한다. 이상의 설명을 토대로 「조・청 무역 장정」의 제4조와 함께 교과서의 서술을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한다.
 
‘……중국 상인이 조선의 양화진과 한성에서 개설이 허락된 영업소를 제외하고 각종 화물을 내지로 운입(運入)하여 상점을 차리고 판매하는 것은 승인하지 않는다.……’<「조・청 무역 장정」>
서울을 비롯한 내륙에서 영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금성출판사>
서울과 양화진에 상점을 개설할 수 있는 권한, 내지 통상권 등을 갖게 되었다.<동아출판>
서울에서 상점을 개설하고 내륙에서도 활동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미래엔>
서울에서 점포를 개설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개항장을 벗어나 내지 통상이 가능해졌다.<지학사>
한성에서의 점포 개설과 내륙에서의 통상이 허용되자<천재교육>
 
거듭 말하지만, 「조・청 무역 장정」에서는 양화진과 한성에 개설이 허락된 영업소에서만 무역은 허용하고, 그 외에 내지로 물건을 가져가 상점을 차리고 판매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한성과 양화진의 개잔(開棧) 무역은 승인하고 내지 무역[통상]은 승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모든 교과서에서는 서울에서의 개잔 무역도 허용하고 내지 무역도 허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부에서는 아래의 내지 토산물 구매에 관한 조문을 내지 통상 허용의 근거로 삼고 있으나 당연히 잘못이다.
 
‘……만약 양국 상인이 내지로 들어가 토산물을 구매하고자 할 때는 마땅히 피차의 상무위원과 지방관에게 청구하고 [이들이] 함께 서명한 증명서를 발급하되 구입할 처소를 분명히 적어 넣는다. 거마(車馬)와 선박은 해당 상인이 고용하도록 하고, 연도(沿途)에서는 바쳐야 할 세금을 정확히 파악하여 수령한다.……’<「조・청 무역 장정」 제4조>
 
통상은 서로 다른 국가의 상인들이 물건을 사고파는 것을 말한다. 서울을 비롯한 내지에서 통상이 허용되었다면 조선 땅 어디에서든 상품을 팔고 또 살 수 있다는 뜻이다. 당연히 양화진이나 한성에 제한된 개잔 무역을 규정할 필요도 없고, 토산물 구매에 대하여 이처럼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울 이유도 없다. 또, 「조・청 무역 장정」 제3조의 ‘……아울러 해안에 올라가 음식물과 식수를 살 수 있으나, 사적으로 화물을 무역할 수 없다.……’는 조항을 두어 사무역(私貿易)을 금지할 이유도 없다. 서울을 포함한 내륙의 통상을 허용했다면 그 안에 모든 것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은 1882년 체결된 「조・청 무역 장정」에서 청에게 내지 통상을 허용하였다는 서술은 명백한 오류다. 반드시 수정해야 한다.▩

입력 : 2017.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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