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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김병헌의 다시 짚어보는 우리 역사(10)

리베르스쿨 한국사 교과서, 영어과 출신이 '일제의 강점과 민족 운동의 전개’ 전담 집필

한국사 교과서, 이대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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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금까지 아홉 차례에 걸쳐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의 조・일 수호 조규(속칭 강화도 조약)에 대한 서술을 분석하여 몇몇 중요한 오류를 지적한 바가 있다. 아직 언급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으나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현행 검정 교과서 중 하나를 예로 들어 미처 언급하지 못한 소소한 오류와 함께 수호 조규 부분에 대한 오류를 정리하고자 한다.
 
한 교과서에 한정하는 것은 8종 교과서 모두를 다룰 경우 지나치게 분량이 많다는 점과, 그 오류의 유형이 대동소이하다는 점에서 8종 중 리베르스쿨 한국사 교과서를 선택하였다. 굳이 리베르스쿨 교과서를 택한 이유는 지금까지 언급한 오류를 골고루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양이 가장 많은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에 교과서 본문을 언급하고 필자의 의견(➡표시)을 제시하도록 한다.
 
1873년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흥선 대원군은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200)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면서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일족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206) 
➡고종 재위 중 공식적 최고 권력 기구는 국왕인 고종과 수렴청정을 시행한 대왕대비 조씨였다. 흥선 대원군은 공식적 지위[座]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권좌(權座)에서 물러났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또, 고종의 친정 선포는 1866년 2월 13일로 1873년에 친정을 선포했다는 위의 서술은 오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필자의 고종 친정에 대한 지적(2회 칼럼)에 따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고종 친정 내용을 아래와 같이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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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은 1866년 9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포함한 8,000여 명의 천주교도를 탄압하였다.(201)
➡병인박해는 1866년 한 해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1866년(고종3)부터 1871년까지 계속된 천주교 박해를 이른다. 1866년 한 해에 모두 처형한 것으로 오해를 살 수 있는 서술이다.
 
영조 정순황후 가례도감의궤
프랑스가 병인양요 때 강화도 왕실 도서관인 외규장각에서 약탈한 도서는 1978년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가 297권을 발굴하여 공개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201)
➡297권은 297책의 잘못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297권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더불어 외규장각 의궤의 제작 시기를 1782년이라고 했으나 이는 외규장각의 건립 연대이지 의궤의 제작 연도가 아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구실 삼아 1876년 강화도 일대를 침입하여 무력시위를 벌였고, 굴욕적인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206)
➡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1876년에 다시 침입하여 무력시위를 벌인 적이 없다. 또, 일본이 굴욕적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는 것도 올바른 서술이 아니다. ‘굴욕적’이란 것은 체결 후 우리가 느끼는 주관적 감정일 뿐, 애초에 ‘굴욕적 조약’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접견대관 신헌이 조약 체결의 전 과정을 일기 형식으로 쓴 ‘심행일기’나 2월 3일 체결된 수호 조규의 12관을 보더라도 ‘굴욕적’이란 표현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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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해협에 불법 침입한 일본 군함 운요호(206)

➡대부분의 교과서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위 그림을 운요호로 표시하고 있으나 ≪고종실록≫의 ‘운양함에 있는 세 개의 돛에는 다 국기를 세워서 우리나라 배를 표시하였다.(雲揚艦三帆, 皆建國旗, 以標我國船)’고 한 기록에 따르면 돛이 두 개밖에 없는 위 그림은 운요호가 아님이 분명하다.
 
제1조에서 조선은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자주국임을 선언하였는데, 이는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206)
➡조약을 체결하는 국가가 자주국이어야 함은 당연하며, 마지막 서명 부분에 청의 연호 대신 개국 기년(開國紀年)을 사용한 것은 조선이 자주국임을 천명한 것이다. 조약 어디에도 ‘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근거가 없다. 제1조의 조는 관의 잘못이다.
 
제7조는 해안 측량권, 제10조는 치외 법권(영사 재판권)을 규정하고 있다. 이 두 조항은 강화도 조약의 불평등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206)
➡제7관의 해안 측량은 개항을 위해 사전 조사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며, 제10관은 양국 범죄인에 대한 재판 관할권을 규정한 조관으로 치외 법권이나 영사 재판권이 아니다. 당연히 불평등이라 할 수 없다. 제7조와 제10조의 조는 관의 잘못이다.
 
조・일 수호 조규 부록에서는 조선에서 일본인 외교관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도록 하고(207)
➡부록 제1관의 ‘각 항구에 주류(駐留)하는 일본국 인민 관리관은 조선국 연해 지방에서 일본국 배가 파선되어 긴급할 경우, 지방관에게 알리고 해당 지역의 연로(沿路)를 지나갈 수 있다.’를 ‘일본인 외교관 여행 자유 조항’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잘못이다. 이 조관은 사고 선박의 처리를 위해 일본인 관리관의 현장 접근을 위한 연로(沿路) 이용의 융통성을 부여한 것으로 자유 여행을 허용한 것이라는 교과서의 서술은 옳지 않다. 일본국 외교관의 자유여행은 1882년에 체결된 조・일 수호 조규 속약에서 처음으로 규정된다. 
 
개항장 사방 10리 안에 일본인이 거주할 수 있는 구역인 거류지를 설정하였다.(207)
➡‘개항장 사방 10리’는 부산항 부두로부터 동서남북 각 10리 까지 일본국 상인들이 자유롭게 다니며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거리, 즉 한행이정(閑行里程)이라는 것으로 거류지가 아니다. 거류지는 조계(租界)와 같은 말로 동래 왜관의 수문(守門)과 설문(設問)을 헐고 새로운 경계를 정한 일본인 거주지를 말한다. 이 조계는 부산항 남서쪽에 있으며 일부는 부산항 부두로부터 10리 밖으로 벗어나 있다. 한행이정과 조계를 분리 서술해야 함에도 대충 얼버무려서 이해할 수 없도록 하였다.
 
조・일 무역규칙에는 양곡의 무제한 유출, 무관세, 무항세 조항이 들어 있었다.(207)
[정리해볼까요] 조・일 무역규칙 : 무관세, 무항세, 무제한 곡물 유출(208)
➡양곡의 무제한 유출은 ‘양미와 잡곡을 수출입할 수 있다.’고 되어있어 무제한이나 유출과 같은 용어가 없다. 관세는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관세 조항이 들어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상선은 선박의 크기(종류)에 따라 항세를 납부하도록 정하였으며, 상선이 아닌 일본국 정부 소속 선박은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무항세’는 잘못된 표현이다. 따라서 ‘세 가지 항목이 들어있었다.’는 서술은 명백한 오류다.
 
1883년 조・일 통상 장정의 무관세 규정이 개정되어 일본으로부터 관세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조일 수호 조규에는 관세에 관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무관세 규정이 개정되어’라는 서술은 잘못이다. 조선 정부는 관세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여 관세를 설정하지 못하였다가 1883년 통상 장정에서 비로소 관세를 설정하여 이를 부과할 수 있었다. 관세권은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조약에 규정하여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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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활동 자료1] 제10관 일본 인민이 조선 지정의 각 항구에서 머무르는 동안 죄를 범한 것이 조선 인민과 관계되는 사건일 때는 모두 일본 관원이 심판한다.(207)
➡제10관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이 지정한 각 항구에 있으면서 만약 그가 범한 죄가 조선국 인민과 관계되더라도 모두 일본국에 귀속시켜 심의 판단하며, 만약 조선국 인민이 죄를 범한 것이 일본국 인민과 관계되더라도 모두 조선 관리에게 귀속시켜 사변(査辨:조사 분별함)하되 각각 그 나라의 법률에 의거 신문(訊問)하고 판단하여 털끝만큼도 비호하는 일이 없이 공평하고 합당하기를 힘써야 한다.’이다. 후반부의 조선인 범죄자에 대한 내용은 생략하고 앞부분만 제시하여 본래의 뜻을 왜곡하였다.
 
[탐구활동 자료2] 제4관 부산 항구에서 일본 인민들이 다닐 수 있는 거리는 부두로부터 계산하여 동서남북 각 지름 10리로 정한다.(207) 
➡‘부산항 부두로부터 동서남북 각 10리로 정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지름으로 계산하면 20리가 된다.
 
[탐구활동 자료3 제6칙 조선의 항구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쌀과 잡곡을 수출할 수 있다.(207)
➡‘수출할 수 있다.’는 ‘수출입할 수 있다.’의 잘못이다.
 
[탐구활동 자료3] 제7칙 일본 정부에 소속된 선박들은 항세를 내지 않는다.(207)
➡제7칙은 항세 조항으로 아래와 같이 상선의 경우 선박의 크기에 따라 항세를 정했으며, 상선이 아닌 일본국 정부 소속 선박은 항세를 납부하지 않도록 하였다.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 정부 소속 선박만 언급한 것은 사실 왜곡이다.
 
제7칙
항세(港稅)  
연외장(連桅檣) 상선 및 증기 상선의 세금은 5원이다.<모선에 부속된 각정(脚艇)은 제외한다.>
단외장(單桅檣) 상선의 세금은 2원이다.<500섬 이상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것이다.>
단외장 상선의 세금은 1원 50전이다.<500섬 이하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것이다.>
일본국 정부에 소속된 모든 선박은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 (고종 실록 1876년 7월 6일 기사)
 
[탐구활동] 자료1. 제4관에서 치외 법권을 인정한 조항을 찾아보고, 강화도 조약의 치외 법권이 왜 불평등한 것인지 오늘날의 치외 법권과 비교하여 보자.(207)
➡자료1의 제4관은 재판권 관할 조항으로 치외 법권이 아니며, 조일 양국의 범죄자는 양국의 재판에 귀속시키는 것으로 불평등이라 할 수도 없다.
 
[탐구활동] 자료2, 3을 일본의 침략과 관련하여 설명해 보자.(207)
➡자료2는 소호 조규 부록이고 자료3은 수호 조규 무역 규칙으로 모두 무역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이 침략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어이없는 질문이다. 집필자는 과연 설명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정리해볼까요]
조・일 수호 조규 부록 : 간행이정 10리(208)
조・일 수호 조규 속약 : 간행이정 10리→50리→100리
➡간행이정은 한행이정(閑行里程)의 잘못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필자의 간행이정은 한행이정의 잘못이라는 지적(7회 칼럼)에 따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간행이정’을 모두 ‘한행이정’으로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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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볼까요]
조・일 수호 조규 속약
제물포 조약 부록
➡조・일 수호 조규 속약은 말 그대로 수호 조규의 속약(續約)으로 제물포 조약의 부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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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오류는 리베르스쿨 교과서 중 수호 조규 부분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적지 않은 오류에 집필진을 확인해보니 현직 고등학교 교사 3명, 중학교 교사 1명, 그리고 영어과 출신의 리베르스쿨 대표 1명까지 모두 다섯 명이 집필자로 참여하였다. 교사는 지식 전달자이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 교과서 필진에는 전문가가 한 명도 없다는 뜻이다. 교사 한 명이 고대사와 중세(고려)사 두 단원을 집필했는가 하면, 영어과 출신의 대표는 1단원부터 6단원까지 모두 집필하면서 5단원 ‘일제의 강점과 민족 운동의 전개’를 전담 집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필진으로 고등학교 교과서를 집필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폐지 수순을 밟고 있는 국정 고등학교 한국사는 전문가 27명이 참여했으니 대략 한 단원 당 4~5명이 집필했음에도 집필자의 전문성과 서술 오류에 대한 논란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비전문가 다섯 명이 선사시대부터 현대사까지의 방대한 역사를 다룬 고등학교 교과서를 집필했는데도 필진의 전문성이나 서술 오류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서술 오류가 아예 없거나 극히 미미하다면 굳이 문제 삼을 일이 아니겠으나 필자가 살펴본 바로는 그렇지 않다.
 
필자는 2014년부터 ‘국사 용어 해설집’ 편찬에 필요한 용어를 수집하기 위해 8종 한국사 교과서를 모두 읽은 바 있다. 교과서를 읽으면서 끊임없이 발견되는 오류에 해당 출판사와 국사편찬위원회에 지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하여 수정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어느 순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8종 교과서를 대상으로 하다 보니 그 분량이 개인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선 데다 단순히 자구 몇 자 고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위에 정리한 수호 조규 부분이다. 여타 7종의 교과서까지 확대하면 그야말로 중구난방(衆口難防)이다. 이 정도면 역사 해석의 다양성이 아니라 서술 오류의 다양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교과서로 우리 아이들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입력 : 2017.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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