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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최초발굴, 오다 줄리아는 유배지(고즈시마)에서 죽지 않았다?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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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의 우도성(宇土城)에 가다
 
돌아가라 나의 푸른 새 메마른 느릅나무의 가지 곁으로
네가 없는 오오 세상 속은 아침 해 조차 떠오르지 않아
(...)
불타라 여름의 십자가 남쪽하늘 높이
밤의 어둠을 비추는 별자리는 눈물의 상들리에
마치 무지개처럼 꿈으로 사라진 줄리아.
(...)
사랑의 끝을 알리듯이 찢겨진 나의 로자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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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와리비좌의 뮤지컬 '오다 줄리아'의 포스터
일본의 유명 밴드 ‘서던 올 스타스(Southern All Stars)’가 예로부터 내려온 전설을 바탕으로 작사·작곡한 노래 <꿈으로 사라진 줄리아>이다. 마냥 노래를 부르던 그들도 ‘전설로만 알았던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것으로 알고 놀랐다’고 한다. ‘오다 줄리아’는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오다 줄리아’는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 의해 포로로 일본으로 잡혀갔다...1596년 5월 일본에서 활동하던 ‘베드로 모레홍(Petro Morejon)’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줄리아’. 1600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해 처형된 뒤 운명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후궁의 시녀가 됐다. 그녀가 궁에서 생활하던 중 천주교 신자인 것이 발각됐으나, '종교를 버리는 것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실이 되라'는 것을 거절해 태평양의 절해고도에서 40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오다 줄리아’가 유배생활을 했던 도쿄 남쪽 이즈(伊豆)제도의 고즈시마(神津島)에선 1970년부터 해마다 5월 셋 째 주 토요일과 일요일 그녀를 기리는 ‘줄리아 축제’를 열고 있다. 일본의 성당들과 고즈시마 마을(村)에서 주관하는 연례적인 행사다. 축제날에는 도쿄에서 178km떨어진 뱃길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일본인들이 그곳을 찾는다.
 
대체로 지금까지 알려진 그녀의 핵심 스토리다.

‘그녀가 일본에서 어떻게 성장했을까.’

필자는 평소 이 점이 궁금했다. 그래서, 고니시가 다이묘(大名)를 지냈던 구마모토에 있는 우도성(宇土城)을 찾았다.

흔적(痕迹)만 남은 우도성-
 
운전은 오쓰보 시게다카(大坪重隆·76)씨가 했고, 와타나베 아키라(渡邊章·69)씨가 조수석에 앉아서 지도를 펼쳐들고 내비게이터 역할을 했다. 두 사람 모두 나이를 잊고 필자의 취재를 지원하기 위해 노익장을 과시했던 것이다. 차(車)는 후쿠오카를 아침 일찍 출발해서 최근 지진 피해를 많이 당한 구마모토(熊本)를 향해서 달렸다. 곳곳에서 지진 복구공사를 하고 있었고, 차가 달리는 도로도 곡예를 하듯이 출렁거렸다.
 
‘아직도 땅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두 노인의 목소리도 떨리는 듯했다. '지진이 그만큼 무섭다'는 것이다.
 
우도시(宇土市)는 구마모토 현의 중앙에 위치한 인구 3만 7여명의 작은 도시다. 이곳은 중세부터 교통의 요지인 관계로 호족들 간의 다툼이 계속돼 왔다. 근대 이후에도 구마모토 현(縣) 상공업의 거점으로 자리했다. 우도 반도의 북부를 차지하고 있는 이 도시는 서부로는 아리아케(有明) 해(海)와 접해있어서 해상교통도 편리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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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고니시 유키나가에 의해 정비되었다는 센바천(船場川)

우도시의 곳곳도 지진의 영향으로 상처투성이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운하를 만들었다'는 하천 센바가와(船場川)도 마찬가지였다. 1861년 만들어진 길이 13.7m, 폭 4.1m의 하천 위 교량의 돌기둥들도 맥없이 쓰러져 있었다.
 
필자 일행은 성터 입구에 차를 대고 ‘문화재 지정’ 푯말을 따라 어린 시절 보물 찾기를 하듯이 성터 공원의 계단을 올랐다. 막바지 여름을 아쉬워하는 것인가. 400여 년 전 고니시가 성주로 부임할 때 '매미들이 합창을 하듯이 울었다'던 울음이런가. 필자를 본 매미들이 '목이 터져라' 극성스럽게 울어댔다. 잠시 후 안내판에 쓰여 있는 크리스천 다이묘(大名)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라는 타이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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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성의 안내문

<1558년 오사카 사카이(堺)의  호상(豪商) 고니시 류사(小西隆佐)의 아들로 교토에서 태어나 히데요시(秀吉) 측근에서 수군을 통솔하며 활약했다. 히고(肥後)의 무사들이 일으킨 반란을 제압 한 후 1558년 우도(宇土)·마시키(益城)·야스시로(八代)의 히고 남반부 약 14만 6천석의 영주로서 우도성을 본거지로 했다. 분로쿠·게이초의 역(임진왜란, 1592년-1598) 당시 선봉으로 2회에 걸쳐 조선 반도에 출병했다. 실제로 우도성에 머무른 것은 1년 반 정도에 불과했다. 1600년 서군에 속했던 고니시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해 교토에서 처형, 4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사실이다. 고니시는 1588년부터 1600년까지 이곳에서 12년간 성주를 역임했다. 이곳저곳 불려 다니느라 실제로 이성에 머무른 것은 안내문에 적혀 있는 바와 같이 1년 반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도에는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천주교 신도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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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고니시의 우도성 터

인적이 없는 공원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계속되는 가뭄 탓으로 기력을 잃었는지 빛바랜 낙엽들이 바람에 뒹굴었다. 공원 뒤편 구석에 동상이 하나 서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동상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오다 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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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의 동상
필자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동상 앞에 섰다. 동상을 감싸고 있던 석판도 지진으로 떨어져나가 있었다. 우리네 인생사도 그러할 터. 먹구름과 흰 구름이 교차할 때마다 동상의 색깔이 변했다. 동상 아래에 쓰여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이력서. 중복되는 부분은 생략한다.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누스. 조선 출병 시 선봉으로 출진하였으나 군사 우선의 가토 기요마사와 대조적으로 개전 당초부터 조기 평화 교섭을 모색하였기 때문에 기요마사와 심각한 대립을 하였다...1600년 교토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유체는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에 의해 거두어졌다. 그의 죽음은 당시 유럽에서 크게 애도해 사망 7년 후인 1607년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유키나가를 주인공으로 하는 음악극이 공연되었다.>
 
유키나가의 동상 옆에 서 있는 또 하나의 안내문-‘줄리아 오다(아)’.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다른 부분이 있어서 안내문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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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오다(아)에 대한 설명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조선 출병에서 선봉을 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 전쟁의 과정에서 고아가 됐던 조선인 소녀 ‘오다(아)’를 우도에 데리고 돌아왔다. ‘오다(아)’는 유키나가의 처 쥬스타에 의해 길러져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줄리아. 이후 경건(敬虔)한 신자로 생애를 보냈다...1600년 유키나가의 처형 후 고니시 일족의 재산 및 인원 정리 과정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있는 에도성의 어느 부인의 시녀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슨푸성(靜岡)에 이주한 이에야스와 동행하게 되고 거기에서 직접 이에야스의 녹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1612년 이에야스 측근 부하의 사건을 계기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불신이 폭발, 금교(禁敎)가 진행되었다. 이에야스는 줄리아에게도 기교(棄敎)를 종용했으나 이를 따르지 않아 결국 고즈시마(神津島)에 유배되었다. 줄리아는 그 후 1620년에 나가사키, 2년 후에는 오사카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의 소식은 불명, 사망 연도도 알 수가 없다. 헤이세이(平成) 27년 3월>
 
고즈시마에서 죽지 않았다?
 
“줄리아는 그 후 1620년에 나가사키, 2년 후에는 오사카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의 소식은 불명, 사망 년도도 알 수가 없다.”
 
이 부분이 문제의 초점이다. 우도시교육위원회는 1622년 2월 15 일자 <일본 발신> 프란시스코・파체코 신부의 편지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신부의 편지에 따르면 오다는 고즈시마를 나와 오사카에 이주해 신부의 원조를 받고 있는 취지의 문서가 나왔다. 또한, 후일 그녀가 나가사키로 거처를 옮겼다는 기록도 있다. 그녀의 최종 삶에 대해서는 어떠한 내용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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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시마에 있는 오다 줄리아의 묘지

오다 줄리아가 고즈시마에서 생을 마쳤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1950년대에 고즈시마의 향토 역사가 야마시타 히코이치로우(山下彦一郎)씨가 ‘섬에 있는 유래 불명의 공양탑이 오다 줄리아의 묘지로 주장한 것’으로부터 ‘그녀가 고즈시마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설(說)이 탄력을 받았다. 필자 역시 2008년 그곳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렇다면, 고즈시마에 있는 오다 줄리아 묘지는 어떻게 된 것일까? 필자는 그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발품을 팔아보려고 한다(계속).

입력 : 201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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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상인 장상인의 세계, 세계인

전 팬택전무(기획홍보실장) 동국대 행정학과/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석사)/인하대 언론정보학과대학원 박사(수료). 육군 중위(ROTC 11기)/한국전력/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상무)/팬택 기획홍보실장(전무)/경희대 겸임교수 역임. 현재 JSI파트너스 대표/ 부동산신문 발행인(www.renews.co.kr) 저서:홍보, 머리로 뛰어라/현해탄 波高 저편에/홍보는 위기관리다/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우리가 만날 때마다 무심코 던지는 말들/오타줄리아(공저) 기타:월간조선 내가 본 일본 일본인 칼럼 215회연재/수필가, 소설가(문학저널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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