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민단체 재검토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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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아키라씨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제가 몇 년 전에 장 선생을 후쿠오카 형무소가 있던 자리에 안내한 적이 있었지요? 윤동주 시인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죠. '한국시인 윤동주의 시비(詩碑)를 건립하려는 시민단체의 요청이 인정되지 않았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장소는 현재의 구치소 북측 공원 같습니다. 유감이군요."
일본의 오랜 지인 '와타나베 아키라(渡邊章·69)' 씨가 구정 연휴기간 필자에게 보내온 이메일이다. 필자는 4년 전 그와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 터가 있었던 니시진(西新) 사와라구(早良區) 모모치(百道)를 찾은 적이 있었다. 또 다른 일본인 '오츠보 시게다카(大坪重隆)'씨도 동행했었다. 와타나베 씨의 이메일에는 대서특필된 2월 4일자 서일본신문 기사가 첨부돼 있었다.
1877년 창간된 서일본신문(70만부 발행)은 후쿠오카 시에 본사를 두고 구마모토(熊本), 가고시마(鹿島), 나가사키(長崎), 오이타(大分) 등 규슈(九州) 지역 전체를 커버하는 유력매체다. 우리의 여러 신문이 이 내용을 다뤘으나 대체로 도쿄 신문에 보도된 기사 중심이었기에 서일본신문에 게재된 내용을 정리해본다.
전중(戰中), 후쿠오카시(福岡市)에서 옥사 한국시인·윤동주
시(市)의 공원에 시비(詩碑)인정 안 해.
지명도, 공헌 없다고 설명
'일한관계를 헤아린(忖度)것일까' 시민단체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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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본신문의 윤동주 시인 관련 기사 |
<앞의 대전(大戰)중에 후쿠오카시에서 옥사한 한국의 국민적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시비건립에 대해 예정지인 공원을 관리하는 시(市)가 "후쿠오카에서 유명하지 않고, 시에 공헌한 인물도 아니라서 허가할 수 없다"고 한 사실이 알려졌다. "평화를 염원했던 서정 시인으로 일본에도 팬이 많다"는 시민단체는 "정체하고 있는 일한관계를 헤아린 것일까?" 납득하지 않는다.>
보도된 기사의 제목과 도입부분의 내용이다. 후쿠오카 시와 일본의 시민단체가 서로 상반된 의견으로 맞서고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시민단체는 어떠한 사람들일까. 기사를 통해서 그들을 알아본다.
<일본의 대학교수와 시인들이 지난해 2월 16일 '후쿠오카에 윤동주의 시비를 건립하는 회'를 조직했다. 구(舊)형무소가 있었던 곳에서 가까운 곳. 추도식을 매년 개최하는 모모치(百道) 서공원이 건립지로 어울린다고 보고 공원을 관리하는 사와라구(早良區)에 타진했으나 지난여름에 '인정하지 않는다'는 연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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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형무소가 옮겨간 자리에 세워진 구치소 |
윤동주 시인은 1945년 2월 16일 새벽 3시 36분 후쿠오카 감옥에서 청춘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윤동주 시인의 기일(忌日)을 맞아 민간인들이 순수한 마음에서 시비건립을 추진한 것이다. 일본인들만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발족한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다. '후쿠오카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의 창립자인 '니시오카 겐지(西岡健治)' 후쿠오카 현립대 명예교수를 비롯해서 일본인 교수·문인 등 10명이 발기인이다.
후쿠오카 시는 어떤 이유에서 이를 거절했을까.
<사와라구 유지 관리과가 도시공원법과 공원 조례의 취지에 비추어 검토하고 "시민의 교양에 이바지한다고 인정되지 않는다"라고 판단했다. "일한의 정치적 문제는 관계없다"고 설명한다.>
과연 정치적 문제는 없었을까.
신문은 '역사적 가치를 판단해야한다'는 나가사키대학(長崎大學) '다카미 야스토시(高実康稔)' 명예교수의 의견을 게재했다.
<나가사키 시에서 지난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한 외국 군인의 추모비가 시민의 발안으로 시유지에 완성하는 등 공공장소에 시민 유지(有志)가 전쟁의 기억과 특정인물에 관련한 비(碑)를 세우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다. 시인으로서의 문화적 가치는 물론 '치안유지법은 무엇이었는가?'를 후세에 전하는 역사적 가치도 냉정하게 파악하고 다시 검토해주기 바란다.>
서일본신문은 시비건립위원회 대표인 '니시오카(西岡)' 명예교수의 멘트를 끝으로 기사를 마감했다.
<'시비(詩碑)는 역사적 사실을 바로 보는 계기가 되고 일본인의 손으로 건립한다는 것은 상호이해도 깊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유감이다. '비는 시민들의 기부로 건립할 계획이며 모금활동을 계속 하겠다'라고 말한다.>
서일본신문 윤동주 기사 16회 연재해
1994년 서일본신문은 <빼앗긴 시혼(詩魂) 발굴, 윤동주의 옥사(獄死)>라는 타이틀로 16회에 걸쳐 윤동주의 인생 역정(歷程), 시의 세계 등을 연재했다. 필자는 연재기사 중에서 '우리말 수난'과 '조국 소멸의 위기감' 부분이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윤동주 시인이 가장 중요시하고 그가 어느 곳에 가더라도 지니고 다녔던 책은 한국의 유명한 국어학자인 최현배(1894~1970) 씨가 쓴 '우리말본'이다. 윤동주가 한글 시(詩)를 쓰게 된 것은 그의 은사인 최현배 씨의 사상에 공감을 했기 때문이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처음 쓴 '새로운 길(1938년)'이라는 시다. 이 시는 학우회지 문우(文友)에 발표됐다. 젊은이의 건강한 활기와 청아한 마음이 가득 들어있다.>
<자기나라의 언어사수가 조국의 독립과 민족문화 회복에 있어서 최후의 요새라고 본 조선 반도의 사람들 ―
그것에 반해 그들의 언어를 소멸시켜서 내선일체화(內鮮一体化) 정책을 완성시키려고 했던 일본의 위정자들 ―
그것에 반해 그들의 언어를 소멸시켜서 내선일체화(內鮮一体化) 정책을 완성시키려고 했던 일본의 위정자들 ―
윤동주는 양자의 마찰이 치열했던 시대에 한글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80년대 초반부터 일본에서 알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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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 전시회에 모인 일본인들(2015년 2월 규슈대 / 사진: 오츠보 시게다카씨) |
윤동주 시인이 일본의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4년 그의 시집(詩集)이 출판(記錄社)되면서 부터이다. 방송에서의 최초보도는 1988년 2월 ‘NHK 라디오 한글강좌’이다. 1990년 故이바라기 노리코(茨木則子, 1926~2006) 시인의 글 '윤동주에 대하여'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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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바라키 노리코 시인(사진: 야후재팬) |
<'청춘의 시인' 윤동주―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기 있는 시인. 수난의 심벌, 순결의 심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장본인. 일본유학 중 독립운동의 혐의로 체포되어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의 나이로 옥사(獄死)한 사람. 옥사의 진상도 의문이 많다. 일본의 젊은 간수는 '윤동주가 사망 당시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고 했다.>
일본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윤동주를 애도하고 시비를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우리도 이들에게 박수를 보냄은 물론 동참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후쿠오카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이어서 한국 관광객들이 아주 많이 가는 곳이다. 이를 감안해서라도 후쿠오카 시(市)는 시민단체가 추진하고 있는 윤동주의 시비 건립을 재고해야 한다.
특히, 2017년은 윤동주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후쿠오카 시의 현명한 판단을 촉구한다.
특히, 2017년은 윤동주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후쿠오카 시의 현명한 판단을 촉구한다.
과거의 아픈 역사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미래를 위한 척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