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군이 가장 무서워했던 무기는 가볍고 빠른 전차였다. 전차는 기원전 18세기 말부터 사용되었다. 히타이트(Hittite) 최초의 대왕이었던 '아니타'는 비록 40대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전차를 끌고 전쟁터로 나갔다. 그의 실록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기록 중에서 전차가 전쟁에 투입되었다는 증거로서는 최고(最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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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 제국의 전차(사진: 비르기트 브란다우 외 '히타이트') |
불가사의한 민족의 역사를 찾아다니면서 글을 쓰는 독일의 '비르기트 브란다우(Birgit Brandau)'와 '하르트무트 쉬게르트(Hartmut Schickert)'의 공저 <히타이트>(장혜경 譯) 중 '청동기시대의 가장 무서운 무기' 부분에 들어있는 내용이다.
그러한 히타이트의 군대는 점점 강해졌다. 이 군대는 신속성·효율성·전술 등 세 가지 요소를 완벽하게 갖췄다. '이집트의 람세스 2세(B. C 1279-1213)가 자신을 향해서 돌진해 오는 히타이트의 전차 3,500대를 보고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히타이트 인들이 철(鐵)의 생산 기술을 익히고 철을 실생활에 이용한 것뿐만 아니라, 철을 전쟁의 무기로 사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전쟁과 평화
전쟁을 거듭하던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결국 평화 협상을 맺었다. 기원 전 1259년 11월 21일, 이집트의 수도 '피라메스'에서 양국의 법학자가 만났던 것이다. 각각 세 명씩으로 한정했던 양국의 대표는 람세스 2세를 알현하고 하나의 은판을 내밀었다. 그 내용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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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평화조약 문서(사진: 비르기트 브란다우 외 '히타이트') |
"이집트 대왕과 '하투샤' 대왕의 관계에 대하여 신들께서 이 조약으로 양국의 전쟁을 금하셨도다."
이것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최초로 체결된 국제법상의 조약이란다. 이 조약의 사본은 현재 'UN본부에 걸려 있다'고 한다. 이 조약은 쌍방에 대한 전쟁을 거부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이 공격할 때도 상호 군사 원조를 해준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문서에는 상대국에서 탈주한 범죄자를 받아주는 것도 금지했고, 연좌제나 신체형 같은 형벌을 내릴 수 없게 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봐도 상당히 우호적이고 합리적인 외교 문서다.
히타이트는 유럽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신은 빵을 먹을 것이고, 물을 마실 것이다."
(nu ninda-an ezzatteni vadar-ma- ekutenni)
(nu ninda-an ezzatteni vadar-ma- ekutenni)
필자가 전 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학자들은 히타이트인의 표현 방식(언어)에서 그들의 뿌리를 찾았다. '히타이트인들이 인도·유럽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비르기트 브란다우'와 '하르트무트 쉬게르트'의 저서 <히타이트>의 내용 일부를 다시 빌어본다.
"동사 변화 및 주어 변화 역시 그리어나 라틴어와 아주 흡사했고, 분사의 사용이나 기타 여러 문법적 특성도 마찬가지였다. 결론은 하나였다. 히타이트인들은 인도·유럽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저자는 언어학적으로 볼 때 "히타이트인들은 지금의 유럽인들과 상대적으로 가까운 친척이었으며, 히타이트어는 문자로 남겨진 인도·유럽어 중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하투샤 유적지를 찾는 사람들 중에 유럽인이 많다. 유적지의 발굴도 유럽인들이 했고, 유적지를 보고 감동하는 것도 유럽인들이다. '자신들의 뿌리를 찾았다'는 인간적 본능 때문인 듯싶다.
사자(獅子)의 문 · 스핑크스 문 · 대왕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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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탐사에 열중인 유럽의 노부부 |
필자가 하투샤(Hattusha)의 하(下)도시에서 상(上)도시로 올라갈 즈음, 바위 덩어리는 물론 쇠붙이도 녹여버릴 기세인 용광로 같은 불볕더위가 계속됐다. 한 때 영광스러웠던 제국의 수도가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불볕 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배낭을 메고 유적지를 뒤지는 유럽인 노부부가 있었다. 필자는 나이를 잊고 유적지 탐사에 열중하는 그들을 보는 순간 경외심(敬畏心)이 우러났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과연 히타이트인들은 지금의 유럽인들과 가까운 친척이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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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문 |
상(上)도시의 정상에는 제법 긴 성벽이 있었다. 성벽을 따라 올라가자 '사자(獅子)의 문'이 나왔다. 지금으로부터 3000여 년 전인 기원 전 13세기에 만들어진 성문(城門)이다. 그토록 많은 세월이 흘렀으나 사자 상(像)에서 위엄이 묻어났다. 특히, 왼쪽의 사자상은 포효(咆哮)할 것 같은 형상으로 필자를 응시했다. 이 성문을 드나들었을 히타이인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다시 '스핑크스 문'으로 이동했다. '스핑크스 문'은 이집트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스핑크스는 많이 훼손돼 있었으나 그래도 형상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 또 다른 지하의 문이 있었다. 석조 터널의 입구였다. 자료를 펼치자 이 터널은 높이가 3-3.3m이며 길이가 71m로 나와 있었다. 이 터널은 히타이트 제국의 마지막 왕인 '수필룰리우마 2세(B. C 1214-1190)'의 작품이란다. 필자는 터널 아래로 내려갔다. 경사면을 따라서 동굴을 지나자 수풀 우거진 드넓은 대지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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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과 스핑크스 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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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핑크스 문 아래에 있는 지하 터널 |
다시 동남 편으로 내려가자 '대왕의 문'이 나왔다. 대왕의 문에는 왼손 주먹을 불끈 쥐고, 도끼를 들고 있는 용맹스러운 전사가 있었다. 안내인에게 물어보자 '원형은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에 있고, 이곳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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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의 문 |
이 하투샤 유적지에는 볼거리가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햇볕과 시간에 쫓겨서 유적지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다. 필자는 히타이트의 왕궁 터를 바라보면서 '야즐르카야(신의 방)'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계속).
<✪참고 및 인용: '비르기트 브란다우(Birgit Brandau)'와 '하르트무트 쉬게르트(Hartmut Schickert)'의 공저 '히타이트'(장혜경 譯)/ 이희철의 '히타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