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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칼럼

아! 히타이트, 히타이트 인(人)이여!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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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카라의 아침이 밝자 필자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오전 일찍 도심을 떠나 아나톨리아(Anatolia)의 대평원을 달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동과 서로 1600km, 남과 북으로 550km인 광활한 반도인 아나톨리아-
 
그렇다고 해서 아나톨리아 반도 전체를 종주하는 것이 아니고, 앙카라에서 약 250㎞ 지점에 위치한 '하투샤(Hattusha)'라는 유적지를 가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보아즈칼레(Boğazkale)라고 부르는 '하투샤'는 기원 전 히타이트(Hittite) 제국의 수도였다.
 
호텔 앞에 차를 댄 운전사 알리(Ali)씨가 "10살짜리 아들이 마침 방학이어서 역사 공부를 위해 데리고 가도 좋으냐? "고 해서 쾌히 승낙을 했다. 이름이 '무스타파(Mustafa)'라는 귀여운 남자 아이였다. 필자는 그들에게 농담을 했다.
 
"무스타파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
 
"아닙니다. 아닙니다. 감히..."
 
그들은 '무스타파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81-1938)'와 비교한다는 그 자체를 부끄러워했다. 한바탕의 웃음을 뒤로한 후 필자 일행은 앙카라 시내를 벗어났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차는 대지를 가르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필자는 터키의 땅이 넓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 시간 여 만에 호박 같은 멜론을 파는 곳에서 잠시 내려서 휴식을 취했다. 보기와는 달리 멜론이 무척 맛이 있었다.
 
앙카라를 떠난 지 2시간 30분 쯤 후 '순구룰루'라는 지명의 읍내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지자 자동차가 좌우로 흔들릴 정도로 길이 울퉁불퉁했다. 드디어 나무숲에 서있는 반가운 안내판이 나왔다.
 
WELCOME TO YAZILIKAYA
Dirstict Governorship of Boğazk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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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투샤 입구의 간판

고대 유적지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였던 하투샤(Hattusha) 입구에 도착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허허벌판 아니, 돌멩이로 뒤덮인 버려진 땅처럼 보였다.
 
'이곳에서 B. C(기원 전) 1700년경부터 B. C 1200년까지 500년 동안 천하를 호령했다'는 말인가. 필자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필자를 안내한 한국인 이진관(54)씨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곳은 작은 왕국이 아니라 대국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 도시에서 5만 여명의 사람들이 거주했답니다. 인류 최초로 집단 거주를 했으며, 아나톨리아에서 최초의 정치 세력을 형성했던 국가였습니다."

 
기원 전에 5만 명이 거주했다면 엄청나게 큰 대도시였을 것이다. 터키 전문가 이희철(李羲徹) 선생은 저서 <히타이트>에서 "아나톨리아에서 최초의 정치 세력을 가진 국가로 등장해서 이집트, 아시리아와 함께 고대 오리엔트 3대 제국으로 부상한 강대국이었다"고 했다.
 
아! 히타이트 왕국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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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 제국의 신전 터(1)
 
필자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하투샤(Hattusha)'의 하(下) 도시 입구에 들어섰다. 순간, 귀에 익은 말이 들렸다. 일본인 관광객 한 팀이 키 큰 나무 아래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명은 일본어를 하는 터키 인(人). 일본어 발음은 어눌했으나 설명은 사뭇 진지했다. 필자는 웃음을 삼키면서 신전 터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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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2세가 선물했다는 돌
살이 금방 익어버릴 것 같은 땡볕이었다. 신전 터에는 주춧돌 같은 돌들만 있었다. 그런데, 화강석 같은 수많은 돌 속에 파란 돌 하나가 오롯이 서 있었다. 안내자는 '이 돌을 만지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했다.
 
"이 돌은 람세스 2세가 히타이트 왕조에 선물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필자는 행운이 온다기에 꾹 참고 파란 돌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돌이 너무 뜨거워서 단 1초도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되찾은 왕국
 
외교관 출신인 이희철(李羲徹) 선생은 저서 <히타이트>에서 '돌이 많아 버려진 땅이었던 이곳을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다시 빛을 보게 됐다'고 했다.
 
"하투샤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건축가이자 여행가인 프랑스 사람 '샤를르텍시에'였습니다. 그는 1834년에 이곳을 여행했습니다. 그 후 1893-94년에 '에르네스 상트르'가 점토판을 발견한 이후 수많은 유럽학자들이 이곳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1906 당시 오스만 제국박물관장인 '마크리디'가 주도하고, 독일인 아시리아 전공 학자 '위고 빙클러'가 참여한 하투샤 발굴 작업이 시작됐습니다...1952년부터 현재까지 독일 고고학 연구소가 발굴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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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히타이트인들이 기념비에 남긴 상형문자-사진: 히타이트/이희철(좌), 점토판에 글을 새기는 터키인(우)

이희철(李羲徹) 선생은 또, "하투샤의 유적은 점토판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고 했다.
 
"nu ninda-an ezzatteni vadar-ma- ekutenni"
(누닌다-안 에자테니 바다르-마 에쿠테니)
 
"당신은 빵을 먹을 것이며, 물을 마실 것이다."
 
이희철 선생은 책에서 "이 문장은 히타이트 제문에 있는 글이다"고 했다. 1915년에 아시리아 전공 학자 '흐로즈니'가 해독했는데, 후 일 그를 히타이트 문자 해독의 아버지로 불렀다. 
 
신이 내린 벌(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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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 제국의 신전 터(2)

히타이트의 군대는 전쟁시에 전차를 잘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히타이트'라는 낱말이 성경의 '헷 사람들(sons of Heth, 헷 족속)'에서 유래한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그리고, 19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히타이트를 발굴한 고고학자들은 이들을 성경에 등장하는 히타이트와 동일시했다(이희철/히타이트).
 
이를 뒷받침하는 사실은 '비르기트 브란다우(Birgit Brandau)'와 '하르트무트 쉬게르트(Hartmut Schickert)'의 저서 <히타이트>(장혜경 譯)를 보면 실감나게 나온다.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히타이트인은 아름다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이다. 다윗 왕은 '밧세바'를 보고 마음이 동해 당장 그녀와 동침했다. 하지만, 성경에는 '동침을 한 것은 아니고, 다윗이 그녀를 봤을 때 목욕 중이었다'고 돼있다. 아무튼, 다윗 왕은 '우리야'를 전쟁터로 보낸다...결국 '우리야'는 전쟁터에서 죽었고, 다윗은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한다. 하지만, 신이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 신은 다윗 왕의 두 아이를 죽게 하는 벌을 내렸다(사무엘 하 11-12장)>
 
지나간 역사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진실의 기록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래서 항상 진실되게 살아야 하며 과거의 역사를 왜곡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이다(계속).

입력 : 201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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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팬택전무(기획홍보실장) 동국대 행정학과/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석사)/인하대 언론정보학과대학원 박사(수료). 육군 중위(ROTC 11기)/한국전력/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상무)/팬택 기획홍보실장(전무)/경희대 겸임교수 역임. 현재 JSI파트너스 대표/ 부동산신문 발행인(www.renews.co.kr) 저서:홍보, 머리로 뛰어라/현해탄 波高 저편에/홍보는 위기관리다/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우리가 만날 때마다 무심코 던지는 말들/오타줄리아(공저) 기타:월간조선 내가 본 일본 일본인 칼럼 215회연재/수필가, 소설가(문학저널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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