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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칼럼

쓰시마 지킴이 '소 요시토시(宗義智)' 이야기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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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죽인 뒤, 다시 소 요시토시(宗義智)를 시켜 조선으로 가서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도록 했다. 소 요시토시는 일본국 국권을 지휘하는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사위이며, 히데요시(秀吉)의 심복이었다.>
 
<쓰시마(對馬島)의 태수 소 모리나가는 대대로 쓰시마 섬을 지키며 우리나라를 섬겼는데, 이때 히데요시는 소 모리나가도 죽이고, 소 요시토시에게 쓰시마 섬의 정무를 주관하게 했다. 우리나라가 바닷길을 잘 모른다며 통신사 파견을 거절하자, 히데요시(秀吉)는 우리에게 이렇게 거짓말을 했다.>
 
"소 요시토시는 쓰시마 섬 도주의 아들로 바닷길에 익숙하니, 그와 함께 오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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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의 이즈하라 항구
 
류성룡의 <징비록, 懲毖錄>(오세진·신재훈·박희정 역해) 첫 부분이다. <징비록>에는 '소 요시토시는 나이는 어렸지만 민첩하고 용감하였으니, 다른 왜인들도 그를 두려워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무릎으로 기며, 감히 얼굴을 올려다보지 못했다'고 쓰여 있다...그 당시 조선은 어떠했을까. 조선 조정은 통신사 파견을 결정하지 못했다.
 
이 책 외에도 KBS 주말드라마의 영향인지 서점마다 '징비록'의 소설이 즐비하다.
 
'오늘에 되새기는 임진왜란 통한(痛恨)의 기록!'
 
'모두가 버린 나라 조선을 일본이 가지려 한다!'
 
시청자들과 독자들의 시전이 집중되는 대목이다. 필자가 늘 주장하는 것처럼 역사는 지나간 과거라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발발 전 쓰시마는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 있었고, 소 요시토시는 전쟁을 막아보려고 애를 썼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가 전쟁을 막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쓰시마가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 주민들이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 쓰시마가 왜군의 중간 기착지가 되어 온갖 피해를 볼 수 있어서다. 어찌했던 그는, 1592년 음력 4월 12일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제1군) 소속으로 쓰시마를 출발해 부산에 상륙, 조선 땅을 무참히 짓밟고 말았다.
 
그가 묻힌 반쇼인(萬松院)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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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 이즈하라에 있는 반쇼인

필자는 쓰시마에 갔던 길에 소 요시토시가 묻힌 반쇼인(萬松院)을 찾았다.  반쇼인은 어떠한 곳일까. 쓰시마 번주(藩主) 소(宗)씨 가문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반쇼인은 일본 정부가 지정한 사적(史跡)이기도 하다. 쓰시마의 2대 번주 '소 요시나리(宗義成, 1604-1657)'는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 대(對)조선평화외교와 고난의 삶을 살았던 초대 번주 '소 요시토시'를 위해 가네이시(金石) 성 서편 봉우리에 쇼온지(松音寺)를 창건했다. 7년 후인 1622년 요시토시의 법명에 따라 사찰의 이름을 반쇼인이라고 개칭(改稱)했다. 1647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서 소(宗)씨 집안 대대로의 보살사(菩薩寺)가 됐다.
 
반쇼인의 유래에 대한 안내판에 있는 내용이다. 필자는 입장료를 지불하고 본당으로 들어갔다. 본당 옆을 흐르는 개울물 소리도 도란도란. 하늘은 역사의 아픔을 잊어버린 듯 더없이 맑고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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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쇼인의 본당(좌), 조선국왕으로부터 받은 선물 삼구족(우)

불상을 모신 본당의 분위기는 근엄했다. 벽에는 쓰시마와 조선통신사에 대한 2013년 행사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조선 국왕으로부터 선물 받은 삼구족(三具足:부처에 공양할 때 쓰는 세 가지 도구)이 전시돼 있었다. 또한 도쿠가와(德川) 가문의 역대 장군들의 위패(복제품)도 보였다.
소 요시토시는 익히 알려진 대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사위로서,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에서 서군 편에 가담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평소 임진왜란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고,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원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생각과 맞아 떨어져 죄가 사면됨과 동시에 쓰시마의 초대 번주 자리까지 올랐다.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命)을 받아 1609년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시켰다. 이러한 공으로 소(宗) 가문은 조선과의 독점 무역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의 수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1615년 1월 3일(음력) 4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고, 장남 소 요시나리(宗義成)가 그의 뒤를 이었다.
 
기러기 행렬?...햐쿠간기(百雁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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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로 터널을 이룬 햐쿠간기(百雁木)

본당을 나서자 '햐쿠간기(百雁木)-'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이름 또한 운치 있어 보였다. '백 마리의 기러기 행렬처럼 들쑥날쑥한 계단'의 의미란다. 132개의 완만한 돌계단은 쓰시마에서 생산된 명석(名石)을 사용해서 만들어졌다. 오랜 세월을 고고하게 지켜온 돌계단의 양 옆에는 석등이 줄을 잇고 있었고, 키 큰 대나무와 스기(杉:삼나무)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일본 3대 묘지라고 했던가. 분명 묘지로 가는 길이었으나, 이끼 낀 돌계단을 오르면서도 묘지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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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스기 나무
우거진 삼림(森林) 때문이다. 나가사키(長崎) 현에서 지정한 1200년 된 천연기념물 스기(杉) 나무도 우뚝, 세월의 두께를 대변하고 있었다.
 
반쇼인에는 크게 상·중·하로 구분된 묘역(御靈屋)이 있다. 상(上) 묘역에는 19대 소 요시토시(1568-1615)로부터 32대 소 요시요이(宗義和, 1422-1494)까지의 역대 번주와 부인의 묘가 있다. 중(中) 묘역 상단에는 제10대 소 사다쿠니(宗貞國)의 묘지가 있고, 별도로 측실과 유아(幼兒)들의 묘지가 있다. 하(下) 묘역에는 일족들의 묘지가 있다. 역대 영주 14명과 관계자들이 묻혀 있는 것이다.
 
때마침 일본 본토에서 온 나이든 관광객들이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도 끝까지 오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하나같이 '참으로 아름다운 삼림입니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소(宗) 가문과 고니시(小西) 가문의 만남은?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고니시 마리아와 결혼했다. 그 역시 세례명이 '다리오'인 가톨릭 신자였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에서 서군이 패하고 고니시가 처형당하는 시점에서 부인 고니시 마리아와 이혼했다. 부부의 운명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타고 비극적으로 흘러갔던 것이다. 소 요시토시와 고니시 마리아는 어떻게 만났을까. 이번영 선생의 <소설 징비록, 왜란/나남> 속으로 들어가 본다.
 
"실제로 전쟁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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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토시의 초상(반쇼인)-사진: 야후재팬
<그렇다면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쓰시마는 이쪽에 짓밟히고 저쪽에 짓눌려서 다 뭉개져 버릴 형국이었다.>
 
"정말로 전쟁이 터진단 말인가?"
 
일촉즉발의 전쟁 시기가 되고 보니, 절대 권력자 히데요시의 측근에 평소 무역관계로 친근하게 지내고 있는 고니시(小西) 부자(父子)가 있다는 것은 쓰시마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쓰시마 도주는 고니시 일가와 보다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에게는 마침 꽃다운 나이의 어여쁜 딸이 있었다. 쓰시마는 간절하게 고니시 집안에 매달렸다. 그런 연유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은 소 요시토시와 결혼했던 것이다.
 
"늘 인도해 주셔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마리아를 생각해서도 무심할 수가 없지."
 
장인(고니시)과 사위(요시토시)가 나눈 대화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도 힘의 논리에 의해 갈라지고 말았다.
 
비운의 여인 고니시(小西)마리아
 
고니시 마리아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필자는 그 여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수소문한 끝에 쓰시마의 중심지 이즈하라(巖原) 대로(大路)변에 있는 하치만구(八幡宮) 신사로 갔다. 커다란 석조 도리이(鳥居)를 지나 왼쪽 편 돌계단을 올라가자, 이마미야(今宮)라는 작은 신사가 있었다. 신사 앞에는 그녀에 대한 기록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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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마리아의 신사

<1590년 15세의 나이로 소 요시토시의 부인이 되어 가네이시(金石) 성으로 들어갔다...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 후 집안이 망하자, 1601년 10월 규슈의 나가사키(長崎)로 추방됐다. 그곳에서 5년여 동안 신앙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쳤다. 그녀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1619년  와카미야(若宮) 신사를 지었다.>
 
이 작은 신사에서 비운의 여인 '고니시 마리아'의 제사를 지낸다. 제삿날은 8월 14일(음력)이다. 이유인즉, 악령의 재앙을 두려워해서란다. 인간의 약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필자는 '다리오'라는 세례명까지 있던 소 요시토시가 절(寺)에 안치된데 대해 의문이 생겼다. 쓰시마관광협회의 야마쿠치(49)씨는 "소 요시토시가 고니시 마리아와 이혼을 한 후에 가톨릭에서 불교로 개종(改宗)했다"고 말했다.
 
종교도 시류(時流)를 따라 흘러가는 것인가. 필자는 고니시 마리아의 신사를 나와 시내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령이 머무는 산이다"는 전설적인 시미즈산(淸水山)을 비롯한 이즈하라(巖原)를 둘러싸고 있는 산 위의 구름들도 무리지어 어디론가 덧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 했던가. 전쟁을 막으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

입력 :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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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상인 장상인의 세계, 세계인

전 팬택전무(기획홍보실장) 동국대 행정학과/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석사)/인하대 언론정보학과대학원 박사(수료). 육군 중위(ROTC 11기)/한국전력/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상무)/팬택 기획홍보실장(전무)/경희대 겸임교수 역임. 현재 JSI파트너스 대표/ 부동산신문 발행인(www.renews.co.kr) 저서:홍보, 머리로 뛰어라/현해탄 波高 저편에/홍보는 위기관리다/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우리가 만날 때마다 무심코 던지는 말들/오타줄리아(공저) 기타:월간조선 내가 본 일본 일본인 칼럼 215회연재/수필가, 소설가(문학저널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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