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자(Abuja)를 출발한 비행기는 사하라 사막을 횡단했다. '아무것도 없다'는 뜻의 사하라 사막은 드넓은 모래 평야였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의 길-'
6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이집트의 카이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현지 시간은 이미 밤 8시- 이집트 입국비자를 받지 않았기에 '은행 문이 닫히지 않았을까?' 다소 불안감이 있었으나, 마중 나온 현지인 덕택에 불안감이 스르르 녹아버렸다.
"요셉(Youssef)이라고 합니다. 15달러면 입국 비자 바우처(voucher)를 살 수 있습니다. 은행으로 가시죠."
"아! 김 선생께서 보내셨군요. 감사합니다. 공항 내부까지 들어오셨네요."
해외에서 '아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입국 수속도 그의 도움으로 VIP 수준이었다. '히잡'을 쓴 여직원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꽝-' 도장을 찍어주었고. 세관 검사는 "Welcome to Egypt"로 끝이 났다.
새로 지은 공항은 나이지리아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고 화려했고, 주차장도 한없이 넓었다. 그러나, 곳곳에 버티고 있는 탱크가 위협적이었다. 이집트 정국이 아직도 안정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필자는 요셉의 안내로 숙소 근처의 한국식당을 찾았다. 300석이 넘어 보이는 식당에 단 두 개의 테이블에만 손님이 앉아 있었다.
정정 불안으로 한국 관광객 제로(zero)
"이집트의 정정 불안으로 한국 관광객이 제로(zero)입니다. 자리를 꽉 메우던 식당이 이지경입니다."
한국 식당 주인의 울음 섞인 말이다. 이제 세계는 하나다. 정정불안은 자국민뿐만 아니라 세계인에게 즉각 영향을 미칠 만큼 큰 이슈로 작용한다.
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시작된 재스민 혁명(Jasmine Revolution)은 민중 봉기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민주화 혁명이다. 서방 언론들은 튀니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스민 꽃의 이름을 민중 혁명에 붙였다. 2010년 12월에 시작된 재스민 혁명은 이집트를 비롯해서 알제리·예멘·요르단·시리아·이라크·쿠웨이트 등 독재정권 하(下)에 있던 아프리카 및 아랍국가의 민주화의 바람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이집트의 경우를 보자. 2011년 무바라크 전 대통령도 민중 시위에 의해서 물러났다. 그는 결국, 시위대 850여 명이 사망한 것과 부패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이집트 법원은 올 1월 재심 끝에 그를 석방했다. 사람들은 또다시 국론의 양분을 걱정하게 됐다. 친(親) '무바르크' 성향의 현 집권 세력과 무슬림형제단을 기반으로 한 반(反)무바라크 성향의 '무리시' 전 대통령 지지세력 간의 대결이다. 반(反) 무바라크 성향의 시위대들이 더욱 격렬해질 수 있다는 우려다.
하지만, "무바라크 시절이 경기도 좋았고 치안도 안정적이었다"고 술회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아무튼, 이집트의 첫 밤은 의외로 평온했다.
카이로에서도 아잔(adhān)에 잠이 깨다
"라-일라- 하 일라 이라-아, 모하메드 레소루-라!"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 그리고, 모하메드는 그의 예언자다.)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 그리고, 모하메드는 그의 예언자다.)
![]() |
카이로의 모스크 |
새벽 4시 59분- 카이로(Cairo)에서도 아잔(adhān)에 놀라 잠이 깼다. 나이지리아에서의 공명(共鳴)보다 울림이 더 컸다. 덕택에 카이로의 번개 여행에 대한 시간 계획을 짰다. 우선 숙소에서 가깝고, 놓쳐서는 안 될 주요 지역을 선정했다. 카이로(Cairo)는 아랍어로 '승리자의 도시'라는 뜻이라고 한다. '미스르 알 카히라(Misr Al-Qahirah)'가 이탈리아어로 '카이로(Cairo)'가 됐다. 사막의 도시 카이로는 나일 강을 끼고 발달했다. 그래서 도시 크기가 동서로 10km, 남북으로 15km밖에 안 된다. 이토록 작은 도시에 1,500만 명이 모여서 산다. 실제 인구는 2,000만이 넘는데도 일부러 줄여서 발표 한다는 말도 설득력이 있다.
카이로는 크게 뉴 카이로와 올드 카이로, 이슬람 카이로로 구분된다. 필자가 세 지역을 다 돌아보는 것은 무리였다. 최대의 걸림돌인 교통체증 때문이다.
첫 번째 목표를 피라미드로 정했다. 일단 시내를 벗어나 세 피라미드가 있는 기자(Giza)를 향했다. 카이로 도심에서 13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13km면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서 금방 도착할 것이라는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교통체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도심의 교통 체증은 차라리 서울이 양반이었다. 차가 막히는 동안 도시의 속 모습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좋았으나,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신호등을 아예 무시하고 교통경찰의 수신호에 의존하는 차량의 흐름이 오히려 지혜로워 보였다.
![]() |
카이로의 거리-하루종일 교통체증에 시달린다 |
그래도 시간을 따라 차량도 느린 흐름을 이어갔다. 피라미드 입구가 가까워지자 요셉 씨가 '현지화가 있느냐?'고 물었다. 필자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그는 환전소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역사적 장소인 메나 하우스(Mena House)였다. 1943년 11월 22일에서 27일까지 미국의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영국의 처칠(Winston Churchill) 수상, 중화민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세 연합국 수뇌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세계전쟁에 대한 대응 문제로 모임을 가진 것이다. 회담 결과 발표한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 중 특별 조항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해 앞으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
![]() |
카이로 회담이 열렸던 메나 하우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언급하겠다. 아무튼, 환전소에서 환전을 하고 나이지라 지폐를 내밀자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나이지리아에서 쓰고 남은 돈이 완전히 휴지 조각 취급을 당했다.
피라미드에 이르는 길목에도 거대한 탱크가 양쪽에 버티고 서 있었다. 필자는 탱크를 뒤로하고 피라미드를 향해 줄달음쳤다.
아! 피라미드!
![]() |
쿠푸왕의 대 피라미드(1) |
그동안 사진으로만 접하던 불가사의한 존재! 피라미드의 실물과 마주한 필자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이토록 경이로운 돌덩이들의 집합을 무슨 말로 찬양할 것인가.
"이집트의 왕들은 대홍수가 일어나기 전 끔찍한 꿈을 꾼 후 나일 강의 서쪽 기슭에 피라미드를 세웠다. 이들 건축물은 왕의 묘지와 학문의 저장고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집트 학자 '장피에르 코르테지아니(Jean-Pierre Corteggiani)'는 저서 <피라미드>에서 피라미드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기자에 세워진 세 개의 피라미드가 무덤에 지나지 않는데 사람들은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어찌됐든 이 피라미드는 이집트 제4왕조(BC 2650-2450)의 파라오인 쿠푸 왕, 카프레 왕, 멘카우레 왕의 거대한 돌무덤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를 정사각형으로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여행 전문가 이태원(76) 선생은 <이집트의 유혹>에서 태양에 대한 신앙과 파라오에 대한 신앙으로 연결된 왕권의 상징이라고 풀이했다.
![]() |
쿠푸왕의 대 피라미드(2) |
"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태양광선을 형상화했다. 옆면을 경사지게 만든 것은 파라오가 죽으면 영생하기 위해서 하늘로 태양광선을 타고 올라간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