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정유왜란은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과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일으킨 침략전쟁입니다. 전쟁은 7년간에 걸쳤으며, 그 피해는 조선 전 국토에 미쳤습니다. 이러한 전쟁의 출병기지가 된 곳이 '히젠나고야성(肥前名護屋城)'이었습니다."
'나고야(名護屋) 성터 탐방지도'에 들어있는 한글 안내문이다. 어느 이른 봄날- 때마침 나고야성(名護屋城) 박물관이 내장 공사 관계로 문을 닫아 필자 일행은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대신 성터와 진영 터를 돌아봤다.
나고야 성터의 기념비 |
아무튼, 무너진 성벽과 아름드리나무들로는 성(城)의 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다만, 130여개에 달했던 진영 터는 그림으로 표시돼 있어 이해할 수 있었다. 천수각이 세워졌던 산 정상에 오르자 바람이 때 아닌 삭풍(朔風)처럼 강하게 불었다. 강풍은 다가오는 봄이 달아날 만큼 거칠었다. 하지만, 나무들의 가지에 이미 봄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자연의 섭리(攝理)는 참으로 오묘했다.
"말라버린 겨울 나뭇가지에 엷은 초록빛이 흐르고,
수목(樹木)이 그 모든 것을
한 가닥 망설임도 없이
봄에게 내맡기려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 멋스러움이 가슴을 친다.
그리고 깨닫는다.
우리의 계절이 너무나도
수목의 계절과는 다르다는 것을."
일본의 유명 시인 '요시노 히로시(吉野弘, 87)'의 <이름지울 수 없는 계절>을 떠올리면서 성터를 내려왔다. 홍로관(鴻臚館)이 있는 하카타(博多)로 방향을 틀기 위해서다.
'인간들의 계절은 나무보다 멋스럽지 못하다.'
계절이 수백 번, 수천 번 바뀌어도 망설임 없이 봄에게 몸을 내맡기지 못하고 있으니 맞는 말이다.
후쿠오카(福岡) 성터의 홍로관
후쿠오카(福岡) 성터도 나고야(名護屋) 성(城)과 마찬가지로 형체가 없다. 단지, 홍로관(鴻臚館: 고로칸) 사적지가 역사적 사실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의 후쿠오카시(福岡市)는 본디 하카타(博多)와 후쿠오카(福岡)로 분리돼 있었다. 하카타가 상업지역, 후쿠오카가 선비의 마을이었다. 그래서, 국제 교역은 하카타를 중심으로 성행했던 것이다.
"한반도의 문물을 받아들였던 요충지였던 곳이 하카타(博多)였다. 그런 의미에서 하카타(博多)야말로 일본 최초의 국제 무역도시라 할 수 있다. 규슈(九州)에 있었던 관청으로써 쓰시마(對馬島)까지 관할하고, 외교·국방을 맡았던 다자이후(太宰府) 정청이 한반도를 비롯한 외국 사신과 도항해온 승려, 그리고 무역상을 위한 영빈관인 홍로관(鴻臚館)을 설치했던 것은 7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당나라 파견 사절단의 구성과 선박의 형태 |
여기서 잠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에 대해서 알아본다. 그는 어린 시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인질로 잡혀갔다. 그의 나이 겨우 10살 때다. 1582년, 히데요시(秀吉)와 함께 일본의 쥬고쿠(中國)와 규슈(九州) 공략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
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제3군 1만 여명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충성 맹세를 했다. 그는 '와키모토 유이치(脇本裕一)'가 <거상들의 시대>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 때 큰 공을 세움으로써, '이에야스(家康)'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 공으로 후쿠오카번(福岡藩)의 초대 번주(藩主)가 됐다. 그가 세운 후쿠오카 성(城)은 1601년에서 1607년에 걸쳐 7년 만에 축성됐으나 해체되거나 매각돼 없어지고, 석벽과 일부 망루가 그 전설을 이어가고 있다.
6년 만에 찾은 홍로관(鴻臚館)
필자는 2007년에 홍로관(鴻臚館)을 찾은 적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6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장보고 CEO 포럼' 회장인 황상석(전남대 세계한상문화연구단 연구교수) 박사와 연구원·학생들과 함께 했다.
홍로관 앞에서 기념촬영 |
입구 안내소에서 관리자가 여전히 반갑게 맞이했다. 6년 전 많은 대화를 나눴던 '나가하마 카츠(長浜勝·68)' 씨다. 그는 방긋이 웃으면서 예전처럼 방문자 기록 명부를 내밀었다.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여전하시군요.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변함이 없으시군요."
방문자 기록부를 채우면서 나눈 짤막한 대화다. 단지, 단체관광객이 반갑기 그지없는 눈치였다.
홍로관(鴻臚館)은 일본 고대의 아스카(飛鳥, 536-701), 나라(奈良, 710-753), 헤이안(平安, 794-1047) 시대에 당나라·신라의 외교사절과 상인들을 접대하던 영빈관(迎賓館)이었다. 홍로관은 그 당시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치쿠시(筑紫: 현 후쿠오카) 등 세 곳이 있었으나, 유적의 존재가 사실(史實)로 확인된 곳은 이곳뿐이다. 이 홍로관(鴻臚館)은 7세기 후반에서 11세기에 이르기까지 400년 간 실재(實在)했던 곳으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발굴 작업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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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홍로관 내부의 모습 |
필자 일행은 홍로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안으로 들어섰다. 먼저 아스카(飛鳥)시대와 나라(奈良)시대, 헤이안(平安)시대를 체계 있게 정리한 연표와 마주했다. 연표에는 630년. 일본이 처음으로 당나라에 사절단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었고, 663년 일본과 백제의 수군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참패한 백촌강 전투에 대한 기록도 있었다. 이어서, 673년 신라의 '김아' 등을 초청해 이곳 홍로관에서 연회를 베풀고 선물을 제공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일본은 당나라·신라·발해 등과 전 방위적인 외교와 무역을 펼쳤던 것이다.
연표를 지나 한 걸음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서자 홍로관의 제원과 명칭, 출토된 유물, 도자기의 길, 당나라와 신라 사절단의 루트, 나라(奈良)시대의 화장실, 홍로관 발굴의 의미와 목적 등에 대해 세세하게 망라돼 있었다. 필자 일행은 짧은 시간 홍로관(鴻臚館)에 얽인 역사의 실타래를 풀어본 셈이다.
신라와 일본의 무역거래에 대해서 설명하는 황상석 박사 |
"장보고가 일본에 갔었다는 문헌적 근거는 없는 것으로 알고있으나, 824년 일본의 치구젠(筑前: 현 후쿠오카) 태수와 만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만남의 장소가 바로 이 홍로관일 것입니다."
하카타(博多)는 고대로부터 나노쓰(那津)·아라쓰(荒津)·나다쓰(灘津)·치쿠시오쓰(筑紫大津) 등으로 불리었으나, 797년부터 하카타쓰(博多津)로 명명됐다. 하카타(博多)는 이름뿐만이 아니라 그 어원(語源)도 재미있다. 토지가 넓고 사람과 물산(物産)이 많은 의미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하카타(博多)는 오랜 역사와 갖가지 사연들을 내재하면서 도도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