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것들은 문자를 아는가?"
"삼강오륜을 알기나 하겠는가?"
"박연(朴淵)에게 시켜 이름이나 하나씩 달아주게 하라"
제주목사 이원진이 하멜 일행을 한양에 데리고 가 임금(효종)을 알현토록 했다. 이 자리에서 임금이 하멜 일행에게 한 말이다. 이들은 이미 난학(蘭學)의 본거지가 된 나가사키(長崎)로 가다가 풍랑으로 꿈속에서도 보지 못했던 '겔파르트(제주도)'에 표착하면서 일이 어긋났다.
1993년 12월 27일자 경향신문에 고은(高銀) 선생이 기고한 <나의 산하, 나의 삶>에 들어 있는 하멜에 대한 부분이다.
'저것들은 문자를 아는가?'
참으로 캄캄한 지도자(왕)의 질문이다. 이미 글로벌 시대를 살고 있는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문자와 삼강오륜' 타령을 했으니 말이다. <하멜 표류기>에 의하면 하멜일행이 임금에게 '자신들을 풀어달라'고 애원했던 대목도 절절하게 나온다.
"임금님! 자비를 베풀어 저희들을 일본으로 보내주십시오. 업무를 마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동포도 만나고, 부모형제와 처자식, 친구, 애인을 만나야 합니다."
"아니다. 외국인을 국외로 내보내는 것은 이 나라의 관습이 아니다.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 대신 너희들을 부양해 주겠노라."
그리고, 임금은 그들에게 네덜란드 식으로 춤을 추게 하고 노래도 부르게 하면서, 가지고 있는 재주를 내보이도록 했다. 그들에게 내재(內在)한 선진 기술을 찾지 못하고, 춤과 노래에만 박장대소(拍掌大笑)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난학(蘭學)을 통한 서구 지식 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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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복장으로 포즈를 취한 데지마 직원의 모습 |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는 쇄국정책을 펴면서도 부분적으로 문을 연 '히라도(平戶)'와 '데지마(出島)'의 상관(商館)을 통해서 서구의 학문과 사상을 유입했다. '오란다 통사(阿蘭陀通詞)'라는 전문 통역관 겸 상무관(商務官)들을 키웠던 것이다.
필자는 데지마 전시관의 난학 코너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난학과 관련한 볼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필체가 살아 있는 <즈푸 할마> 사전에 눈이 갔다. 이 <즈푸 할마>는 '네덜란드어-일본어' 사전이다. '네덜란드어-프랑스어' 사전인 <할마>를 데지마 상관장 '헨드릭 도프(Hendrik Doeff, 1777-1835)'가 일본어로 번역하고, 이를 일본인이 정리한 것이다. 그래서, <도프 할마>라고도 한다. 네덜란드 상관장의 근무기간이 대체로 1년 이었으나, '헨드릭 도프'는 무려 14년이나 근무했다고 한다. 그 결과 <즈푸 할마>가 탄생했다.
그 당시 네덜란드어를 가르치던 오사카의 '오가타주쿠(緖方塾)'에서는 이 사전을 보물처럼 소중하게 관리했다. 단 하나 밖에 없는 사전이었기 때문이다. 이 한권의 사전을 5-10명의 학생들이 한 방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돌려가면서 공부했으며, 방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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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푸 할마 사전 1 |
'스기타 겐바쿠'는 1814년에 일단 자료를 정리하고, 수제자인 '오오쓰키 겐타쿠(大槻玄沢, 1757-1827)'에게 교정을 맡겼다. 1815년 책이 완성됐을 때의 그의 나이는 83세. 책이 완성된 2년 후, 그는 85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책의 원제목은 '란도고토하지메(蘭東事始)'. 그러나, 아쉽게도 원본은 사라지고 사본만 남았다. 그 사본도 '간다 타카히라(神田孝平, 1830-1898)'가 우연히 길가 노점상에서 발견했다.
란가쿠고토하지메와 스기타 겐바쿠의 초상 |
이어서, 메이지 2년인 1869년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를 비롯한 뜻있는 사람들이 <란가쿠고토하지메(蘭学事始)>라는 제목으로 재발간해 오늘에 이르렀다. <란가쿠고토하지메>는 서양 의학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유익한 책이었고, 문학성도 높은 것으로 알려 져 있다(데지마 자료관).
일본에서의 난학은 그 만큼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일본의 서양 사상과 의학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난학
난학과 관련해 일본 돈 1만 엔 권(券)의 지폐 속에 들어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1835-1901)'에 대한 이야기를 지나 칠 수 없다. 규슈(九州) 나카스 번에서 하급무사(후쿠자와 하쿠스케)의 아들로 태어난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는 한문 서적밖에 읽은 적이 없었다. 1854년 2월 그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형을 따라 나가사키(長崎)로 갔다. 이것이 난학과의 운명적 만남이었다. '가와무라신지(川村眞二·65)'의 저서 <후쿠자와 유키치>을 통해 난학과 관련한 그의 일화를 간략하게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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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푸 할마 사전 2 |
'후쿠자와 유키치'가 난학을 배우기 위한 결심을 했는데도 집안의 반대가 무척 심했다. 친척들은 모두 서양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부친 격인 그의 작은 아버지의 고함에 지붕이 내려 앉을듯했다.
"쓸데없는 소리 마라. 형이 죽어 네가 가업을 잇게 됐으니, 국가를 위해 온 힘을 다해 봉사해야 한다. 네덜란드 학문 따위를 배우겠다니...한심한 놈!"
그러나, 그는 난학 만이 살길이라면서 난학의 가치·유용성·매력을 가슴에 담고 난학에 대한 자신의 능력을 키워나갔다.
"난학 공부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과 같았다. 소년의 혈기가 있어서 가능했다."
호랑이는 매우 위험한 동물이다. 한 발 삐끗하면 후쿠자와도 호랑이 밥이 되고 만다. 난학은 근본적으로 사물에 대한 시각을 바꿔준다. 사용하기에 따라 일본의 봉건제에 대변혁을 가져다 줄 학문이었기 때문이다(川村眞二의 저서 '후쿠자와 유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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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의 1887년경의 모습 (출처: 야후재팬) |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기독교 탄압 등 쇄국(鎖國)에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권력 유지를 위해서다. 그러나,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막을 수 없었다. 나가사키에 인공 섬 데지마(出島)를 만들어 네덜란드와의 교역만 허용했으나, 난학의 유입은 막부(幕府)의 쇄국(鎖國)을 무너뜨리는 또 다른 힘으로 작용했다.
데지마와 작별을 고(告)하고 발길을 돌리는 순간, 멀리 산 위에서부터 화톳불 같은 전등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다. 나가사키 야경의 '찬란한 향연(饗宴)'을 기대하며 언덕길을 올랐다. 불현듯 여행은 시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배움을 쌓아가는 '소중한 노마드(nomad)'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