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長崎)는 서양의 문물을 최초로 받아드린 도시라서 그런지 일본의 여느 도시와는 다른 느낌이 든다. 언덕위에 자리한 형형색색의 나지막한 집들과 좁으면서도 가지런한 길, 느린 걸음으로 달리는 전차도 다정하기 그지없다. 더불어 야경(夜景)이 으뜸이다. '이나사야마(稲佐山)'・'나베간무리야마(鍋冠山)'・'후우도우산(風頭山)' 등으로 둘러싸인 이 작은 도시는 '세계 신3대 야경'으로 손꼽일 정도로 아름답다. 그러나, 이 도시에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깊은 상처가 지층의 밑바닥은 물론, 사람들의 가슴 속 깊이 박혀 있다.
"더없이 맑은 푸른 하늘이/ 슬픔을 떠올리는 안타까움이여!/ 넘실대는 파도의 인간 세상에/ 덧없이 피어난 들꽃이여!/ 위로하고 달래주는 나가사키(長崎)의/ 아- 나가사키의 종이 운다."
'사토 하치로'의 시를 노래로 만든 <나가사키의 종>이다. 이 노래는 원폭에 의한 피해자들의 상처와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다. 하지만, 노래보다 앞선 사연이 있다. 백혈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도 피폭자들을 돌보다가 생을 마감한 '나가이 다카시(永井隆, 1908-1951)' 박사의 소설 <나가사키의 종>이 있었다.
시계도 멈춰버린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長崎)는 원자폭탄(原子爆彈)으로 인해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의 '맨허튼 계획(Manhattan Project)'에 의해 만들어진 이 원자폭탄은 1945년 7월 16일 실험을 거쳐 그해 8월 6일 히로시마(廣島)를 폭격했고, 3일 후인 8월 9일 나가사키(長崎)를 초토화 시켰다.
필자는 이러한 실상(전시장)을 여러 차례 봤지만, '장보고 CEO 포럼' 회장인 황상석(전남대 세계한상문화연구단 연구교수) 박사의 요청으로 연구원·학생·가족들과 함께 3년 만에 나가사키(長崎) 원폭 자료관을 찾았다.
전남대 역사 탐방 팀의 기념 촬영 |
필자와 일행들은 원폭 자료관에 들어가기 전에 팔을 펼치고 반기는 노란 조각상을 만났다. '원폭순난(原爆殉難)을 가르치는 아이와 교사의 상(原爆殉難敎え子と敎師の像)'이었다. 원폭으로 죽음과 재난을 당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담고 있는 조각상이다. 일행은 노란색 조각상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 후에 미로(迷路) 같은 긴 통로를 돌아 지하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고등학생들이 핵병기 철폐와 평화 세계 실현을 위한 <고교생 1만 명 서명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어린 학생들이 앞장서서 세계의 평화를 부르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전시관은 1996년 4월에 원폭(原爆) 50주년 기념사업으로 피폭의 실상을 알리고 시민들의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기 위해 건립됐다. 넓은 공간에는 원폭 피해에 대한 실증적 자료들과 당시의 처절한 상황들이 리얼하게 전시돼 있었다.
버섯구름의 생생한 영상,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피폭자,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절규, 부모를 잃은 아이의 울음, 하천을 흐르는 붉은 피, 타버린 교회당....어느 하나 가슴 아프지 않은 것이 없었다.
피폭자들의 모습들- |
"충격적입니다. 원폭의 피해가 이토록 처절하리라는 것을 몰랐었습니다. 피폭 당시의 상황은 물론, 피해 당사자들의 애절한 호소에 이르기까지 실증적인 내용이 리얼하게 정리돼 있는 점도 놀라웠습니다. 단, 자신들의 아픔만 크게 부각되고, 그 원인에 대한 규명이 미흡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아무튼, 평화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됐습니다."
전남대 황상석(55) 박사의 말에 동행자들이 대체로 동의 했다. '무력으로 일으킨 전쟁이 더 큰 무력에 의해 엄청난 재앙(災殃)을 초래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가이 다카시(永井隆) 박사
전시관 의 관람객들- |
필자는 전시관을 관람하던 중 '나가이 다카시(永井隆, 1908-1951)' 박사의 생을 기린 부스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의 생이 가련하면서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교훈적이었기 때문이다.
1908년생인 그는 1928년 나가사키 의과 대학에 입학, 의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의사의 본분은 "환자의 생명을 구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그 영혼은 구원하고 싶다"는 신앙적 생각을 지녔다. 그는 1931년 우라카미(浦上) 천주당 근처에서 하숙하던 때부터 기독교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934년 기독교 봉사회에 가입하여 무료 진단·무료 봉사 활동을 통해 "의사의 일은 환자와 함께 고통을 즐기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 |
그는 낮에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밤에는 열과 통증을 견디며 생명이 다할 때까지 불굴의 의지로 책을 썼다. <나가사키의 종>, <이 아이를 남기고>, <그날 나가사키에 무슨 일이 있었나>, <눈물이 마를 날은 언제인가> 등 수많은 저서를 세상에 남겼다.
'나가이 다카시(永井隆)'씨는 생전에 "전쟁은 인간이 일으킨다. '할까, 말까?'는 인간이 정하는 것이다"면서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는 전쟁의 소용돌이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아인슈타인은 위대한 발명가인가
이 전시장에는 원자폭탄의 탄생에서부터 투하, 그 이후까지의 스토리가 잘 정리돼 있었다. 그 중에서 주목을 받는 인물이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85)'과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1904-1967)' 등 물리학자이다.
"만약 원자폭탄을 실제로 터뜨린다면, 집 몇 채 혹은 몇 블록 수준이 아니라 온 도시가 한 순간에 날아가고 말 것입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4개월 전 나온 이야기다. 아무튼, '아인슈타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라'는 일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이 아닌데도 그는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때마다 아인슈타인의 대답에는 일종의 후회와 함께 독일로부터 느꼈던 위협이 꼭 들어가게 된다(실번 S. 슈위버의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일본인들은 '아인슈타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일본의 언론인 '이토 순이치(伊藤俊一, 60)'씨의 의견이다.
아인슈타인 |
일본인의 아인슈타인에 대한 생각은 물리학의 권위자라는 것이며,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폭 투하 당사자인 미국에 대한 유한(遺恨)과 전쟁(戦争)에 대한 거부 반응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지만, 아인슈타인에 묶여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일본은 세계 유일의 피폭 국으로서 핵에 대해 매우 민감하고,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 후 극단적인 거부 반응이 나타난 것도 이러한 심층 심리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한편, 전후 60년- 전쟁의 기억이 풍화(風化)되는 가운데 '자위대를 강화해야한다'는 총리의 요청에 대한 강한 반대가 없어지고, 주변 국가 특히, 중국과의 영토 분쟁이 표면화하는 가운데 '다시 핵무장도 해야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참으로 위험스러운 일이다. 나가사키(長崎)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고, '나가이 다카시(永井隆)' 박사의 눈물이 마르지 않았는데.... '군비 강화와 핵무장의 목소리까지 나온다'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필자일행이 전시관을 나와 평화의 공원으로 이동하는 순간, 비둘기들이 힘찬 날갯짓을 하면서 푸른 하늘을 향해 높이 날아올랐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