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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윤동주 문학관을 찾아서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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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가 급격히 냉각되고 있어 걱정이군."

"왜요? 올림픽 축구 때문에? 일본이 패(敗)해서 화가 났나요?"

2012 세계 엑스포 관련 업무로 필자가 여수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탔을 때의 일화다. 비행기 출발 직전 옆자리에 앉은 어느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부부간의 대화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남편은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이후 일본의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주한 일본 대사의 소환 등의 신문 기사를 보면서 하는 이야기이고, 부인은 창밖을 내다보며 런던 올림픽 한일 축구 경기만 떠올리는 모습이었다.

정치는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더 관심이 많은 탓도 있지만, 일반인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했다. 아무튼,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유럽 발 경제 위기 등 서민들의 삶도 팍팍한데, 왜 모두들 이렇게 흥분만 하는 것일까?

가까운 이웃인 한국과 일본- 업무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많은 인연(因緣)을 맺고 있는 범인(凡人)들은 양국이 긴장 분위기에 휩싸일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평화로운 해결을 위한 솔로몬의 지혜(知慧)를 학수고대(鶴首苦待)한다.

'이 순간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투명한 영혼(靈魂)을 찾아보자.'

청운공원 입구에 자리한 '시인(詩人)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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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문학관 전경


  필자는 종로구청이 최근 '윤동주 문학관을 오픈했다'는 뉴스를 접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가 휴일을 맞아 큰맘을 먹고 종로구 청운공원 입구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을 찾기로 했다. 효자동 골목을 지나 경비가 삼엄한 청와대 담벼락을 끼고 언덕길을 따라 차를 몰았다. 불과 10여분 달렸는데도 한적함과 고요가 도심의 소음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숲이 우거진 자연의 정취를 느끼며 언덕길에 오르자 왼편 길모퉁이에 자리한 자그마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 눈으로 봐도 윤동주 문학관임을 알 수 있었다. 벽면에는 윤동주 시인의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었고, 그 옆에는 <새로운 길>이라는 시(詩)가 쓰여 있었다. 1938년 5월 10일.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쓴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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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문학관 벽면에 쓰여있는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불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그 시기에 쓴(1988년 5월) 동시 <산울림>도 빼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 혼자 들었다.
 산울림."

종로에서 하숙생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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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문학관 후면
윤동주 문학관이 종로구에 세워진 이유는 윤동주가 연희전문 시절 이곳 종로구 누상동에서 하숙을 하면서 인왕산 중턱까지 자주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연희전문 4학년 때 이사를 많이 다녔다고 한다. 신촌과 종로, 북아현동을 중심으로 보따리를 수시로 쌌다. 연희전문학교와 가까운 곳을 맴돌았을 것이다. 송우혜 씨의 <윤동주 평전>을 통해 그와 종로와의 인연을 알아본다.

"누상동 마루터기 하숙집에서 한 달→누상동 9번지의 소설가 김송(金松) 집으로 옮겨서 5월 그믐 때부터 여름방학 끝날 때까지→북아현동 하숙 전문집으로 옮겨서 9월부터 12월말의 4학년 졸업 때까지."

"그 무렵 우리의 일과는 대충 다음과 같다. 아침 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세수는 산골짜기 아무데서나 할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청소를 끝내고 조반을 마친 다음 학교로 나갔다. 하학 후에는 기차 편을 이용했었고,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로 들어와 충무로 책방들을 순방하였다."

70년 전 서울의 모습을 연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파트가 하늘을 가린 인왕산 골짜기에서 세수를 할 수 있었고, 눈부신 쇼핑 몰만 가득한 충무로에 책방들이 많았었다는 사실도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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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언덕에 오르는 나무 계단


 이러한 인연으로 종로구는 인왕산 자락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조성(2009년)했고, 지난 7월 25일, 윤동주 시비가 있는 청운공원 입구에 윤동주 문학관을 개관했다. 윤동주 문학관은 3개의 전시 공간으로 구성돼있다. '시인 채'로 명명한 1전시실은 시인의 사인과 친필원고를 전시했고, '열린 우물'로 명명한 2전시실은 용도 폐기된 물탱크의 윗부분을 개방해 중정(中庭)을 조성했다. 그리고, '닫힌 우물'의 3전시실은 윤동주 시(詩)의 세계를 영상물로 감상하는 공간으로 했다.

종로구청 관계자는 "1년여 동안 수십 차례의 검토를 거쳐서 건축설계를 추진했으며, 시인이 살았던 당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애를 썼다"고 했다.

하늘을 향해 뚫려 있는 '열린 우물'에서 밤하늘을 보면 그의 시 '별 헤는 밤'이 연상됐지만, '닫힌 우물'에서 눈을 감으면 후쿠오카(福岡)의 감방이 아리게 떠올랐다.


후쿠오카(福岡) 감옥에서 유명을 달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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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전시실 '닫힌우물' (사진: 종로구청)
윤동주는 본란에서 여러 차례 밝힌 바와 같이 필자가 자주 가는, 아주 자주 가는 후쿠오카(福岡)의 형무소에서 27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다시금 송우혜 씨의 <윤동주 평전>을 빌어 그 당시의 상황을 알아본다.

"윤동주는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그의 나이 27세 2개월...그의 운명을 지켜보았던 젊은 일본인 간수는 윤동주가 외마디소리를 높게 지르면서 운명하더라고 유족들에게 전했다. 그는 그렇게 비통하게 갔다."

일본의 유명 시인인 이바라기 노리코(茨木則子, 1926~2006) 씨도 <윤동주에 대해서>라는 글에 다음과 같이 기술(필자 칼럼 No 8 참조)했다.

<'청춘의 시인' 윤동주―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기 있는 시인. 수난의 심벌 · 순결의 심벌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장본인. 일본유학 중,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의 나이로 옥사(獄死)한 사람. 옥사의 진상도 의문이 많다. 일본의 젊은 간수는 윤동주가 사망 당시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고 했다.>

규슈(九州) 후쿠오카시(福岡市) 니시진(西新) 108번지, 윤동주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현해탄의 길목에 자리한 '닫힌 우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유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입력 : 2012.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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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팬택전무(기획홍보실장) 동국대 행정학과/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석사)/인하대 언론정보학과대학원 박사(수료). 육군 중위(ROTC 11기)/한국전력/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상무)/팬택 기획홍보실장(전무)/경희대 겸임교수 역임. 현재 JSI파트너스 대표/ 부동산신문 발행인(www.renews.co.kr) 저서:홍보, 머리로 뛰어라/현해탄 波高 저편에/홍보는 위기관리다/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우리가 만날 때마다 무심코 던지는 말들/오타줄리아(공저) 기타:월간조선 내가 본 일본 일본인 칼럼 215회연재/수필가, 소설가(문학저널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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