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는 슬픔과 기쁨, 공포와 평안,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들과 같이 다양한 모습을 띠며 모든 법규들을 피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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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크기(10m높이)로 제작한 장식 야마가사(山笠) |
필자는 지난 14일 후쿠오카의 전통 축제 '야마가사(山笠)'를 참관하기 위해서 빗속을 뚫고 후쿠오카(福岡)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호텔 방이 동이 나서 일본 친구들을 총동원함은 물론, 필자 역시 사력(死力)을 다해서 방을 구했다.
"기적입니다. 호텔방을 용케 구했군요."
만나는 일본인마다 이구동성으로 되뇌는 말이었다. 후쿠오카 시내의 호텔이 몇 달 전에 마감됐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여명(黎明)의 순간 열리는 축제
7월 15일 새벽 4시 59분. 둥 둥 둥-
북소리에 이어 '와-'하는 함성이 어둠을 열었고,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人波)가 물결치듯 박수를 쳤다. 북소리는 심장을 대변한다고 했던가. 북소리와 함께 도로를 꽉 메운 사람들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까지도 들리는 듯했다. 후쿠오카(福岡) 시민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오이샤, 오이샤' 전사들의 외침에 순간적으로 새벽잠이 달아났고, 수십만 인파의 눈과 귀가 나카스(中州)의 구시다(櫛田) 신사로 쏠렸다.
매년 7월 15일 새벽에 열리는 '하카다 기온 야마가사(博多祇園山笠)'는 국가지정 중요 무형 민속 문화재다. 필자가 765회 이후 6년 만에 참가했으니, 올해로 771회가 되는 셈이다. 771년이 되도록 이러한 행사가 민속문화로 정립되어 그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6년 전과는 달리 밤을 새지 않고 새벽 3시에 일어나 구시다(櫛田) 신사 근처로 갔다.
거리에 몰려드는 인파 |
구시다(櫛田) 신사 내에 있는 본부석 입장권은 6개월 전 발매 개시 10분 만에 매진됐다고 한다. 본부석 입장권(1900석)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표를 구하지 못한 필자는 되도록 가까운 곳에서 가마를 맨 전사들의 용감무쌍한 모습을 보기 위해 구시다(櫛田) 신사 주변을 맴돌면서 틈을 노렸으나 허사였다. 도로변은 부지런한 사람들이 자정 무렵부터 자리를 잡아 점거(?)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좁은 인도는 일렬, 이열, 삼열....시간이 흐를수록 겹겹의 줄이 생겨났다. 전 날까지만 해도 규슈지역 전체가 폭우로 인한 물난리가 났으나, 신(神)의 도움인지 15일은 검은 구름이 무리지어 오락가락할 뿐 날씨가 좋았다.
"축제의 쾌락 속에서 혼미로우면서도 즐겁게 신과 인간, 신과 나 사이의 짝지음이 가능해진다"는 말이 있다. 이를 대변하는 듯 일본의 마쓰리(祭)는 주로 종교색이 짙은 신사(神社)에서 개최된다. 신(神)과 인간의 교감(交感)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마쓰리(祭)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 또한 신(神)을 태우는 가마, 수레, 화려한 장식, 흥을 돋우는 음악, 북소리 등으로 주술적인 인상이 강하다. 하카다(博多) 야마가사(山笠)의 기원은 가마쿠라(鎌倉, 1241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하카다(博多)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이때 중국 송(宋)나라에서 귀국한 승천사(承天寺)의 국사(國師)가 사람들이 맨 가마 같은 틀(施餓鬼棚)을 탄 채 감로수를 뿌리고 다니면서 전염병을 물리쳤다 고 한다. 그 가마가 오늘날 '야마가사(山笠)'의 형태로 발전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어린이까지 동참한 치요(千代) 나기레(流) |
하카다(博多)인의대중적인 민속 문화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인 마쓰리(祭)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변화되어 최근에는 자발적인 주민 참여 하에 대중적인 민속 문화로 발전했다.
"회사의 협조로 1주일 동안 업무 전폐하고 행사에 참여 했습니다. 사람도 많이 사귀고, 많이 뛰면서 체력단련을 했습니다. 참으로 좋은 기회였습니다."
서일본교통회사에 근무하는 '가네모토 잇세이(金本一成, 35)'씨의 말이다. 그는 '마쓰리(祭)에 참가한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과 동시에 단결심이 유발된다'는 말도 했다. 자발적인 주민 참여로 이어지는 민속 문화라는 것이다.
하카다(博多)는 본디 항만도시로써 '하카다 나루(津)'라고도 불리었다. 고대로부터 무역 도시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나카가와(那珂川)를 경계로 후쿠오카(福岡)와 하카다(博多)로 갈라져 있었으나, 메이지(明治) 시대에 하나의 도시로 합병돼 후쿠오카(福岡)가 됐다. 소실됐던 하카다(博多)의 이름은 1972년 하카다구(博多區)로 부활됐다. 신간선의 종점이 '후쿠오카 역(驛)'이 아니라 '하카다 역(驛)'으로 명명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람들은 후쿠오카(福岡)와 하카다(博多)를 동일시하고 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점이 많다. 후쿠오카(福岡)는 선비의 마을, 하카다(博多)는 상인의 마을로 주민들의 기질이 다른 것이다. 야마가사(山笠)가 예로부터 하카다인의 축제이기 때문에 전사들이 후쿠오카 지역으로 건너가지 않고, 시작과 피날레가 하카다 지역에서 이루어진다.
달릴 준비를 하고 있는 야마가사 전사들 |
7개 팀이 승부를 겨뤄
이 '야마가사(山笠)'는 7개 팀이 겨룬다. 구시다 신사를 한 바퀴 돌고 5km를 달리는 시간을 잰다. 7개 팀을 지역 명칭에 의해 나가레(流)로 분류된다. 나가레(流)의 명칭은 임진왜란의 주역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분류됐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전투에서 하카다가 잿더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히데요시(秀吉)가 돌아갈 때 하카다의 구획을 나가레(流)로 분류했던 것이 야마가사에도 반영된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히데요시(秀吉)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나쁘겠지만 그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번 한국 방문 때 신세진 빚을 갚겠다'고 작심하고 나온 오츠보(大坪重隆, 71)씨의 설명이다. 한때 13개의 나가레(流)였던 야마가사는 오늘날 7개로 굳어졌다. 하카다인(博多人)들의 함성은 장대비를 멈추게 했고, 그들이 부른 <하카다 축하의 노래>는 날이 훤해진 이후에도 긴 여운을 남겼다.
"축하합니다. 와카마쓰님(若松樣)이여! 와카마쓰님(若松樣)이여!
가지(枝)도 튼튼하고, 이파리도 무성 하누나.
에이쇼-에, 에이쇼-에, 쇼-에, 쇼-에, 쇼-엔 가네(....)
이 다다미는 축하의 다다미, 축하의 다다미.
학(鶴)도 거북이(龜)도, 춤추며 노는구나."
거리를 질주하는 니시(西) 나가레(流) |
"축제란 일반적으로 한 문화권 내에서 벌어지는 행위로서 '삶과 현실의 반영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소망과 기원이 담긴 문화 양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연세대 남덕현 교수의 논문 <문화이론을 통해 본 축제의 의미>의 한 대목이다. 필자는 '하카다 야마가사(山笠)'가 바로 남교수의 주장과 부합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 '야마가사(山笠)'가 700년이 넘도록 '하카다 문화'라는 키워드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