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과 쇼크였습니다. 그게 사실이었을까?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에 저러한 일을 했구나!' 생각하면서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써 크게 반성을 했습니다."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오츠보 시게다카(大坪重隆 · 71)'씨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돌아본 소감을 필자에게 털어놨다. 그는 지난 8일 오전 혼자서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돌아보고 '쇼크를 받았다'면서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던 것이다.
<서대문 형무소는 1908년 10월 21일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으로 개소되어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국권을 되찾기 위해 싸운 독립 운동가들이 수감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1987년까지 서울 구치소로 이용되면서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들이 수감되는 등 한국 근대사의 굴곡을 안고 있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1987년 서울 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과거의 아픔과 그 극복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자 1998년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으로 개관하여 자주독립정신과 자유 · 평화 수호 정신을 기리는 교육의 현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소개 글이다. 아픈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여 '교훈'으로 삼고자했다는 대목이 가슴에 와 닿는다.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중요하다. 오츠보(大坪)씨도 본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선인(先人)들의 행태에 대해서 질타하며 반성(反省)하지 않는가.
행주산성(幸州山城)을 오르다
때마침 휴일이라서 복잡한 서울 시내보다는 그리 멀지 않으면서 시골 분위기가 나는 행주산성(幸州山城)을 찾았다. 한국의 성(城)은 일본처럼 천수각(天守閣)이 존재하지 않아 분위기가 다르지만, 과거의 역사를 더듬어볼만한 가치가 있어서다.
행주산성(幸州山城)은 사적 제56호이며 해발 124.8m의 덕양산(德陽山)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는 산성이다. 차(車)는 꼬불꼬불 소로(小路)를 돌아 성(城) 입구에 도착했다. 대첩문을 들어서자 권율(權慄, 1537-1599) 장군의 동상이 두 눈을 부릅뜨고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충장공권율도원수상(忠莊公權慄都元帥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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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장군 동상앞에서 활짝 웃고있는 오츠보 씨 |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대와 싸우는 동안 포탄과 돌 등이 바닥이 나자 여인들이 앞치마(前掛)에 돌(石)을 날라 군대에 보급하는 덕택에 전투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행주(布巾)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행주(布巾)라는 말에 그러한 역사적 의미가 서려 있군요. 어찌했던 일본은 임진년(1592년)에도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군요."
필자 역시 오랜만에 행주산성에 올라 정상까지의 거리를 가늠할 수 없었으나 꽤나 긴 언덕이었다. 언덕길 좌우에는 역사의 수액을 머금고 살아온 단풍나무와 소나무, 유난히 키가 큰 아카시아와 참나무 등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우거진 수풀 속에서 봄과 여름 사이에서 길을 잃었는지 뻐꾹새 한마리가 애절하게 울었다.
'뻐꾹, 뻐꾹'
필자가 일본에서는 뻐꾹새를 무엇이라고 하며, '울음소리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오츠보(大坪)씨는 뻐꾹새는 '간코우도리'라고 한다면서, 울음소리는 '칵코우, 칵코우'라고 흉내를 냈다.
'뻐꾹 뻐꾹, 칵코우 칵코우!'
성을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는 않았으나 꽤나 멀게 느껴졌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발걸음이 느려지는 순간 팔각정 하나를 발견했다. 덕양정(德陽停)이라는 정자였다. 오츠보 씨는 필자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잠시 땀을 식히기로 했다. 눈 아래 한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고, 붉은 방화대교가 큰 몸집을 과시하고 있었다.
토성(土城)으로 유명
총 길이가 1km에 달하는 토성(土城)-현재 415m가 복원되어 있다. |
"임진왜란 때 권율(權栗) 장군이 일본군을 크게 격파한 행주대첩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성벽은 해발 70-100m의 능선을 따라 부분적인 토축(土築)을 했는데, 그 길이는 약 1km에 달합니다. 성의 남쪽은 한강이 인접해 있고, 동남쪽으로는 작은 하천이 산성을 돌아 한강으로 유입되고 있어 자연적으로 해자(垓字)가 조성되었습니다. 산성의 동남쪽과 남쪽 일대는 급경사 절벽이 있어 요새로서의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1593년 2300여 명의 민(民) · 관(官) · 승(僧) 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3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친 현장입니다. 혹시 기분이 나쁘시지는 않는지요?"
그림으로 본 행주대첩 |
"이러한 말씀을 하면 오츠보(大坪)씨의 집에 돌멩이를 던지지 않을 까요? 일본 여인들이 기모노에 돌멩이를 잔뜩 날라 와 던지면 큰일입니다."
"아! 지난번 조선총독부의 불합리성을 거론했을 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칭찬을 받았습니다."
잠시 땀을 식히고 정상으로 올라가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인 대첩비각(大捷碑閣)이 있었고, 그 위에는 하얀 행주대첩비가 큰 키를 자랑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의 역사에 대해서 짚어본다.
3개의 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
행주대첩비(좌: 구비, 우: 재건비) |
행주대첩비는 구비(舊碑) · 중건비(中建碑) · 재건비(再建碑)로 구분된다. 먼저 구비(舊碑)는 선조 35년(1602)에 세워진 것으로 행주대첩을 승리로 장식한 권율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장군의 부하들이 세운 비(碑)다. 그리고 중건비(中建碑)는 헌종11년(1845)에 세워진 것이며, 재건비는 1963년 8월에 세워진 것으로 경기도민과 각계각층의 유지들이 합심하여 건립했다. 특히, 재건비 앞면의 글씨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글씨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