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여행을 떠날 때마다 '시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얻는 것이다'는 생각을 하면서 배움의 자세로 길을 나선다. 그래서인지 항상 기대에 부풀어 설렘으로 잠을 설치기 일쑤다. 오래 전부터 정해진 업무적인 여행이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진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이번의 경우는 후자인 우연한 발설(發說)로 성사된 여행이었다. 직장 후배가 결혼 25주년 여행을 '부부동반으로 동행하자'는 제안을 해서 급격하게 진행된 케이스(case)이기 때문이다. 2박 3일의 짧은 기간이라면 행선지는 두 말 할 것 없이 일본이다. 필자는 일본의 시코쿠(四国) 지방을 지목했다.
시코쿠(四国)는 홋카이도, 혼슈, 규슈와 함께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섬이다. 둘레가 750km이며, 인구 약 400만 명인 시코쿠(四国)는 일본의 4개 섬 중에서 가장 작은 도서이기도 하다. 시코쿠(四国)는 도쿠야마(德山) · 가가와(香川) · 에히메(愛媛) · 고치(高知) 등 4개의 현(県)을 가지고 있다. 사누키(讚崎) 우동과 '고우보우(弘法)' 대사(大師)가 개척한 88개 절(寺)의 순례가 일본 전역으로 유명하다.
도련님(봇장)과 하이쿠(俳句)의 도시
에히메 켄(愛媛県) 마쓰야마시(松山市)는 '세토(瀬戸)' 내해(内海)에 연해있는 도시로 해산물이 풍부하고 귤, 밤 등이 지역 특산물로 손꼽히고 있다. 일본의 다른 지역에 비해 태풍이 적고 지진 피해도 거의 없는 살기 좋은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
마쓰야마(松山) 공항은 국제선이라고는 해도 서울(인천공항)과 중국 상해를 왕래하는 비행기 일 뿐, 자그마한 시골 공항이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눈에 가장 많이 띄는 것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의 '도련님(봇장)'과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1867-1902)'의 안내문이다. 두 사람 공히 일본의 근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메이지(明治) 시대의 대표적인 문학자이다. 특히 '시키(子規)'는 마쓰야마(松山)에서 태어났기에 이곳 사람들의 가슴 깊이 자리하고 있는 유명인이다.
필자 일행은 공항에서 리무진 버스를 기다릴 여유가 없어서 무작정 시내버스를 타고 마쓰야마(松山) 역으로 향했다. 짐을 아무리 줄이려고 애를 써도 줄이지 못한 커다란 여행 가방을 어디엔가 맡겨야 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JR마쓰야마 역(松山驛)의 크기도 공항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수소문 끝에 '코인로커'를 찾았으나 가방의 몸집이 너무 커서 허사(虛事)였다. 아이디어를 총동원해서 지하도까지 뒤졌으나 결과는 같았다. 두리번거리던 중 우연히 발견한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의 노래비(碑) 앞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쓰야마 역 앞에 있는 子規의 노래비(碑) |
"봄은 옛날 15만석의 성벽(城壁) 아래로구나."
(봄은 옛날이런가. 15만섬 영화는 어디로 갔는가-)
'시키(子規)'의 대표적인 하이쿠(俳句, 5·7·5음 등 17음으로 구성된 일본 詩의 일종)의 하나인 이 노래는 '시키'가 <일본신문>의 종군기자로 청일전쟁(1894-1895)에 나가기 직전 고향인 마쓰야마(松山)에 잠시 머물렀을 때 지은 것이다.
'지금'과 '여기'의 마쓰야마(松山)
"햇살 부드럽게 쏟아지는 봄날임에도 꽃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고 있으리라."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의 가인 '기노 토모노리(紀友則)'의 춘가(春歌)이다. 평론가 '가토 슈이치(加藤周一, 1919-2008)'는 <일본문화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책에서 '봄의 햇살도 흩어지는 꽃잎도 눈앞의 광경이지만, 한편의 한가로움과 다른 한편의 조급함이 대조되는 모습이 재미있다'고 평했다. 계절의 여왕 5월. 황금 연휴를 맞아 사람들이 북적됐으나 필자는 모처럼의 한가로움에 조급함이 없었다.
"일본에는 시간에 있어서는 '지금', 공간에 있어서는 '여기'로 집약되는 세계관이 존재한다"는 '가토 슈이치(加藤周一)'의 말을 떠올리면서 필자의 눈앞에 펼쳐있는 마쓰야마(松山)의 '지금'은 '여기'일 따름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가로수들의 연두색 이파리들도 풋풋한 향기를 내품으며 봄바람에 너울거렸다. 필자는 택시를 타고 '마쓰야마성(松山城)'을 오르기로 마음먹었다. 택시의 트렁크에 가방을 집어넣고 발걸음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다.
일본은 택시비가 비싸기는 하지만, 덤으로 관광안내와 사진을 찍어주기 때문에 때로는 유익하기도 하다. 필자의 예상대로 제법 나이가 지긋한 택시 운전사(松本 씨)를 만났다. 몸을 의지하는 것보다 커다란 가방 두 개를 처리(?)한 것이 더욱 행복했다. 택시는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도심의 작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성(城)으로 가는 길목은 도심 골목길에 숨어있는 케이블카와 슬로프를 타는 승강장이었다.
"마쓰야마죠우(松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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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야마 성의 입구 |
승객으로 꽉 찬 케이블카에서 관광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마스야마 성(松山城)' 입구에 도착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일본인들은 어느 곳이나 성(城)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도 수박 겉핥기식이 아니라 진지한 모습들이다. 사진을 찍는 것은 기본이고, 그림까지 그리는 사람들도 많다. 성(城)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성벽의 윗부분이 활처럼 휘어져 있었다.
"일본 전국적으로 드믄 '경사 석벽'입니다. 적이 오르지 못하도록 기술적으로 경사 각도를 유지하면서 석축한 성입니다."
윗부분이 활처럼 휜 마쓰야마 성(城)의 경사 석벽 |
천수각(天守閣)으로 올라가는 입구의 성문에서 젊은 안내원들이 관광객들에게 사무라이(侍) 복장을 걸치게 하면서 구호를 외쳤다.
"마쓰야마죠우(松山城)! 마쓰야마죠우(松山城)!"
일본의 3대 '평산성(平山城)'의 하나
일본은 도시마다 곳곳에 성(城)이 있다. 많은 성 중에서 3대 명성을 꼽는다면 구마모토성(熊本城), 나고야성(名古屋城), 히메지성(姫路城)이다. 3대 명성은 아닐지라도 마쓰야마성(松山城)은 쓰야마성(津山城: 岡山県), 히메지성(姫路城)과 함께 일본의 3대 '평산성(平山城)'의 반열에 올라있다. 이유는 평야의 중앙에 있는 산에 축성되었기 때문이다. 천수각(天守閣)에 오르자 마쓰야마(松山) 시내가 한 눈에 펼쳐졌다. 새벽 이른 시각 눈을 비비면서 서울을 떠나 1시간 20분 만에 날아온 인구 51만 명의 마쓰야마시(松山市)다. 수 백 번 일본을 왕래하면서도 지역별로 미묘한 차이가 있는 이문화(異文化)의 체험은 갈수록 궁금증을 부채질하는 듯했다.
천수각에서 바라본 마쓰야마의 시내 전경 |
리프트를 타고 성(城)을 내려오자 봄바람치고는 제법 강한 바람이 불었다. 출렁거리는 리프트가 필자의 몸과 마음을 흔들었다. 성하(城下)의 숲에서 나는 이상야릇한 향기의 정체를 알아냈다. 범인은 바로 밤꽃 향기였다. '남성의 꽃'이라는 밤꽃 냄새에 대한 이야기는 택시 운전사 '마쓰모토(松本)' 씨에게도 통했다. 골목길 주차장으로 돌아가서 다시 택시를 탔다. 시동을 걸자마자 마쓰모토(松本) 씨가 필자에게 물었다.
"뒷좌석에 앉으신 손님이 조금 전 부인에게 연산홍 꽃 앞에서 사진을 못 찍게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 농담이었습니다."
("여보! 거기서 사진 찍으면 안 됩니다. 당신이 거기에 서면 꽃이 죽잖아요.")
부인이 '꽃 보다 예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농담'이라는 말에 운전사가 감동했다.
"아-그렇군요. 참으로 고급스러운 유머이군요. 그래서 일본 여자들이 한국의 남자 배우들을 좋아하나 봅니다. 제 집사람도 하루 종일 한국 드라마만 봅니다."
택시는 골목길을 요리조리 빠져나와 도고(道後) 온천으로 향했다. 마쓰야마(松山)의 스토리(story)는 역사를 넘나들며 시시각각으로 이어졌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