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의 모습 1(좌로부터 후나하시 씨, 간다 씨, 고토 씨)
필자가 일본에 출장 갔던 지난 21일. 더위가 연일 기승을 부렸다. 신문들은 '맹서열도(猛暑列島)', '열도비등(列島沸騰)' 등의 제목으로 더위에 대한 기사를 쏟아냈다. 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열도가 끓고 있으며, 열사병으로 사망한 사람도 여러 명 있었다고 보도했다. 나고야와 가까운 기후켄(岐阜県)의 다지미시(多治見市)가 37.6도, 미에켄(三重県)의 츠시시(津市)가 36.8도, 나고야(名古屋)가 36.4도를 기록했다. 가만히 서 있어서도 땀이 줄줄 흘렀으며, 헉헉 숨이 찼다. 우리와 달리 일본은 습도가 높은 탓이기도 하다. 이러한 날씨에도 나고야에 뜨거운 모임이 있었다. 중부전략연구회 멤버들의 모임이다.
저녁 식사 겸 해외여행에 관련한 특별 모임이었다. 필자도 특별회원의 자격으로 모임에 합류하게 되었다.
터키 여행을 위한 여행사 결정
나고야 중부전략연구회의 특별 의제는 오는 11월 18일부터 11월 23일까지 6일간 터키 여행을 가기 위한 여행사 선정에 관한 건이었다. 필자와 이토 슌이치(伊藤俊一, 56) 씨가 먼저 도착했고, 뒤이어 이번 여행의 간사를 맡은 '아카키 신이치로(赤木紳一郞, 50)' 씨가 서류를 잔뜩 들고 등장하여 참석자의 자리에 서류를 배포했다. '아카키(赤木) 씨는 최근 자신의 회사를 떠나 경제단체인 중부경제연합회 기획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부경제연합회는 나고야 지역의 아이치켄(愛知県)을 비롯하여 기후켄(岐阜県), 미에켄(三重県)은 물론이고, 나가노켄(長野県)과 시즈오카켄(靜岡県)의 기업들도 회원사에 포함된다고 했다.
필자는 나가노켄(長野県)까지는 몰라도 도쿄와 가까운 시즈오카켄(靜岡県)이 중부지역에 포함된 것은 다소 의아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회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필자와 회원들은 이제 오랜 친구 같은 친숙한 관계가 되어 허물없는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이들 중 2-3명은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으나, 그들도 필자의 이름은 잘 알고 있었다. 6시 30분이 되자 한 사람도 늦은 사람이 없었다. 약속을 잘 지키는 일본사람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회의는 위원장인 '오오모리 미키히코(大森幹彦, 62)'씨의 주재로 진행되었다. 진지한 이야기와 의견 제시는 날씨보다 더 뜨거웠다. 먼저 '이번 여행에 대한 견적서를 미제출한 여행사의 사장으로부터 사과장을 받았다'는 것과, '약속 불이행에 대한 사과금 5만 엔을 회비로 귀속시킨다'는 발표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사적인 모임이나 엄격한 룰(rule)을 견지하고 있는 모습들이 신기했다.
여행에 대한 구체적인 토의는 여행경비와 여행 경로 ․ 탐방지 등 각각의 장단점을 비교하는 것이었고, 3개의 여행사 중 금액은 다소 비싸지만 내용이 좋은 한 여행사로 결정되었다. 여행인원은 부부동반 세 가족을 포함해서 총 11명이 가는 것으로 결정 되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은 물만 마셨고, 회의가 끝나자 맥주, 와인, 소주 등의 술과 안주가 줄을 이었다. 회식이 시작되자 진지한 모습들은 사라지고 순식간에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이들은 희망자에 한해서 년1회 해외여행을 간다. 목적은 이문화(異文化) 체험을 위해서다. 초기부터 필자와 친하게 지내고 있는 '사토 츠네오(佐藤永勇, 65)' 씨는 기억을 더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문화(異文化) 체험의 첫 방문지는 흔히 말하는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한국이었습니다. 어언 20년 가까이 되었죠? 장 선생이 대우의 차장 시절이었던가?"
"글쎄요. 그렇게 오래되었나요? 세월이 참 빠르군요."
필자가 이들을 회사까지 안내하여 홍보용 영화까지 소개했던 기억이 났다. 이들은 그 후로 한국에 자주 오게 되었으며, 부여·경주 등 역사 탐방에도 열심이었다.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가운데 초면인 '스즈키 마사히로(鈴木正紘, 65)'라는 사람과 진지하고도 뜨거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필자의 최근 칼럼인 센노리큐(千利休)와 NHK의 대하드라마 천지인(天地人)에 이르기까지 대화의 폭이 넓어졌고, 사야가(沙也可/ 한국명: 金忠善)이라는 인물에 대해서까지 이르렀다. '한국에서는 영웅으로, 일본에서는 배반자로 취급받고 있다'는 점에 대한 뜨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필자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 뚱 하자 그는 "내일 바로 자세한 자료를 보내겠다"고 했다. 스즈키 씨는 이튿날(7/22)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내왔다.
사야가(沙也可)이야기
"어젯밤 중부전략연구회에서 만난 스즈키(鈴木)입니다.
회식 석상에서 제가 이야기했던 히데요시(秀吉)의 조선 침략전쟁 시(時) 일본을 등지고, 조선으로 투항한 사야가(沙也可)의 이야기를 발췌하여 아래와 같이 보냅니다. 내용은 'Wikipedi'로부터 요점만을 추출했습니다."
<사야가(沙也可, 1571-1643)는 분로쿠(文祿) · 게이쵸(慶長)의 역(조선에서는 임진왜란)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부하로서 조선에 건너갔으나, 조선군에 투항해 일본군을 격퇴했다고 여겨지는 인물이다. 조선에서는 김충선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영웅으로 취급 되고 있지만, 그 활약의 실태는 불명한 점도 많다.>
<사야가의 활약에 대해서는 그의 전기 「모하당문집」에 자세하게 쓰여 져 있다.「모하당문집」에 의하면, 1592년 4월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선봉부장으로서 부산에 상륙했지만, 곧바로 조선을 동경해 3000명의 병사와 함께 조선에 항복했다. 사야가는 화승총이나 대포의 기술을 조선에게 전함은 물론, 일본군과도 싸워 그 공적을 인정받았다. 그는 조선 왕으로부터 김충선의 이름을 하사받게 되었다. 그 후로도 여진족을 격퇴하는 등 공적에 의해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다.>
<현재에도 그는 한반도에서는 영웅으로 되어 있다. 한국의 대구시 교외의 달성군 가창면에는 사야가의 후예들이 살고 있다. 1992년에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영웅과 역적사이
필자가 역사학자가 아니라서 정확성을 입증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사야가(김충선)는 실제로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우선봉장으로 조선에 출정했으나 "일본의 조선침략이 명분이 없다"며 부산항에 온 즉시 귀화했고, 곧바로 경주, 울산 등지의 전쟁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일본에서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다고 한다. '사야가의 기록은 정녕 없는 것일까?' 시간이 허락되면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볼 생각이다.
필자는 일본 아사히신문 연재 중 폭발적인 화재를 모았던 '요시다 슈이치(吉田修一 · 42)'의 소설 악인(惡人)에서 살인범으로 등장하는 '시미즈 유이치'의 넋두리를 연상했다.
<그럴 때면 나는 바닷가에 나뒹구는 유목(流木)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파도에 휩쓸려갈 것 같으면서도 휩쓸리지 않고, 모래 위로 떠밀릴 듯 하면서 떠밀리지 않는다. 유목(流木)은 하염없이 모래 위에서 이리저리 나뒹굴 뿐이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몫일 듯싶다.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아픔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명분 없는 전쟁이다. 상처만 남고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고귀한 생명이 희생되기도 하고, 여성들의 수난이 참으로 많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뜨거운 지구촌-
뜨거운 나고야에서 뜨거운 만남과, 뜨거운 대화를 나눈 지난 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