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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칼럼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생가(生家)를 찾아서-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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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상

 "세 사람은 두견새를 소재로 하여 하이쿠(俳句)를 읊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울지 않는 새는 죽여야 한다'고 읊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해야 한다'고 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읊었습니다. 저희는 지금 이에야스가 태어난 생가(生家)를 갑니다."
 필자의 옆자리에 앉은 후나하시 미치아키(舟橋三千秋) 씨는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이에야스에 대해 열심히 설명 했다.
 이번의 역사탐방 역시 여느 때와 마찬 가지로 필자의 일본 친구들이 4명이나 따라 붙었다. '오오모리 미키히코(大森幹彦 ․ 62)' 씨. '후나하시 미치아키(舟橋三千秋 ․ 61)' 씨. '아카키 신이치로(赤木紳一郞 ․ 50)' 씨. 그리고 '이토 슌이치(伊藤俊一 ․ 56)' 씨다. 그들은 하루 업무를 전폐하고 휴가를 내어 필자를 밀착 호위(?)했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이다. 목적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태어난 생가(生家), 오카자키(岡崎) 성이었다. 나고야 중심부 오스(大須)에서 출발하여 지하철과 특급열차를 갈아타고 30-40분을 달려서 '히가시 오카자키(東岡崎)' 역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5인승 택시를 타고 성(城)을 향해 질주했다. 한국보다 한걸음 빠른 봄이 싱그럽게 다가와 있었으며, 막바지에 달한 벚꽃이 봄의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막 움을 튼 새싹들이 가지마다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었고, 그 가지사이로 아담한 천수각(天守閣)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안에 들어서자마자 '이에야스의 고향'이라는 가로등이 늘어서 있었으며, 그의 동상이 역사의 현장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호랑이 해, 호랑이 날, 호랑이 시에 태어나

 오카자키(岡崎) 성은 15세기 전반에 세워졌다. 묘다이지(明太寺)의 절터에 이 성을 최초로 축성한 사람은 '사이고 요리쓰구(西鄕賴嗣)'다. 1531년. 이에야스(家康)의 할아버지인 '마쓰다이라 기요야쓰(松平淸康)'가 지금의 위치에 이전한 이후 오카자키(岡崎) 성으로 불리어 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텐분(天文) 11년(1542) 12월 26일. 이 오카자키(岡崎) 성에서 영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와, 가리야 번 '미즈노 타다마사(水野忠政)'의 딸인 오다이(於大)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이름은 다케치요(竹千代) 이었다.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저자:山岡莊八)'를 통해서 그 당시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본다.
<"성주님! 오카자키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셨습니다. 그것도 보통 사내아이가 아닙니다."
"뭐? 보통 사내아이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출생 시각은 오늘 새벽 인시(寅時). 세자께서 호랑이 해, 호랑이 날, 호랑이 시에 태어나시었다며 오카자키에서는 일시에 환성이 터졌다고 합니다."
"허어. 호랑이해에 호랑이 시(時)라...."
"호랑이 신(神) 보현보살이 환생하였다고 야단들입니다. 보현보살은 법체편만(法體遍滿)하여 일체의 미혹을 끊고 극성(極聖)에 가까워 여러 부처와 보살들 중에서 가장 슬기로운 보살이지요.">
오다이(於大)의 친정 아버지(이에야스의 외할아버지) '미즈노 타다마사(水野忠政)'와 그의 충신 '히지가다'가 주고받는 대화다.

 그렇다면 오카자키 성의 분위기는 어떠했을까? 아기 탄생과 설날 축하연이 겹쳐서 화기 넘친 웃음소리가 성안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아기가 태어난지 이레 날이자 설날에 그의 이름이 지어졌다. '다케치요(竹千代)-'
"경사지요. 이런 경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내아기님에다 이제 이름까지 지어졌으니...."
생존을 위한 정략결혼을 통해 기구한 운명을 짊어지고 태어난 '다케치요(竹千代)'는 할아버지 '기요야스(淸康)'의 아명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오카자키 성을 거점으로 천하통일 기초 다져

 이에야스의 고향이라는 전등. 야간에는 더욱 아름답게 빛을 발한다.'죽느냐, 사느냐-' 생존을 위해 얽히고설킨 난세에 운명적으로 태어난 이에야스(家康)의 어린 시절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6살 때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아버지인 '노부히데(信秀)'에게, 8세 때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인질이 되어 소년기를 타향에서 보내야 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빌어서 알아본다.

<"다케치요."
아버지 히로타다(廣忠)가 비장한 음성으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예"
"너는 아직 어려서 모를 테지만, 너의 이번 여행은 우리 가문을 위한 중대한 일이다."
"예"
"아버지는 나의 무력함을 부끄러워하며, 오늘 이렇게 너에게 머리를 숙였다는 것을 기억 해 다오. 이것만은 네가 성장했을 때 반드시....."
아버지 히로타다는 말을 맺지 못하고 아들 다케치요 앞에 머리를 숙이더니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방안의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인질 생활은 19살 때 겨우 풀려났다. 그 때가 바로 1560년(永禄 3年)이다. '오케하지마(桶狹間) 전투에서 '이미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전사(오다 노부나가의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 후 이에야스(家康)는 이 성을 거점으로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한 기초를 다졌다. 그는 어릴 적 아버지가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던 모습을 가슴 속 깊이 새기고 또 새기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풀 사이로 모습을 내보인 오카자키 성의 천수각

1959년 천수각 복원

 이에야스는 1570년 본거지를 지금의 시즈오카 현 하마마츠(浜松) 시인 '도오토우미 하마마쓰(遠江浜松)'로 옮기고 적자인 '노부야스(松平信康)'를 오카자키 성주로 삼았다. 1579년 '노부야스(信康)'가 자결을 하는 바람에 중신인 '이시가와 가즈마사(石川数)'와 '혼다 시게스구(本多重)'를 대리 성주로 임명하기도 했다. 1590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 의해서 관동으로 이봉되어 히데요시의 가신인 '다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가 성주가 되지만, 이에야스가 에도에 막부를 세운 후에는 다이묘에게 오카자키 성을 지키게 하였다.
 에도시대에 이 성(城)은 이에야스의 출생지로서 신성시 여기던 곳이다. 녹봉이 5만석 정도의 작은 성이었지만, 다이묘들은 오카자키성의 성주가 되는 것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졌었다. 모두들 '신군(神君)출생의 성'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이고(西鄕)가 축성한 최초의 성은 현재의 혼마루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에야스에 의해서 근세 성곽의 원형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시대에 성곽의 대부분이 해체되는 비운의 성이 되기도 했다. 해자와 석벽이 옛 모습을 어렴풋이 전하는 정도였는데,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이 성에 천수각이 없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는 시민들의 원성에 의해 1959년. 옛 모습의 성과 흡사한 천수각의 외관이 복원되었다고 한다. 천수각에 오르자 2층에는 그 시대의 번정(藩政)과 농민지배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었으며, 3층에는 그 당시 번창하였던 문화와 산업에 대해서, 4층에는 성과 성주에 대해서 자세히 전시되어 있었다. 필자 옆을 떠나지 않는 후나하시(舟橋) 씨의 진지한 설명이 이어졌다.

의리(義理)와 신의(信義)

 "1547년에 이르러 오다(織田)의 세력은 미카와(三河) 지역을 더욱 빈번하게 침략했고, 결국 마쓰다이라는 이마가와(今川)에게 병력 원조를 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이마가와는 다케치요를 순푸(駿府)로 유배 보낼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히로타다는 이 요구를 절대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다케치요는 결국 순푸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오오모리(大森) 씨가 말을 받았다.
"오다 노부히데는 다케치요를 인질로 잡아두고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에게 자신에게 협력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거절했습니다. '아들의 목숨이 아까워 오랫동안 베풀어 준 이마가와(今川)의 은혜를 저버린다면 이는 미카와의 수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감격한 '이마가와'는 '마쓰다이라'에게 전면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히로타다로 부터 거절당한 '오다 노부히데' 또한 이에 감동하여 다케치요를 죽이지 않고 나고야로 보내 관대하게 대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나가'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고야 출신의 세 장군 이야기. 특히 나고야 사람들은 이들의 역사적 스토리를 좋아한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모두 나고야 출신이기 때문이다. 특히, 제약회사의 CEO인 오오모리(大森) 씨의 설명에서 '사람의 의리(義理)와 신의(信義)'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카키(赤木) 씨와 '이토(伊藤) 씨가 후나하시(舟橋) 씨와 오오모리(大森) 씨에게 박수를 쳤다. 두 사람의 역사 실력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는 의미였다. 필자도 그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봄의 정취가 가슴 속까지 느껴지는 오후였다. 천수각 아래로 하얗고 파란 수풀 마당이 펼쳐져 있었으며, 이름 모를 새들도 봄이 반가운 듯 목청을 높였다. 수풀 너머 멀리 강을 건너는 기차도 새봄의 분위기에 일조했다.
 천수각 입구의 동조공유훈비(東照公遺訓碑)에 새겨져 있는 글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이에야스가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에 임명되었을 때 쓴 것이라고 한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르지 말라. 부자유를 늘(常)이라고 생각하면 부족함이 없다. 마음에 바람(望)이 일면 곤궁한 때를 떠올려라. 감인(堪忍)은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기본. 분노를 적이라고 생각하라. 이기는 것만 알고 있다가 지는 것을 알지 못하면 몸에 해가 된다.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을 탓하지 말라. 미치지 못하는 것은 지나침에 이기나니. 사람은 자신을 알아야 한다. 풀잎의 이슬의 무게도 이파리를 떨어뜨릴 수 있거늘.>

천수각에서 바라본 전경

입력 : 201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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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팬택전무(기획홍보실장) 동국대 행정학과/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석사)/인하대 언론정보학과대학원 박사(수료). 육군 중위(ROTC 11기)/한국전력/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상무)/팬택 기획홍보실장(전무)/경희대 겸임교수 역임. 현재 JSI파트너스 대표/ 부동산신문 발행인(www.renews.co.kr) 저서:홍보, 머리로 뛰어라/현해탄 波高 저편에/홍보는 위기관리다/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우리가 만날 때마다 무심코 던지는 말들/오타줄리아(공저) 기타:월간조선 내가 본 일본 일본인 칼럼 215회연재/수필가, 소설가(문학저널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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