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엔도 키미오 씨(사진: 연합뉴스)
2010년은 호랑이(虎)해다. 일본에는 야생 호랑이(虎)가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호랑이를 다른 나라에만 살고 있는 '상상의 동물' 정도로 여겨 왔었다. 일본인들이 호랑이를 보게 된 것은 에도(江戶)시대 이후라고 한다. 해외로부터 유입된 호랑이를 동물원에서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도 우리와 십이지(十二支)가 같기 때문에 올해가 호랑이해에 해당된다. 하지만, 호랑이해를 맞는 느낌은 우리와 사뭇 다르다. 우리는 60년 만의 '백호(白虎)의 해'라고 온 국민이 기대에 부풀어 있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다. 필자의 일본 친구는 호랑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담담하게 얘기했다.
"금년의 간지(干支) 호랑이해에 대해 조사했습니다만, 잘 정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보 검색을 해 봐도 일본의 호랑이는 고대부터 생존하지 않았고, 중·한(中韓)의 문화 전래 시에 이국(異國)의 동물로서 전해져 회화나 시(詩) 속에서 창조된 것이었습니다. 일설에 살쾡이라고 말했던 기술은 있으나, 달력이나 제사 때 묘사된 호랑이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른 것 같습니다. 참고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일본에서도 호랑이는 예로부터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때로는 두려움의 존재이기도 했다. 그래서 수많은 민화나 전설, 미술품, 무용, 이야기나 그림책 등 여러 곳에서 호랑이가 등장했던 것이다.
임진왜란과 호랑이
한국 호랑이는 실제로 우리의 산하를 누비던 산림의 왕이었다. 그러한 호랑이가 모두 어디로 사라지고 동물원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호랑이는 '일본 강점기 시절에 멸종당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앞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 왜장들을 시켜서 호랑이를 마구잡이로 포획했던 사실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일본 사람들 사이에서도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작가이자 야생동물 생태연구가인 '엔도 키미오(遠藤公男, 1933- )'라는 학자가 있다. 그는 한국 호랑이에 대한 사실을 엮어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라는 책(번역: 아담Books)을 냈다. 그 중에서 여덟 번째 이야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호랑이'가 필자의 관심을 끌었다.
'엔도 키미오(遠藤公男)' 씨는 '오다 쇼고(小田省吾)'가 쓴 <조선출병과 가토 기요마사>라는 책을 인용하여 당시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분로쿠(文祿) 원년(임진왜란 원년-1529년) 일본군의 무장인 '가메이 코래노리(龜井玆矩)'는 부산 근처의 기장성(機張城)을 점령해 도요토미에게 호랑이 한 마리를 보냈다. 드물게 보는 거대한 호랑이였기 때문에 '도요토미'는 교토의 '고요제이(後陽成)' 천황에게 보였다. 그리고 호랑이를 수레에 실어서 장안을 돌아다녔다.>
엔도(遠藤) 씨는 '자신도 역사책에서 그러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고 술회했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때 미친 듯이 기뻐서 춤을 추자 무장들은 경쟁하듯이 '도요토미'에게 호랑이를 보냈다고 썼다. 조선의 호랑이가 무차별 남획되었음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분로쿠 3년(1595년) 12월. '기츠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는 부산에서 가까운 동래에서 호랑이 한 마리를 보냈다. 분로쿠 4년(1596년) 3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경상남도 창원에서 사냥한 호랑이 두 마리를 소금에 절여 도요토미에게 보냈다."
일설에는 '도요토미가 호랑이를 잡아서 보내라는 것은 장병들의 사기를 높이려는 데 있었다'고 하는 말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요토미'는 무슨 목적으로 조선의 호랑이를 잡아갔을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보신을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님의 요양을 위해서 원래는 그쪽으로 갔어야 했으나 가능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머리고기 ․ 장 등을 하나도 남김없이 소금에 절여 보내 주시오."
분로쿠 3년(1595년) 3월. 도요토미의 부하가 '기츠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에게 보낸 문서에 쓰여 있는 호랑이의 용도다. 도요토미는 호랑이를 자신의 몸보신을 위한 약용으로 썼던 것이다. 엔도(遠藤) 씨는 도요토미의 부하가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에게 보낸 공문서 통해서 또 다른 증거를 찾아내었다.
"호랑이를 보내라는 명령에 즉각 사냥을 해 주어서 가죽, 머리, 뼈와 고기, 간과 담을 목록 그대로 받았습니다. 도요토미님은 기뻐하며 드셨습니다."
예로부터 호랑이가 귀한 약용으로 쓰여 왔음을 익히 간파한 도요토미는 조선의 호랑이를 잡아오도록 무장들에게 명령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토록 몸에 좋다는 호랑이의 고기는 물론, 간과 쓸개까지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엔도(遠藤) 씨는 그러한 사실을 이렇게 묘사했다.
"작은 몸집에 원숭이 얼굴을 한 사람이라고 불린 도요토미의 풍모를 떠 올렸다. 무엇인가 홀린 듯한 눈을 하고 호랑이의 간과 장까지 탐을 내며 먹었던 것이 아닐까? 자기 자신만의 목숨을 유지하려고 어쩌면 누구에게도 주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까지 해서 오래 살려고 했는데, 도요토미는 62세에 죽었고 임진왜란은 끝났다."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던가. 그토록 오래 살려고 발버둥 쳤으나 조선 땅의 호랑이만 무차별 죽임을 당하게 했을 뿐, 그는 결코 명이 길지 못했고 정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호랑이 사냥'
작가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주축이 되어 조선 호랑이를 남획했다는 문헌적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했다. 도요토미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 특정 무장에게 일임하지 않고 분담제로 하여 호랑이를 잡아 보내도록 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 호랑이는 필요 없다."
한 번 호랑이를 헌상한 사람에게 보낸 그의 명령이다. 왜 그렇게 했을까? 자신의 요양을 위해서 호랑이 고기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아무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조선에서 일본으로 돌아가 게이쵸(慶長) 원년(1597년) 도요토미 앞에 나타났을 때 호랑이 가죽 5장을 지참했다고 한다. '가토 키요마사'가 어떻게 해서 호랑이 가죽을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많은 수의 호랑이 가죽을 일본에 가지고 간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는 없으나, '가토 기요마사'가 앞장서서 호랑이를 남획(濫獲)했다는 것은 틀리지 않을 듯싶다. '고무로 나오키(小室直樹)'의 문고판 <한국의 비극>에도 이러한 글이 있다.
"히데요시(秀吉)는 조선을 정벌(征伐)하였다. 그 때 기요마사(淸正)는 호랑이를 퇴치하였다. 일본에서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유명한 이야기다."
한국 호랑이의 멸종은 일제강점기 시절
엔도 키미오(遠藤公男) 씨는 이 책을 쓰기 위해서 박물관과 도서관, 향토 자료관 등과 관계자들과의 면담을 통해서 한국 호랑이에 관한 기록을 속속 찾아내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시절 호랑이가 멸종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던 것이다.
"한반도 남부로 2마리의 호랑이(박제)를 찾아서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몇 년을 두고 찾은 결론이 바로 일본의 침략이 이 나라 호랑이의 멸종에 깊이깊이 관여했다는 것이었다. 호랑이를 산신으로서 숭배해온 이 나라에 많은 일본인들이 신식의 연발총과 군총(軍銃)을 들고 밀어닥쳐 메이지 후반(1897-1912)부터 다이쇼(1912-26)에 걸쳐 순식간에 호랑이를 멸종시켜 버렸다."
<한국호랑이 멸종. 일제의 남획 결과.
일본 동물학자 엔도 씨가 총독부 자료에서 발견.
해수(害獸)로서 10년 사살계획-100마리 가까이 포획.
군대와 경찰, 포수 등 수 만 명 동원.
1915-24년 집중적으로 곰·표범·늑대 등도 동시에 수난.>
1986년 1월 7일자 한국일보에 게재된 기사다. 엔도(遠藤) 씨의 사진과 함께 실린 이 기사가 한국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음은 물론, 그의 고향인 이와테(岩手) 신문 사회면 톱기사가 되었다고 했다.
"한반도의 호랑이가 급감한 원인이 정식으로 조사된 적은 없으나 엔도(遠藤) 씨가 조사한 것은 부분적으로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호의적인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그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다.
"저런 기사가 보도되면 한국의 대일 감정은 더욱더 나빠질 뿐이다........일본이 멸종시켰다고 선전한다면 당신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호랑이가 멸종한 원인 같은 건 이제 아무도 모르는데 일부러 들추어내다니. 지금 당장 그만둬!"
진실을 밝히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자기 나라의 치부(恥部)를 파헤치는 일은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엔도 키미오(遠藤公男) 씨는 대담하게도 어려운 일을 해냈다. 그는 야생동물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파괴가 멈출 줄 모르고 있는 현실을 개탄했다. 이런 상황에서 적어도, '그들의 기록만이라도 후세에 남기고 싶은 마음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의 한국판 발간에 즈음하여 서문에 들어있는 글을 통해서 엔도 키미오(遠藤公男) 씨의 마음을 읽어본다.
"나는 운 좋게도 한국 호랑이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묻힌 수많은 사실들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호랑이 멸종 뒤편에 일제의 무서운 폭력과 무자비함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일본인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를 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