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직경 3마일 이상의 대도시일 것.
2. 폭풍으로 효과적인 피해를 줄 수 있을 것.
3. 8월까지 공격당하지 않고 남아 있을 만한 시가지일 것.>
- 리버워크의 옥상에서 바라본 고쿠라 성
일본 상공을 정찰하다가 격추되어 포로로 잡힌 '크레이그 부샤르'의 7월 18일자 일기에 쓰여 진 글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냉정과 열정 사이'와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의 인기 작가 '츠지 히토나리(辻仁成, 50세)'의 소설 <태양을 기다리며>에 나오는 내용이다. '크레이그 부샤르'는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다.
원폭 투하 목표 도시는 작가가 꾸민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고쿠라(小倉)는 히로시마(廣島)에 이어 두 번째 원폭투하의 목적지였다. 고쿠라(小倉)가 병기 제조창을 비롯하여 제철소 등이 많은 공업단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고쿠라(小倉)를 살렸다. 원폭 투하 직전 고쿠라(小倉)의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가사키(長崎)가 엄청난 화염과 후폭풍에 휩싸이고 말았다.
무법송(無法松)의 일생
후쿠오카 현 고쿠라(小倉) 출신 작가 '이와시타 슌사쿠(岩下俊作, 1906-1980)'의 소설 중에 '무법송(無法松)의 일생(一生)'이 있다. 원작은 '도미시마 마쓰고로우(富島松五郞)'이었으나 1938년에 이름을 바꿔서 문예지 개조(改造)의 현상소설에 응모하여 가작으로 입선된 작품이다. 1941년 <규슈 문학>에 발표하여 나오키 상(直木賞)의 후보가 되기도 했다.
이 소설은 고쿠라(小倉)에 사는 무법자 인력거부(人力車夫)인 '마츠고로(松五郞)'의 고독한 생애와 '요시오카(吉岡)' 대위의 미망인 '요시코(吉子)'에 대한 은밀한 사랑을 그린 중편이다. 연극, 영화, TV에서도 여러 번 다루어져 대중의 인기를 끌었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 '이나가키 히로시(稻垣浩)' 감독,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郞)' 주연으로 영화화(1958)된 '무법송(無法松)의 일생'은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바 있다.
"고쿠라(小倉) 태어나서 현해탄에 자라고
입도 거칠고 행동도 거칠다.
무법송(無法松) 일생 눈물을 버리고
두둑한 배짱으로 살아가는 몸.
남자의 일생 무법송(無法松)
허공에 울려 퍼지는 저 소리는
말달리기 경주의 북치는 소리(.......)
북채가 격렬하다, 오른쪽 왼쪽
고쿠라(小倉) 유명인 무법송(無法松)
두둑한 배짱으로 날뛰는 중에 (..........)"
영화뿐이 아니다. '무법송(無法松)의 일생'은 쇼와(昭和) 시대 마지막 엔카(演歌) 가수인 '무라타 히데오(村田英雄, 1929-2002)'의 데뷔곡이기도 하다. 무라타(村田)는 노래뿐만 아니라 영화에도 많이 출연했던 엔터테이너로 손꼽힌다. 당뇨병으로 두 다리를 자르는 불운한 삶을 살면서도 신곡발표에 여념이 없었다는 그는, 일본인들의 가슴 속 깊이 각인된 가수이기도 하다. 노래도 노래지만 가라오케의 화면에 나오는 마쓰리(祭) 영상과 북 소리가 일품이다.
이러한 고쿠라(小倉)를 중심으로 5개의 마을이 통합하여 오늘날 기타규슈(北九州) 시(市)가 생겨났다. 옛 성(城)터이자 교통의 요충지인 고쿠라(小倉)와 간몬해협(関門海峡)에 접해 있는 혼슈와 터널로 연결되는 모지(門司), 공업 도시인 도바타(戸畑)와 야하타(八幡), 그리고 석탄 수출로 번창했던 항만 도시 와카마쓰(若松) 등 다섯 개의 시(市)가 합해져 거대한 통합시가 형성된 것이다. 이 도시에 현대식 건물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건축물은 주변과의 조화를 이루어야
필자는 며칠 전 기타규슈를 돌아보던 중 의미 있는 건축물 단지를 발견했다. 기타규슈(北九州) 시(市)에 있는 '리버 워크(River Walk)'라는 상업시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아파트나 상업시설에 영어 이름을 붙이는 것이 유행이지만, 건물의 콘셉에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리버 워크'는 주변 환경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건물 옆에 흐르는 강을 따라 걸어보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고쿠라(小倉) 성(城)과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했던 것이다.
이 '리버 워크(River Walk)'가 들어서기 전의 부지(敷地)에는 백화점 창고와 낡은 사무실, 개인 병원들이 흉물스럽게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현대적인 쇼핑몰, 백화점, 미술관, 방송국, 신문사들이 한데 어울려 형형색색 자태를 뽐내고 있다. 도시의 생성을 새로이 하여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인구 100만 명을 밑도는 도시에 연간 1,000만 명이 드나든다고 했다. 특히 '리버 워크'는 접근로가 사통오달이다.
필자는 고쿠라(小倉) 성문(城門)을 통과하여 공원으로 들어갔다. 예로부터 내려온 발자취를 그대로 간직한 성(城)을 지나자 아름드리 거목 사이로 노랑 · 빨강 · 파랑 건물들이 속속 눈에 들어왔다. 공원에는 유명한 서예가의 일필휘지가 돌비석에 새겨져 있었고, 신사(神社) 입구에는 역사적 유물들도 즐비했다. 성의 해자(城壕)를 지나자 바로 쇼핑몰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를 지나 현대에 도달한 기분이었다.
상업시설이면서도 사람들의 마음까지 빼앗는 발상이 참으로 기묘했다. 우리나라 보다는 기온이 높아 구슬땀을 흘렸으나 공원의 시원한 바람이 건물 내부로 이어졌고 눈부신 태양도 건물사이 사이를 비추고 있었다. 일본의 유명 디벨로퍼인 '도 겐이치(藤賢一, 60세)' 씨가 평소 입버릇처럼 말하던 살아있는 건물의 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은 살아 있어야 합니다. 건물 내부에도 물, 바람, 햇빛이 들어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건축물은 홀로서기가 아닌 주변과의 융합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의 건축물을 뛰어넘어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키고 도시 미관을 고려하여 설계를 했던 것이다.
환경 친화적인 도시로 변모
기타규슈(北九州)의 역사적 배경은 '리버워크(River Walk)' 마스터플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다섯 개의 마을이 통합했다는 연유로 건물을 다섯 개 동으로 분리했고, 건물마다 색깔을 달리하면서 특징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노력들이 하나하나 모아져 기타규슈 (北九州) 시(市)가 미래지향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석탄과 제철, 그리고 2차 대전 당시 병기제조창이 있었던 공업도시 기타규슈는 오랫동안 공해문제로 시달리기도 했으나, 시(市) 관계자와 시민들의 꾸준한 노력에 의해 공해문제를 극복한 결과 환경 친화적인 도시로 변해 UN 등으로부터 세 번이나 표창을 받은 바 있다.
필자는 고쿠라(小倉)의 강변을 거닐었다. 말 그대로 '리버 워킹(River Walking)'을 한 것이다. '리버 워크(River Walk)' 건물을 감싸고 흐르는 강물은 찬란한 태양 빛을 받으며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과거·현재·미래를 싣고 유유히 바다로 떠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구상의 시 '한강근경'이 떠올랐다.
"강은 아랑곳없이/ 그 깊고 넓은 침묵을 안고/ 태고의 모습으로 흐른다/ 과거와 미래가/ 한데 이어져서 흐른다."
우리의 삶은 이러한 강물처럼 과거와 미래가 한데 어우러져 흐르고 있을까? 도시의 모습은 제대로 이어져서 흐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