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치이(一位)의 이사를 축하한 손님들의 메시지
<이맘때의 거리는 거리 그 자체가 지닌 밤의 생리에 따라 기능하고 있다. 계절은 가을의 끝자락. 바람은 불지 않고 공기는 냉랭하다. 조금만 지나면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의 장막이 새롭게 열릴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1949- )의 소설 '어둠의 저편'에 묘사된 밤거리의 한 대목이다. 밤늦은 시각이면 사람들은 비틀거리면서 어딘가를 찾는다. 이 때 일본인들이 잘 가는 곳이 포장마차(屋台)나 이자카야(居酒屋)다.
일본에는 이러한 포장마차(屋台)나 이자카야(居酒屋)가 유난히 많다. 값이 저렴하여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이자카야(居酒屋)는 우리의 선술집 정도로 인식되는 주류와 안주용 요리를 제공하는 간이 음식점이다. 하지만 술을 주종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 레스토랑과 다르다.
필자의 경우도 이런저런 만남으로 인하여 이자카야(居酒屋)를 자주 간다. 필자의 일본 친구들은 '다양한 이자카야 문화를 소개한다'는 배려에서 필자가 일본에 갈 때마다 새로운 곳으로 안내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비교적 자주 가는 가게가 있다. 이치이(1位)라는 곳이다. 우리말로 1등이라는 이자카야다. 이 가게가 최근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는데도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그 집을 찾는다. 이유인즉, 술의 종류가 많고 안주의 맛이 일위(1位)라서이다. 주인아저씨의 인상이 포근한 것도 이유 중의 하나이지만........
"이치이(一位), 이치이(一位)"
하루키(春樹)의 표현처럼 필자 일행은 '여름의 끝자락에 밤의 생리에 따라 기능(?)'하며 이자카야 이치이(一位)에 모였다. 간다 소헤이(神田草平, 68세) 씨, 시미즈 시게오(淸水重雄, 66세) 씨, 사토 츠네오(佐藤永勇, 64세) 씨, 오오모리 미키히코(大森幹彦, 61세) 씨, 이토 슌이치(伊藤俊一, 55세) 씨, 고토 아키오(後藤秋夫, 56세) 씨, 아카기 신이치로(赤木紳一郞, 49세) 씨 등이 이자카야 '이치이(1位)'에서 뭉쳤던 것이다. 우리는 일단 생맥주로 건배를 하고 박수를 쳤다. 필자를 환영하는 간단한 의식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자연스럽게 자민당이 참패한 일본의 정치 문제와 일본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한국의 매스컴들도 연일. 일본의 정치 상황에 대해 시시각각 보도하고 있는지라 필자도 그들의 대화 속에 빠져들었다.
"이치이(一位), 이치이(1位)" 민주당이 제1당이 된 것을 이자카야 이치이(1位)에 빗대어 한 농담이다.
일본 국민들이 자민당을 외면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동안 자만에 빠져 국민을 실망시켰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치이(一位)에 모인 사람들은 한결같이 '일본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일본의 묵은 관습이 깨졌기 때문이란다.
"변화! 변화! 변화! 우리가 드디어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너무나 기쁩니다." 사토 츠네오(佐藤永勇) 씨가 포문을 열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얼마나 오랜만에 맛본 즐거움일까? 일본인들의 얼굴마다 기쁨이 넘쳐흘렀다. 필자의 나고야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자민당을 성토했다. 모두가 정치 평론가 수준을 능가했다.
"자민당은 그동안 국민들에게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정치 자금만 받아 챙기다가 스스로 자멸했습니다."
"대대로 이어온 정치 귀족들이 어떻게 서민들의 삶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모두가 역대 총리들의 책임입니다."
"고이즈미 총리, 아베 총리, 후쿠다 총리, 아소 총리 모두가 말만 앞세웠습니다."
일본 매스컴들이 바람을 일으켰고, 국민들이 선거 혁명을 이룩했다. 그래서 국민이 무서운 것이다. 국민 무서운 줄 모르는 지도자들은 국민들로부터 혹독한 심판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표본이리라.
"참으로 민심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불과 몇 달 전의 상황과 이렇게 다를 수가 없습니다. 보수 중의 보수인 이곳 나고야(名古屋)에서 자민당이 한 석도 못 얻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미즈 시게오(淸水重雄, 66세) 씨가 대미를 장식했다.
에도시대에 탄생한 이자카야(居酒屋)
이자카야(居酒屋)의 서정(抒情)은 바로 이러한 모습이다. 서민들의 삶이 그윽하게 묻어나는 곳이다. 이자카야(居酒屋)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 기원은 에도시대(江戶時代)로 거슬러 올라간다. 술의 정량 판매(저울로 무게를 달아서 팔던 방식)를 하던 주점(판매점)에서 선채로 술을 마시도록 하다가 점차 간단한 술안주를 제공하게 된 것이 그 효시라고 한다. 술집에서 '계속 있으면서 마신다'는 것으로부터 거주(居酒/いざけ)로 칭해, 단순히 술을 팔기만하는 집과 차별화하기 위하여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 문안드림>의 첩지를 매장에 내걸게 되었다. 현재에도 이러한 주점에 해당되는 형식의 다치노미(立飲み) 스탠드가 잔존하고 있다. 더불어 인근 주민의 가벼운 사교장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예도 볼 수 있다. 또한 에도시대에는 혼자 사는 독신 남성이 많았던 까닭에 술을 마시면서 간단하게 식사도 하는 이자카야(居酒屋)가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 형태가 달라졌던 것이다.
1970년 대 무렵까지는 이자카야라고 하면 '남성 회사원들이 니혼슈(日本酒)를 마시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근래 들어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있어 맥주, 와인 등 음료나 요리 종류를 풍부하게 준비하고 실내 장식을 근사하게 꾸민 가게가 많아졌다. 이에 따라 여성들의 그룹이나 가족 동반을 포함해 누구라도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장소라는 이미지가 정착되고 있다.(위키백과)
체인점 확대로 수요층 늘어
특히 1980년 대 무렵부터 이자카야(居酒屋)의 체인점이 확대되었다. 이자카야(居酒屋)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다소 소란스럽기는 해도,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어 값이 싼 음료나 요리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하는 메리트를 가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학생·회사원·친구 등의 모임에서 <간단한 회식>을 할 때는 연회장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더불어 체인점을 중심으로 남녀불문 두터운 고객층을 형성 하고 있다. 그리고 각기 다른 모습으로 진화되고 있다.
"가게의 장식이나 식음료가 일본식이 많지만, 서양풍으로 하여 다른 가게와 차별화를 도모하는 곳도 늘어났습니다. 또한 신선한 어패류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활어조(活魚槽)를 만드는 가게나, 카운터를 만들어 눈앞에서 조리를 해 보이는 등 여러 가지 형태의 가게도 많습니다." 주인 아저씨의 코멘트다.
일본의 술 문화는 우리와 비교해 보면 단조롭기도 하다. 폭탄주를 마시며 인생을 하루에 끝내버리는 듯 폭음을 하는 우리의 문화와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제 술 문화를 바꿔야 한다. 고급 살롱에서 비싼 술을 비밀스럽게 마시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오픈된 곳에서 열린 마음으로 술을 즐겨야 한다는 말이다. 값이 싼 술을 마시는 것이 더욱 인간적이고 친화적이라는 것을 나고야(名古屋)의 이치이(1位)에서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래서 이자카야(居酒屋) '이치이(一位)가 이치이(1位)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