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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나가사키(長崎)의 종(鐘)'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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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63번째를 맞는 나가사키(長崎) 원폭 희생자 위령제가 지난 9일 나가사키(長崎)시 평화의 공원에서 거행 되었다. 나가사키(長崎)의 날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청명했으나 진혼(鎭魂)의 분위기는 먹구름이 드리운 듯 어두웠다. 오전 10시 40분에 시작된 이날의 추모식은 11시가 지나자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11시 2분. 침묵을 깨트리고 '나가사키(長崎)의 종(鐘)'이 울렸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기에 그 시각에 맞추어 종이 울린 것이다. 사회자의 '묵념'이라는 안내방송에 따라 참배자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피폭자와 유족들, 행사 참가자들은 눈을 감고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지난 1년 동안 새로 확인된 3,058명의 사망자 명부 3권이 평화의 기념상 앞에 있는 봉안함에 봉납되었다.

나가사키(長崎)의 종(鐘)은 원폭의 상징

다카미 토미히사(田上富久) 나가사키(長崎) 시장은 '핵보유국에 대해 핵무기의 대폭삭감'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올해로 '나가사키(長崎)의 종(鐘)'의 저자인 나가이 타카시(永井隆, 1908-1951) 박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나가이(永井) 박사는 일찍이 '전쟁에는 승리도 패배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멸망뿐이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은 시대를 넘어 평화의 존귀함을 세계에 호소해 지금도 전 인류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고 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후쿠다(福田) 수상도 "향후 비핵 3원칙을 견지해 핵병기 폐절(廢絶)을 위해 국제사회의 선두에 설 것을 맹세한다"고 했다.

원폭의 상징이 된 '나가사키(長崎)의 종(鐘)'은 어떻게 탄생되었을까?
이 '나가사키(長崎)의 종(鐘)'은 나가사키 의과대학 교수였던 '나가이 타카시(永井隆)' 박사의 수필에 의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파괴된 우라카미(浦上) 성당의 안제라스 종(鐘)을 모델로 하여 폐허된 도시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던 것이다. 1949년 출판되자마자 종이가 부족했던 당시에도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빛을 보기까지 아픈 사연도 있었다. 이 작품은 1948년에 쓰여 졌으나 GHQ(General Headquaters: 연합국 군최고사령관 총사령부)의 검열에 의해 출판이 불허되었었다. 그러나, '마닐라의 비극'이라는 책과 합본이 되어 1949년 1월, 히비야(日比谷) 출판사에 의해 빛을 보게 되었다.

나가이 타카시(永井隆) 박사는?

1908년 시마네 현 마쓰에(松江) 시에서 출생한 '나가이 타카시(永井隆)' 씨는 나가사키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1932년 단기 군의관으로 종군하기도 했다. 1934년 귀환하여 우라카미(浦上)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그해 8월에 결혼하였으며, 1937년 나가사키 의대 강사 · 조교수를 거쳐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1946년에 교수가 되었다. '나가이 타카시(永井隆)' 박사는 원래 X-레이 과(科) 교수였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기도 했던 그는 1945년 6월 백혈병을 얻어 3년 여 년 밖에 살 수 없는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도 운명에 굴하지 않고 직무를 계속했고, 어려운 환자들을 위한 무료 진료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9일. 대학에서 폭탄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집에 있던 부인을 잃었지만 구호활동을 계속한 그는. 1946년 나가사키 역에서 쓰러진 후 병마와 싸우다가 1951년 두 자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처녀 고개」,「생명의 강」,「평화탑」, 「사랑하는 내 아이들아」,「이 아이를 남겨 두고」,「나가사키의 종」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가 병상에서 집필한 수필「나가사키의 종」은 시인인 '사토우 하치로(佐藤八郞, 1903-1973)'가 가사를 썼고, 작곡가인 '고세키 유우지(古關裕而, 1909-1989)'가 곡을 만들었으며, 일본의 국민가수이자 작곡가인 '후쿠야마 이치로(藤山一郞)'가 불러 국민적 반향을 일으킨 대히트곡이 되었다. 그 후 이 노래는 "나가사키의 종"이라는 영화의 주제곡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눈물을 안기기도 했다.

나가사키 평화의 공원에서 언덕길을 내려오면 공원 벽면에 '나가사키(長崎) 종(鐘)'의 악보와 가사가 새겨져 있다. 단순한 노래 말이라기보다는 '나가이 타카시(永井隆)' 씨의 애절한 인생사가 녹아 있는 듯 했다.

"한없이 맑고 파란 하늘을
슬프다고 생각하는 안타까움이여
넘실대는 물결 같은 인간 세상에
덧없이 살아가는 들꽃이여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나가사키의
아- 나가사키의 종이 울린다.
부름 받은 아내는 천국으로
헤어져서 홀로 여행을 떠났네.
유물로 남겨진 로자리오의
묵주에 하얀 나의 눈물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나가사키의
아- 나가사키의 종이 울린다."

'사랑하는 내 아이들아'

'나가이 타카시(永井隆)' 박사는 1948년 11월, 적혈구 120만(정상치 500만), 1949년 2월 백혈구 28만(정상치 8,000)이라는 백혈병이 악화되어 정신과 육체가 모두 쇠약해지는 동안에도 '멸망하지 않는 것을', '묵주 알', '이 아이를 남겨두고', '생명의 길' 등을 썼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도 스스로의 인생을 반성하고 '사랑하는 내 아이들아'라는 유언장 같은 책(정성호역, 성바오로)을 눈물로 썼다.

<나는 거지라고 불러도 도리가 없었다. 나는 분명히 거지였기 때문이다. 병상에 누워있으니까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이것저것 들고 교대로 찾아왔고, 먼 곳으로부터 소포도 많아 배달되어 왔다.>

<지금이니까 고백하지만, 나는 원자 폭탄이 떨어지고 난 직후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 날 한발의 원자 폭탄으로 대학이 무너지고 연구실이 불타고 친구들이 죽고, 집이 없어지고, 너희의 어머니가 죽고, 나도 중상을 입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그러한 처참한 일을 당해 밑바닥에 떨어지면 끝장이라고 단념해 버릴 것이다.>

<쓰러진 뒤에 다시 시작한다.>

<세상은 참으로 교묘하게 배려되어 있다. 저축한 돈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 내가 쓴 원고가 팔리기 시작하여, 그 인세가 내 주머니에 들어오게 되었다.>

<사랑하는 아이들아. 이것 보아라. 숙부가 저녁밥 준비를 하는지 두레박으로 물을 긷고 있다. 저 두레박은 텅 빈 채로 맨 아래까지 떨어지지 않는 한 물을 가득 담아 위로 올라올 수 가 없는 법이란다.>

4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사회의 의사이자 가정의 아버지'인 '나가이(永井)' 박사가 남긴 눈물겨운 어록들이다.

"전쟁에는 승리도 패배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멸망뿐이다"는 그의 호소를 잊지 말자. 나가사키의 종소리가 공명(空鳴)이 아닌 우리 모두의 공명(共鳴)이 되기를 기원하자.

"아- 나가사키의 종이 울린다."

입력 : 2008.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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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팬택전무(기획홍보실장) 동국대 행정학과/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석사)/인하대 언론정보학과대학원 박사(수료). 육군 중위(ROTC 11기)/한국전력/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상무)/팬택 기획홍보실장(전무)/경희대 겸임교수 역임. 현재 JSI파트너스 대표/ 부동산신문 발행인(www.renews.co.kr) 저서:홍보, 머리로 뛰어라/현해탄 波高 저편에/홍보는 위기관리다/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우리가 만날 때마다 무심코 던지는 말들/오타줄리아(공저) 기타:월간조선 내가 본 일본 일본인 칼럼 215회연재/수필가, 소설가(문학저널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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