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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무궁화의 여자」 가수 심수봉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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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출장 중에 우연히 펼쳐본 아사히(朝日)신문(2006년 10월 25일)석간에 대서특필된 심수봉씨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무궁화의 여자」 ‘가수 심수봉의 반생(半生)’이라는 인터뷰 기사였다. 좌측상단에는 故박정희대통령의 사진, 중앙에는 커피잔을 앞에 놓고 자신의 반생(半生)을 "활동사진" 돌리는 듯한 표정의 심수봉씨 사진이 실려있었다.


 

「무궁화의 여자」

 


‘날지도 못하는 새야
무엇을 보았니?
인간의 영화가 덧없다.
머물지 말고 날아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하늘에 산화한 저 넋이여!
몸은 비록 묻혔으나
나라를 위해 눈을 못 감고
무궁화 꽃으로 피었네.......’

 

심수봉씨의 노래 「무궁화」중의 일부다.
이 「무궁화」는 한때  방송 금지곡이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하늘에 산화한 저 넋이여! 몸은 비록 묻혔으나 나라를 위해 눈을 못 감고……」라는 가사가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심수봉씨는 '방송금지가 되었던 「무궁화」를 다시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은 88년 말이었다'고 했다.

 

‘뭐라 말 할 수 없는 눈물이 넘쳤습니다. 10년 동안의 은둔생활, 파국을 맞은 결혼생활……’

 

다른 가수들은 휘황찬란한 무대 위해서 열창하고 있을 때, ‘그때 그 자리에’있었다는 이유하나로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만했다는 것이다.

 

‘대통령 암살, 옆에 있었던 나 —’

 

≪대통령을 뵙게 된 것은 세 번째였습니다. 나는 대통령의 왼쪽 옆에 앉았고, 오른쪽에는 또 한 사람의 여학생이, 모두 여섯 명이었습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표정은 어쩐지 로봇처럼 굳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때 그 사람’을 부른 후의 일이였습니다. 김부장이 자신의 왼쪽에 있던 차지철 경호실장과 대통령을 연속으로 쏘았습니다.≫

 

≪차실장은 손에 구멍이 뚫려서 그것을 막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여학생이 대통령께 ‘괜찮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은 ‘괜찮아’라고 대답한 후 제 쪽으로 기대었습니다. 목 안쪽에서 「큘큘」하는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왔습니다.≫

 

≪김부장은 대통령께서 무릎베개하고 있는 저에게 총구를 겨누었습니다. ‘아— 이것으로 죽는구나!’고 생각했습니다.≫

 

≪정보기관 건물의 지하실에 연행되어 여러 번 조사를 받았습니다....... 마지막 조사 때,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다. 남자들도 다 도망을 갔는데, 용기 있게 현장에 남았다.’ 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가수로 데뷔하여 1년 동안의 절정기에서 추락한 것은 27년 전, 24살의 만추(晩秋)였습니다.≫


지금은 대체로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10ㆍ26을 맞이하여 기획한 아사히(朝日)신문의 인터뷰 기사가 이채(異彩)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의 노래 칭찬 받아서

 

심수봉씨가 故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일본 노래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사히(朝日)신문이 심수봉씨의 인터뷰를 기획했을까?

 

"故박대통령을 처음으로 뵙게 된 것은 1975년이었습니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의 「슬픈 술(酒)」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히바리씨는 제가 중학교 때 선생님으로부터 레코드를 받아서 알게 되었습니다. 가사를 열심히 외우고… 자연스럽게 일본어 공부도 되었습니다."

 

심수봉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로 피아노연주를 했다고 한다. 그때 나이 19살. 클라리넷 하는 동료의 권유로 한국ㆍ일본의 손님들이 연회를 하는 곳에 불려갔다. 한 여성이 일본노래 「나가사키는 오늘도 비가 왔다」를 불렀다. 그런데, 그 여성의 노래가 박자. 음정이 엉망이여서 화가 난 심수봉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때 부른 노래가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의 ‘처녀 뱃사공(일본 노래)’이었다.

 

박수갈채를 받은 것은 당연한 일. 연회의 주최자인 남성이 ‘잘 불렀다’고 칭찬을 하면서 20만원을 주었다. 그 당시, 아르바이트로 번 돈이 한 달에 5만원이었다니 노래를 얼마나 잘 불렀을까?
그때 그 남성이 故박정희 대통령의 측근인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부터 각하를 만난다’... 설마? 떨렸습니다.≫

 

≪‘눈물 젖은 두만강’과 ‘횡성옛터’를 불렀습니다. 대통령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부른 곡이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의 「슬픈 술(酒)」이였습니다. ‘누가 일본 녀석을 데리고 왔어? 너는 일본사람인가?’라고 유쾌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으로 대학가요제에 나가

 

그런 일이 있은 후, 심수봉씨는 가수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 78년 MBC의 대학가요제에 나간 것도 ‘우승하면 레코드를 낼 수 있다.’는 천진난만(?)한 발상(發想)이었던 것 같다. 대학가요제에서 자신이 작사ㆍ작곡한 ‘그때 그 사람’을 불렀지만 우승은 못했다.  ‘학생이 너무 프로같다’는 이유였단다. 하지만 이 가요제에 나간 것을 계기로 이름이 알려져 결국 프로가수로 데뷔하는 꿈이 실현되었다.

 

아사히(朝日)신문은 심수봉씨의 노래는 ‘젊은 사람부터 나이든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팬의 폭이 넓다’고 했다. 그녀 노래의 특징은 일본의 엔카(演歌), 포―크, 무드가요를 믹스한 것 같은 곡조로서 한국의 「트로트」로 분류했다. 또 ‘대부분의 노래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작사ㆍ작곡한다. 비음(鼻音)의 감미로운 가성(歌聲)이 특징’이라고 분석했다.

 

아사히(朝日)신문의 인터뷰기사는 5회(10월31일)로 끝이 났다. 심수봉씨의 반생(半生)을 다 담으려면 그녀의 표현대로 산(山) 만큼 될 텐데…. 필자는 ‘그녀의 반생(半生)을 10시간에 걸쳐서 들었다’는 취재 기자(市川速水 氏)를 통해서 더욱 자세한 얘기를 듣기로 하였다.

 

‘이 몸이 죽어 한줌의 흙이 되어도/ 하늘이여 보살펴주소서/ 내 아이를 지켜주소서....’

 

질곡(桎梏)의 세월을 벗어난 그녀에게 「무궁화」의 노랫말처럼, 하늘의 보살핌이 있으리라 믿는다.

입력 : 200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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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팬택전무(기획홍보실장) 동국대 행정학과/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석사)/인하대 언론정보학과대학원 박사(수료). 육군 중위(ROTC 11기)/한국전력/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상무)/팬택 기획홍보실장(전무)/경희대 겸임교수 역임. 현재 JSI파트너스 대표/ 부동산신문 발행인(www.renews.co.kr) 저서:홍보, 머리로 뛰어라/현해탄 波高 저편에/홍보는 위기관리다/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우리가 만날 때마다 무심코 던지는 말들/오타줄리아(공저) 기타:월간조선 내가 본 일본 일본인 칼럼 215회연재/수필가, 소설가(문학저널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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