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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칼럼

고독한 “조선인 원폭(原爆)희생자의 추도비”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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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30도를 넘는 폭염이 계속되는 8월이다. 올해의 8월은 유난히 뜨겁다.
일본의 고이즈미(小泉)총리가 일본총리로서는 두번째로 8월15일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는 소식 때문일까?

‘아 ― 감격의 8·15광복’

 

일본 왕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하는 발표문을 보자.


「…… 육해공군이 용감히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전국(戰局)은 우리에게 유리하지 못했다. 적(敵)은 실로 측량 할 수 없는 파괴력을 가진 폭탄을 떨어뜨렸다 …… 우리가 만일 전쟁을 계속한다면 전쟁의 끝은 최종적인 와해와 일본 국민의 파멸....... 열강의 공동선언 조건을 수락할 것을 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廣島)와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의해 691,500명이 피해를 입었고, 사망자가 233,167명이나 된다. 이 가운데 한국 사람은 7만 명이 피해를 입었고, 4만 명이 사망했으며, 3만 명이 온 몸에 상처를 입은 채 목숨을 부지했다. 결국 이 두 개의 폭탄은 일본의 항복을 가져왔다. 8ㆍ15광복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쁜 감격도 있지만, 엄청난 희생과 상처를 안겨주기도 했다. 필자는 최근에 이러한 아픔의 도시 나가사키(長崎)에 다녀왔다.

 

 

“나의 영혼은 누가 위로해주나?”

 

나가사키(長崎)에는 평화의 공원, 원폭낙하 중심지, 원폭자료관 등 그 날의 아픈 상처들이 주름살 같은 60년의 세월들을 말해 주고 있다.

필자는 이곳 평화의 공원에 ‘조선인 추도비가 있다’는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으며 그 공원에 갔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조선인 추도비’는 보이지 않았다. 평화의 공원, 원폭낙하 중심지, 원폭 자료관 등 어느 한곳에도 없었던 것이다. 필자를 안내하는 .택시 운전사(浦上學, 56세)도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원폭낙하 중심지’와 ‘원폭 자료관’ 사이의 비탈길에서 ‘조선인 추도비’를 발견했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듯, 외로이 서있는 비석 ―

누군가 언제 다녀갔는지 숨죽은 꽃다발이 땡볕에서 뒹굴고 있었다.

비석 주변에는 들풀들만 무성했다. “아! 버려진 영혼들 ― ”

너무나 초라하고 고독해 보였다.

그 비석 옆에는 이러한 글이 새겨져있었다.

 

<1910(명치43)년 8월22일, 일본정부는 「일한병합조약」을 공포하여, 조선을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지배하에둠으로써, 자유와 인권, 귀중한 토지마져 빼앗기여, 생활의 수단을 잃은 많은 조선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일본에로 건너왔다.

그후, 일본에 강제련행으로 끌려와 강제로동을 당한 조선사람은, 1945(소화20)년 8월15일 일본의 패전당시에는, 실로 2,365,263명에 이르렀으며 나가사끼현하에도 약7만명이 거주하고 있었다(내무성 경보국 발표).

그리고 나가사끼시 주변에는 약 3만 수천명의 조선사람들이 살고있었으며, 그들은 미쯔비시계렬의 조선소, 제강소. 전기, 병기공장과 도로, 방공호, 군수공사장 등 토목공사장들에서 강재로동을 당하고 있었다.

1945(소화20)년 8월 9일 미군의 원자폭탄투하에 약 2만명의 조선사람들이 피폭하였으며, 그중 약 1만여명이 폭사하였다.

우리들 이름없는 일본사람들이 얼마간의 돈을 모아, 이곳 나가사끼에서 비참한 생애를 보낸 1만여명의 조선사람을 위하여 이 추도비를 건설하였다.

지난시기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그 민족을 강재로 끌고와, 학대혹사하며, 강재로동끝에 비참하게도 원폭을 맞아 죽게한 전쟁책임을, 그들에게 사과함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 핵무기의 완전철패와 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념원하여 마지않는다.>


1979년 8월 9일 ‘나가사키(長崎) 재일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회(會)’가 세운 추도비와 비문이다. 서투른 필체와 틀린 맞춤법으로 새겨진 한마디 한마디가 그 날의 상처처럼 보였다. 기업인인 필자에게도 이들의 ‘서러운 죽음’이 땅거미 같은 어둠으로 드리워졌다. 이국땅에 끌려와 영문도 모른 채 죽음으로 내몰린 이들에게 누가 사과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들 이름없는 일본사람들이 얼마간의 돈을 모아, 이곳 나가사키에서 비참한 생애를 보낸 1만여명의 조선사람을 위하여 이 추도비를 건설하였다’는 말이 참으로 가슴 아프다.

 

 

오른손은 원폭을, 왼손은 평화를........

 

<저 ― 악몽(惡夢)과 같은 전쟁(戰爭). 몸이 오싹한 처절비참(凄絶悲慘)...... 오른쪽 손은 원폭을 가리키고, 왼손은 평화를, 얼굴은 전쟁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평화의 공원에 서있는 동상과 그 옆에 쓰여 있는 글이다.

그러나 이토록 처참한 비극을 겪으면서도 이 지구상에는 지금도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고독한 ‘조선인 원폭피해자의 추도비’ 위로 한 마리의 새가 날았다.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죽어간 그들의 혼백이 새가 되었을까?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에

새 날아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천상병 시인의 새)

 


‘원폭 피해자에게 따뜻한 정성을......’


일본 국외에 거주하는 원폭피해자에게도 건강관리수당을 지급해야 한다며, 일본을 상대로 12년간이나 법정투쟁을 해왔던 이강녕씨가 지난달 11일 부산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보도(동아일보/ 요미우리신문)가 있었다.


17살의 나이로 나가사키(長崎)에 강제 징용되어 원폭피해를 본 이씨는 1945년 12월에 한국으로 돌아온 뒤,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며 후쿠오카 지방법원과 후쿠오카 고등법원에서 건강관리수당 미지급청구 소송에서 승소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에 시달리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78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한국의 히로시마(역사비평사, 1988년)'를 쓰도록 일본 이치바준코(市場淳子, 50세)씨에게 용기를 준 피폭2세 김형율(金亨律)씨도 지난해에 35세라는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병명은 ‘선천성 면역글로블린 결핍증’이란다. 그의 모친은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폭

방사능에 노출된 뒤 지금도 후유증에서 시달리고 있다. 이치바준코씨는 김형율씨에 대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한국인 피폭자에게 안겨주었던 피해가 청산되지 않는 상태에서 그 피해가 한국의 피폭2세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했다.”고 자신의 책에 썼다.


서울대 정근식 교수도 이들의 아픔을 ‘고통의 역사(선인, 2005. 8.20)’에 이렇게 기술했다.


「피폭 60년의 세월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고, 이들의 고통의 목소리와 함께 기억도 앗아갔다. 피폭자들의 역사적 근원은 희미해진 기억의 말보다는 그들의 몸에 보다 생생히 아로새겨져있다」고........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고생하고 있는 수많은 원폭피해자들에게 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확대되어야 한다. 그들의 아픔이 곧 우리 모두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입력 : 200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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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팬택전무(기획홍보실장) 동국대 행정학과/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석사)/인하대 언론정보학과대학원 박사(수료). 육군 중위(ROTC 11기)/한국전력/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상무)/팬택 기획홍보실장(전무)/경희대 겸임교수 역임. 현재 JSI파트너스 대표/ 부동산신문 발행인(www.renews.co.kr) 저서:홍보, 머리로 뛰어라/현해탄 波高 저편에/홍보는 위기관리다/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우리가 만날 때마다 무심코 던지는 말들/오타줄리아(공저) 기타:월간조선 내가 본 일본 일본인 칼럼 215회연재/수필가, 소설가(문학저널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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