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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대의 ‘되짚기’】 한동훈, 이회창式 정치 넘어설 수 있을까

서봉대  정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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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9일 오후 국민의힘 한동훈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총선 파이널 유세를 갖고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사진=조선DB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닮은 점들이 많다.

 

같은 법조인 출신인데다 정부 요직(법무부 장관)을 거친 뒤 사실상 윤석열 대통령에 의해 집권당을 이끌 비대위원장 겸 총괄선대위원장으로 임명됨으로써 정계에 입문한 과정도 그렇다. 이 전 총재 역시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뒤 현직 대통령인 YS에 의해 정치권으로 들어와 선대위원장으로 총선을 이끌었고 그후 당 대표를 맡았던 것이다.

 

게다가 정치 신인이었던 두 사람 모두 대선 유력 주자로 부상했고 한 전 위원장 역시 이 전 총재처럼 팬클럽을 갖고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때문에 한 전 위원장의 향후 정치적 행보도 주목된다. 4·10 총선과정에서, 그리고 총선 패배로 물러나는 자리에서도 정치적 역할을 계속할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대권 도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전 총재가 DJ·노무현 전 대통령과 잇따라 경쟁했던 1997년과 2002년 대선과정도 되짚어볼만 하다.

 

대선후보 이회창에게는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대쪽이미지가 늘 따라붙었다. 이를 통해 기존의 정치인들과는 다른 신선함으로 주목을 받았고 표심에도 주효, 두 차례 대선 모두에서 선거전 초반 대세론을 이어갔던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검사 출신인 한동훈의 이미지도 이와 겹치고 법무장관·비대위원장 시절 신드롬을 일으켰을 정도로 유권자들을 끌어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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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을 세운 이회창 前 총재.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지만 산업화 세력의 부정적 이미지를 털어내지 못한 채 한나라당의 이미지를 ‘귀족 정당’으로 고착시켰다. 사진=조선DB

 

그러나 이 후보는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 등 도덕성 문제가 잇따라 제기되자 여론 지지율에서 급격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미지가 강하게 부각됐던 만큼이나 타격도 더 컸다.

 

3김처럼 오랫동안 정치판에서 생존해왔던 정치인들 같았으면 의혹에 대해 일정 수준의 면역력과 대처능력까지 갖출 수 있었으나, 정치판 초짜인 이 후보에게는 논란꺼리가 부각되기 쉬웠고 그것을 헤쳐나가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경쟁 후보였던 DJ가 비자금 의혹 제기에도 그다지 흔들리지 않았던 데는 수사가 유보됐던 상황에 못잖게 그런 능력도 작용했던 것이다. 당시 DJ 병역문제도 논란을 초래했으나 얼마 못가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게다가 호남을 중심으로 견고한 지지층을 갖고 있었던 것도 큰 버팀목이었다.

 

이 후보도 한나라당 텃밭인 영남을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었지만 그 강도 측면에선 DJ에 미치지 못했기에 지지율은 의혹제기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랬던 이 후보가 노 후보와 경쟁할 땐 엘리트 VS 서민이라는 이미지 프레임에 갇히기도 했다.

 

이 후보처럼 정치 초짜인 한 전 위원장에게도 자신의 이미지를 훼손시킬 수 있는 의혹이나 프레임 공세에 휘말릴 경우 적잖은 타격을 입을 것이다. 벌써부터 야권에선 그를 겨냥한 특검법을 벼르고 있다.

특히 선거에선 의혹에 대처하는 방식에 따라서도 판세에 미치는 영향이 달랐다.

 

이 후보는 아들 병역비리 의혹 확산에 대해 그런 문제가 제기됐다는 것만 갖고 도덕성이 없다, 부정한 방법으로 했을 것이 틀림없다는 식으로 생각해버린 데 원인이 있다고 지적하며 정직과 성실을 거슬러서 한 일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몇 년후 무죄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대선 당시 그런 식의 무미건조한 이성적 대응만으로는 떠나버린 표심을 되돌리기에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자녀 병역문제에 민감한 부모들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노무현 후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장인의 좌익활동 의혹과 관련, “그런 사실을 알고 아내와 결혼했다. 그렇다고 아내를 버리면 대통령 자격이 있고 그대로 사랑하면 자격이 없다는 것이냐고 호소했던 게 표심을 끌어안게 됐던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초점을 벗어난 답변일 수 있지만 오히려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정치판에선 이성보다 감성의 호소력이 더 강할 수 있다.

 

한 전 위원장 역시 법무장관 시절, 야당 의원들의 잇단 공세를 논리적이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무력화시킴으로써 주목을 받았으며 엘리트적 이미지 등이 합쳐지면서 신드롬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총선에선 인파가 몰려들었다.

 

하지만 사안마다 직설적·논리적으로 맞대응해왔던 게 오히려 정치인으로서의 한동훈에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정치판의 생리는 논리적으로 따지는 법조계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 후보의 ‘3김정치 청산슬로건도 정치권 개혁을 바라던 유권자들에게 먹혀들기는 했지만 역풍도 뒤따랐다. 같은 보수진영이었던 JP 측으로부터 연대제의를 수차례 받았으나 함께 할 명분이 궁색했던 만큼 일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JPDJ와 연대하게 됨으로써 이 후보에게는 주요 패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보수진영 분열을 초래한 자충수가 됐던 셈이다.정치는 명분이라지만 3당 합당에 나섰던 YS처럼 만들면 되는 데 대쪽이 후보는 그렇게 하진 못했다.

 

이 후보는 탈당·출마한 이인제 후보와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서도 "경선불복·탈당이라는 부도덕성이 3김 정치와 다를 게 없다"고 비난하며 "사과하고 당을 깬 것을 원상회복해야 가능하다"고 선을 그었을 정도였다. 그것도 판세가 아들 병역비리 의혹으로 DJ에게 역전당해 세력 확산에 전력을 쏟아야 했을 때였다.

 

한 전 위원장의 여의도 기득권 정치 청산기치 역시 정치권 개혁 의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국민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얻고 있으나 ‘3김 정치 청산처럼 상황에 따라선 보수 분열이란 역풍을 맞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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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제(가운데) 전 경기지사가 1997년 10월 31일 신한국당을 탈당, 국민신당에 입당한 김운환(왼쪽), 한이헌(오른쪽) 의원이 손을 맞잡아들고 웃고 있다. 사진=조선DB

 

이 후보가 1997년 대선에서 낙선했던 데는 대통령인 YS 및 민주계와의 갈등도 자리해 있었다. 민주계였던 이인제 후보의 탈당·출마가 가시화됐고 DJ비자금 수사 유보 직후에는 YS 탈당 요구와 인형 화형식으로 치닫게 되면서 양측간 갈등이 고조됐다.

 

한 전 위원장 역시 비대위원장을 맡아 총선을 진두지휘하는 괴정에서 윤 대통령과 갈등기류를 표출했다. 총선 직후 윤 대통령의 오찬 제안을 거절한 이후에는 양측 관계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얘기까지 들리고 있다. 때문에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느냐가 그에게는 정치적 시험대가 될 것이다. 임기가 절반이나 남아있는 대통령과 갈등을 지속한다는 건 악수(惡手)가 되기 십상이다.

 

결국 한 전 위원장에게는 정치권 개혁의지를 부각시키는 것 못잖게, 정치판 생리를 체득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자신이 공언했던 곱셈의 정치까지는 아니더라도 덧셈의 정치는 할 수 있어야 정치적 꿈을 다질 수 있다.

입력 : 202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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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대의 되짚기

jisang3@daum.net 경북 청송 출신으로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 국민일보에 입사한 이후 2020년 뉴스 1 부국장을 마지막으로 30년 언론인생활을 마무리했다. 정치부장, 정치선임기자 등으로 여의도 정치권과 청와대, 총리실 등을 취재하고 후배 기사를 데스킹하는 데 20여년을 보냈다. 현재 민간연구원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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