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 6월 5일 국회 개원식 연설을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 입장한 김대중 대통령이 연설하기 전에 이만섭 국회의장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조선DB
더불어민주당에서 국회의장 중립의무 취지를 담은 국회법을 훼손시키는 주장들이 잇따르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떠올려졌다.
4·10총선을 통해 압도적 의석을 차지했던 더불어민주당에서 자신들 몫인 차기 국회의장 경선을 앞두고 당내 후보들끼리 경쟁하듯 이같은 주장들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긴급 현안에 대해선 의장 직권으로 본회의를 열어 처리하겠다" ”다수당으로서 민주당의 효능감을 보여줄 수 있게 하겠다"는 등 노골적으로 중립의무 취지를 깔아뭉개고 있다. 이런 기세라면 더불어민주당이 수적 우세를 앞세워 국회 활동에서 폭주할 것이고 의장도 이에 가세하겠다는 으름장에 다름아니다.
2000년 7월 DJP 공동정부때의 민주당(당시에는 새천년민주당)소속 국회의장은 달랐다. 17석의 의석을 갖고 있던 자유민주연합을 원내교섭단체로 만들기 위해 최소 의석수(20석)를 낮추려는 국회법개정안이 공동여당인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에 의해 추진됐으나 집권당 소속이었던 국회의장에 의해 무산됐던 것이다. 당시 의장이었던 이만섭이 당총재이기도 했던 대통령 DJ의 설득에도 불구, 날치기 처리됐던 법안의 본회의 상정 요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앞서 집권 양당은 야당의 거센 반발에도 수적 우세로 밀어붙여 개정법안을 국회 운영위에서 날치기 통과시켰고 이에 반발, 한나라당은 철야농성에 돌입하는 동시에 국회의장 공관을 에워싸는 등 정국이 급속도로 경색국면으로 치달았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새천년민주당 측은 이 의장에게 날치기 법안의 본회의 ‘직권상정’까지 요청했으나 이 의장은 날치기 법안을 그렇게 할 수 없다며 야당과의 대화와 타협을 거듭 촉구했다. 급기야 DJ까지 나서서 본회의에서 표결하도록 설득했지만, 이 의장의 소신에 밀려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교섭단체 요건완화 법안의 국회통과는 결국 무산됐다.
이만섭 국회의장실에서 열린 여야총무회담에서 이만섭 국회의장이 민주당 정균환 총무와 한나라당 정창화 총무의 손을 잡게 하고 있다. 사진=조선DB
그후 국회의장의 당적보유를 금지하는 국회법개정안이 DJ의 새천년민주당도 가세한 가운데 여야 합의로 통과됐고 이 의장은 새천년민주당을 탈당, 법률상 당적을 갖지 않은 최초의 국회의장이 됐다. 이 의장은 국회의장 선거 당시에 이미 당적 이탈을 공약하기도 했다. 의장 임기를 마친 후에는 다시 새천년민주당으로 복당, 상임고문을 맡았다.
앞서 YS정부 때인 1993년말 새해 예산안 처리를 둘러싸고 여야가 대치했을 때도 그랬다. 당시 쌀시장 개방과 추곡가 문제 등으로 여야간 대치정국이 계속되고 있던 상황과 맞물려 새해 예산안 처리도 난항이 불가피했다. 대통령이자 소속당 총재였던 YS까지 직접 나서서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이만섭을 청와대로 불러 법정기일 안에 반드시 통과시키라고 압박했다. 하지만 이 의장은 YS에게도 야당과의 협상을 통해 매듭지어야 한다는 소신으로 맞섰던 것. 그러자 집권당은 이 의장에게 사회권 이양까지 강요한 뒤 본회의 날치기 처리를 시도했으나 야당의 거센 반발에 밀려 실패했고 그 후 여야 협상을 통해 표결처리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당시 이 의장은 사회권을 넘겼던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로 본회의에서 예산안이 날치기 처리될 경우 사퇴하기 위해 사임서를 미리 작성해 놓기도 했다.
이처럼 이 의장은 현직 대통령일 뿐 아니라 소속당의 총재인 양김에게 맞서 국회의장으로서 정치적 중립 소신을 지켜냈던 셈이다. 본회의장에서 날치기든 직권상정이든 단 한 차례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 총재의 권한은 요즘의 당 대표와는 비교될 정도로 막강했던 상황이었다.
국회의장의 중립의무에 맞서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과거에는 어땠을까?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 말에는 요즘 더불어민주당 모습과는 달랐다. 이듬해 예산안이 집권당에 의해 날치기 처리되자 국회의장이 중립의무를 훼손했다는 등 거세게 반발, 대치정국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2011년 11월 1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국회의장실에서 박희태 국회의장이 한나라당 황우여 원내대표와 민주당 김진표 원내대표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조선DB
제 1야당이었던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전신)은 한나라당 출신의 박희태 의장을 겨냥, ”국회의장으로서 공평무사하고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해야 함에도 야당 측과 협의없이 날치기 통과시켰다”며 의장직 사퇴 촉구와 함께 장외투쟁에 돌입했다.
그랬던 더불어민주당이 이번 국회의장 선거를 앞두고는 돌변해 버렸다. 총선에서 연거푸 압승한데 고무됐기 때문일까. “중립보다는 옳고 그름의 판단과 민심이 우선”이라는 등 민심까지 거론하며 자신들 발언을 정당화하려 애쓰고 있는 데서는 오만함과 왠지 모를 절박감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국회의장 중립화를 담은 국회법이 시행된지 20여년이 지났지만 의장을 하겠다고 출사표를 던진 순간부터 대놓고 소속당에 편향적인 국회운영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을. 역대 정부에서도 날치기 처리가 있었지만 정치적 부담이 컸기에 대국민 사과를 하는 등 정국 수습을 위해 애썼으나 더불어민주당의 기세로 봐서는 앞으로는 그런 모습조차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오죽했으면 당내에서조차 “국회법정신이 의장의 중립성이며 이것을 강조해주는 게 정치이지, ‘나는 민주당에서 나왔으니까 민주당 편만 들 거야’, 이건 정치가 아니다”라는 쓴소리가 나왔을까. 중립의무가 법 조문으로 명문화돼 있지않다는 점을 거론하는 쪽도 있으나, 당시 법안은 제안 취지를 통해 의장의 정치적 중립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궁색한 변명일뿐이다.
“의사봉을 칠 때 한 번은 여당을 보고, 한 번은 야당을 보며, 마지막 한 번은 국민을 바라보고 양심의 의사봉을 칠 것입니다” 이만섭 의장이 취임 인사에서 했던 말이다. 더불어민주당이 떠받들고 있는 DJ도 새천년민주당의 총재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이 의장의 중립화 소신을 결국 존중했고 그후 국회법도 통과됐던 것이다. 의장 경쟁에 뛰어든 인사들이라면 되새겨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