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월 23일 정영환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장이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공천관리위원 2차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DB
여의도가 한껏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4·10 총선의 1차 관문인 공천심사 국면으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현역 의원들은 수성(守成)을 위해, 원외에 있던 전직 의원들은 설욕을 위해, 그리고 정치 신인들은 창업(創業)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관가(官街)나 용산 대통령실도 출마자들로 들썩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런 출마자들도 있다. 총선 때만 되면 병이 도지듯 여의도를 기웃거리는 전직 중진의원들 말이다. 그들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걸 정말 모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주변에서 부추겼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권력욕에 대한 미련을 끝내 떨쳐내지 못해서일까...
전직 의원들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이란 옛말도 있다. 물러날 때를 알고 떠나야 뒷모습이 아름답고 오래 기억된다.
전직 대통령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보려는 유혹에 빠져들 수 있는 시기이지만, 여론은 비판적이다. 이들에게 특정 정파를 벗어난 국가원로 역할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혹을 떨쳐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퇴임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통해 “그냥 잊힌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문재인 전 대통령조차 갈수록 정치권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잊히는 삶을 바란다던 그가 어느새 정치에 개입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은 지난해부터 소셜미디어나 각종 행사 참석을 통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자신이 재임할 당시의 소득주도성장 통계가 조작됐다는 감사결과에 대해 거세게 반박하고 나선 데 이어 “파탄난 지금의 남북관계를 생각하면 안타깝고 착잡하기 짝이 없다” “'안보·경제는 보수정부가 낫다'는 건 조작된 신화"라는 등 현 정부를 직접 겨냥하기 시작했다.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롯해 야당 정치인들과의 접촉면을 넓히면서 “윤석열 정부의 폭주가 너무 심하다”, “야권은 단합해야 한다”는 등 어느새 야당의 정치 지도자로 성큼 다가선 듯한 형국이다.
2024년 1월 12일 임혁백 더불어민주당 공관위원장이 국회에서 열린 제1차 공직선거후보자공천관리위원회 1차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조선=DB
더불어민주당의 친문(문재인) 의원들은 물론이고 임종석 전 청와대비서실장 등 문재인 정부 당시 주요 인사들의 출마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다. 게다가 친명(이재명)세력에 반발해 탈당하려던 자파 의원을 주저앉힌 것으로 알려지면서, 친문 측이 차기 당권을 겨냥해 세 불리기에 나섰다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문 전 대통령의 행보가 이처럼 적극적인 데는 전직 대통령들의 불행했던 역사에서 비롯된 자기방어적 측면도 자리해 있을 법하다. 월성원전 조기폐쇄 사건, 탈북어민 강제북송 사건, 서해공무원 피살 사건 등이 문재인 정부를 겨냥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 문 전 대통령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정치권과 연결된 대외 행보에 나서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이 전 대통령은 지난해 여름 친이(이명박) 정치인들과 모임을 가짐으로써 정치권의 주목을 받았다.
집권당과 정부의 핵심 인사들 중 상당수가 친이계 측이기도 하다. 현 정부를 ‘2기 MB정부’라고 부를 정도로 윤석열 대통령 주변을 친이계 인사들이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다.
친이계 인사들의 출마 움직임도 대구·경북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잇따르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질 수 있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의 경우 친박(박근혜) 인사들과 선을 긋고 있기는 하다. “정치적으로 친박은 없다”며 이들의 총선출마를 자신과 연관시키지 말라고 잘라 말했을 정도다. 하지만 측근으로 꼽히는 유영하 변호사가 대구에 출마할 경우 앞서 대구시장 선거때처럼 어떤 식으로든 지원할 것 같다.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대구·경북에 잔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은 국민의힘 지도부와 만나는 등 대외활동도 늘려가고 있다. 윤 대통령이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박 전 대통령과 잇따라 회동하고 있는 것도 그의 영향력과 무관치 않다.
하지만 정치사를 되짚어보면 전직 대통령의 정치개입은 뜻대로 되지않았다.
“국내 정치문제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대선을 앞둔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과 중도통합민주당이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분열양상을 보이자 민주신당 측을 지지하며 통합을 촉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양당은 이합집산만 거듭하다가 대선에서 각각 후보를 내세웠고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에게 참패하게 됐다.
양당은 이듬해 총선을 앞두고 통합은 이뤄냈으나 개선 저지 의석에도 한참 모자랐을 정도로 참패만 거듭했다.
DJ와 달리 정계은퇴 입장을 밝히지 않았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DJ 집권 때부터 적극적으로 정치문제에 개입했다. 한때 신당창당설이 나돌기도 했을 정도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2008년 3월 19일 공천에서 탈락후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 김무성 의원의 부산 남구 용호동 선거사무실을 찾아 "한나라당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야한"며 김 의원을 격려하고 있다. 사진=조선DB
2008년 총선을 앞두고는 측근이 낙천된 직후 한나라당 공천에 대해 “아주 잘못됐다”는 식으로 날을 세웠다.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부산은 물론 서울의 판세까지 거론하면서 거듭 비판, 총선을 한달정도 남겨둔 정국에 파장을 일으키는 듯했다.
그러나 총선 결과는 한나라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대승으로 마무리됐다. YS로선 무색했을 법도 하다.
이처럼 전직 대통령들의 영향력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만큼 먹혀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행보를 지켜보는 여론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격(格)만 떨어뜨린 꼴이 돼버렸다. 자충수를 뒀다고도 할 수 있다...
정치판에 개입하기보다는 진영대결이 첨예화된 나라를 화합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애쓰는 국가원로. 그런 전직 대통령들이 절실한 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