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노래만으로도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감격스러운 8·15 78주년을 맞아 옛이야기를 다시 조명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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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강제적으로 조선의 통치권을 빼앗은 것은 1910년 8월 29일이었다. 그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은 36년이라는 길고도 긴 세월동안 한국을 식민통치했다. 하지만, 피지배 민족으로서의 어려운 가운데서도 민중 음악은 살아 쉼 쉬었다. 요리 집의 기생들, 길거리 악사들, 노를 젓는 뱃사공들에 의해서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1년 조선을 방문해서 기행문을 쓴 하이쿠인(俳人)이자 소설가인 ‘다카하마 교시(高浜虚子, 1874-1959)’의 <조선>(조경숙 옮김)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짚어본다.
“불로초로 술을 빚어 만년이 되어도/ 술잔이 가득 넘치게 채워 축배합니다/ 남산의 장수를...”
“눈을 떠보니 님의 편지가 와 있네/ 읽고 또 읽고 나서 가슴 위에 얹어보니/ 이내 마음 천근만근이네.”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장사하러 갔지/ 작은 병이 점점 무거워 지네/ 모두 기도 덕이지.”
조선에 흥미를 느낀 ‘다카하마 교시’는 경성의 거리를 거닐면서 모순된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는 길가 돌 위에 앉아서 곰방대를 피는 소크라테스 같은 노인이 무엇 때문에 타 국민에게 정복됐나 하는 연민이다. 둘째는 이 발전력이 위대한 국민을 탄미(嘆美)하는, 과연 일본인은 위대하다는 것이며, 그 장래성 많은 민족의 일원으로서 억누를 수 없는 자긍심을 느꼈다.>
‘다카하마 교시’가 서술한 바와 같이 발전력이 위대한 한국은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국가로 도약했다. 문화와 예술까지도.
야나기 가네코(柳兼子)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야나기 가네코의 생전의 모습)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을 사랑하는 한 부부가 있었다. 다름아닌 야나기 가네코와 야나기 무네요시였다. 일본 NHK출신 작가 '다고 기치로'의 소설 '조선을 노래하다'를 통해 그당시의 상황을 알아본다.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본다.
<때는 1920년 5월 4일. 음악회는 저녁 7시부터 종로의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개최되었다. 수용 인원이 1,300명 이었는데, 이를 훌쩍 뛰어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한 시간이나 늦게 시작되었다. 일본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조선 사람들이었다. 폐허의 동인들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남궁벽(南宮壁)은 공연의 총책임자처럼 무대 곁에서 음악회의 진행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동아일보를 대표하여 염상섭이 개회사를 했고, 무네요시(宗悅)가 염상섭의 통역으로 청중들에게 인사를 했다. 드디어 가네코(兼子)가 무대에 등장했다. 음악회의 서곡은 가극 ‘마뇽’ 중 ‘그대는 아는가, 저 남쪽 나라를’과 ‘불쌍한 아이가 먼데서 왔다’라는 아리아였다.
<오렌지 꽃이 피는 나라를 아시나요?/ 금빛 과실과 붉은빛 장미의 나라를/ 미풍이 조용히 불고/ 새가 경쾌하게 노래하는 나라를.>
가네코(兼子)는 청중들의 반응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꼈다. 그녀는 슈베르트의 가곡을 준비했다. 내성적이고 깊은 맛이 나는 독일 ‘리트(Lied)’의 세계가 펼쳐졌다. 조선 백자를 통해 가네코(兼子)는 그 아름다움에서 종종 슈베르트의 음악을 떠올렸다.
도자기를 만질 때마다 그 살갗에서 전해지는 따스함은 그 음악이 깊은 곳에 품고 있는 따스함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슈베르트의 가곡을 부르는 것은 ‘조선 사람들에게 노래를 바치겠다’는 그녀 마음의 핵심이었다. 음악임과 동시에 시(詩)의 세계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기도 차원으로 승화되어 있었다.
(도자기를 좋아하는 야나기 무네요시 가족들)
“오오,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늘의 아버지시여!
당신이 만드신 세계가 빛이 지상으로 내려와, 먼지가 미광에 채색될 때
구름에 반짝이는 저녁노을이, 나의 조용한 창에 떨어질 때.”
가네코(兼子)는 로멘티즘을 머금은 고요한 정복(淨福)을 엄숙하게 노래했다. 그녀는 남궁벽(南宮壁, 1895-1922)의 영시(英詩)에 나왔던 ‘Holy Garden’을 생각하고 있었다.
(남궁벽의 묘지)
“Holy Garden-that is what I call my another world.”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고독한 청년. 남궁벽은 슈베르트의 곡은 상실자의 음악이라고 했었다. 그러면서 그는 ‘슈베르트에서 빛을 느낀다’고 했다.
“폐허와 같은 현실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이 곡에서 삶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바란다. 절망에 빠지지 말고 희망의 빛을 붙들었으면....”
청중들은 모두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눈동자가 젖어 반짝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가네코(兼子)는 열기의 정체를 드디어 알 수 있었다. 놀라운 기쁨이었다. 가네코(兼子)는 청중들을 향해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드디어 박수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일단 박수소리가 들리자 파도처럼 삽시간에 객석으로 퍼져나가 커다란 감동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넘쳐흐르는 눈물은 닦을 생각도 않고 사람들은 가네코(兼子)에게 갈채를 보냈다. 남궁벽의 눈에서도 청중들과 같은 종류의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식민지 통치는 우매함의 소산이었다. 그 비인간성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노래는 그 부당함을 인식하지만, 그 너머로 영원의 빛을 희구한다. 사람들은 그 빛에 감명을 받았다.>
“조선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결코 고아가 아닙니다. 세계의 벗들은 당신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정치적 역학관계를 초월하여 예술의 우주에서 날개 짓 한다면 당신들은 틀림없이 세계 인의 동포입니다.”
음악회가 끝났다.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커튼콜을 받은 뒤 홀의 불이 꺼졌을 때는 이미 밤 10시였다. 밤이 깊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대기실로 몰려와 좀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월간조선 2009년 8월호에 썼던 필자의 글 중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