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1997년 12월 19일 오전 국회 본관 앞에서 국민회의 자민련 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대통령 당선 환영행사에 참석,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와 박태준 총재의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정치판에서 성공하려면 지지세력을 넓혀야 한다. 적(敵)을 늘려가거나, 지지세력까지 등을 돌리게 하는 건 망하는 첩경이다. 뻔한 얘기를 왜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럴까?
#1997년 대선 때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막판까지 계속됐던 JP의 보수연합 제안을 일축하기만 하다가 DJP(김대중+김종필 )연대에 뒤통수를 맞았다. ‘개혁·진보’ DJ·새정치국민회의가 ‘보수 원조’ JP·자민련 측과 손을 잡았다는 점에서 허(虛)를 찌른 한 수였던 셈이다.
양측간 이념적 간극도 그렇지만, 3당 합당에 합류했던 YS(김영삼)를 군사독재정권 세력과 손잡았다는 등 맹비난했던 DJ가 그런 정권의 2인자였던 JP와 과연 연대할 수 있겠느냐는 게 이 후보 측 판단이었다는 데 결과적으론 오산이었다.
DJ는 JP의 숙원인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고 심야에 JP 청구동 자택까지 찾아가는 등 갖은 공을 들여 연대를 성사시켰던 것이다. 이를 통해 대선 정국에서 자신에 대한 보수층의 불안감을 희석시켜 지지세력을 확산시킬 수 있었고 결국 당선됐다.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가 1997년 11월 3일 대전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DJP단일화를 "내각제 야합"이라며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반면 이 후보로선 ‘3김 정치 청산’을 기치로 개혁을 역설했던 만큼 JP와의 연대 명분을 찾기가 힘든 처지이기도 했다. 대쪽 같은 원칙주의자라는 이미지까지 갖고 있었다.
게다가 DJ 비자금 수사가 유보되자 필승결의대회를 통해 대통령 YS를 겨냥한 인형 화형식을 강행, 지지세력 이탈까지 초래했다. YS가 탈당해버리자 그의 지지세력은 탈당·출마한 이인제 후보 쪽으로 더욱 쏠렸던 것이다.
DJP 공동정부가 와해됐던 2002년 대선에서도 JP 측은 이회창 후보 측에 연대를 거듭 제의했다. 이 후보 역시 노무현 후보의 행정수도 충청 이전 공약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이 지역 맹주 JP와의 연대가 필요했을 법하다.
하지만 당내 반발이 거셌던데다 자신의 여론지지율도 막판까지 선두를 고수하고 있었던 상황 등으로 절박감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연대는 무산됐다.
이 후보에겐 더 큰 패착도 있었다. DJP연대 때처럼 개혁·진보 성향의 노무현 후보와 보수 성향의 정몽준 후보간 단일화 가능성을 낮게 봤던 점이다.
그렇다고 자신과 정 후보 간 연대문제를 검토했다는 얘기도 듣지 못했다. 캠프 내부적으로 정 후보 지지자들은 막판에 이 후보 쪽으로 쏠릴 것이란 자신감이 적잖았다. 하지만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는 성사됐고 이 후보는 또 졌다.
# 노 후보도 집권 후에는 정반대의 길로 치닫았다.
대선 때 후보단일화를 통해 지지세력을 넓혀갔으나 집권 후에는 여권을 분열시킴으로써 적을 늘려가는 행보를 취했다. 자신의 지지세력이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자 집권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해 버렸던 것. 적이 돼버린 새천년민주당 측은 한나라당 측과 합세, 대통령 탄핵소추안 의결을 주도했다.
탄핵 역풍 덕에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등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상승세를 타기도 했으나 국정현안들을 놓고 한나라당은 물론 민주당의 공세가 거셌고 측근·친인척 비리 등도 잇따라 불거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범여권은 차기 대선을 앞두고 분열을 거듭하다가 한나라당 측에 정권을 빼앗겼던 것.
2012년 12월 19일 저녁 6시 지상파 방송3사 출구조사발표에서 1.2%차이로 승리한 것으로 나타나자 방송을 시청하던 새누리당 선대위위원장과 당직자들이 박수치며 환호하고있다
앞줄에 김성주, 한광옥, 김용준, 정몽준, 황우여, 김종인 등이 보인다. 사진=조선일보DB
박근혜 새누리당(한나라당 후신) 후보는 2012년 대선 기간 외연 확대에 적극 나섰다.
대한민국대통합위원회를 신설, DJ정권 청와대비서실장이었던 한광옥을 수석부위원장에 임명하는 등 민주당 계열 인사영입에 공을 들이는 동시에 보수대연합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회창·이인제 전 후보가 합류했고 이재오 전 의원 등 친이(이명박)계도 적극 지원했고 정계은퇴했던 JP는 지지선언을 했던 것.
당시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통해 ‘경제민주화’를 공약화, 중도층 표심을 공략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권 후에는 노 전 대통령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경제민주화 공약을 사실상 폐기, 중도 지지층 이탈을 가속화시켰고 집권기반이었던 보수세력의 분열까지 초래했다.
친박(박근혜)계가 임기말 총선을 앞두고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비롯한 비박계 공천 학살을 강행하다 참패함으로써 텃밭인 영남에서조차 새누리당 지지기반이 흔들렸던 것. 이같은 상황은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 의결에도 탄력을 붙였고 비박계들은 집단 탈당, 바른정당을 창당함으로써 보수분열이 본격화됐다.
#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국민통합을 역설하며 지지층의 외연 확대에 적극 나섰다. 선거 캠프에 이를 위한 조직을 뒀고 민주당 계열 전·현직 의원 영입도 추진했다. 당선 후에도 대통령 직속으로 국민통합위원회를 설치한 후 민주당 대표를 지냈던 김한길을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집권당 내부에선 이준석 대표와 친윤(윤석열) 세력간의 권력 다툼이 가열되고 있으며, 급기야 대통령과 당 대표가 서로를 겨누는 지경까지 치닫았다. 초등학교 입학연령 하향 등 정책 추진과정에서도 난맥상을 드러내면서 윤 대통령에 대한 여론지지율은 하락세를 거듭하고 있다. 20∼30대 지지층의 이탈은 더욱 심각하다.
국민의힘에 비대위를 설치한다고 이같은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윤 대통령에겐 지지자들이 떠나는 ‘마이너스’ 정치를 반전시킬 수 있는 묘수가 시급하다. 전직 대통령들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