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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대의 ‘되짚기’】 윤석열 대통령 당선 일등공신은 당심? 바람? 구도?

서봉대  정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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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5일 오후 국민의힘 제20대 대통령 선거 후보에 지명된 윤석열 전 총장(왼쪽B두번째)이 서울 용산구 백범 김구기념관에서 열린 2차전당대회에서 축하꽃다발을 받은 뒤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대통령 선거판에 회자되는 격언들 중에는 ‘당심은 민심을, 조직은 바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게 있다.


2022년 대선에서도 통했을까?


국민의힘 경선결과는 그러지 못했다. 윤석열 후보가 여론조사에선 홍준표 후보에게 10%포인트 이상 뒤졌으나 당원투표에서 20%포인트 이상 앞섬으로써 이겼던 것이다. 국민의힘 최종 후보 경선방식은 일반국민 여론조사와 당원투표 결과를 절반씩 반영했다.


결국 민심이 당심을 이기지 못함으로써 격언을 비켜갔던 셈이다. 


경선과정에서 회자됐던 ‘역선택론’이 이같은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이 이재명 후보의 맞상대로 윤 후보보다 홍 후보가 낫다고 판단, 여론조사에서 홍 후보를 적극 지지했다는 역선택론 때문에 국민의힘 당심이 윤 후보 쪽으로 더욱 쏠렸을 것이다.


이재명 후보와 이낙연 후보가 치열하게 맞섰던 더불어민주당 경선의 경우 국민선거인단을 통해 치러지기 때문에 국민의힘처럼 당심과 민심을 분리해 후보 득표율을 산정하지는 않았다.


윤 후보는 이재명 후보와의 대선 본선에선 정권교체 바람이 거세게 일면서 민주당의 조직력을 눌렀다. 민주당은 2020년 총선과 2018년 지방선거에서 압승, 중앙과 지방 정치권을 장악함으로써 당의 조직력으로만 보면 대선에서 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의 거듭된 실정(失政)으로 정권교체 열기가 고조되고 이재명 후보를 겨냥한 대장동 특혜개발 의혹까지 불거지면서 민주당의 조직력은 한계에 부딪혔고 이 후보는 고배를 마셔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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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17일 서울 송파구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한나라당 서울합동연설회에서 이명박, 박근혜 후보가 경선승복 선서를 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이번 대선 본선은 조직이 바람을 이겨내기 어렵다는 정치권 격언을 재확인시켜 줬던 것이다.

앞서 2007년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대선후보 경선결과는 이번 국민의힘 경선과는 정반대였다. 민심이 당심을 눌렀던 것이다.


경선 초기만 해도 박근혜 후보가 당심에서의 확실한 우위를 토대로 이명박 후보보다 유리할 것이란 전망이 다수였다. 

박 후보는 위기에 빠져있던 당을 회생시켰던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당 대표로 취임한 뒤 부패정당이란 오명을 벗기 위해 여의도에 천막당사를 차려놓고 선거를 진두지휘, 노무현 대통령 탄핵역풍 속에서도 선전을 이끌어냈다. 앞서 한나라당은 2002년 대선 불법 선거자금 사건으로 ‘차떼기 당’이란 비난여론에 휩쓸리면서 존폐 위기까지 내몰렸던 것. 

게다가 박 후보는 당 대표직을 대선 출마 전까지 맡았던 만큼 당내 지지도는 견고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이 후보는 서울시장을 지내고 대선에 출마했던 만큼 당내 지지기반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대기업 CEO 출신의 이 후보는 그러나 경제대통령 이미지를 부각시켰던 게 당시 노무현 정부의 경제 실정(失政)과 맞물리면서 주효, 여론에서 박 후보를 앞섰다.

경선결과 여론에서 앞섰던 이 후보가 당심에서 우위를 보였던 박 후보와 접전 끝에 이겼다. 당시 경선의 득표율 합산방식은 다소 복잡했지만 대체적으로 당심과 민심이 50%씩 반영되는 것이었다.


2002년 대선 본선에서도 조직이 바람 앞에 무너졌다.

 

한나라당이 대선에 앞선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잇따라 압승했고 이를 기반으로 이회창 후보는 선거 초반 대세론을 구가했다.

반면 새천년민주당은 잇단 선거 패배로 당세가 약화된데다 노무현 후보까지 지방선거 참패 책임론에 휩쓸리면서 후보교체론에 시달려야 했고 ‘노풍(盧風)’도 잦아드는 듯했다.

노 후보는 그러나 젊은층을 비롯, 새정치를 열망하는 지지세력을 기반으로 노풍을 다시 확산시켜 나갔다. 게다가 이 후보 아들 병역의혹까지 재부각됐고 선거전 막판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까지 성사시키면서 승기를 굳혔던 것. 

 

투표 전날 정 후보의 단일화 파기로 비상이 걸리기도 했으나 오히려 지지층을 더욱 결집시킴으로써 이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결국 노풍이라는 새정치 열기 앞에 한나라당의 탄탄했던 조직력이 무너졌던 셈이다.

거침없을 것 같은 바람도 ‘구도’ 앞에선 무너졌다. 6월 민주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됐던 1987년 대선 때도 그랬다.


전두환 정권에 맞선 정권교체 열기가 뜨거웠음에도 김대중(DJ)과 김영삼(YS)의 후보단일화가 끝내 무산됨으로써 JP(김종필)를 포함한 4자 대결구도로 치러졌고 그 결과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당선됐던 것이다. 당시 노 후보의 득표율이 36%였던 데 반해 DJ와 YS의 득표율을 합산하면 50%를 초과했다.   


정권교체 열기도 야권 분열이란 4자 대결구도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거는 구도 싸움이라고도 한다. 안철수 후보가 후보단일화없이 완주했더라도, 정권교체가 이뤄졌을 것이라고 장담하할 수 있을까. 이번 대선에서 당락을 가른 득표율 차이는 0.7% 포인트에 불과했던 것이다.

입력 : 2022.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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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대의 되짚기

jisang3@daum.net 경북 청송 출신으로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 국민일보에 입사한 이후 2020년 뉴스 1 부국장을 마지막으로 30년 언론인생활을 마무리했다. 정치부장, 정치선임기자 등으로 여의도 정치권과 청와대, 총리실 등을 취재하고 후배 기사를 데스킹하는 데 20여년을 보냈다. 현재 민간연구원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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