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에 대한 추억은 사람마다 다르다. 전망대나 케이블카를 생각하는가하면, 조용한 산책길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래도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애국가 2절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서울 시내를 한 눈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해발 262미터 높이의 남산-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 중턱의 한 모퉁이 건물 지하에 서럽고 아픈 사연들이 서려 있었다.
암울했던 시대의 아픈 사연들을 파헤친 <5공 남산의 부장들>(블루엘리펀트)이라는 신간이 서점가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저자 김충식(68)은 동아일보에서 30년 일한 기자 출신이다. 지금은 가천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일단, 놀랍다. 생생하면서도 방대한 자료와 사진들 때문이다. 참고문헌이 120여권이고, 각주(脚註)가 320개에 달한다. 저자 김충식은 코로나 시대에도 관객들이 앞 다투어 영화관을 찾아 500만 관객(넷플리스와 유료방송분 제외)을 모은 <남산의 부장들>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5공 남산의 부장들>의 책장을 열자 필자의 눈을 멈추게 하는 문장이 있었다.
그럴 수 있었을까. 저자는 머리글에서 권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권력은 멀쩡한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영리한 지식인도, 힘센 장사도 한낱 부나방으로 만든다. 권력의 광기(狂氣)에 휘말려 인격과 생애의 자산을 날린다. 경제도 거품은 모르고, 주식도 상투는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일까. 그것이 인간 존재의 한계인 것인가? 이 책은 그러한 ‘설계 미스’같은 인간 존재, 그리고 권력과 ‘인간본질’에 대한 탐구이다.>
인간과 권좌와 권력의 생리를 잘 축약했다. 책은 중앙정보부에 대해서도 간단명료하게 정리했다. 미국의 CIA(중앙정보국)를 벤치마킹해서 만들었으나 미국 정보기관보다 훨씬 더 막강했단다.
<남산의 중정은 그야말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초법적인 ‘슈퍼파워’였다. 가령 미국으로 치면 연방수사국(FBI), 검찰, 경찰, 군(軍) 수사기관을 예외 없이 CIA아래 둔, 말도 안 되는 권력기관이었던 셈이다.>
권력 보위 기구 ‘남산’에서 본 전두환 통치 8년-드라마를 뛰어넘는 현장감, 돋보이는 팩트와 분석력이 눈길을 잡아맨다.
서울대 모의재판에서 전두환 무기징역, 신현확에게 사형 때린 윤석열
제20대 대통령 윤석열이 1년 6개월 만에 권력의 정상에 올랐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최근의 결과만 봐서는 안 된다. 저자는 이미 5공 초기에 민들레 홀씨처럼 싹이 텄다고 한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본다.
20대 대통령 윤석열은 1980년 서울의 봄, 서울 법대 재학생으로 책에 등장한다. 그는 마당극 모의(模擬)재판의 재판장으로서 “전두환 무기징역! 신현확 사형!”을 선고하고 쫓기는 신세가 되어 외가가 있는 강릉에 몇 달간 피신했다. 윤 대통령은 2021년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당시 잘못된 정보를 접하고 신현확을 쿠데타 수괴로 오인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검사가 되어서는 2012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원세훈 국정원이 저지른 여론조작(댓글)사건의 특별수사팀장이 된다. 그 일로 박근혜 정부의 탄압을 받아 대구·대전으로 좌천되어 일약 이름을 알렸고, 우여곡절 끝에 10년 후 지금의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그만큼 오늘의 한국 정치는 국정원(안기부)의 정치공작과 따로 떼어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은 ‘과거 흑역사’를 정치권력의 미래에 ‘백미러’로 삼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시사(示唆)를 던진다.
5共 5인의 행적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기승전결(起承轉結)
이 책은 5共의 기원이 된 1979년의 12·12 군사반란부터 해부했다. 전두환·노태우·황영시 는 ‘수사 권력’을 이용해서, 멀쩡한 정승화 계엄사령관(육참총장)이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와 공모(내란 방조)했다”라고 몰아세워, 군권(軍權)을 장악해 버렸다. 허화평·허삼수·이학봉 등 보안사 대령들이 그 반란의 기획 및 실행에 앞장섰다.
한마디로, 제5공화국의 국가안전 기획부장(전두환만은 정보부장 서리) 5명이 권력이라는 그 치명적인 유혹 앞에서 춤추고 몸부림친 다큐멘터리다. 그 주인공은 전두환·유학성·노신영·장세동·안무혁 5명이다. 이 책은 전두환 집권 8년의 5공 역사를 ‘남산의 부장들’을 중심으로 되짚어보는 그 후속편이요 제2탄이다. 책에서 서술한 5명의 특징이다.
· 전두환:김재규와 이희성 정보부장의 후임자(80년 4월 14일)가 되자 곧 김재규 처형(5월 24일)을 지휘하며, 5공 시대를 열었다. 그는 김대중 체포, 광주민주화운동 진압과 구정치인 숙청 등 거친 싹쓸이 작업을 주도하고, 대통령에 오르기 위해 떠났다. 역대 최단명(最短命) 부장이지만 중정의 과도기를 짧고 굵게 다스리고 5공의 ‘창업 오너’가 됐다(總).
· 유학성:12·12쿠데타 ‘간판 5인방’의 일원으로 정보부장에 취임(80년 7월)한다. 그는 실세 대·령 허화평 허삼수를 어르면서, 정보부를 이끌고 국가안전기획부로 간판을 바꿨다. 하지만 강력한 보안사 세상이었기에, 안기부는 그 밑에 눌려 지내야 했다. 82년 장영자 어음 사기 사건을 둘러싸고 전두환 친인척을 단죄하자는 두 허 씨들에 동조하다 밀려났다(起).
· 노신영:정보부와 안기부 역사상 최초의 문민(文民) 부장이었다. 외무부 장관 시절, 일본에서 100억 달러의 외자를 도입(한일 경협)하는 교섭을 성실히 뒷받침하여, 전두환의 신임을 얻었다. 안기부장 때, 사형수 김대중 석방과 도미(渡美), 재야 종교계 접촉, 야당의 거물 최형우 영입 공작(이간책) 등, 조용한 밀행으로 전두환을 감동케 했다. 안기부장에서 곧장 국무총리로 승진, 5공의 최강 ‘문민’으로 일시 후계자 반열까지 올랐다(承).
· 장세동:85년 2·12 총선에서 김영삼 김대중이 이끄는 신민당이 약진하자, 황혼으로 기우는 5공 정권의 마무리 투수로 등판했다. 그러나 ‘강펀치 심복’, 장세동도 달아오르는 야당·재야·대학가의 투쟁 열기를 이기지 못해 무리수를 연발했다. 부천서 성(性)고문, 정치 깡패를 고용한 신민당 창당 방해(용팔이사건), 수지김 간첩 조작, 박종철 군 고문치사 및 조작 은폐 사건이 그것이다. 결국, 87년 5월 권력 무대에서 퇴장당하고 만다(轉).
· 안무혁:노태우가 5공의 후계자, 집권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정해질 무렵에 등장한다. 전-노가 머리를 맞대고, 5-6공의 징검다리 안기부장으로 안무혁을 골랐다. 안무혁은 이춘구(민정당 사무총장)와 함께 노태우 대통령 시대를 연 공신이었다. 그러나 6공이 자리를 잡자, 실세가 된 노태우의 처 고종사촌인 박철언과 안기부에서 부딪치게 되자 스스로 떠났다 (結).
(작가이자 교수인 김충식 씨)
▲ <5공 남산의 부장들>은 어떤 책입니까?
“5공이야기는 박정희 시대 18년의 후속편이자, 6共 김영삼·김대중의 징검다리입니다. 5명의 안기부장의 시대이기도 하고요. 그들은 정당성이 결여된 반란정권을 지탱하기 위해 정보정치가 필요했고, 그 지휘부 임무를 수행했지요. 인원은 5명이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전두환 주연, 4명의 조연이지요. 그래서 ‘5공 남산의 부장들’을 기록하다 보니, ‘전두환 평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서평을 적어주신 분도 그런 지적을 했는데, 저자로서 수긍합니다.
▲ 전두환이 박정희의 후계자가 된 배경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무명의 장군 전두환이 박정희의 후계자가 된 배경에 대해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규동 장군의 사위였다는 점입니다. 이규동은 박정희의 육사 2기 동향 동기생이고, 만주에서 청춘기를 보냈다는 점에서 마음의 동지이지요. 그 이규동이 1960년경, 영등포 6관구에 박정희가 사령관으로 있을 때 사위 전두환 대위를 데리고 가서 소개합니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 소장은 전두환에게 ‘자네, 내 부관을 하게!’라고 했으나, ‘저는 부관 체질이 못 됩니다’라고 사양합니다. 이게 첫 인연입니다. 그로부터 1년여 후에 박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전두환 대위는 태릉으로 달려가서 육사 생도를 쿠데타 지지데모에 동원합니다. 그런 박정희-이규동-전두환의 첫 만남과 5·16 참여 인연은 전두환을 모시던 부하들의 기록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작 ‘전두환 회고록’에는 이 인연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회고록에는, 아무 연고도 없는 전두환이 박정희 소장의 혁명에 의분(義憤)을 느껴, 육사 생도를 동원한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실수인가, 의도인가? 궁금할 따름입니다. 아무튼, 전두환 인생의 3대 은인은 박정희·이규동·박종규입니다. 전두환 인생의 첫 분기점이 되는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으로 남산에 발 디딜 때, 신원보증인이 이규동·박종규였습니다. 그리고 박종규는 1973년 윤필용 사건에서 하나회장 전두환이 위기에 처하자 구명에 앞장섰습니다. 박정희가 18년 내내 전두환을 파격적으로 발탁 승진하고 요직에 보내 준 것은 익히 알려진 일입니다.
▲저자가 본 전두환 전 대통령은 어떤 사람인가요?
“이 나라 근현대사의 우여곡절이 한 몸에 투영된 인물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아버지가 일본군 순사를 해치고 만주로 피신하는 바람에 만주에서도 살고, 대구 산비탈의 지번도 없는 움막집에서 끼니를 굶으며 소년기를 지냈지요. 그리고 6·25 전쟁 중에는 228명 모집하는 육군 사관생도 모집에 226등으로 턱걸이 합격했어요. 박정희 장군의 동기생 이규동의 딸(이순자)과 결혼한 것이 생애의 분기점이었지요. 그는 손가락질 받을 일을 많이 했고, 저도 비판적 관점에서 서술했지만 그의 생애를 통째로 매도한 건 아닙니다.”
음료수 한 잔을 마신 후 계속되는 김충식 교수의 말이다.
▲<5공 남산의 부장들 1,2>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더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1980년 5월 전두환 정보부장 시절에 그가 허삼수에게 충고했던 말이 있다. 모질게 살지 마라는 한마디. 그의 나이 아직 40대였으나, 퍽 어른스러운 한마디였다.
“여보! 남에게 눈물 나게 하면, 훗날 제 눈에서 피눈물 나는 법이야!”
전두환의 여생은 비루하고 힘들었다. 운명할 때까지 ‘29만 원’으로 살아간다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고, 이글을 매듭 짓는 이 순간까지, 영면의 터도 못 잡고 구천을 떠돌고 있다. 말이 씨가 되었을까?>
“허삼수가 1980년 정보부 개편 시기에 요원 300명을 솎아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고요. 그러나 전두환은 그자들의 생계대책도 생각하자면서 100명만 자르라고 했어요. 그의 나이 49세였는데, 제법 어른스러운 말을 했지요. 그 말이 씨가 되어 전두환 자신을 지배했을까요? 남의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리게 한 그이기에, 지난 해겨울 이승을 떠났지만, 무덤이 어딘지 아무도 모릅니다. 나름 한 시절 떨치던 군인, 8년여 세월 나라를 통치했던 전직 대통령치고는 비록 그것이 업보(業報)라 하더라도 너무도 비참한 일입니다. 새삼 역사의 벌판에 숨을 곳이 없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전두환과 그를 보위하던 남산의 권력자들이 ‘언젠가는 역사라는 허허벌판에 시린 알몸으로 서게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어땠을까요?”
▲ 방대한 사진과 자료에 놀랐습니다. 집필 기간은 얼마나 걸렸나요? 어떤 심정으로 쓰셨나요?
“3년 동안 집필했습니다만, 실제로는 10년이 넘었다고 보아야 하지요. ‘마음의 권투 장갑’ 이랄까? 그러한 각오 없이는 안 되는 작업이기에. 제 일은 화조풍월(花鳥風月)을 노래하는 문학이 아니라, 역사의식과 명예훼손을 걸고 다투는 진검승부니까요.”
▲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은 몇 명이나 되나요?
“책 후면 인명록에 표기한 대로 공식적으로 74명이지만, 실제적으로는 300여 명이 넘을 것 같습니다.
▲ 이 책을 집필하신 특별한 동기는 무엇인지요?
“일종의 빚을 갚는 기분이랄까, 의무감 때문이었습니다. <남산의 부장들> 이후 30년이 됩니다만, 아직도 서점과 전자책 리스트에 살아 있어요. 독자, 특히 언론 후배들이 ‘왜 후속편을 쓰지 않는가? 누가 쓰라는 말인가.’라고 채근했습니다. 영화가 나온 이후, 더 심해졌고요. 3년 전에 대학 정년을 맞아서야 겨우 마음을 정했지요. 1990년 <남산의 부장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수많은 정치인, 장군들을 인터뷰하고 취재했었는데, 취재노트에서 박정희 시대 18년(1961~1979)의 정보부장 10명을 뽑아 썼고, 나머지에 대한 자료는, 먼지에 덮인 채 방치돼 있었습니다.”
▲ 뭐가 그렇게 신경 쓰인 건가요?
“새로 쓴 <5공 남산의 부장들>은 37만 자(字) 분량이었습니다. 한 자 한 자가 저로서는 우주선 발사체의 나사 볼트와 다름없습니다. 소설 같은 창작이 아니니, 추측이나 상상으로 적을 수 없고, 이름 석 자를 걸고 역사와 마주하는 겁니다. 한편으로 한세상 주물렀던 당사자(남산의 부장들)들의 명예도 고려해야 했습니다. 정보부장 안기부장을 칭찬만 할 수는 없으니까요. 또 후속 연구자들의 웃음거리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37만 개의 나사 하나만 빠지거나 볼트의 조임이 덜 되어도 공중폭발하고 만다는 심정으로 써왔습니다.”
▲ 기자생활 30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자 정신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저는 20원짜리 모나미 볼펜 하나를 들고서 동아일보사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는 판-검사나 증권사 간부 등, 전문가에게 전화 취재해서 전달하면 훌륭하고 충실한 정보가 되는 제너럴리스트의 전성시대였지요. 과점(寡占)미디어 시대여서, 기자는 공정 공공을 중시하고 역사의식으로 무장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다(多)미디어, 1인 미디어시대에는 다릅니다. 이제는 제네럴리스트로서 천하를 논하는 거대담론은 허망한 것이고, 의미도 없어요. 먼저 스페셜리스트여야 합니다. 금융·증권·부동산·환경·‘4차 산업혁명’·인공지능·무기체계 같은 각각의 전문성과 식견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취재해서 종합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멀리 가버렸어요. 예를 들어 와인이나 향수(香水)에 대한 기사를 쓴다면 종류 몇 개가 아니라 냄새의 감별까지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스페셜리스트라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 그에 걸맞은 전문성의 기자정신이 요구된다고 봅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필자의 지인 김선호(66)씨가 <5공 남산의 부장들>을 읽고서 한 말이다.
“역사적 사실을 대하(大河) 드라마처럼 쓰는 재주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밤새워 단숨에 읽었습니다. 작가의 힘은 또 어디에 연원이 있을까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담담하게, 그리고 유창하게 써 내려간 필치가 탄성을 지르게 했습니다. 행간에 숨어 있는 명언들은 책의 품격을 더욱 높였고요.”
저자 김충식은 누구인가?
1977년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30년을 재직했다. 주로 정치부에서 국회, 정당, 청와대, 외무부를 출입했다. 현장 기자로서 금단의 성역이었던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를 거쳐 현재 국가정보원)를 심층 해부해보려는 열망에 불타, 1990년 김중배 편집국장(후일 한겨레신문 사장·MBC 사장)에게 연재를 건의했다. 그렇게 시작된 ‘남산의 부장들’은 압력과 회유, 협박 속에서 장장 2년 2개월 동안 112회가 연재되어,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어 단행본 <남산의 부장들>로 출간돼 한일 양국에서 54만 부가 팔리는 대 반향을 몰고 왔다. 2012년 내용을 대폭 보완한 개정·증보판이 출간돼 수만 부가 팔렸다. 2021년 중국어판도 대만에서 출간되었다.
저자는 1993년 평기자로서, 30대에 최연소 논설위원으로 발탁되었다. 한국기자상을 두 번 수상(1984, 1993년)했다. 문화부장, 사회부장을 거쳐 2002년부터 3년간 도쿄특파원 겸 지사장으로 주재하며 아사히신문 등에 칼럼을 썼다. 2004년 도쿄대 대학원(법학정치학연구과)에서 ‘정치와 보도’ 과목을 1년간 강의했다.
저서로 <남산의 부장들>(1992), <슬픈 열도>(2006), <법에 사는 사람들>(공저, 1984), <목화꽃과 그 일본인>(2015), 번역서로 <화해와 내셔널리즘>(2007)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