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 18일 오후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이 서울 종로구 통의동 당선인 집무실에서 만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미 바이든 대통령은 2020년 11월 대선에 승리하고도 한동안 트럼프의 몽니에 시달렸다. 대선 결과에 승복 안한 트럼프가 업무인수인계를 놓고 어깃장을 부린 것이다. 트럼프의 백악관은 정부부처에 바이든 인수팀에 협조하지 말라고 했다. 심지어 연방기관에 트럼프 행정부의 내년 예산을 짜라고 요구했다. 바이든은 기가 차 “망신스럽다”며 트럼프를 공개비판 했다.
트럼프 몽니는 미국 선거제도를 알면 그래도 이해가 간다. 바이든의 공식적인 당선은 12월14일 선거인단 투표로 확정된다. 또 새 대통령이 취임하는 2021년 1월20일까지 72일 동안은 여전히 트럼프가 대통령이다. 그 때까지는 어쨌든 트럼프가 대선에 불복을 하든 제 멋대로 예산을 짜든 그의 자유다. 또 트럼프란 사람 자체가 ‘우아한 승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 아니냐. 그는 그래서 백악관 내부 반발에도 불구, ‘나 홀로 불복쇼’를 한동안 이어갔다.
재작년 미국에서 벌어진 트럼프 몽니와 비슷한 일이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임기를 50일도 남기지 않은 현직 대통령이 ‘독불장군’ 트럼프가 하던 몽니를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1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참석해 안보 공백을 이유로 윤석열 당선인의 대통령실 용산 이전 계획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 “새 정부 출범 전까지 국방부 합참 대통령 집무실과 비서실 등을 이전 한다는 계획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들어가는 496억원의 예비비 상정 요구도 “어렵다“고 거부했다.
문 대통령의 이날 NSC 주재는 뭔가 어색해 보였다. 우선 문 대통령은 웬만해선 NSC를 열거나 주재하지 않는 대통령이다. 정권 초기 북한의 잇단 미사일 도발에도 주로 안보실장에게 NSC 주재를 지시했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 때 수시로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직접 NSC를 주재하는 일본의 아베 총리와 비교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또 지난 2020년 6월 북한 김여정의 지시로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될 때도 NSC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런 문 대통령이 새로 취임하는 윤 당선인의 용산 대통령 집무실 문제를 가지고 NSC를 개최했으니 그 순수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 대통령은 갑자기 왜 이럴까. 사실 문 대통령은 지난 10일 오전 윤 당선인에게 전화를 걸어 정권 인수인계 협조를 약속했다. 곧바로 윤 당선인과 문 대통령간의 회동이 추진됐고 세부적인 조율에 들어갔다. 그런데 16일 하기로 했던 청와대 오찬 회동이 취소되면서문 대통령의 기류가 바뀌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공공기관 ‘알박기’ 인사와 김경수 전 경남지사 사면 등이 이유라고 하지만 이때부터 문 대통령이 윤 당선인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3월 18일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공식 출범한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서울 종로구 인수위 대회의실에서 첫 전체회의를 주재하기 앞서 마스크를 벗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대통령 집무실 용산이전과 관련해서도 문 대통령은 당초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윤 당선인이 지난 20일 “5월10일 취임과 동시에 용산 새 집무실에서 근무하고 같은 날 청와대는 국민들께 개방한다”고 하자 21일 오전까지는 협조의사를 밝혔다. 박수현 청와대 국민통합 수석은 라디오에 나와 “저희는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는 약속을 못 지켰지만 윤 당선인의 의지는 지켜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런 문 대통령이 지금은 윤 당선인측과 충돌도 불사하며 집무실 이전을 제동 걸고 있다. 지난 22일 열린 국무회의에 윤 당선인이 집무실 이전 비용으로 요구한 496억원의 예비비는 상정조차 안했다. 윤 당선인도 물러설 리가 없다. 윤 당선인은 “5월10일 0시부터 청와대를 반드시 개방하겠다”며 “늦더라도 용산으로 간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문 대통령은 민주당 강경파의 목소리에 급히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5월10일 용산 대통령 시대가 열리고 제왕적 대통령과 권부의 상징인 청와대가 국민들에게 개방이 되면 “6월1일 지방선거는 해보나 마나”라는 민주당 강경파의 주문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내면서 밀려오고 있는데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중국 명나라 격언에 “장강(양츠강)은 뒷물이 앞물을 밀어내며 흐르고, 새 인물은 옛 사람을 대신한다”(長江後浪推前浪, 一代新人煥舊人)란 말이 있다. 문 대통령은 이제 50일도 안 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할 대통령이다. 그동안 선거라면 ‘쌍심지’를 키고 ‘매표 행위’도 서슴지 않았던 문 대통령이지만 이제는 공동체의 이익이 무엇인지 생각을 하며 물러서야 할 때다. 문 대통령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지만 내심 좀스럽지 않았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