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 16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에 마련된 당선인 집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사진=국회 사진기자단
5년 전 박근혜 탄핵을 겪으면서 보수 세력은 한동안 오금을 펴지 못했다. 이번에 윤석열 당선인을 앞세운 대선 승리가 없었으면 ‘보수는 부패세력’이라는 등식에 한동안 더 시달렸을 것이다. 당시 비선실세 최순실의 부정부패 사건과 국정농단은 보수세력에 그만치 충격이 컸다. 그래서 한 때 보수정권에 ‘유랑 도적단’ 비유가 따라붙기도 했다.
이 ‘유랑 도적단’ 비유는 미국 경제학자 맨슈어 올슨(Mancur Olson·1932~1998)이 한 말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장덕진 교수가 신문 칼럼에 한국의 5년 단임 대통령제를 빗대 유명해졌다. “장기 집권하는 비민주적 정권은 ‘정주 도적단’이고 짧게 집권하고 떠나는 정권은 ‘유랑 도적단’”이라는 것이다. 장 교수는 어차피 성숙한 민주주의가 아닐 바에는 정주 도적단이 차라리 나은 면이 있다고 봤다. 정주 도적단은 내년에도 수탈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성장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5년만 지나면 떠날 유랑 도적단은 다르다. 나라의 미래는 아랑곳 않고 오로지 정권과 자기편 이익만 챙기면 그만이다. 정치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상당부분 밥그릇 싸움이라 그런 것이다.
그렇게 보수세력 때문에 거론되던 ‘유랑 도적단’이라는 말이 이제는 좌파 쪽에 옮겨 붙었다. 최근 문재인 정권의 임기 말 알박기 인사 논란 때문이다. 최근 문 정권 청와대는 정권 이양기라는 시점에 아랑곳 않고 산하공공기관과 정부산하기관에 친 정권 인사들을 낙하산으로 마구 내리 꽂고 있다. 임기 50일 밖에 남기지 않은 정권이 새 정부가 들어서기 직전에 공공기관에 자기 사람을 심어 놓고 떠나는 것이다. 윤석열을 반대한 사람들이 윤석열 정부와 최장 3년을 함께 하겠다는 것인데 정치도의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새 정부 출범을 훼방 놓겠다는 심산인 건지, 아니면 0.73%차 대선패배에 대해 한풀이를 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사실 새 정부로의 정권이양은 당초 순조로울 것으로 예상됐었다. 대선 이튿날인 지난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 당선인에게 전화를 걸어 회동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축하인사와 함께 “정권 인수를 지원 하겠다”는 뜻도 밝혔다고 한다. 그런데 회동 당일인 지난 16일 아침 청와대는 느닷없이 약속 취소를 통보했다. 공공기관 알박기 인사에 대한 윤 당선인측 반응을 문제 삼았다고 한다. 고질적인 ‘문재인 식언(食言)’ 습관이 재발한 것인가? 윤 당선인측 입장에서 임기말 알박기 인사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중단을 요청하는 것은 상식 아닌가? 물론 회동 불발에 알박기 인사 갈등만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문 대통령의 식언과 협량(狹量)을 재차 확인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실제 문재인 정부의 공공기관 알박기 인사는 임기말로 가면서 더욱 노골화됐다. 지난 1월 해외 주재 대사와 공공기관요직을 대거 교체하자 야당도 더 이상은 좌시할 수 없다는 듯 반발했다. “대선과 정부 교체가 임박한 시점에 정부 인사를 하는 것은 보은인사고 측근 챙기기”라며 강력 반발했다. 실제로 낙하산 인사가 계속되면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공공기관 350곳의 67%인 234곳의 기관장 임기가 1년 이상 남았다고 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다고 해도 새 대통령이 임명할 자리는 한국수력원자력, 한국가스공사 등 4곳에 불과하다고 한다.
3월 16일 오후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국방부 청사로 이전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전경. 사진= 조선일보DB
그런데 이같은 문재인 정부 임기 말 알박기 인사는 전형적인 내로남불에 해당한다. 과거 2017년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 문 대통령은 공공기관장 인사중단을 요구한 적이 있다. 당시 대통령 후보 시절 문 대통령은 황 대행의 인사 조치에 대해 “탄핵당한 정권이 졸속으로 추진한 ‘알박기 인사’ 국정농단 세력에 의해 불공정하게 진행된 ‘최순실 인사’에 대해 철저히 검증해 바로 잡겠다”고 천명했다. 실제로 문 정권은 대선 승리 후 한국전력과 한국토지주택공사, 코레일 등에 대한 채용비리와 탄핵국면에서 이뤄진 공공기관장 낙하산 인사 인선과정을 집중 점검해 소위 ‘황교안 인사’ 기관장들이 목을 쳐댔다. 이랬던 문 대통령이 지금은 버젓이 “5월9일까지는 내가 인사권자”라고 하고 있으니 그 뻔뻔함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사실 문재인 정권의 공공연한 논공행상과 공공기관 자리 나눠먹기는 정평이 나있다. 대통령 스스로 지키지도 못할 ‘공공기관 낙하산 인사 금지’를 약속 해놓고 뻔뻔스럽게 논공행상으로 전리품을 나눠먹고 있다. 문 정권 출범 2개월 만인 지난 2017년 7월 민주당은 부국장급 이상 당직자들에게 “공공기관이나 정부 산하기관으로 갈 의향이 있는 분 회신 바란다”며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지난 2020년 4·15 총선 후에는 비례대표 후순위로 밀려 국회 입성에 실패한 사람들에게 같은 내용을 보내며 3지망까지 적어내라고 했다. 조폭 집단이 아닌 대한민국의 청와대와 집권여당에서 벌어지는 낯 뜨거운 자리 나눠먹기 현주소가 이렇다. 승자독식 구조를 바꾸든지 아니면 정권이 바뀌면 낙하산들은 모두 사표를 내든지 무슨 수를 내야지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