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11월 17일 조선일보가 주최한 대선후보 합동토론회에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오른쪽부터)가 손을 맞잡고 선전을 다짐하고 있다. 사진=조선DB
직선제 도입 후 대선에선 어김없이 제3의 후보가 나왔다. 원내 3당 소속이기도 했고 돌풍을 일으키며 창당하거나 무소속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레이스 도중에 포기하기도 했고 끝까지 완주하더라도 패했다.
제 3후보 출마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대선 판세를 가를 가능성이 높다는 점 때문이다. 여당과 야당, 혹은 진보와 보수 진영 중에서 제 3후보가 출마해 완주했던 쪽은 견고한 대세론이 유지됐던 2007년 대선을 빼곤 모두 졌다. 3후보와 후보단일화를 성사시켰을 때도 상대 후보의 대세론이 강했을 땐 역부족이었다.
# 직선제로 치러졌던 첫 선거인 1987년 대선과 1992년 대선은 야권에서 제 3후보가 출마함으로써 집권당의 재집권으로 이어졌다.
1987년엔 팽팽한 3자 대결구도였다.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37%의 득표율로 28%의 김영삼 통일민주당 후보와 27%의 김대중 평화민주당 후보를 눌렀다. 양김(김대중, 김영삼)이 후보단일화를 성사시켜 양자 대결구도로 몰아갔다면 정권교체가 이뤄졌을 수 있다. 양자 대결구도가 아니라 3후보가 출마함으로써 지지층이 겹치는 후보와의 동반 낙선으로 이어졌던 것.
1992년에도 양김에 정주영 후보가 가세, 직전 대선 때처럼 야권분열 상황에서 치러졌다. 투표 결과 집권당의 김영삼 후보가 42%로 당선됐고 김대중 후보는 34%, 정주영 후보는 16%를 얻었다.
정 후보가 수도권과 충청권, 제주도에서 선전했던 점을 감안하면 김대중 후보의 낙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997년 대선은 정반대 양상으로 전개됐다. 내부 분열로 집권당 쪽에서 3후보가 출마, 정권교체로 이어졌던 것이다.
DJP(김대중+김종필)연대를 성사시킨 김대중 후보가 40%를 득표, 대권을 차지했고 집권당의 이회창 후보는 39%, 집권당을 탈당해 출마했던 이인제 후보는 19%에 그쳤다.
3후보인 이인제 후보가 여권의 지지표를 분산시켰다는 점에서 대권의 향배를 갈랐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 2 위의 득표율 차이가 역대 대선 최소치인 1.5%에 불과했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2002년 대선에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대세론이 워낙 견고해 아들 병역의혹에도 불구, 야권에서 제 3후보가 출마했다는 것만으로 판세를 뒤집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 판세를 뒤집은 건 대선 막판에 집권당 후보와 야권 3후보간의 후보단일화 성사였다.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가 선거일을 한 달 앞두고 3후보였던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와 단일화를 성사시킨 것을 계기로 판세를 뒤집기 시작, 결국 정권을 재창출했다.
노 후보는 49%를 얻어 47%에 그친 이 후보를 눌렀다. 양자간 표차는 2.3%에 그쳤다. 정 후보가 야권 지지층의 외연을 확장, 노 후보 당선에 기여했던 셈이다. 정 후보는 보수 측에서 배신자란 비난을 받기도 했다.
2017년 대선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사태에다 여권 분열까지 겹쳐 다자 대결구도로 치닫으면서 일찌감치 정권교체가 예상됐다. 문재인 후보가 41%로 당선됐으며 자유한국당 홍준표 24%, 국민의당 안철수 21%, 바른정당 유승민 7% 등이었다.
한나라당 이회창, 민주당 노무현후보와 정몽준 의원이 2002년 10월 6일 서울에서 열린 전국 신용협동조합인대회에 참석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가 각각 당선됐던 2007년과 2012년 대선은 또 다른 양상을 보였다. 3후보 출마에 따른 보수진영 분열이나 진보 측 후보단일화가 당락을 가르지 못했다. 선거전 초반 형성됐던 이·박 후보의 대세론을 흔들기엔 역부족이었던 셈이다.
2007년 대선에선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가 맞선 가운데 직전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 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 3 파전 양상을 보였다. 결국 보수 진영이 분열했던 선거전이었으나 이명박 후보는 49%를 얻어 당선됐으며 정동영 후보 26%, 이회창 후보 15%였다.
2012년 대선은 새누리당 박근혜, 민주통합당 문재인, 무소속 안철수 등 3자 구도로 치닫다가 투표일을 한 달 앞두고 안 후보가 문 후보를 지지하며 중도 사퇴함으로써 사실상 야권후보 단일화가 성사됐으나 정권교체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개표결과 박 후보가 52%로 당선을 확정지었으며 문 후보는 48%에 그쳤다.
2012년 11월 23일 오후 서울 영등포 민주통합당사 기자실에서 기자들이 TV로 안철수 후보의 사퇴 생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조선DB
#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도 3후보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역대 대선처럼 치러진다면 3후보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3후보로 누가 나설 지가 변수일 뿐이다.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선 친문(친 문재인)과 비문 간의 갈등이 3후보 출마의 지렛대가 될 수 있다.
여권 유력주자로 꼽히는 이재명 경기지사의 경우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선두권을 고수하고 있지만, 친문과의 갈등관계가 대선가도의 걸림돌이다. 최근 들어 경선시기를 놓고 양측갈등이 본격화되고 있다.
민주당에서 이낙연·정세균 전 총리 외에 친문 측 김두관·이광재 의원과 추미애 전 법무장관, 최문순 강원지사가 잇따라 출마를 선언하고 나섰다. 친문은 아니지만 박용진 의원과 양승조 충남지사도 출마선언을 한 뒤 이 지사 정책을 겨냥, 날을 세웠다. 당내에서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인사들이 9명이나 됐다.
이 같은 상황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9명의 후보가 경쟁했던 한나라당 경선을 떠올리게 한다. 집권당 주류였던 민주계의 지원을 받았던 이인제 후보는 경선에서 졌으나 탈당·창당과정을 거쳐 3후보로 출마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당시 대통령이던 김영삼 및 민주계와 갈등을 빚었던 상황과 맞물려 있다.
지금은 ‘이인제 방지법’에 따라 경선에서 진 후보가 탈당해 출마할 수는 없지만 경선에 앞서 갈등이 증폭될 경우 탈당을 통한 독자 출마를 강행할 수 있다.
야권 대선주자들로는 국민의힘에서 유승민 전 의원, 하태경 의원과 원희룡 제주지사가 있고 당 밖에선 윤석열 전 검찰총장, 최재형 감사원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홍준표 무소속 의원,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등이 거론되고 있다.
야권의 경우 친문처럼 당을 주도하는 계파가 부각되지 않는데다 지지층에서 정권교체 열기가 고조되고 있는 만큼, 후보난립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장담하기에는 아직 이른 상황이다.
당밖 인사들 모두가 입당 혹은 합당 등의 과정을 거쳐 국민의힘에서 경선으로 매듭짓게 될 경우 본선에서 야권 후보들이 난립할 가능성은 없다.
다만 국민의힘 경선에 앞서 출마자들간 갈등이 커질 경우 입당 보류나 탈당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경선에 참여하지 않은 당밖 인사와의 야권 후보단일화 경선이 무산될 때도 3후보 출마로 이어질 것이다.
이번 대선도 과거 양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필승전략은 분명해 졌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각자 진영 내부에서 3후보 출마를 저지시키는 동시에 상대 진영에서 3후보와의 후보단일화를 무산시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이를 관철시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