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3월 13일 신한국당 전국위원회에서 총재인 김영삼 대통령이 이회창 고문을 대표위원으로 지명한 직후 손을 잡아 단상으로 인도하고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려면 여의도를 거쳐야 했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 도입 이후 대권을 차지했던 당선자들은 모두 정치판에 발을 담궜던 인사들이다. 비정치인은 지지율 여론조사에서 선두로 부상했다고 해도 이내 출마를 포기해야 했다. 출마를 강행해도 당내 경선이나 본선에서 떨어졌다. 정글같이 먹고 먹히는 정치판에서의 생존법을 제대로 체득·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권과 야권에서 각각 유력 대선주자로 꼽히고 있는 이재명 경기지사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어떻게 될까? 두 사람 모두 정치권 밖의 아웃사이더인 것이다.
이 지사와 윤 전 총장이 당내 경선에서 선출되거나 본선에서 당선된다면 우리 정치사에 새로운 기록을 남기게 된다. 미국과 프랑스 대선에선 아웃사이더인 트럼프와 마크롱이 당선되기도 했다.
이들의 대선가도에는 복병(伏兵)이 있다. 대권을 잡기 위해선 이회창 전 한나라당 후보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1997년 5월 19일 신한국당 이회창 대표가 확대당직자회의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이 지사는 1997년 대선 당시 김영삼 대통령 측 인사들(민주계)과 갈등관계를 빚었던 이회창 후보를 떠올리게 한다.
9명의 후보(김덕룡 박찬종 이수성 이인제 이한동 이홍구 이회창 최병렬 최형우: 통칭 ‘9 龍’) 가 출마했던 집권당 경선에서 이 후보는 결선 투표까지 간 끝에 민주계가 지원했던 이인제 후보를 누르고 선출됐지만 대선기간 내내 후유증에 시달렸다.
이 후보는 정치권으로 들어오기 전 김 대통령에 의해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로 잇따라 발탁됐지만 “현 정권 비리에도 성역은 없다”는 입장을 밝히는 등 정권 실세였던 민주계와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다.
양측간 갈등은 대세론을 업었던 이 후보의 여론지지율이 아들 병역비리 의혹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급락하자 고조됐다. 이인제 후보가 탈당해 출마하게 됐고,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 반전이 어려워지자 민주계 측이 대대적으로 후보교체론을 제기하며 그를 흔들었다. 대선에선 졌으나 막판 추격으로 투표율 격차가 역대 최소(1.6%)였다는 점에서 이 후보로서는 두고두고 가슴 칠 일이었을 것이다.
이 지사의 처지도 더불어민주당 내 친문(친 문재인)측과의 갈등을 풀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흡사하다.
이런 가운데 이낙연·정세균 전 총리의 여론지지율이 부진하자 친문 측을 중심으로 당내 후보 경선일자를 늦추자는 얘기가 들리더니 김두관·이광재 등 친문 의원들이 잇따라 출마를 선언하고 나섰다. 친문은 아니지만 박용진 의원과 양승조 충남지사도 출마를 공식화했다. 출마설이 나도는 추미애 전 법무장관과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까지 포함하면 벌써 9룡이 됐고 더 늘어날 것이란 얘기도 들린다.
결국 후보경선에선 결선투표까지 할 가능성이 높아졌고 친문 후보들간 연대가 이뤄질 경우 접전으로 치닫을 것이다. 이 지사가 후보로 선출돼도 후유증은 커질 수밖에 없고 이를 어떻게 수습하느냐에 그의 정치적 운명이 갈릴 수 있다.
4월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윤석열 관련 책들이 비치돼 있다. 야권의 대권주자로 꼽히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 관련된 책이 잇달아 출간되고 있다.
# ‘공정’과 ‘정의’를 역설하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모습은 이회창 후보의 ‘대쪽’ 원칙주의자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 후보는 김영삼 정부 초기 감사원장으로 취임하자 “권력형 비리엔 성역이 없다”고 선언하며 청와대와 정부 부처까지 조사 대상에 포함시켰을 정도로 개혁에 적극 나섰다.
중앙선관위원장으로 활동했던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노 대통령이 당 총재 명의로 선거구에 서한을 보낸 것을 대통령의 선거개입으로 문제삼기도 했다.
1997년 집권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자 개혁적 보수주의자임을 집중 부각시켰고 같은 맥락에서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식 정치를 부패정치구조로 규정, 청산할 것을 호소했다. 이같은 후보 이미지와 맞물려 여론 지지율이 40%를 웃도는 등 대세론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이 야권에서 잇따라 제기되면서 이 후보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쳤다. 탄탄하게만 보였던 대세론이 의혹 한 방에 반토막날 정도로 깨져버렸던 것이다. 그에게 개혁적 이미지가 부각됐던 만큼이나 도덕성 의혹 제기에 따른 타격도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윤 전 총장도 이 후보처럼 살아있는 권력의 눈치를 보지않고 공정과 법치주의 소신을 역설하고 있으며, 그 덕에 여론 지지율에서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다.
그에게도 의혹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처가 등과 관련된 게 대부분이고, 자신과 직접 관련된 것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아직까지 이 후보에 비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대선정국이 본격화될 경우 경쟁후보를 겨냥한 각종 의혹 제기가 당내 경선과 본선 과정에서 계속될 것이고, 이에 어떻게 대처해나가느냐에 따라 대권 전쟁의 승패가 갈릴 수 있다.
이 지사와 윤 전 총장의 대권 레이스 향배가 어느 쪽으로 결말날지 궁금하다. 복병에 무너질까, 아니면 대권을 차지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