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남은 김일성이 만난 유일한 손자였다
⊙ 김일성, 첫 손자 김정남을 품에 안고 감격…김일성의 후처 김정숙이 만남 주선
⊙ 김정남은 김경희·장성택 손에 키워져
⊙ 김일성, 첫 손자 김정남을 품에 안고 감격…김일성의 후처 김정숙이 만남 주선
⊙ 김정남은 김경희·장성택 손에 키워져
- 1997년 북한 공작원에게 피살된 이한영씨(사진 뒷줄 맨오른쪽)가 1981년 8월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 김정일 오른쪽이 김 위원장의 장남 김정남. 뒷줄 왼쪽부터 김정남을 낳은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과 그 자녀인 이남옥, 이한영씨. 사진=조선일보
김정남의 갑작스런 죽음에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이 결국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이복형을 암살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김정은이 김정남에 대해 갖고 있었던 콤플렉스도 이번 암살사건에 한몫한 걸로 보인다. 김정남은 김정일이 북한 영화배우 성혜림과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이다. 순수 북한 여성이 낳은 ‘백두혈통’의 적장자(嫡長子)인 것이다. 당연히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반면 이복동생 김정은은 어머니가 재일교포 출신 무용수 고용희다. 김정일의 세 번째 부인이었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김정은은 생전에 만나지도 못한 ‘곁가지 손자’에 불과했다”면서 “김정남은 아버지 김정일로부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고 할 정도의 총애를 받았다”고 했다.
김정남은 1980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제네바 종합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박진 전 새누리당 의원에 따르면, 1994년 김일성은 평양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게 “손자 김정남과 낚시를 하는 것이 취미”라며 “내가 좋아하는 손자를 데리고 갈 수 있겠느냐”며 미국방문을 희망하기도 했다.
김정남은 1990년대 귀국해 북한 국가보위부 간부를 지냈고 후계 수업까지 받았다. 하지만 1980년대 해외 유학 시절 접한 서방세계의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정남은 개혁개방을 외치다 김정일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특히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려다 추방돼 후계자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기도 했다.
김정남은 이복동생 김정은에게 수차례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김정남은 2010년 연평도 포격사건이 나자 김정은에게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북남관계를 조정해 달라”고 말했다.
김정일, 성혜림 빼앗기 위해 미모의 여성을 남편에게 소개
김정은에겐 김정남이 눈엣가시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2012년 신병 치료차 싱가포르에 온 고모 김경희가 김정남에게 “신변을 조심하라”고 걱정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김정남의 출생 스토리를 보려면 그의 어머니 성혜림(1937~2002)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봐야 한다.
성혜림은 아버지 성유경과 1920년대 민족주의 잡지 《개벽》의 여기자였던 어머니 김원주 사이에서 1남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성혜림은 서울사대 부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풍문여중에 다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직전 부모를 따라 월북했다. 성혜림은 북한에서 평양예술학교를 졸업한 후 1960년에 만들어진 영화 〈온정령〉 〈백일홍〉 등에 출연했다.
성혜림은 소설 《땅》으로 알려진 월북작가 리기영의 큰아들인 김일성종합대학 연구사 리평과 결혼했다. 둘 사이에서 옥돌이라는 딸을 낳았다고 한다. 성혜림은 결혼 후에도 연극영화 대학을 졸업했다. 성혜림은 예술영화인 〈분계선마을〉을 시작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그런 성혜림은 김정일을 만나면서 인생이 롤러코스트를 탄 듯 급물살을 탔다. 성혜림은 김정일보다 연상이었다. 당시 성혜림은 32세, 김정일은 27세였다. 이 무렵 김정일은 계모 김성애와 권력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은 위험을 무릅쓰고 유부녀 성혜림을 관저로 불러들였다.
김정일은 리평에게 친위대 출신 미모의 여성을 소개해 강제 결혼시킨 후 폴란드로 보내고, 성혜림에게 남편 리평과 이혼하도록 했다. 성혜림은 1969년부터 김정일과 동거를 시작한다. 성혜림은 1971년 장남 김정남을 낳았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김정일은 아들의 존재를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했다. 아버지 김일성 주석에게까지 손자가 태어난 사실을 숨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성혜림과 부도덕한 관계가 폭로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게 여러 탈북자들의 이야기다.
후처(後妻) 김성애의 김일성 설득
당시 로열패밀리 사정을 잘 아는 탈북자 A씨에 따르면, 두 사람의 ‘불장난’은 아버지 김일성에게 알려졌고, 김일성은 격노했다. 김정일은 아버지의 집무실로 찾아가 성혜림과의 관계를 설명하며 이해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분을 참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아들 김정일을 향해 권총까지 꺼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정일은 아버지가 겨눈 총구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아버지 김일성이 동생 김경희를 임신한 생모 김정숙을 내팽개치고 김성애와 바람을 피우는 바람에 생모는 불쌍하게 죽어갔다며 대들었다고 한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김일성이 권총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김성애가 급하게 뛰어들어 “그만들 하시라”며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고 한다. 2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엄마 대접’을 해주지 않은 김정일을 김성애가 위기에서 구해 준 것이다.
유부녀와의 불륜이 후계자 이미지에 크게 손상이 갈 것을 우려한 김일성은 황장엽 김일성대학 총장을 직접 찾아가 간곡하게 지도를 부탁했다고 한다. 황장엽은 1965년 김일성대 총장에 이어 1972년부터 1983년까지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3차례나 거친 북한 정치권력층의 핵심 인물이다. 특히 철학박사인 그는 김일성 주체사상의 제1인자로 김정일의 후계자 이미지를 조작·관리해 왔고, 김정일의 가정교사 노릇을 톡톡히 했다.
탈북자 A씨는 “김일성이 황장엽을 만난 이후 김정일의 태도가 돌변했다”면서 “김정일이 아버지 앞에서 겸손하고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1971년 봄 김정일의 큰아들 김정남이 태어났다. 하지만 김일성은 여전히 성혜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의 소생인 김정남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둘 사이를 중재하고 나선 것은 김성애였다.
탈북자 A씨는 “김성애도 여성인 까닭에 모성애와 동정이 일부 발동한 것도 사실이지만, 김일성의 마음을 사고 남편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것”이라며 “그래야 후계자를 평일이로 밀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느날 김성애는 김정일의 친동생이자 장성택의 부인인 김경희를 불렀다고 한다. 김성애는 “오빠의 첫 아이인데 할아버지에게 보여드려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걱정 말고 데려오라”고 했다.
김일성, 김정남 품에 안고 감격스러워해
탈북자 A씨에 따르면, 김성애는 김경희를 앞세우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성혜림은 정상급의 배우였으나 출산으로 인해 초췌한 모습으로 차마 김성애의 눈을 마주보지 못했다고 한다. 김성애는 성혜림의 곁에 잠들어 있는 갓난아기 김정남을 안고 할아버지 김일성에게 갔다.
‘손주 사랑은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말처럼, 손주 김정남을 안은 김일성의 마음은 360도 돌변했다. 손주를 본 순간, 아들 김정일과 성혜림에 대한 미움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첫 손주를 품에 안고 감격에 겨워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손주는 따로 길러도 되니, 어서 유라(김정일)에게 제대로 된 배필을 찾아주자”고 했다고 한다.
김정남은 고모부인 장성택, 김경희 부부가 맡아 키우게 된다. 결국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와 장성택은 김정남을 맡아서 키우는 대신, 김정일과 성혜림이 갈라서는 데는 앞장섰다. 김정일보다 나이가 많고 한 번 결혼해서 아이도 있는 여자라는 이유에서였다. 서자(庶子) 김정남의 비운이 시작이었다.
김정남이 권력서열에서 멀어진 것은 생모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이 미국으로 망명했고, 그의 아들 리일남(이한영으로 개명) 역시 한국으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1996년 미국으로 망명한 성혜랑은 김정일 왕조정권을 폭로하는 《등나무집》이란 책을 펴냈다. 함께 탈북했던 성혜랑의 아들 이한영은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이란 책에서 김정일의 처조카로서 목격한 김씨왕조의 부패상을 폭로했고, 그 때문에 암살당했다.
성혜림은 김정일과의 동거와 결혼생활 6년 만인 1974년 모스크바로 쫓겨났다. 성혜림은 1996년 언니 성혜랑과 그의 딸 리남옥과 함께 신병치료차 머물렀던 모스크바를 떠나 스위스로 나온 후 잠적했다 다시 모스크바로 되돌아갔다. 성혜림은 2002년 5월 모스크바 한 병원에서 ‘오순희’라는 가명으로 치료받다 사망해 모스크바 근교 트로예쿠롭스코예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성혜림의 검은색 화강암 묘비 전면에는 한글로 ‘성혜림의 묘’, 뒷면에는 ‘묘주 김정남’이란 글씨가 적혀 있다고 한다. 2016년 6월 현지 언론은 “아직 채 시들지 않은 붉은색 꽃 네 송이가 무덤 앞 상석에 가지런히 놓여 있어 누군가 최근에 다녀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묘주인 김정남의 사후, 이 쓸쓸한 묘지를 찾는 이는 과연 누구일까.⊙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김정은은 생전에 만나지도 못한 ‘곁가지 손자’에 불과했다”면서 “김정남은 아버지 김정일로부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고 할 정도의 총애를 받았다”고 했다.
김정남은 1980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제네바 종합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박진 전 새누리당 의원에 따르면, 1994년 김일성은 평양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게 “손자 김정남과 낚시를 하는 것이 취미”라며 “내가 좋아하는 손자를 데리고 갈 수 있겠느냐”며 미국방문을 희망하기도 했다.
김정남은 1990년대 귀국해 북한 국가보위부 간부를 지냈고 후계 수업까지 받았다. 하지만 1980년대 해외 유학 시절 접한 서방세계의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정남은 개혁개방을 외치다 김정일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특히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려다 추방돼 후계자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기도 했다.
김정남은 이복동생 김정은에게 수차례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김정남은 2010년 연평도 포격사건이 나자 김정은에게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북남관계를 조정해 달라”고 말했다.
김정일, 성혜림 빼앗기 위해 미모의 여성을 남편에게 소개
김정은에겐 김정남이 눈엣가시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2012년 신병 치료차 싱가포르에 온 고모 김경희가 김정남에게 “신변을 조심하라”고 걱정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김정남의 출생 스토리를 보려면 그의 어머니 성혜림(1937~2002)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봐야 한다.
성혜림은 아버지 성유경과 1920년대 민족주의 잡지 《개벽》의 여기자였던 어머니 김원주 사이에서 1남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성혜림은 서울사대 부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풍문여중에 다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직전 부모를 따라 월북했다. 성혜림은 북한에서 평양예술학교를 졸업한 후 1960년에 만들어진 영화 〈온정령〉 〈백일홍〉 등에 출연했다.
성혜림은 소설 《땅》으로 알려진 월북작가 리기영의 큰아들인 김일성종합대학 연구사 리평과 결혼했다. 둘 사이에서 옥돌이라는 딸을 낳았다고 한다. 성혜림은 결혼 후에도 연극영화 대학을 졸업했다. 성혜림은 예술영화인 〈분계선마을〉을 시작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그런 성혜림은 김정일을 만나면서 인생이 롤러코스트를 탄 듯 급물살을 탔다. 성혜림은 김정일보다 연상이었다. 당시 성혜림은 32세, 김정일은 27세였다. 이 무렵 김정일은 계모 김성애와 권력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은 위험을 무릅쓰고 유부녀 성혜림을 관저로 불러들였다.
김정일은 리평에게 친위대 출신 미모의 여성을 소개해 강제 결혼시킨 후 폴란드로 보내고, 성혜림에게 남편 리평과 이혼하도록 했다. 성혜림은 1969년부터 김정일과 동거를 시작한다. 성혜림은 1971년 장남 김정남을 낳았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김정일은 아들의 존재를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했다. 아버지 김일성 주석에게까지 손자가 태어난 사실을 숨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성혜림과 부도덕한 관계가 폭로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게 여러 탈북자들의 이야기다.
후처(後妻) 김성애의 김일성 설득
당시 로열패밀리 사정을 잘 아는 탈북자 A씨에 따르면, 두 사람의 ‘불장난’은 아버지 김일성에게 알려졌고, 김일성은 격노했다. 김정일은 아버지의 집무실로 찾아가 성혜림과의 관계를 설명하며 이해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분을 참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아들 김정일을 향해 권총까지 꺼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정일은 아버지가 겨눈 총구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아버지 김일성이 동생 김경희를 임신한 생모 김정숙을 내팽개치고 김성애와 바람을 피우는 바람에 생모는 불쌍하게 죽어갔다며 대들었다고 한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김일성이 권총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김성애가 급하게 뛰어들어 “그만들 하시라”며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고 한다. 2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엄마 대접’을 해주지 않은 김정일을 김성애가 위기에서 구해 준 것이다.
유부녀와의 불륜이 후계자 이미지에 크게 손상이 갈 것을 우려한 김일성은 황장엽 김일성대학 총장을 직접 찾아가 간곡하게 지도를 부탁했다고 한다. 황장엽은 1965년 김일성대 총장에 이어 1972년부터 1983년까지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3차례나 거친 북한 정치권력층의 핵심 인물이다. 특히 철학박사인 그는 김일성 주체사상의 제1인자로 김정일의 후계자 이미지를 조작·관리해 왔고, 김정일의 가정교사 노릇을 톡톡히 했다.
탈북자 A씨는 “김일성이 황장엽을 만난 이후 김정일의 태도가 돌변했다”면서 “김정일이 아버지 앞에서 겸손하고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1971년 봄 김정일의 큰아들 김정남이 태어났다. 하지만 김일성은 여전히 성혜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의 소생인 김정남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둘 사이를 중재하고 나선 것은 김성애였다.
탈북자 A씨는 “김성애도 여성인 까닭에 모성애와 동정이 일부 발동한 것도 사실이지만, 김일성의 마음을 사고 남편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것”이라며 “그래야 후계자를 평일이로 밀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느날 김성애는 김정일의 친동생이자 장성택의 부인인 김경희를 불렀다고 한다. 김성애는 “오빠의 첫 아이인데 할아버지에게 보여드려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걱정 말고 데려오라”고 했다.
김일성, 김정남 품에 안고 감격스러워해
탈북자 A씨에 따르면, 김성애는 김경희를 앞세우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성혜림은 정상급의 배우였으나 출산으로 인해 초췌한 모습으로 차마 김성애의 눈을 마주보지 못했다고 한다. 김성애는 성혜림의 곁에 잠들어 있는 갓난아기 김정남을 안고 할아버지 김일성에게 갔다.
‘손주 사랑은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말처럼, 손주 김정남을 안은 김일성의 마음은 360도 돌변했다. 손주를 본 순간, 아들 김정일과 성혜림에 대한 미움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첫 손주를 품에 안고 감격에 겨워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손주는 따로 길러도 되니, 어서 유라(김정일)에게 제대로 된 배필을 찾아주자”고 했다고 한다.
김정남은 고모부인 장성택, 김경희 부부가 맡아 키우게 된다. 결국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와 장성택은 김정남을 맡아서 키우는 대신, 김정일과 성혜림이 갈라서는 데는 앞장섰다. 김정일보다 나이가 많고 한 번 결혼해서 아이도 있는 여자라는 이유에서였다. 서자(庶子) 김정남의 비운이 시작이었다.
김정남이 권력서열에서 멀어진 것은 생모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이 미국으로 망명했고, 그의 아들 리일남(이한영으로 개명) 역시 한국으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1996년 미국으로 망명한 성혜랑은 김정일 왕조정권을 폭로하는 《등나무집》이란 책을 펴냈다. 함께 탈북했던 성혜랑의 아들 이한영은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이란 책에서 김정일의 처조카로서 목격한 김씨왕조의 부패상을 폭로했고, 그 때문에 암살당했다.
성혜림은 김정일과의 동거와 결혼생활 6년 만인 1974년 모스크바로 쫓겨났다. 성혜림은 1996년 언니 성혜랑과 그의 딸 리남옥과 함께 신병치료차 머물렀던 모스크바를 떠나 스위스로 나온 후 잠적했다 다시 모스크바로 되돌아갔다. 성혜림은 2002년 5월 모스크바 한 병원에서 ‘오순희’라는 가명으로 치료받다 사망해 모스크바 근교 트로예쿠롭스코예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성혜림의 검은색 화강암 묘비 전면에는 한글로 ‘성혜림의 묘’, 뒷면에는 ‘묘주 김정남’이란 글씨가 적혀 있다고 한다. 2016년 6월 현지 언론은 “아직 채 시들지 않은 붉은색 꽃 네 송이가 무덤 앞 상석에 가지런히 놓여 있어 누군가 최근에 다녀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묘주인 김정남의 사후, 이 쓸쓸한 묘지를 찾는 이는 과연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