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 5세 이하 幼兒 사망률 10명 중 3명인 캄보디아
⊙ 훈센 집권 후 親北에서 親韓으로 외교노선 변경
⊙ 안경 썼다 죽이고, 책 읽을 줄 안다고 죽였던 狂氣의 시간, 킬링필드
⊙ 훈센 집권 후 親北에서 親韓으로 외교노선 변경
⊙ 안경 썼다 죽이고, 책 읽을 줄 안다고 죽였던 狂氣의 시간, 킬링필드
- 해골로 만든 캄보디아 지도. 단 4년간 이어진 크메르루주의 통치는 전(全) 국토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다.
7월 13일 밤, 프놈펜 거리는 무더웠다. 흘러내리는 땀을 주체할 수 없는 열대야(熱帶夜)였다. 바싹(Bassac)강 부근에는 바람을 쐬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간간이 외국인(外國人)과 현지 여성들의 ‘흥정’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는 몸을 팔려는 여자들이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호객’을 했다. ‘가격협상’을 끝낸 이들은 ‘툭툭(TukTuk·오토바이 뒤에 이륜 수레를 연결한 교통수단)’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숙소로 돌아가는 기자의 뒤를 스쿠터를 탄 여자 두 명이 조용히 따라왔다. “꼬레?”라 물으며 몸을 훑더니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짙은 화장이었지만, 한눈에 10대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앳된 얼굴이었다. 서툰 영어로 “30달러”라고 화대(花代)를 제안하는 그녀들을 무시하고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은 이내 다른 외국인에게 접근했다. 프놈펜의 밤은 ‘쾌락’을 찾는 사람들로 불야성(不夜城)이었다.
인구의 30%가 하루 1달러로 연명하는 세계 최빈국, 캄보디아
기자는 지난 7월 10일 세계태권도평화봉사단(WPT· 총재 이휴원)의 하계봉사단(캄보디아팀)과 동행(同行)·출국(出國)했다. WPT는 2008년에 설립된 단체로, 전 세계에 ‘태권도 정신’을 알리고 있다.
7월 11일 현지시각 오전 11시, “프놈펜 국제공항에 착륙한다”는 기내(機內)방송이 흘러나왔다. 얼마 후 창밖으로 눈을 돌렸을 때 보이는 풍광은 ‘상상하던’ 수도(首都)의 모습이 아니었다. ‘고층빌딩이 즐비한’ 도시(都市)의 모습은 오간 데 없이, 흙먼지가 풀풀 날릴 것 같은 황무지(荒蕪地), 탁한 ‘회색빛’ 강물이 보였다. 공항에 접근했을 때 비로소 시공(施工) 중인 빌딩 몇 개가 보일 뿐이었다.
도착 후 공항 출구를 나서는 순간 태양이 바로 머리 위에 있음을 실감했다. 냉방된 공항을 벗어나자 말로만 듣던 ‘동남아 날씨’가 살갗으로 파고들었다.
캄보디아 태권도의 대부(代父) 최용석(崔容碩·44) 사범이 나와 있었다. 그는 1996년에 캄보디아로 가 군과 경찰을 대상으로 태권도를 전파했다. 현재 그의 노력으로 태권도 인구는 2만명이 되었으며 각급 학교에서 태권도를 정규수업으로 운영하는 것도 증가 추세에 있다고 한다. 현재 최 사범은 캄보디아 태권도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더위를 피해 재빨리 최 사범의 차에 올라타 KOICA(한국국제협력단) 숙소로 향했다.
캄보디아는 세계 최빈국(最貧國) 중 하나다. 1인당 국내 총생산액(2008)은 약 620달러에 불과하다. 하루 1달러로 사는 사람들의 비율인 빈곤지수(Human Po-verty Index)가 30.1%이고, 내륙 산악지역은 50%가 넘는다. 빈부격차를 나타내는 지니계수(0.4 이상은 심각한 수준)가 0.417(2004, UN)이다. 기본적인 의료서비스도 받지 못해 만 5세 이하 유아(幼兒) 10명 중 3명이 죽는다. 즉 국민의 대다수가 빈곤층인 나라다.
‘가난의 풍경’은 숙소로 가는 길에서부터 포착됐다. 도로에 자동차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툭툭과 모토(오토바이 택시), 시클로(자전거로 끌고 가는 일종의 인력거)가 빽빽하게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여느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동남아의 혼잡한 모습 그대로였다. 불과 5~6세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구걸(求乞)을 하기 위해 달리는 차를 가로막았다. 사고가 날 법도 하지만, 운전자들은 욕 한마디 하지 않고,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녔다.
金日成이 보낸 北韓경호원 30명이 王室 경호를 맡기도
시내(市內) 독립기념탑을 지나치는데, 매우 ‘익숙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인공기(人共旗)가 펄럭거리는 북한(北韓)대사관 벽에 붙은 김일성(金日成) 사진이었다. 철조망이 둘러쳐진 틈 사이로 바라본 대사관 현관에는 한글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구호가 아직도 걸려 있다. ‘유훈통치의 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교 일선에도 김일성의 유훈은 맹위를 떨치는 모양이었다.
대사(大使)를 포함, 총 4명으로 운영되는 북한대사관은 협소했다. 굳게 닫힌 철문(鐵門), 사진촬영을 경계하는 경비원의 눈초리는 여느 외교공관과 달리 눈을 마주치기가 부담스러웠다. 기자는 여기저기 안 보는 척하며 대사관 주변을 서성거렸다.
캄보디아는 1964년 북한과 수교(修交)했다. 이후 친북(親北)의 길을 걸었다. 시아누크 전(前) 국왕과 김일성의 개인적 친분이 큰 작용을 했다. 시아누크는 1970 ~80년대에 망명 생활을 할 당시 평양에 기거(寄居)하면서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을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이후 1993년 시아누크가 국왕이 됐을 때도 왕가(王家)의 분위기가 반영돼 대체로 친북적 노선을 유지했다. 한때 김일성이 보낸 북한경호원 30명이 왕실 경호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훈센이 유일한 실권자가 되면서 분위기는 친한(親韓)으로 바뀌었다. 2009년 5월 23일 훈센은 총리관저에서 한국언론과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과의 외교관계를 복원시킨 것은 나의 최대 업적 중 하나”라고 했을 정도다.
또한 지난 5월에는 훈센이 ‘천안함 격침(擊沈)’ 결과발표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북한을 맹비난했다. 그는 “캄보디아 왕국은 불안정을 유발해 한반도에서 평화를 침해하는 이런 형태의 도발을 강하게 비난한다”고 밝혔다.
이런 배경에는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이 캄보디아의 개발붐을 이끌고 있는 중요 투자국으로 떠오른 탓도 없지 않다.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는 2001년 이래 한국의 대외원조국 중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는 캄보디아에 2억 달러의 유·무상 원조를 제공했다. 주(駐) 캄보디아 한국대사관의 엄원재 1등 서기관은 “캄보디아 경제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크다”며 한국ㆍ캄보디아 교류 동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의 대(對) 캄보디아 투자 누계(累計)액은 캄보디아 투자위원회(CDCㆍ위원장: 훈센 총리) 승인 기준으로 현재 약 30억 달러로서, 중국의 60억 달러에 이어 제2위 투자국입니다. 직항기(直航機)도 우리가 주 30편으로 제일 많고, 관광객도 연 30만명 수준으로 제일 많습니다. 봉제업 같은 경우 우리나라 업체 40여 개 정도가 진출해 있는데, 대사관에서 파악한 바로는 현지인 10만명 정도를 고용하고 있습니다.”
프놈펜의 스카이라인을 창조하는 한국기업
엄 서기관은 “캄보디아는 2000년 이후 연(年) 평균 8%의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지금은 캄보디아 경제가 어렵다”면서도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엄 서기관의 말이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경제가 어렵게 됐습니다. 회복을 하려면 어느 정도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캄보디아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이나 베트남의 경우 이미 인건비가 많이 상승해 매력이 떨어지는 반면, 아직 캄보디아는 인력이 넘쳐납니다. 또 태국,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지리적으로 상당한 이점(利點)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남아 시장진출의 교두보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국내 은행들도 이곳에 진출해 있습니다.”
엄 서기관의 말처럼 현재 많은 한국기업이 캄보디아에 진출해 있는 상황이다. 특히 부동산개발에서 우리 기업들의 활약이 눈에 띈다. 프놈펜의 스카이라인(Skyline)을 한국기업들이 만들어 내고 있었다. 캄보디아 최초의 증권거래소와 바타낙 은행 등이 입주할 예정인 바타낙 캐피탈 타워(지하 4층·지상 38층)는 포스코 건설이 짓고 있는데, 캄보디아 금융을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될 것이라고 한다.
한일건설은 지하 5층 지상 42층의 주상복합건물을 짓고 있으며, 벙칵(Beoung Kak) 호수 부근에 ‘캄코시티’라는 신도시를 개발 중이다. 캄코시티는 캄보디아 최대 규모의 부동산개발 프로젝트로서 연면적이 119만6457㎡(35만9975평)에 달한다.
장차관급만 220명, 서야 할 ‘줄’이 너무 많다
그러나 캄보디아에서 외국인이 사업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외국인이 캄보디아에서 사업을 추진할 경우, 초기에 어느 ‘줄’을 잡아야 할지 몰라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2009년, 국제투명성기구(IT)가 발표한 부패인식지수 순위에 따르면 캄보디아는 180개국 중 158위이다. ‘감투’가 너무 많아 누가 실권(實權)을 가졌는지 판별하기 어렵다는 점이 캄보디아 사업 진출의 주의점이란 얘기다. 최용석 사범은 “이곳은 뭘 하나 하기도 굉장히 어렵지만, 또 매우 쉽게 풀어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캄보디아는 공무원들이 ‘요직에 있다’ ‘누구 라인이다’면서 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각 구성원이 총리 1명, 부총리 9명, 각 부 장차관 208명에, 청장(차관급) 2명으로 220명입니다. 여기 장관 월급이 300달러, 대졸자 초임 월급이 50달러 수준입니다.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법’보다 ‘돈’이 우선입니다. 여기서 제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의 차를 보면 전부 렉서스입니다. RX470 같은 경우는 1회 주유에 100달러 정도 듭니다. 그런 돈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여기서 청렴결백한 것은 바보입니다.”
최 사범의 설명이 끝날 무렵, 경찰이 앞에 가던 차를 잡아 세웠다. 운전자는 경찰에게 다가가 지갑을 꺼내더니 귀찮다는 듯 1달러짜리 지폐를 경찰이 들고 있는 서류 사이에 끼웠다. 그러자 경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 할 일을 하러 갔다. 최 사범은 “교통경찰의 경우 수입이 좋은 길목을 차지하기 위해 수천 달러씩 바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프놈펜의 밤’이 찾아왔다. 현지인이 추천한 ‘플래티넘 클럽’으로 향했다. 길에는 쓰레기가 가득했고, 온갖 악취(惡臭)가 진동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쓰레기를 피해 가는데, 가족으로 보이는 3명이 쓰레기더미를 뒤지더니 거기서 나온 음식물을 입속에 넣었다. 하마터면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마냥 행복해 보였다.
1달러 없어 고생하지만 양주 1병은 800달러
프놈펜의 밤거리를 걷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도 자주 방해를 받는다. 행인의 다리를 잡고 “Give me some money!”라고 애걸(哀乞)하는 아이들이 걸린다. 툭툭이 기사들은 지친 몸을 뉘고 있다가도, 반사적으로 일어나 “Hey! You tuktuk?”을 외쳤다. 이들을 겨우 뿌리치면 여자들이 말을 걸어왔다. 성매매를 권하는 호객꾼도 계속 따라붙었다.
개중에는 “Child”라고 속삭이는 이도 있었다. 아동매춘(兒童賣春)을 말하는 듯했다. 언론에 보도된 유니세프 자료(2007)를 보면 프놈펜에서 매춘에 종사하는 미성년자는 약 5만~1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전체의 30% 선이라고 한다.
왓 프놈(사원) 근처에 있는 ‘플래티넘 클럽’에 도착했다. 클럽 앞 주차장에는 렉서스가 즐비하게 서 있었다. 입구로 다가가자 검은 양복의 사내 두 명이 제지를 했다. 옆을 보니 총기, 마약, 수류탄, 개 등은 반입금지였다. “빈번하지는 않지만, 총기사고가 가끔 일어난다”는 것이다. 몸수색을 하면서 “가방 안을 보자”고 했다. 카메라만 있는 걸 확인한 그들은 “클럽 안에서는 절대 촬영금지”라고 경고했다. 두 개의 문을 통과하자 바깥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국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남녀, 테이블 위의 양주병들이 보였다. 대부분 40~50대 남성과 젊은 여성이 동석(同席)해 있었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를 보니 양주의 가격대는 400~800달러였다. 순간 “돈을 달라”며 쫓아오던 아이들, 쓰레기더미를 뒤지던 가족이 스쳐 지나갔다. 클럽에서 마시는 술은 ‘천인혈(千人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여 분쯤 머물다 나오자 어김없이 아이들이 달려들었다. 1950~60년대, 미군에게 “초콜릿을 달라”고 하던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캄보디아는 한때 인도차이나 반도(半島)를 지배했고, ‘앙코르와트’라는 인류사의 위대한 유적(遺蹟)을 건설한, 앙코르 제국의 후신(後身)이다. 영광스러운 과거를 간직한 이들이 이런 ‘빈곤’의 나락으로 빠진 것은 ‘킬링필드’ 때문이다.
‘잊고 싶은 악몽’, 킬링필드
‘킬링필드(Killing Fields)’란 1975년부터 1979년 사이, 폴 포트(Pol Pot)가 이끄는 크메르루주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대학살(大虐殺)’을 가리킨다. 1984년 제작된 동명(同名)의 영화로도 유명(有名)해진 이 사건은 캄보디아인에게는 ‘잊고 싶은 악몽(惡夢)’이다.
1975년 4월 17일, 프놈펜에 입성한 폴 포트는 극단적인 몽상가(夢想家)였다. “프놈펜 시민은 예외 없이 모두 시외로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몽상가의 광기(狂氣)가 4년 동안 캄보디아 전역을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의에 기초한 ‘원시 공산제사회’를 꿈꿨던 폴 포트는 화폐, 무역, 도시, 가족을 없애고, 모든 사람을 ‘집단 농장’에서 일하게 했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대규모 숙청도 개시했다. ‘구악(舊惡)’에 물들어 ‘개조’가 불가능한 지식인, 관료 등이 주요대상이었다. 안경을 썼거나, 책을 똑바로 보기만 해도 ‘지식인’으로 분류돼 희생당했다. 이 시절 ‘혁명정부’의 무자비한 숙청과 기아, 질병으로 죽어간 캄보디아 국민이 ‘150만~300만명’으로 추정된다.
7월 17일 오후, 프놈펜 외곽의 ‘초응 억(Choeung Uk)’에 갔다. ‘대학살’ 당시의 희생자 유해가 발굴된 웅덩이와 위령탑이 있는 곳이다. ‘죽음의 땅’에는 꽤 많은 서양인이 와 있었다. 이들과 함께 동영상을 관람했다.
설명에 따르면 ‘초응 억’에서 약 2만명이 희생당했다고 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혁명군’은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을 총으로 쏘고, 칼로 베고, 곤봉으로 때려죽였다. 나중에는 가시가 달린 나뭇가지로 목을 절단했다. 아이를 나무에 던져 머리를 부숴 버리고, 공중으로 띄우고서 ‘클레이 사격’을 하듯 죽이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동영상으로 보고 나니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관람객들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아일랜드에서 왔다는 클레어(여·23)씨는 “여기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면서 계속 눈물을 훔쳤다. “지금 내가 본 것을 믿을 수 없다”며 말을 이었다.
“영상만으로도 충격이 매우 큽니다. 유골이 있는 위령탑을 보러 왔는데,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이념 때문에 사람이 이렇게 잔인해질 수 있는 겁니까?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위령탑으로 가자 해골이 눈에 들어왔다. 탑에는 8985명의 해골과 옷가지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영국에서 온 바트 부부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그들은 “희생자의 명복을 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희는 신혼여행을 왔는데 킬링필드가 있다고 해서 호기심에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캄보디아가 이 정도로 아픈 역사를 가진 줄 몰랐습니다. 희생자 유골을 대하니 사진을 찍는 것이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카메라를 집어넣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 기도로 희생자들이 조금이나마 안식을 얻었으면 합니다. ”
수감자 1만8000명 중 6명만 살아남은 뚜얼슬랭
다음 날에는 뚜얼슬랭(Toul Sleng) 학살박물관을 찾았다. 현지 교민 조송간씨는 “초응 억은 숙연함을 주지만, 뚜얼슬랭은 공포스럽다”면서 “꼭 한 번 가보라”고 권했다. 뚜얼슬랭은 원래 여자고등학교 건물이었지만, 크메르루주는 ‘S-21’이라는 비밀감옥으로 이용했다. 수감자들의 직업은 노동자, 농민, 엔지니어, 지식인, 교수, 선생, 학생, 장관, 외교관 등이었다. 이곳에서 1만8000명이 고문과 처형으로 ‘불귀(不歸)의 객(客)’이 됐다. 수감자 중, 단 6명만이 살아남았다. 학생들이 ‘미래’를 준비하던 학교가 피비린내나는 ‘생지옥’이 된 것이다.
박물관에는 철제침대, 쇠고랑 등이 30여 년 전 그대로 전시되고 있었다. 낮인데도 음울(陰鬱)한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옆 건물로 이동하자 희생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삶에 대한 희망을 놔 버린 초점 없는 눈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했다. 이들은 ‘혁명의 적(敵)’이었다.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한 채 ‘CIA나 KGB의 첩자’라는 허위자백을 하고 처형당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몰리(여ㆍ26)씨는 “캄보디아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때, 국제사회는 뭘 하고 있었는지 이해가 안된다”면서 “지금이라도 ‘미친 자’들을 제대로 심판해야 한다”고 성토(聲討)했다.
현재 학살책임자는 대부분 생존해 있다. 폴 포트는 지난 1998년 가택연금 상태에서 심장발작으로 사망했지만, 민주 캄푸치아 시절 대통령이던 키우 삼판, 외무장관 이엥 사리와 그의 부인인 사회부장관 이엥 티리트, 크메르루주 상임위원장 누온 체아 등이 생존해 있다.
2003년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가 ‘학살행위’에 대한 단죄를 하기로 합의했지만, 5000만 달러에 달하는 비용문제로 계속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2009년 2월에 양자(兩者)가 정한 재판관 15명으로 구성된 재판부가 ‘S-21’의 교도소장을 지낸 ‘카잉 구엑 에아브’를 기소했다. 캄보디아 전범 재판소는 지난 7월 26일 에아브에 대해 30년 형을 선고했다. 이제 막 청산의 첫 걸음을 뗀 것이다.
大虐殺의 상처, 아직까지 치유되지 않아
킬링필드의 후유증은 과거와의 문화적 단절, 사회적 자본 파괴 등이다. 민간 저축률도 저조해 자체 재원(財源)조달이 불가능하다. 캄보디아는 예전의 우리가 그랬듯 ‘원조경제체제’가 형성돼, 외부지원에 크게 의존하는 상황이다. 이 중 가장 큰 문제는 지식 재생산 사이클이 무너진 것이다. 지식인들이 제거됐기 때문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매우 열악한 상황이다. 2008년 중학교 취학률이 34%, 고등학교는 10% 미만이다. 대학교육은 ‘돈이 있는’, 소수의 사람만 갈 수 있다. 경제발전, 사회계몽을 하려고 해도 인적자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주(駐) 캄보디아 KOICA 사무소를 방문했다. KOICA는 2003년부터 캄보디아에서 도로를 닦고, 현대식 병원과 학교를 짓는 등 인프라 지원을 하고 있다. 또한 농촌지역에서 ‘새마을운동’을 보급해 농촌 주거환경개선과 소득향상을 위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김병관 소장은 “캄보디아는 한(恨)이 많은 곳”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킬링필드의 상처가 아직까지 캄보디아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이곳의 영화를 보면 대부분 공포영화입니다. 내용도 밤잠을 설칠 정도로 무섭습니다. 이것은 여기 공포심리가 외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캄보디아인들은 누가 나를 고발하고,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자신의 ‘생존’만이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공공심(公共心)이 부족하고, 단합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공무원들도 ‘내 것’을 챙기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김 소장은 “캄보디아가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한국의 경험’을 전수해 줘야 한다”며 ‘우리의 역할’을 강조했다.
“우리는 6·25전쟁의 참화를 이겨내고 세계사에 유례없는 정치ㆍ경제적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작년 11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산하 DAC(개발 원조 위원회)에 24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는데, 수원국에서 원조 공여(供與)국으로 지위가 바뀐 것은 우리가 처음입니다. 개발도상국의 비효율적 경제구조와 부패로 원조가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전 세계에 ‘성공사례’를 보인 것입니다. 한국이 비약적 발전을 거두었듯이 캄보디아가 내전의 상처를 씻고 발전하는 데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기자의 뒤를 스쿠터를 탄 여자 두 명이 조용히 따라왔다. “꼬레?”라 물으며 몸을 훑더니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짙은 화장이었지만, 한눈에 10대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앳된 얼굴이었다. 서툰 영어로 “30달러”라고 화대(花代)를 제안하는 그녀들을 무시하고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은 이내 다른 외국인에게 접근했다. 프놈펜의 밤은 ‘쾌락’을 찾는 사람들로 불야성(不夜城)이었다.
인구의 30%가 하루 1달러로 연명하는 세계 최빈국, 캄보디아
기자는 지난 7월 10일 세계태권도평화봉사단(WPT· 총재 이휴원)의 하계봉사단(캄보디아팀)과 동행(同行)·출국(出國)했다. WPT는 2008년에 설립된 단체로, 전 세계에 ‘태권도 정신’을 알리고 있다.
7월 11일 현지시각 오전 11시, “프놈펜 국제공항에 착륙한다”는 기내(機內)방송이 흘러나왔다. 얼마 후 창밖으로 눈을 돌렸을 때 보이는 풍광은 ‘상상하던’ 수도(首都)의 모습이 아니었다. ‘고층빌딩이 즐비한’ 도시(都市)의 모습은 오간 데 없이, 흙먼지가 풀풀 날릴 것 같은 황무지(荒蕪地), 탁한 ‘회색빛’ 강물이 보였다. 공항에 접근했을 때 비로소 시공(施工) 중인 빌딩 몇 개가 보일 뿐이었다.
도착 후 공항 출구를 나서는 순간 태양이 바로 머리 위에 있음을 실감했다. 냉방된 공항을 벗어나자 말로만 듣던 ‘동남아 날씨’가 살갗으로 파고들었다.
캄보디아 태권도의 대부(代父) 최용석(崔容碩·44) 사범이 나와 있었다. 그는 1996년에 캄보디아로 가 군과 경찰을 대상으로 태권도를 전파했다. 현재 그의 노력으로 태권도 인구는 2만명이 되었으며 각급 학교에서 태권도를 정규수업으로 운영하는 것도 증가 추세에 있다고 한다. 현재 최 사범은 캄보디아 태권도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더위를 피해 재빨리 최 사범의 차에 올라타 KOICA(한국국제협력단) 숙소로 향했다.
캄보디아는 세계 최빈국(最貧國) 중 하나다. 1인당 국내 총생산액(2008)은 약 620달러에 불과하다. 하루 1달러로 사는 사람들의 비율인 빈곤지수(Human Po-verty Index)가 30.1%이고, 내륙 산악지역은 50%가 넘는다. 빈부격차를 나타내는 지니계수(0.4 이상은 심각한 수준)가 0.417(2004, UN)이다. 기본적인 의료서비스도 받지 못해 만 5세 이하 유아(幼兒) 10명 중 3명이 죽는다. 즉 국민의 대다수가 빈곤층인 나라다.
‘가난의 풍경’은 숙소로 가는 길에서부터 포착됐다. 도로에 자동차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툭툭과 모토(오토바이 택시), 시클로(자전거로 끌고 가는 일종의 인력거)가 빽빽하게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여느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동남아의 혼잡한 모습 그대로였다. 불과 5~6세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구걸(求乞)을 하기 위해 달리는 차를 가로막았다. 사고가 날 법도 하지만, 운전자들은 욕 한마디 하지 않고,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녔다.
金日成이 보낸 北韓경호원 30명이 王室 경호를 맡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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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탑 옆 북한대사관. 현재 북한은 캄보디아에서 왕실 경호자문과 레슬링대표팀 지도 등을 맡고 있다. |
대사(大使)를 포함, 총 4명으로 운영되는 북한대사관은 협소했다. 굳게 닫힌 철문(鐵門), 사진촬영을 경계하는 경비원의 눈초리는 여느 외교공관과 달리 눈을 마주치기가 부담스러웠다. 기자는 여기저기 안 보는 척하며 대사관 주변을 서성거렸다.
캄보디아는 1964년 북한과 수교(修交)했다. 이후 친북(親北)의 길을 걸었다. 시아누크 전(前) 국왕과 김일성의 개인적 친분이 큰 작용을 했다. 시아누크는 1970 ~80년대에 망명 생활을 할 당시 평양에 기거(寄居)하면서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을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이후 1993년 시아누크가 국왕이 됐을 때도 왕가(王家)의 분위기가 반영돼 대체로 친북적 노선을 유지했다. 한때 김일성이 보낸 북한경호원 30명이 왕실 경호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훈센이 유일한 실권자가 되면서 분위기는 친한(親韓)으로 바뀌었다. 2009년 5월 23일 훈센은 총리관저에서 한국언론과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과의 외교관계를 복원시킨 것은 나의 최대 업적 중 하나”라고 했을 정도다.
또한 지난 5월에는 훈센이 ‘천안함 격침(擊沈)’ 결과발표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북한을 맹비난했다. 그는 “캄보디아 왕국은 불안정을 유발해 한반도에서 평화를 침해하는 이런 형태의 도발을 강하게 비난한다”고 밝혔다.
이런 배경에는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이 캄보디아의 개발붐을 이끌고 있는 중요 투자국으로 떠오른 탓도 없지 않다.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는 2001년 이래 한국의 대외원조국 중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는 캄보디아에 2억 달러의 유·무상 원조를 제공했다. 주(駐) 캄보디아 한국대사관의 엄원재 1등 서기관은 “캄보디아 경제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크다”며 한국ㆍ캄보디아 교류 동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의 대(對) 캄보디아 투자 누계(累計)액은 캄보디아 투자위원회(CDCㆍ위원장: 훈센 총리) 승인 기준으로 현재 약 30억 달러로서, 중국의 60억 달러에 이어 제2위 투자국입니다. 직항기(直航機)도 우리가 주 30편으로 제일 많고, 관광객도 연 30만명 수준으로 제일 많습니다. 봉제업 같은 경우 우리나라 업체 40여 개 정도가 진출해 있는데, 대사관에서 파악한 바로는 현지인 10만명 정도를 고용하고 있습니다.”
프놈펜의 스카이라인을 창조하는 한국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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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캄보디아를 국빈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훈센 총리와 만나 포옹하고 있다. 훈센 총리는 이 대통령의 영접을 진두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경제가 어렵게 됐습니다. 회복을 하려면 어느 정도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캄보디아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이나 베트남의 경우 이미 인건비가 많이 상승해 매력이 떨어지는 반면, 아직 캄보디아는 인력이 넘쳐납니다. 또 태국,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지리적으로 상당한 이점(利點)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남아 시장진출의 교두보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국내 은행들도 이곳에 진출해 있습니다.”
엄 서기관의 말처럼 현재 많은 한국기업이 캄보디아에 진출해 있는 상황이다. 특히 부동산개발에서 우리 기업들의 활약이 눈에 띈다. 프놈펜의 스카이라인(Skyline)을 한국기업들이 만들어 내고 있었다. 캄보디아 최초의 증권거래소와 바타낙 은행 등이 입주할 예정인 바타낙 캐피탈 타워(지하 4층·지상 38층)는 포스코 건설이 짓고 있는데, 캄보디아 금융을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될 것이라고 한다.
한일건설은 지하 5층 지상 42층의 주상복합건물을 짓고 있으며, 벙칵(Beoung Kak) 호수 부근에 ‘캄코시티’라는 신도시를 개발 중이다. 캄코시티는 캄보디아 최대 규모의 부동산개발 프로젝트로서 연면적이 119만6457㎡(35만9975평)에 달한다.
그러나 캄보디아에서 외국인이 사업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외국인이 캄보디아에서 사업을 추진할 경우, 초기에 어느 ‘줄’을 잡아야 할지 몰라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2009년, 국제투명성기구(IT)가 발표한 부패인식지수 순위에 따르면 캄보디아는 180개국 중 158위이다. ‘감투’가 너무 많아 누가 실권(實權)을 가졌는지 판별하기 어렵다는 점이 캄보디아 사업 진출의 주의점이란 얘기다. 최용석 사범은 “이곳은 뭘 하나 하기도 굉장히 어렵지만, 또 매우 쉽게 풀어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캄보디아는 공무원들이 ‘요직에 있다’ ‘누구 라인이다’면서 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각 구성원이 총리 1명, 부총리 9명, 각 부 장차관 208명에, 청장(차관급) 2명으로 220명입니다. 여기 장관 월급이 300달러, 대졸자 초임 월급이 50달러 수준입니다.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법’보다 ‘돈’이 우선입니다. 여기서 제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의 차를 보면 전부 렉서스입니다. RX470 같은 경우는 1회 주유에 100달러 정도 듭니다. 그런 돈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여기서 청렴결백한 것은 바보입니다.”
최 사범의 설명이 끝날 무렵, 경찰이 앞에 가던 차를 잡아 세웠다. 운전자는 경찰에게 다가가 지갑을 꺼내더니 귀찮다는 듯 1달러짜리 지폐를 경찰이 들고 있는 서류 사이에 끼웠다. 그러자 경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 할 일을 하러 갔다. 최 사범은 “교통경찰의 경우 수입이 좋은 길목을 차지하기 위해 수천 달러씩 바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프놈펜의 밤’이 찾아왔다. 현지인이 추천한 ‘플래티넘 클럽’으로 향했다. 길에는 쓰레기가 가득했고, 온갖 악취(惡臭)가 진동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쓰레기를 피해 가는데, 가족으로 보이는 3명이 쓰레기더미를 뒤지더니 거기서 나온 음식물을 입속에 넣었다. 하마터면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마냥 행복해 보였다.
1달러 없어 고생하지만 양주 1병은 800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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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놈펜 시내 곳곳에서 구걸하는 아이를 만날 수 있다. 외국인을 보면 ‘돈을 달라’면서 쫓아온다. |
개중에는 “Child”라고 속삭이는 이도 있었다. 아동매춘(兒童賣春)을 말하는 듯했다. 언론에 보도된 유니세프 자료(2007)를 보면 프놈펜에서 매춘에 종사하는 미성년자는 약 5만~1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전체의 30% 선이라고 한다.
왓 프놈(사원) 근처에 있는 ‘플래티넘 클럽’에 도착했다. 클럽 앞 주차장에는 렉서스가 즐비하게 서 있었다. 입구로 다가가자 검은 양복의 사내 두 명이 제지를 했다. 옆을 보니 총기, 마약, 수류탄, 개 등은 반입금지였다. “빈번하지는 않지만, 총기사고가 가끔 일어난다”는 것이다. 몸수색을 하면서 “가방 안을 보자”고 했다. 카메라만 있는 걸 확인한 그들은 “클럽 안에서는 절대 촬영금지”라고 경고했다. 두 개의 문을 통과하자 바깥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국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남녀, 테이블 위의 양주병들이 보였다. 대부분 40~50대 남성과 젊은 여성이 동석(同席)해 있었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를 보니 양주의 가격대는 400~800달러였다. 순간 “돈을 달라”며 쫓아오던 아이들, 쓰레기더미를 뒤지던 가족이 스쳐 지나갔다. 클럽에서 마시는 술은 ‘천인혈(千人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여 분쯤 머물다 나오자 어김없이 아이들이 달려들었다. 1950~60년대, 미군에게 “초콜릿을 달라”고 하던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캄보디아는 한때 인도차이나 반도(半島)를 지배했고, ‘앙코르와트’라는 인류사의 위대한 유적(遺蹟)을 건설한, 앙코르 제국의 후신(後身)이다. 영광스러운 과거를 간직한 이들이 이런 ‘빈곤’의 나락으로 빠진 것은 ‘킬링필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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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4월 16일, 폴 포트는 태국과의 접경지역 밀림(密林)에 위치한 자택에서 심장발작으로 죽었다. 사망 당시 그는 가택연금 상태였다. |
1975년 4월 17일, 프놈펜에 입성한 폴 포트는 극단적인 몽상가(夢想家)였다. “프놈펜 시민은 예외 없이 모두 시외로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몽상가의 광기(狂氣)가 4년 동안 캄보디아 전역을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의에 기초한 ‘원시 공산제사회’를 꿈꿨던 폴 포트는 화폐, 무역, 도시, 가족을 없애고, 모든 사람을 ‘집단 농장’에서 일하게 했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대규모 숙청도 개시했다. ‘구악(舊惡)’에 물들어 ‘개조’가 불가능한 지식인, 관료 등이 주요대상이었다. 안경을 썼거나, 책을 똑바로 보기만 해도 ‘지식인’으로 분류돼 희생당했다. 이 시절 ‘혁명정부’의 무자비한 숙청과 기아, 질병으로 죽어간 캄보디아 국민이 ‘150만~300만명’으로 추정된다.
7월 17일 오후, 프놈펜 외곽의 ‘초응 억(Choeung Uk)’에 갔다. ‘대학살’ 당시의 희생자 유해가 발굴된 웅덩이와 위령탑이 있는 곳이다. ‘죽음의 땅’에는 꽤 많은 서양인이 와 있었다. 이들과 함께 동영상을 관람했다.
설명에 따르면 ‘초응 억’에서 약 2만명이 희생당했다고 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혁명군’은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을 총으로 쏘고, 칼로 베고, 곤봉으로 때려죽였다. 나중에는 가시가 달린 나뭇가지로 목을 절단했다. 아이를 나무에 던져 머리를 부숴 버리고, 공중으로 띄우고서 ‘클레이 사격’을 하듯 죽이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동영상으로 보고 나니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관람객들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아일랜드에서 왔다는 클레어(여·23)씨는 “여기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면서 계속 눈물을 훔쳤다. “지금 내가 본 것을 믿을 수 없다”며 말을 이었다.
“영상만으로도 충격이 매우 큽니다. 유골이 있는 위령탑을 보러 왔는데,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이념 때문에 사람이 이렇게 잔인해질 수 있는 겁니까?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위령탑으로 가자 해골이 눈에 들어왔다. 탑에는 8985명의 해골과 옷가지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영국에서 온 바트 부부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그들은 “희생자의 명복을 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희는 신혼여행을 왔는데 킬링필드가 있다고 해서 호기심에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캄보디아가 이 정도로 아픈 역사를 가진 줄 몰랐습니다. 희생자 유골을 대하니 사진을 찍는 것이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카메라를 집어넣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 기도로 희생자들이 조금이나마 안식을 얻었으면 합니다. ”
수감자 1만8000명 중 6명만 살아남은 뚜얼슬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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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루주는 온갖 잔악한 방법으로 살인(殺人)을 저질렀다. 그림은 아이를 나무에 던져 머리를 깨뜨리는 장면. |
박물관에는 철제침대, 쇠고랑 등이 30여 년 전 그대로 전시되고 있었다. 낮인데도 음울(陰鬱)한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옆 건물로 이동하자 희생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삶에 대한 희망을 놔 버린 초점 없는 눈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했다. 이들은 ‘혁명의 적(敵)’이었다.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한 채 ‘CIA나 KGB의 첩자’라는 허위자백을 하고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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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당하기 직전 아이를 안고 사진을 찍은 한 여인. 그녀의 눈빛은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애절함이 느껴진다. |
현재 학살책임자는 대부분 생존해 있다. 폴 포트는 지난 1998년 가택연금 상태에서 심장발작으로 사망했지만, 민주 캄푸치아 시절 대통령이던 키우 삼판, 외무장관 이엥 사리와 그의 부인인 사회부장관 이엥 티리트, 크메르루주 상임위원장 누온 체아 등이 생존해 있다.
2003년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가 ‘학살행위’에 대한 단죄를 하기로 합의했지만, 5000만 달러에 달하는 비용문제로 계속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2009년 2월에 양자(兩者)가 정한 재판관 15명으로 구성된 재판부가 ‘S-21’의 교도소장을 지낸 ‘카잉 구엑 에아브’를 기소했다. 캄보디아 전범 재판소는 지난 7월 26일 에아브에 대해 30년 형을 선고했다. 이제 막 청산의 첫 걸음을 뗀 것이다.
大虐殺의 상처, 아직까지 치유되지 않아
킬링필드의 후유증은 과거와의 문화적 단절, 사회적 자본 파괴 등이다. 민간 저축률도 저조해 자체 재원(財源)조달이 불가능하다. 캄보디아는 예전의 우리가 그랬듯 ‘원조경제체제’가 형성돼, 외부지원에 크게 의존하는 상황이다. 이 중 가장 큰 문제는 지식 재생산 사이클이 무너진 것이다. 지식인들이 제거됐기 때문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매우 열악한 상황이다. 2008년 중학교 취학률이 34%, 고등학교는 10% 미만이다. 대학교육은 ‘돈이 있는’, 소수의 사람만 갈 수 있다. 경제발전, 사회계몽을 하려고 해도 인적자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주(駐) 캄보디아 KOICA 사무소를 방문했다. KOICA는 2003년부터 캄보디아에서 도로를 닦고, 현대식 병원과 학교를 짓는 등 인프라 지원을 하고 있다. 또한 농촌지역에서 ‘새마을운동’을 보급해 농촌 주거환경개선과 소득향상을 위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김병관 소장은 “캄보디아는 한(恨)이 많은 곳”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킬링필드의 상처가 아직까지 캄보디아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이곳의 영화를 보면 대부분 공포영화입니다. 내용도 밤잠을 설칠 정도로 무섭습니다. 이것은 여기 공포심리가 외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캄보디아인들은 누가 나를 고발하고,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자신의 ‘생존’만이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공공심(公共心)이 부족하고, 단합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공무원들도 ‘내 것’을 챙기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김 소장은 “캄보디아가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한국의 경험’을 전수해 줘야 한다”며 ‘우리의 역할’을 강조했다.
“우리는 6·25전쟁의 참화를 이겨내고 세계사에 유례없는 정치ㆍ경제적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작년 11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산하 DAC(개발 원조 위원회)에 24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는데, 수원국에서 원조 공여(供與)국으로 지위가 바뀐 것은 우리가 처음입니다. 개발도상국의 비효율적 경제구조와 부패로 원조가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전 세계에 ‘성공사례’를 보인 것입니다. 한국이 비약적 발전을 거두었듯이 캄보디아가 내전의 상처를 씻고 발전하는 데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