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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초기 朴正熙의 관찰자’ 金鐘信 전 대통령 비서관(上)

朴正熙 장군과의 인연

정리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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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일보》 기자 시절,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한 朴正熙 대통령과 처음 만나
⊙ 송요찬 참모총장이 부정선거 독려하자 “병신 같은 자식”
⊙ 죽순 방석 말아 쓰고 월남춤 추고, 오징어 직접 찢어 기자들에게 나눠주며 술 권하기도
⊙ “민주주의 노래도 좋지만, 노래도 배가 불러야 나오는 것 아닌가”

金鐘信
⊙ 83세. 동아대 법학과 졸업.
⊙ 《부산일보》·《서울신문》·MBC기자, 《부산일보》편집부국장, 대통령 사회문화비서관,
    부산 MBC사장 역임.
  1960년 1월 어느 날. 황용주(黃龍珠·전 MBC 사장) 《부산일보》 주필이 군(軍) 출입기자이던 나를 불렀다. 그는 대뜸 “오늘 군수(軍需)기지사령부에 갔었다면서?”라고 물었다.
 
  당시 부산에는 병기기지창, 통신기지창, 항만사령부 등 다양한 보급부대들이 모여 있었다. 미국의 군사원조에 모든 것을 의존하던 시절, 이들 기지에 산더미 같은 군수물자를 쌓아놓았고, 주먹구구식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선임하사쯤만 되어도 물자를 빼돌려 한몫 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병참(兵站)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장교들은 전문성을 내세워 지키면서 부정을 일삼았다. 그들은 자유당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바치면서 돈이 생기는 노른자위 보직을 지켰다.
 
  군부(軍部) 내 부패척결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던 송요찬(宋堯贊) 육군참모총장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고치기 위해 부산 지역을 관할하던 2관구사령부를 군수기지사령부로 개편했다. 초대(初代) 군수기지사령관으로는 6관구사령관으로 있던 박 아무개 소장(少將)이 온다는 얘기가 돌고 있었다. 황용주 주필이 말했다.
 
  “대구사범학교 동기 보쿠세이키, 박정희(朴正熙)라는 친구가 육군 소장으로 있다던데, 그 친구가 아닌지 몰라.”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황 주필은 “옛날부터 여간 성미가 불칼 같은 위인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대단히 청렴결백한 사람”이라며 기대를 표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그 사람 아니겠느냐’고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군대 시절 친하게 지냈던 지성한(池聖漢·한성화학 회장)씨로부터 박정희 장군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그는 “육군에 물건이 하나 있다”고 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박정희 장군”이라고 했다.
 
 
  “잘해 나갈 작정입니다”
 
제주도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한 청와대 출입기자들.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종신 기자. 그 오른쪽이 신동관 경호차장.
  황용주 주필을 만난 지 며칠 후. 신설 군수기지사령부에서 신임 사령관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박정희 장군을 처음 보고 받은 느낌은 키가 몹시 작다는 것이었다. 작은 키와는 대조적으로 걸음걸이는 무척 육중하게 보였다. 동료 기자가 “무지하게 폼을 재며 걷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느리게 걷는 것도 아닌데, 그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움푹 발자국이라도 낼 듯이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박정희 사령관이 사무실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높으신 양반들일수록 약속시각보다 늦게 나타나는 것을 위엄으로 생각하는지, 20~30분, 심하면 1시간을 늦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곗바늘은 정확하게 약속시각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1분도 틀리지 않았다. 박정희 장군이 내 뇌리에 박히는 순간이었다.
 
  복장도 다른 장성들처럼 화려한 정장(正裝) 차림이 아니라 작업모에 점퍼 차림이었다. 박 장군은 좌중을 훑어본 후, 방 가운데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전응덕 부산 MBC 보도과장이 마이크를 들이대자 박 장군은 빙긋 웃더니, 마이크를 치우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뭐, 이런 딱딱한 분위기는 치워버리고 얘기나 합시다.”
 
  박 장군은 “나는 경상도 사람이라 부산에 오니까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습니다”라면서 “뭐, 물을 것 있으면 물어보시오”라고 말했다.
 
  뜻밖이었다. 새로 부임해 오면 “군 풍기를 단속하고 민폐를 일소하고” 운운하는 상투적인 성명서를 읽어 내려가던 다른 지휘관들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질문을 던졌다.
 
  “부산에 있는 부대들이 말썽이 많다는 것을 알고 오셨을 텐데, 앞으로 부대 운영은 어떻게 해나갈 작정이십니까?”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부산 지역 병참부대들에 만연한 비리를 염두에 둔 질문이었다. 박정희 장군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잘해 나갈 작정입니다.” 기자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박 장군은 웃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잘해 나가겠다”던 자신의 약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정치권이나 군 상층부에 ‘백’을 두고 있던 부패한 병참장교들이 쫓겨나고, 전방에서 근무하다 온 야전장교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때부터 나는 박정희 장군에게 매료됐다. 박 장군도 친구인 황용주 주필 때문인지, 나를 무척 친근하게 대해줬다. 덕분에 나는 무시로 사령관실을 드나들 수 있었다.
 
 
  “병신 같은 녀석!”
 
송요찬 육군참모총장.
  박정희 장군이 부임하고 한 달여쯤 지났을 때, 송요찬 육참총장이 내려왔다. 좀처럼 기자들과 자리를 만들지 않던 박 장군은 송 총장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 기자들을 초대했다. 김진위(金振緯·전 수도경비사령관) 8기지창장, 최우근(崔宇根·전 육사교장) 차량재생창장 등 인근 부대장들도 참석했다. 술이 몇 순배 돌면서 주흥이 무르익기 시작했다. 그런데 박정희 장군의 표정이 안 좋았다.
 
  기자들이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송요찬 참모총장에게 “박정희 장군이 근래 기자들과 전혀 접촉이 없다”고 고자질했다.
 
  송요찬 참모총장은 “박 장군! 그래서야 쓰나? 너무했는걸?”이라며 박정희 장군에게 눈살을 찌푸리는 시늉을 하더니, 기자들에게 말했다.
 
  “거, 잘 봐 주시오. 그러니 오늘 이렇게 모인 게 아니겠소? 앞으로 중대사도 있는데…. 박 장군도 바빠서 그렇지 기자 선생들을 싫어해서 그랬겠소?”
 
  ‘중대사’란 목전으로 닥쳐온 3·15 정·부통령 선거를 뜻하는 것이 분명했다. 순간 박정희 장군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병신 같은 녀석!”, 이런 소리였을 것이다.
 
  송요찬 장군의 얼굴을 보니, 그도 박 장군이 하는 얘기를 들은 것이 분명했다.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송 장군은 얼른 술잔을 비우더니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박정희 장군에게 술을 권했다.
 
  1966년 나는 《영시(零時)의 횃불》이라는 책을 내면서 이때의 박정희 장군이 “X 같은 새끼!”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했다. 책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렸는데, 얼마 후 만났을 때 그는 딱 이 부분만 지적했다.
 
  “그때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
 
  사실 나도 박정희 장군이 뭐라고 말했는지 정확하게 듣고 쓴 것은 아니었다. 나는 먼저 “각하,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라고 사과한 후,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 재클린 케네디의 수기를 읽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재클린이 일하던 신문사의 편집장이 당시 케네디 상원의원을 ‘손이 빠른 놈’이라고 칭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신문사 편집장이면 상원의원을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더구나 그때는 대통령도 아니셨잖습니까?”
 
  그래도 박정희 대통령은 마음에 걸리는지, “그런 거 빼면 책이 안 팔리나?”라고 물었다. “안 팔립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알았어. 그럼 내버려두라”고 했다.
 
 
  整軍운동
 
  결국 이승만 정권은 3·15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선거를 앞두고 특무대(현 기무사령부)는 각급 지휘관들로 하여금 휘하 장병들에게 이승만(李承晩)-이기붕(李起鵬) 후보를 지지하도록 독려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박정희 장군은 그러한 압력을 거부했다.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박정희 사령관은 부산계엄사무소장으로 임명됐다. 4월 24일 부산 교외(郊外) 범어사에서 4·19 희생자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박정희 장군이 조사(弔辭)를 했다. 조사는 “이 나라에 진정한 민주주의 초석을 놓기 위하여 꽃다운 생명을 버린 젊은 학도들이여!”로 시작해 “여러분들이 못다 이룬 소원은 기필코 우리들이 성취하겠습니다”로 끝났다. 이는 박정희 장군이 시민 편에 섰다는 선언이었다. 지역 기관장, 유지들의 천편일률적인 조사에 따분해 하던 학생과 시민들의 정신이 확 들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민의(民意)에 굴복해 하야(下野)했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억눌렸던 욕구들이 일시에 분출되어 나왔다. 부산 지역에서도 신문기사에 불만을 품은 대학생들이 신문사를 습격해 편집국을 박살내는 등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났다. 박정희 장군은 군 병력을 함부로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시위가 지나치게 과격해진다 싶으면 헌병을 출동시켜 제압했다.
 
  박정희 장군의 이런 태도는 여러 사람의 불만을 샀다. 국회 해산과 기성 정치인 퇴진을 요구하는 부산 지역 학생들의 시위에 불만을 품은 정치인들은 국회에서 “조총련이 자금을 대서 학생시위를 사주하고 있다”면서, “군의 유력한 장성이 이 시위를 묵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장군을 겨냥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박정희 장군은 정군(整軍)운동의 선두에 섰다. 5월 2일 박정희 장군은 부관 손영길(孫永吉·수도경비사 참모장 역임) 대위 편에 편지를 보내 송요찬 육참총장에게 군내(軍內)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고 권고했다.
 
  1군 사령관 시절에는 참모장, 육참총장 시절에는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박정희 장군을 중용했던 송요찬 참모총장은 격노했다. 그는 박정희 장군을 ‘빨갱이’라고 비난하며 부산에 병력을 증파해 박 장군을 견제하려 했지만, 결국 군내 압력에 밀려 퇴진하고 말았다.
 
 
 
左遷

 
부산 오륙도 앞바다에서 기자들과 뱃놀이를 즐기는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앞줄 모자 쓴 사람).
  송요찬 장군의 뒤를 이어 육참총장이 된 최영희(崔榮喜·전 국방부 장관) 장군은 한때 박정희 장군을 육군인사참모부장으로 중용해 정군운동을 무마하려 했다. 최 총장에게 그런 건의를 한 사람은 최 장군을 모신 적이 있는 내 형(김종헌·육사 3기로 예비역 육군대령)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최 총장은 7월 30일 박정희 장군을 한직(閑職)인 광주(光州) 1관구사령관으로 좌천시켰다.
 
  그날 박정희 장군은 모처럼 출입기자들을 초청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박 장군과 기자단은 해군 부산경비부 소속 선박을 타고 오륙도, 태종대 등을 둘러보았다. 박정희 장군은 모처럼 군복을 벗어버리고 점퍼 차림에 등산모를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시골 농부 같았다.
 
  바닷바람을 쐬고 난 후, 우리 일행은 근처 음식점(주막에 가까운)에서 회식을 했다. 박 장군은 평소 과묵하던 모습을 벗어던졌다. 처량한 곡조의 가요 ‘낙화유수’를 주먹을 휘두르면서 씩씩한 군가(軍歌) 투로 불러 배꼽을 잡게 만들었다. 옆의 참모들이 ‘하나, 둘, 셋’ 하면서 장단을 맞추었다. 이어 박 장군은 죽순 껍질로 만든 둥근 방석을 삿갓 모양으로 말아 머리에 올린 후 수건으로 매고 치마를 두른 후 ‘월남춤’을 추었다.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하면 흔히 근엄한 모습만을 연상한다. 또 기자들을 멀리하기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보기와는 달리 박 대통령은 잘 놀 줄도 알았고, 기자들에게도 잘해 주었다. 그랬던 그가 후일 청와대에 들어가서 고독함을 달래야 했을 생각을 하면 안타깝다.
 
  박 장군이 한참 춤을 추고 있는데 부관 손영길 대위가 들어왔다. 손 대위는 박 장군에게 귀엣말로 뭐라고 보고했다. 손 대위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 장군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손 대위의 표정으로 보아 무슨 일이 난 게 분명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때 손 대위는 박정희 소장에 대한 인사명령을 전한 것이었다.
 
  며칠 후 군수기지사령관실에서 부대를 떠나는 박정희 장군을 만났다. 박 장군은 이미 짐을 다 꾸린 상태였다. 그런데 박정희 장군이 애지중지하던 제니스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제자리에 있었다. 작은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커다란 진공관 라디오를 막 대체하기 시작할 무렵 나온 라디오였다. 내가 물었다.
 
  “어, 라디오는 안 가져가십니까?”
 
  “저건 내 거 아니야.”
 
 
  쿠데타 소식 접하는 순간 朴正熙 떠올려
 
5·16 직후 서울시청 앞에 모습을 나타낸 박정희 소장. 왼쪽은 박종규 소령, 오른쪽은 차지철 대위.
  그렇게 부산을 떠난 박정희 장군은 이듬해 5월 16일 ‘군사혁명’의 지도자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1961년 5월 16일, 나는 전날 숙직을 한 탓에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출근했다. 쿠데타가 일어난 줄은 까맣게 모르고…. 사무실로 들어서니 왠지 부산한 분위기였다. 동료 기자가 “부장이 찾는다”고 했다. 부장실로 들어가니, 호통이 떨어졌다.
 
  “뭘 하다 이제 나오는 거야? 자네, 라디오 들었나?”
 
  “못 들었는데요.”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어. 주동자는 박정희 장군인 것 같아.”
 
  순간 ‘역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장 입에서 ‘쿠데타’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나는 이미 박정희 장군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군수기지사령부로 달려갔다. 마침 연병장에서 김현옥(金玄玉·서울시장·내무부장관 역임) 대령과 마주쳤다. 김 대령은 “사령관 때문에 골치 아프다”고 말했다. 사령관 박모 장군이 혁명에 미온적이라는 것이었다. 김 대령의 말에서 그가 혁명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게 당시 군내 다수의 분위기였다.
 
  군수기지사령관 박모 소장은 그날 부산계엄사무소 간판을 붙였다 떼었다 되풀이하면서 기회주의적인 처신을 했다. 계엄사무소 간판을 붙이는 것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내린 군사혁명위원회의 지시를 따른다는 의미였다.
 
 
 
鄭剛 장군, “‘빨갱이’가 쿠데타한 것으로 생각”

 
5·16 당시 병력을 출동시키려 했던 정강(왼쪽) 전 8사단장과 김웅수 전 6군단장(오른쪽)은 반혁명죄로 군사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쿠데타 초기 상황이 유동적이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주한미군 당국과 한국군 일부 장성이 박정희 장군의 사상을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쿠데타 진압을 위해 병력을 출동시키려 했다는 이유로 반(反)혁명으로 몰려 옥고(獄苦)를 치르고 예편당한 8사단장 정강(鄭剛) 준장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육사2기로 박정희 장군과 동기였다. 정 장군은 가형(家兄·김종헌)과 가까운 사이였다. 6·25 당시 내가 김화지구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육군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을 때, 정 장군이 힘을 써서 나를 헌병으로 전과(轉科)시켜 주었다. 때문에 나는 정 장군을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했다. 후일 내가 청와대 비서관으로 있을 때, 정 장군을 찾아갔더니 이런 얘기를 했다.
 
  “내가 왜 5·16 때 병력을 출동시키려 했는지 아나? 사실 나는 박정희를 빨갱이라고 생각했었다. 여순반란사건 후 숙군(肅軍) 때, 박정희가 특무대에 잡혀와 고문(拷問)당하는 걸 봤거든(정강 장군은 헌병 계통에서 근무했고, 숙군 때 수사에 참여했었다-기자 주). 5·16 전에 미 8군사령관을 만났더니, ‘지금 육군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박정희’라고 하더군. 그래서 5·16이 나자 빨갱이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생각해서 진압하려 했던 거야. 물론 지금 보니 박정희는 빨갱이가 아니야. 5·16 때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지휘관으로서 박정희를 빨갱이라고 잘못 판단했다는 것이겠지.”
 
  정 장군은 “나야 어차피 박정희와 원수지간이 됐지만, 너는 대통령을 잘 모시도록 하라”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강 장군 얘기를 전했더니, 박 대통령은 가만히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래, 정강 장군은 그렇게 말할 사람이지.”
 
  1963년 제5대 대선(大選) 때 윤보선(尹潽善) 후보 측은 박정희 후보를 ‘빨갱이’로 몰았었다. 박 대통령은 그런 오해를 불식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내게 자신이 그런 오해를 받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朴正熙, 자신의 容共 혐의 해명
 
  “내가 공산주의를 처음 접한 것은 광복 후 귀국을 위해 천진(天津)의 광복군으로 들어가 있을 때였소. 중대장을 하라고 하더군. 그런데 부하들 중에 공산주의자들이 있었어. 그들이 자기들 모임에 중대장인 나를 오라 가라 하고, 내게 ‘중대장 동무’ 운운하는 걸 보니, 만정이 떨어졌소.
 
  1946년 귀국해서 고향으로 갔는데, 박상희(朴相熙·박정희 대통령의 셋째 형으로 김종필 전 총리의 장인. 1946년 대구폭동 때 경찰에게 사살됨-기자 주) 형이 ‘왜 이리 늦게 왔느냐’고 하기에 ‘광복군에 있다가 왔다’고 했더니 안색이 확 달라지더군. 그때 형이 사상적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소.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고향 선배들이 나를 위해 화수회(花樹會) 한다고 해서 가 보았더니 황태성(북한 무역성 부상[副相] 역임. 5·16 후 북측의 밀사로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어 간첩혐의로 처형됨), 이재복(남로당 군사부장) 등 좌익들이 나와 있더군. 나와 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는 그게 다요. 그 때문에 숙군 때 조사를 받고 옷을 벗었던 거지.”
 
  박 대통령은 창피해서인지 김창룡(金昌龍·후일 특무대장 역임)에게 고문을 당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5·16 후 예편당한 정강 장군은 그때 무척 어렵게 살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강 장군이 어렵게 살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 후 정강 장군을 만났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 이상국(李相國·육사2기·5·16 당시 30사단장으로 있다가 반혁명으로 예편당함-기자 주)을 만났더니, 박정희가 주는 것이라면서 봉투를 주더군. 그 돈으로 TV 사고, 집세 내는 등 유용하게 썼네. 고맙다고 전해주게.”
 
  박정희 대통령과 정강 장군은 여러 가지로 달랐다. 키가 작은 박정희 대통령과는 달리 정 장군은 키가 크고 남자답게 생겼다. 사관학교 시절이나 군 생활을 하면서 두 분이 가까이 지낼 기회는 없었다고 하는데, 박 대통령은 정 장군을 좋아했다. 정강 장군은 반혁명사건 유죄판결을 받아 육군준장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정강 장군이 죽기 전 국립묘지 안장을 소망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박 대통령은 정 장군이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게 조치해 주었다. 나는 정강 장군이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박정희 대통령이 그에게 정보 부문 요직을 맡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容共으로 몰린 황용주 주필
 
황용주 《부산일보》 주필.
  《부산일보》에서 나는 황용주 주필과 김지태 사장을 모셨다. 두 분 모두 내게 잘해 주었다. 5·16은 두 분 모두에게 안 좋은 일이었다.
 
  5·16 직후 군사정부는 좌익용공(左翼容共) 혐의자들을 일제히 검거했다. 황용주 주필도 지명수배 대상자 명단에 포함됐다. 박정희 장군의 친구였던 그가 용공분자로 몰린 것은 교원노조 고문으로 이름이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선 대공(對共)경찰에서는 이 기회에 조금만 사상적으로 이상하다 싶으면 다 용공으로 엮어 넣으려 했다.
 
  박정희 장군이 아직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으로 있을 때, 초도순시차 부산으로 내려왔다. 나는 항만사령부 식당 앞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다가 박정희 장군을 만났다. 내가 황 주필이 지명수배를 받고 있다고 하자 박정희 장군은 깜짝 놀랐다. 박 장군은 “용주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은 내가 잘 알아”라면서, 황 주필에 대한 지명수배를 해제하도록 지시했다. 그날로 피신처에서 나온 황 주필은 박 장군과도 만났다.
 
  그런데 얼마 후 황 주필은 기어코 경찰에 구속되고 말았다. 경찰은 황 주필이 민주당 정권 시절, 부정선거에 간여했던 경찰간부들의 공민권 제한 심사에 참여했던 것 때문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결국 황 주필의 부인이 상경(上京)해서 박정희 의장에게 직접 탄원을 넣었다. 박태준(朴泰俊) 비서실장을 통해 보고를 받은 박 의장은 “아니, 용주가 아직도 잡혀 있어?”라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황 주필은 4개월 만에 풀려났다.
 
  황용주 주필은 출옥 후 부산MBC 사장을 지내지만, 나중에 다시 《세대》지 필화(筆禍)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박정희 대통령이 부산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을 때, 술을 같이하면서 함께 혁명을 논의했던 그가 막상 박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후 두 번이나 옥고를 치러야 했던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사상적으로 황용주 주필이 어느 정도 좌경한 생각을 갖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자기의 집안 아저씨가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이라고 했다. 김원봉은 의열단장, 조선의용대 총사령 등을 지냈고, 광복 후 월북(越北)해 북한 정권의 초대 국가검열상이 된 좌익의 거물이었다. 어려서부터 할머니는 그를 키우면서 “너는 언제 커서 아저씨 같은 사람이 될래?”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가 독서회사건으로 대구사범을 그만둔 후 일본 와세다대 불문학과로 진학한 것도 당시 국제외교언어였던 불어(佛語)를 공부해 김원봉을 돕기 위해서였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가 구체적으로 좌익 활동을 한 것은 없었다. 그 이전에 양주(洋酒)와 양담배를 즐겼던 그는 ‘빨갱이’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金智泰 회장
 
김지태 삼화그룹 회장.
  김지태(金智泰) 전 삼화그룹 회장은 당시 한국 제일의 거부(巨富)였다. 조선견직·한국생사·삼화고무 등으로 부를 일군 그는 당시 MBC, 《부산일보》 등 언론매체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아마 국내 재벌들 가운데 ‘회장’ 호칭을 가장 먼저 쓴 사람일 것이다. 그럴 정도로 그는 그때 이미 여러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의 소유주였다.
 
  내게 잘해 주었던 상사(上司)에게 죄송한 얘기지만, 김지태 회장은 그리 인심을 얻지는 못했다. 인색하고 겸손하지 못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용주 주필은 부산군수기지사령관으로 온 박정희 장군에게 김지태 회장에 대해 안 좋게 얘기했다. 《부산일보》 사장을 겸하고 있던 김지태 회장이 편집국장과 주필을 겸하고 있던 황 국장의 편집국장직을 면(免)하고 주필로 발령내는 한편, 황 국장과 가깝던 기자들에게 사표를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이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은 편집국 기자들이 모두 ‘황용주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였던 것 같다. 이때 신문사를 떠난 사람 중에는 후일 내무부 장관을 지낸 서정화(徐廷和)씨도 있었다.
 
  황용주 편집국장에 의해 특채(特採)됐던 나는 수습기자 시험을 다시 보고 입사(入社)하는 조건으로 간신히 구제되었다. 내가 구제된 것은 김지태 회장의 부산상고 후배였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내게 “기자를 하면 사람 버린다”면서 자기 비서를 하라고 했다. 나는 기자 일을 하면서 비서 역할, 술상무 노릇도 같이했다.
 
  나는 김지태 회장과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을 엮어주려고 애를 썼다. 한번은 김 회장에게 “《부산일보》 주최 고교야구대회 개막식 날 박정희 장군에게 시구(始球)를 부탁하면 어떻겠느냐”고 건의했다. 김 회장은 좋다고 했다. 내가 박정희 장군을 야구장으로 모시고 갔다. 두 사람은 귀빈석에 나란히 앉았다. 그러나 김 회장은 자기만 시구를 하고 박정희 장군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김 회장 눈에는 육군 소장 정도는 우습게 보였을지 모르겠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지태 회장의 부일장학회를 강탈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김 회장이 부산 지역에서 크게 인심을 얻어 4·19 때도 시위대가 김 회장 집을 지켜주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4·19 후 시위대가 김지태 회장 집을 습격했다. 무슨 까닭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런 혼란기에 흔히 있는 가진 자에 대한 반감 표출이었을 것이다.
 
  나는 박정희 장군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박 장군은 “그런 자는 혼 좀 나야 해”라며 응하지 않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군수기지사령부 헌병부장에게 부탁, 헌병 두 명과 함께 사흘 동안 김 회장 집을 경비했다.
 
 
  “합숙소를 이용하시오”
 
스코필드 박사의 장학기금 희사 소식을 보도한 1962년 5월 3일자 《서울신문》 기사.
  김지태 회장이 5·16 거사 자금을 거절해 박정희 장군에게 밉보였다는 얘기도 사실과 다르다. 황용주 주필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박정희 장군이 거사 자금 댈 사람을 구하면서 ‘김지태는 어떨까’라고 하기에, ‘김지태는 계산이 밝은 사람이라 그럴 사람이 못 된다’고 했다. 박 장군은 김지태에게 거사 자금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5·16 후 당시 최세경(崔世卿·전 KBS 사장) 《부산일보》 논설위원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고문이 됐다. 그는 서울에 집이 없었다. 그가 김 회장을 찾아가 상경 인사를 하자, 김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서울에 가면 우리 회사 합숙소가 있으니, 거길 이용하시오.”
 
  김지태 회장 정도면 서울에 거처가 없는 최세경씨를 위해 방 한 칸 얻어줄 법도 했는데 그런 소리를 한 것이다. 최세경씨는 나중에 이때의 일을 얘기하면서 김 회장에 대해 서운해했다. 내가 1961년 말 《부산일보》를 떠나 《서울신문》으로 옮긴 것도, 사람을 도구로 생각하는 김 회장에게 실망해서였다.
 
  이런 식으로 안팎에서 인심을 잃은 것이 김지태 회장에게 부메랑이 되어 날아왔다. 나중에 부일장학회 헌납의 단초가 되는 다이아몬드 밀수 사건도 내부 고발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2년 5월 3일자 《서울신문》을 보면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내가 쓴 기사인데, 스코필드 박사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장학사업에 써달라며 25만원을 희사(喜捨)했다는 얘기다. 박정희 의장은 스코필드 박사에게 감사해 하면서 “가난한 학생을 돕는 것은 혁명정신이요, 나의 소원”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삼성 등 국내 유수의 기업들도 다투어 재단에 돈을 기부하기 시작했다. 그해 3월 27일 다이아몬드 밀수 사건으로 구속되어 있던 김지태 회장은 5월 20일 부일장학회 헌납 의사를 밝혔다.
 
  정수장학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정수장학회가 부일장학회를 강탈해 설립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정수장학회(구 5·16장학회)는 스코필드 박사가 희사한 돈, 국내 기업들이 기부한 돈, 그리고 다이아몬드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김지태 회장이 헌납한 부일장학회를 합쳐서 만든 것이다. 또 그때 “악덕 기업인이 장학사업을 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여론 때문에 장학회 측이 고민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김지태 회장이 부일장학회를 헌납한 것은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내가 누굴 잡아먹나?”
 
저도 해수욕장에서 기자들과 함께한 박정희 대통령(앞줄 가운데). 뒷줄 오른쪽에서 맨 오른쪽이 김종신 기자.
  군정(軍政) 시절 나는 최고회의를 출입했지만, 박정희 의장과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박 의장이 지방순시를 가면 거기서 혹시 기삿거리가 있나 싶어 열심히 쫓아다니고, 낙종(落種)해서 속상해 하는 것은 다른 기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63년 박정희 의장은 오랜 논란 끝에 민정(民政) 참여를 결심했다. 본격적인 대선(大選)이 시작되기 전인 그해 여름 박정희 의장은 부산 해운대로 여름휴가를 갔다. 박 의장의 휴식을 위해 기자들은 물론 이후락(李厚洛) 공보실장,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도 박 의장 가족의 숙소와는 떨어진 곳에 묵었다.
 
  기자들은 이후락 실장에게 박 의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다. 이후락 실장은 못 이기는 척하고 내게 슬쩍 박 의장이 쉬고 있는 천막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수영복 차림으로 박 의장이 있다는 천막으로 몰려갔다. 뜻밖에도 박 의장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흰 수영복 팬티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박 의장은 진로 소주병을 앞에 두고 오징어를 찢고 있었다. 박종규 경호실장, 이후락 공보실장, 박경원(朴璟遠) 내무부 장관 등이 함께 있었다. 주위에는 해삼 함지, 빈 소주병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이후락 실장은 시침 뚝 떼고 악수를 내게 청하면서 “아니,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느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박정희 의장은 “모처럼 만났으니 술이나 한잔 하자”면서 기자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박 의장은 기자들에게 잔을 돌렸다. 손수 오징어 다리를 북북 찢어 기자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어느 기자가 말했다.
 
  “각하께서는 무서운 분으로 소문이 나 있는데, 오늘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무섭다니…. 내가 누굴 잡아먹나? 나도 똑같은 사람인데.”
 
  그렇게 말하는 박 의장의 표정이 너무 재미있어서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는 점점 화기애애해졌다. 박정희 의장은 슬쩍 언론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기자들을 가까이하고 싶어도 아무거나 막 써버리는 통에 만나기가 싫단 말이야. ‘이건 쓰지 마라’고 하면, 신문에는 ‘이건 쓰지 말라고 하더라’까지 나니, 원 참….”
 
  분위기가 좋아지자 화제는 자연스럽게 시사(時事)와 관련된 쪽으로 흘렀다. 장준하(張俊河) 《사상계》 발행인의 막사이사이상 수상 얘기가 나왔다. 박 의장은 “우리나라에서 주는 상은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외국에서 주는 상이라면 왜 그렇게 야단들인지 모르겠다”며 못마땅해 했다.
 
 
  “송아지도 키워서 잡아먹어야”
 
  박정희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나와 조우하면 옛정을 잊지 않고 반겨주었다. 민정 이양 후의 일이다. 그 무렵 박 대통령은 부산에 내려오면 현재의 지금 조선비치호텔 앞에 있던 동래 후생원이라는 여관에서 묵곤 했다. 한번은 후생원 복도에서 신동관 경호과장과 장난을 치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미안해서 얼른 자리를 떴다. 잠시 후 신 과장이 와서 박 의장이 찾는다고 했다.
 
  방으로 가니 박 대통령은 이발을 하고 있었다. 이발사가 서툴러서인지 박 대통령 얼굴에 스킨로션을 붓다시피 했다. 스킨이 눈에 들어가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스킨로션을 닦아드렸다. 박 대통령이 식사를 같이하자고 했다.
 
  박 대통령과 식사를 같이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박종규 경호실장이 들어왔다.
 
  “각하, 콜트사(미국의 총기 제조회사) 사장이 뵙고자 합니다.”
 
  내가 자리를 비키려 하자, 박 대통령은 그냥 있으라고 했다. 콜트사 사장이 들어왔다. 통역은 조상호(趙相鎬·전 체육부 장관) 의전비서관이 맡았다. 그는 박 대통령이 대화 중 기침을 하면, 그 기침까지 그대로 흉내 냈다. 나는 조 비서관의 영어 실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아, 통역은 저래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콜트사 사장이 방을 나가자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임자, 들었지? 저 녀석이 나에게 M-16 공장을 만들라고 찾아온 거야. 안 한다고 했지. 아, 지금 우리가 총 만드는 게 문제인가. 우리가 먼저 총을 살 필요는 없어. 당분간 미국이 원조해 주는 걸 받아쓰면 돼. 총 같은 것은 우리가 정밀기계공장을 만들기만 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
 
  그때는 사실 우리가 경제건설을 막 시작한 단계였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당장은 필요한 부분에서 미국의 원조를 받기는 하겠지만, 언제까지 미국에 의존만 할 수는 없으며, 결국은 자립(自立)해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발전을 위해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지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총 같은 것은 우리가 정밀기계공장을 만들기만 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박 대통령의 말에서는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경제발전’을 먼저 생각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일부 국민들, 특히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먼저 요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요즘 데모를 하면 영웅이 되고 그러지. 하지만, 이보시게. 송아지가 있으면 키워서 새끼도 낳고 한 후에 잡아먹어야 할 게 아닌가? 송아지 뿔도 나기 전에 잡아먹자고 하면 어떻게 하나? 좀 참아야지. 민주주의 노래도 좋지만, 노래도 배가 불러야 나오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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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일    (2013-03-16) 찬성 : 120   반대 : 84
박정희 대통령의 은혜에 감사할줄 모르는 인간들은 천벌을 받는다. 박정희를 부정하려면 북으로 가라!
  조영일    (2013-03-14) 찬성 : 44   반대 : 80
박정희는 5천년 한민족 역사에 가장 위대한 영도자였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사회 지도급 인사가 없는가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필요한게 기본적인의식주 해결문제이다.5천년 민족의 역사에 가난을 대물림해온 우리 민족에게 처음으로 가난을 스스로 해결 할수있게 선도한 박정희의 공로는 그 무엇으로도 깍아내릴수 없다. 혹자는 박정희의 5.16과 유신독재를 운운하는데 작금의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을 놓고 보드라도 1960년대 박정희가 선택한 민족증흥의 방법으로 5.16과 70년대 유신은 적정한 선택이었다. 박정희가 없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한번 상상해보라! 어쩌면 북에의해 적화 통일되었을지도 모르며 아니면 찌들은 가난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박정희 덕분에 해외에 살고 있는 6백만이상의 동포도 한국민이라는 데 자긍심을 가지고 살악며 있으며 전세계사람들의 손에 쥐어진 삼성 휴대폰, 전세계 가정의 벽에 걸려있는 삼성티브, 세계의 도로를 달리는 현태, 기아차, 오대양을 누비는 선박, 가정의 빨래를 도맏은 세탁기등등 이루 말할수 없을정도로 많은 한국산 제품들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있는게 다 누구의 덕인가 이제는 한국인이라는 사싱에 자긍심을 가져도 되며 그 자긍심을 갖게해준 장본인인 박정희에게 존경과 사랑을 보내도 부족한입장에서 어찌 박정희 얘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무는자들은 과연 어느나라 어느민족인가 당신들은 민족의 영도자를 험담할 자격이 있는 인간들인가
  도현경    (2013-03-01) 찬성 : 160   반대 : 150
지당하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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