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母校와 고향을 잃어버린 「反共의 보루」 平壤高普 졸업생들의 황혼

우리의 愛校心은 反共·愛國心 이었다. 10년 후에도 同門會가 열릴 수 있을까?

김성동    ksd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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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세가 막내인 고교 동문회
  지난 1월7일 낮 12시, 서울 중구 소공동 소재 롯데 호텔 3층의 사파이어 볼룸. 1백50여 명의 老人(노인)들이 新年 賀禮會(신년 하례회)를 갖기 위해 모여 있었다. 그곳에 모인 노인들 중 가장 어린 사람의 나이가 예순 여섯. 이들은 平壤高普(평양고보) 동문들로 국내 고교 동문회 가운데 전체 졸업생의 평균 연령이 가장 높다.
 
  平壤高普 동문회는 지난해 1월에도 같은 장소에서 신년 하례회를 가졌다. 당시 참석 인원은 1백20여 명으로 올해보다 30여 명이 적었다. 주최측은 회원들의 年齡(연령)을 감안, 올해는 참석 인원을 1백여 명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50여 명이 초과 참석한 것이다.
 
  동문회 吳仁鍵(오인건·71·35회 졸업) 상무는 『얼마 전 북한을 다녀온 趙慶哲(조경철) 동문의 강연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趙慶哲(한국우주과학연구소장·35회) 박사의 강연 주제는 「평양을 다녀와서」였다. 대부분 평양이 고향인 平壤高普 동문들은 변화된 평양의 모습, 특히 平壤高普가 있던 자리가 어떻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趙박사는 1999년 11월20일부터 27일까지 평양을 방문해 북한에 살고 있는 동생을 만나고 돌아왔다. 평양 방문 길에 그는 平壤高普 터 등 평양시내를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趙박사는 동문들에게 平壤의 지금 모습은 6·25 사변 전과 99% 이상이 바뀌어 과거의 흔적을 찾는 일이 어려웠지만, 그래도 옛날 平壤高普 자리는 현재 공터로 남아 있다고 전했다. 학교로 들어가는 입구의 모습은 옛날 그대로였고, 벽돌 건물 뒤에 있던 나무 한 그루가 살아 남아 동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공터로 남아 있는 그 자리에 5년 후건 10년 후건 平高(평양고보를 그들은 이렇게 부른다) 건물을 다시 세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이 자리에서 꼭 살아 남아 그곳에 平高를 다시 세우겠다고 다짐합시다』
 
  대부분의 동문들이 趙박사의 그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平壤高普 사람들은 그렇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강 以北의 최고 명문고교
 
 
  한때 平壤高普는 자타가 인정하는 한강 이북 최고의 명문고교였다. 이 학교의 명맥은 40회로 끊겼다. 38회가 6·25사변이 발발한 해인 1950년 졸업이고, 39회와 40회는 당시 재학중이었다. 1899년에 세워져 많은 인재들을 배출해오다 1950년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산정권에 의해 폐교된 것이다.
 
  鄭光憲(정광헌·전 조광인쇄 사장·70·37회)씨는 『공산주의는 전통의 파괴를 건설로 여기기 때문에 전통을 자랑하는 평양고보를 폐교시킨 것은 그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라면서 『동문들의 절반 정도가 월남을 선택한 것도 폐교의 한 원인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의 전통 때문에 해방 후 공산정권과 平壤高普 재학생들 간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른바 「白線(백선) 사건」이 그것이다. 平壤高普 校帽(교모)와 校旗(교기)에는 두 개의 백선이 들어가 있다. 平壤高普의 교모와 교기에 백선이 두 개가 들어간 것은 공립 학교 설립 순서와 관계가 깊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공립학교인 京城高普(경성고보·현 경기고)는 백선이 하나였고, 平壤高普는 그 다음에 세워졌기 때문에 백선이 두 개, 또 그 다음에 세워진 大邱高普(대구고보·현 경북고)는 백선이 세 개였다.
 
  학교 설립 순서대로 백선의 수가 정해졌기 때문에 이들 학교의 재학생들에게 백선은 학교의 상징이자 전통이 되었다. 이들이 백선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느냐 하는 것은 세 공립학교가 세워진 이후에 개교한 京城第二高普(경성제2고보·현 경복고)가 서울에서 두 번째로 개교한 공립학교라는 이유로 교모에 백선 두 개를 넣으려고 할 때의 반응에서 알 수 있다. 平壤高普가 이미 두 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특히 平壤高普가 그랬다. 그래서 결국 京城第二高普도 백선을 두 줄로 넣되 위는 가늘게, 아래는 굵게 넣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는 것이다.
 
  해방 후 북한 지역에 들어선 공산 정권은 日帝의 잔재라는 이유로 平壤高普 재학생들에게 백선을 떼라고 지시했다. 平壤高普 재학생들로서는 학교의 상징과 전통을 하루 아침에 던져 버리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지시는 전교생을 교정에 집합시킨 가운데 당시 교장(김상규)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때 맨 앞에 서 있던 4학년 학생이 갑자기 뒤로 돌아서면서 『우리들은 절대로 백선을 떼어서는 안된다. 이 백선은 선배가 우리에게 물려준 平高의 상징이니 우리들 마음대로 뗄 수 없다』고 외쳤다. 이에 동조한 전교생이 일제히 흩어지면서 교문 밖으로 나갔다. 이 사건으로 몇몇 재학생들이 주동자로 몰려 아오지 탄광과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단순한 愛校心(애교심)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공산당을 반대하는 愛國心(애국심)도 그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反共(반공)과 애국심은 平壤高普 동문들에게 지금까지 면면히 흐르는 정신이고, 그 정신은 平壤高普를 남한 사회에서 파워 엘리트 집단으로 만든 동력이기도 하다.
 
 
  의사, 변호사 등 전문 직종 종사자 많아
 
 
  平壤高普 출신 가운데 월남한 사람은 대략 1천8백여 명으로, 이 가운데 해외 거주자를 포함해 1천2백여 명의 동문들이 생존해 있다. 동문회 주소록을 보면 눈에 띄는 것이 해외 거주자들이 많다는 점인데, 고향이 以北(이북)이라는 점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 교포의 경우 남한에 사는 사람보다 북한을 방문하는 일이 비교적 수월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사업가보다는 의사, 변호사, 교수 등 전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직업 분포에 대해 동문들은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吳仁鍵씨는 『平高 출신들은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것밖에 모를 정도로 원칙적이다』면서 『그런 성격이 사업가보다는 의사나 변호사, 교수 같은 전문직을 선호하게 한 것 같다』고 해석했다.
 
  동문회장인 李榮德(이영덕·74·33회) 전 국무총리는 『경기나 경북도 마찬가지지만 일제시대에는 의료계가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진출한 분들이 많았다』면서 『법조계 진출이 많은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 따른 결과라는 것이다.
 
  鄭光憲씨는 역사적인 배경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그는 『조선 시대 5백년 동안 평안도 사람들이 관직에 나가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일이었다』면서 『이런 배경으로 평안도 사람들은 실용적이고 전문적인 직업을 선호하게 됐고, 그 결과 평안도 지방 인재들의 집합소인 平高 출신들의 전문직 진출이 두드러지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平壤高普 동문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改新敎(개신교) 신자들이 많다는 점이다. 평안도는 改新敎가 최초로 상륙한 지역으로,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로 改新敎세가 막강했다. 平壤高普 출신들 가운데 改新敎人이 많은 이유는 이런 지역적 특성과 관련이 깊다.
 
  또한 改新敎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펼칠 때 의료 활동을 겸했던 점을 감안하면, 平壤高普 출신들의 의료계 진출이 두드러진 것과 改新敎의 영향이 큰 지역이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월남한 사람들이 전체 동문의 절반을 넘을 정도로 많다는 것과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이 많은 이유 또한 종교적 특성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李 전 국무총리는 平壤高普 출신들을『정직하고 프라이드가 강한 성격』이라고 정의한다. 그의 말대로 이들은 平壤高普 출신이라는 사실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신년 하례회에서 만난 한 동문은 『옛날 30년대의 우리 선배들은 경기고 출신들에게 「너희들은 경성제대를 먹어라, 우리는 동경제대를 먹을 테니까」라고 말 할 정도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다』면서 『그런 자부심은 후배인 우리들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고에 뿌리내린 평양고보 정신
 
 
  平壤高普 동문들은 남한에 와서도 平壤高普 출신들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을 잇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런 노력은 먼저 평양에 있던 오산고가 남한에 내려와 다시 문을 연 것처럼 平壤高普를 남한에 세우겠다는 계획으로 나타난다.
 
  李在泉(이재천·전 조흥은행 임원·67·39회)씨는 『오산 등 평양에 있던 사립학교들이 남한에 와서 학교를 재건하는 것을 보고 平高도 재건 운동을 벌였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平壤高普 재건 운동은 결실을 보지 못한다. 공립학교이기 때문에 平壤高普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는 당국의 유권해석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平壤高普 동문들은 학교 재건 대신 平壤高普의 정신을 계승시킬 학교를 찾았으니, 그것이 서울고다. 동문회 차원에서 진행된 일은 아니지만 동문들은 以心傳心(이심전심)으로 자녀를 서울고에 보냈고, 많은 동문들이 그곳에서 교사 생활을 함으로써 스파르타식 교육이라는 平壤高普의 전통을 이식하게 된다.
 
  李 전 총리는 『왜 그랬는지 딱히 꼬집어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많은 동문들이 서울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동문들도 가능하면 그 학교에서 자제들을 교육시키려고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서울고에서 교편을 잡았던 사람의 대표적 인사가 훗날 서울시 교육감을 지낸 金元圭(김원규·1968년 작고·13회)씨였다. 金씨는 그의 30주기를 맞아 제자들과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모여 「다시 태어나도 교육자의 길을」이라는 추모 문집을 낼 정도로 후학들의 존경을 받았고, 곧잘 스승의 師表(사표)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일찍이 교사 재교육, 교육 자치제, 세계화 등을 역설하며 선각자의 길을 걸었던 그는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유명했다. 金씨가 서울고에 재직했던 11년 동안 서울고가 「신문로 감옥소」라는 별칭으로 불렸을 정도다. 金씨는 하루하루를 「이지 고잉(쉽게 살기)」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으며, 독일을 일으킨 鐵(철)의 재상 비스마르크와 터키의 영웅 케말파샤의 정신력을 교육의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平壤高普 동문들은 平壤高普의 學風(학풍)을 이야기할 때 金씨가 서울고에서 행한 교육 방침을 예로 든다. 平壤高普의 학풍을 金씨가 서울고에서 그대로 이식해 놓았다는 것이다.
 
  공부벌레를 만드는 平壤高普의 학풍이 지리적·역사적·시대적 환경과 맞물리면서 의사, 변호사, 교수 등 전문직 종사자들을 많이 배출하게 된 한 요인이 됐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역대 국무총리 3명 배출
 
 
 
  ▲ 평양고보는 국무총리를 세 명 배출했다. 왼쪽부터 玄勝鍾(26회), 李榮德(33회), 盧信永(36회) 前 총리.
 
  平壤高普 동문들이 학교의 명맥이 끊긴지 50여 년이 된 지금까지도 平壤高普 출신이라는 것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以北에 뿌리를 두고도 남한 사회에서 파워 엘리트 집단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지도자를 배출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우선 平壤高普는 3명의 국무총리를 배출했다. 동문회장인 李 전 총리를 비롯해 玄勝鍾(현승종·26회) 전 총리, 盧信永(노신영·36회) 전 총리가 그들이다.
 
  성균관대 총장과 한림대 총장을 거쳐 1992년 중립내각 국무총리에 기용되었던 玄勝鍾 전 총리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1993년 4월부터 1999년 12월까지 건국대 이사장을 지냈다.
 
  1999년에는 학도병으로 징집돼 일본군 장교로 임관됐었다는 사실을 고백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玄 전 총리가 일본군 소위 계급장을 달기로 한 날은 바로 해방이 되던 8월15일이었고, 그가 일본군의 패망을 안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고 한다. 玄 전 총리는 현재 한림대 한림과학원장으로서 後學(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玄勝鍾 전 총리와 마찬가지로 학자 출신인 李 전 총리는 27대 국무총리를 역임하기 직전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을 지냈다. 李 전 총리는 그를 소개할 때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는 「보수적」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특히 통일觀과 관련해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는데, 그는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거부한다.
 
  『나는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이고 합리주의자다. 내 말은 북한의 본질을 알고 대응을 해야 한다는 뜻인데 그게 보수주의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북한 집권층의 의식 변화가 선행돼야 통일이 된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平壤高普 동문회 취재를 위해 만난 자리에서도 여전히 「보수적」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李 전 총리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초고속정보화추진위원장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냈다. 총리직을 그만둔 후 정치권에서 入黨(입당) 제의가 서너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입당원서를 되돌려 주니까 더 이상 정치권에서 괴롭히지 않는다고 한다.
 
  서울대 명예교수이기도 한 그는 이름 뒤에 「총리」라는 말보다는 「이영덕 교수」라고 불리는 게 훨씬 듣기 좋다고 말한다. 현재 그는 한동대 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외무부 장관·안기부장을 지내는 등 정통 관료 출신인 盧信永 전 총리는 선배들보다 앞서 18代 국무총리를 지냈다. 지금도 정치권에서 부르는 손짓이 끊이지 않고 있는 盧 전 총리는 현재 롯데복지재단과 장학재단 이사장으로서 노인 및 장애인 복지 시설 지원, 결식학생 돕기, 불우 청소년에 대한 장학금 지급 등 사회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盧 전 총리를 잘 안다는 平壤高普 동문 한 사람은 『어지간해서 그가 정치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康仁德·黃山德·李範錫…
 
 
  이밖에도 平壤高普는 초대 심계원장(현재의 감사원장 격)을 지낸 盧鎭卨(노진설·8회)씨, 李益興(이익흥·14회) 전 내무부 장관, 黃山德(황산덕·23회) 전 법무 장관, 1983년에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殉國(순국)한 李範錫(이범석·31회) 전 외무부 장관 등 많은 관료를 배출했다.
 
  생존해 있는 이로는 康仁德(강인덕·38회) 전 통일부 장관이 있으며, 趙淳(조순·34회) 전 부총리도 2학년까지 平壤高普를 다니다 3학년 때 경기고로 전학했다.
 
  平壤高普 출신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 직종은 의료계다. 1990년대 중반까지 활동하던 平壤高普 출신 의료계 인사가 1백 여명에 달할 정도다.
 
  대표적인 인물이 李永春(이영춘·10회) 박사다. 李박사는 1935년에 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80년에 타계할 때까지 전북 옥구에 농촌위생원을 세우고 농촌에서만 의료활동을 벌여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별칭을 듣기도 했다.
 
  1982년에 한림대학교를 세운 尹德善(윤덕선·26회) 일송학원재단 이사장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 1996년 타계할 때까지 그는 의사로서 강동·강남 성심병원, 춘천 성심병원 등 서울과 춘천에서 5개의 성심 병원을 운영하면서 의료계 발전과 후학 양성을 위해 힘썼다.
 
  이밖에 대한의학협회장을 지낸 金在(김재전·32회) 박사와 대퇴부가 절단된 환자의 다리를 완전무결하게 연결시켜 「조인트 박사」라는 별명을 얻었던 전 경희대 의대 金奉健(김봉건·29회) 교수도 이 학교 출신이다.
 
  법조계에는 1999년 작고한 李太熙(이태희·19) 전 검찰총장과 鄭順錫(정순석·9회) 전 검찰총장을 비롯해 金泰淸(김태청·24회)·田鳳德(전봉덕·16회)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金潤慶(김윤경·39회) 전 서울고등법원장, 金世玩(김세완·3회) 전 대법관 등이 있다.
 
  平壤高普가 배출한 세 명의 국무총리 가운데 두 명이 학자 출신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의료계 배출 인재 만큼이나 학계에도 국문학의 태두라고 일컬어지는 梁柱東(양주동·8회) 선생을 위시해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1998년 90세로 세상을 떠난 金東一(김동일·14회) 박사는 학술원 회원이었고, 초대 서울공대 학장을 지냈다. 金박사는 한국요업학회장, 대한화학회장, 원자력상임위원 등을 지내며 초창기 우리나라 화학공학계를 이끌었다.
 
  한국사 연구의 해방 후 제1세대에 속하는 사학자로 평가받는 韓劤(한우근·21회) 전 서울대 명예 교수도 平壤高普 출신이다. 지난해 9월 별세한 韓교수의 「韓國通史」(한국통사)는 이기백 교수의 「韓國史新論」(한국사신론)과 함께 대표적인 한국사 개설서로 꼽히며 영문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75세까지 강단에 섰던 그는 후학 양성의 공을 인정받아 학술원상, 장지연상, 국민훈장 석류장 등을 받았다. 수필가로 유명한 安秉煜(안병욱·26회) 숭실대 명예 교수도 이 학교 동문.
 
  이밖에도 黃浿江(황패강·34회) 전 단국대 부총장, 조류학자인 경희대 元炳旿(원병오·36회) 교수, 申一澈(신일철·38회) 고려대 명예 교수, 한림대 池明觀(지명관·30회) 교수 등이 平壤高普 졸업생들이며, 동경제대 영문과를 수석 졸업하고 한국 최초로 영한사전을 편찬했던 이양하(李敭河·12회) 선생도 이 학교를 졸업했다.
 
 
  효봉 스님과 함석헌翁의 母校
 
 
  平壤高普는 관계, 의료계, 법조계, 학계에는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남한 사회의 파워 엘리트 집단이 갖는 특성 중 하나인 「정치인 양성소」 역할은 하지 못했다. 平壤高普가 북한에 지역적 기반을 두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는 남한 사회의 정치가 지역적 기반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역구에 출마해서 국회의원을 한 사람은 金東吉(김동길·34회) 전 연세대 부총장과 의사 출신으로 경주에서 당선됐던 吳正國(오정국·18회) 박사 둘뿐이다. 대신 지역기반 없이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유정회와 전국구를 통해서는 崔相嶪(최상업·27회) 서강대 명예 교수 등 3명을 배출했다.
 
  平壤高普는 문화계에도 적잖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문단에는 「보일 듯이 보일듯이」로 시작하는 동시 「따오기」를 지은 아동문학가 韓晶東(한정동·4회)씨를 비롯, 소설 「순교자」를 쓴 재미작가 金恩國(김은국·37회)씨, 일제하에서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인 아쿠다가와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金史浪(김사랑·20회)씨 등이 있다.
 
  畵壇(화단)에는 한국화가로서 최초로 파리 유학을 한 李鍾禹(이종우·5회) 전 홍익대 미대 교수를 위시해 서양화가 朴泳善(박영선·19회) 화백, 제2회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한 金相游(김상유·32회) 화백 등이 있다.
 
  음악계에는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렸던 鄭鎭宇(정진우·33회) 서울대 명예 교수가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고 있으며, 대중 음악계에서는 예명인 길옥윤으로 널리 알려진 작곡가 崔致禎(최치정)씨가 鄭교수와 동기다.
 
  한국 현대 건축의 개척자로 3·1빌딩, 불란서 대사관, 올림픽 공원 평화의 문 등을 설계한 金重業(김중업·27회)씨도 이 학교가 배출한 인재 중 한 명이고, 일제시대인 1936년에 한강 인도교를 설계하고 시공과 감독까지 맡았던 이도 이 학교 출신의 崔景烈(최경렬·11회)씨다.
 
  언론계에는 조선일보 주필을 지낸 洪鍾仁(홍종인·9회)씨,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崔興朝(최흥조·24회)씨, AP 통신 기자를 지낸 安武勳(안무훈·33회)씨 등이 있다. 洪씨는 3·1 만세 사건과 관련돼 平壤高普를 중퇴하고 사립인 오산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군인으로서는 전 해군참모총장 李龍雲(이용운·20회) 제독과 순직 후 소장으로 진급한 李龍文(이용문·22회) 장군 형제 등이 대표적이다. 동생인 李龍文 장군의 경우는 그의 군인 정신을 기리기 위한 「이용문 장군배 승마대회」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이처럼 적은 동문 숫자에도 불구하고 사회 각 분야에 인재들을 배출한 平壤高普 출신들이 가장 존경하는 동문은 1회 졸업생인 李燦亨(이찬형)씨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판사다. 1회 졸업생 또는 한국인 최초의 판사였다는 이유로 동문들이 그를 존경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출세가 보장된 전도 유망한 법조인으로서 양심 때문에 「세상의 것」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苦行(고행) 구도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는 데 있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졸업하던 26세에 귀국하여 판사의 길을 걷는다. 판사 생활 10년 만에 사형선고를 내리게 되는데, 인간이 인간을 죽일 수 있느냐 하는 회의를 안고 3년간에 걸친 방랑 생활을 하다가 出家(출가)를 한다. 속세를 등지고 불교에 귀의한 것이다. 훗날 그는 조계종 총무원장을 거쳐 통합 종단 초대 종정에 오른다. 종단 통합 등 불교 발전에 큰 기여를 한 曉峰(효봉) 스님의 속명이 李燦亨이었다.
 
  故 咸錫憲(함석헌·8회) 선생도 동문들의 존경을 받는 사상가이다. 咸선생은 3학년 재학 중에 3·1 만세 사건에 가담했다가 학교를 중퇴하고 2년 후에 오산학교로 가서 학업을 마쳤다.
 
 
  反共과 愛國도 함께 사라질 것인가
 
 
  필자가 만난 平壤高普 동문들은 대부분 前職(전직)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現職(현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들은 이제 남한 사회의 파워 엘리트 집단이 갖는 리더로서의 역할을 상실해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동문회의 존속 기간을 「앞으로 10년 정도」로 예상하면서 平壤高普의 정신이 이어질 수 없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자녀들이 이어주길 기대했지만, 남한에서 낳고 자란 자녀들은 이미 철저히 「남한化」돼버렸기 때문에 기대난망이 된 지 오래라고 한다. 그러면서 『언젠가 통일이 되면 동문회 차원에서 평양에다 반드시 평양고보를 재건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실향민이기 때문에 통일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이들은 통일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시기는 10년 후로 점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문회의 존속 예상 기간과 같은 점이 흥미롭다. 통일의 형태는 흡수통일이나 북한 내부 쿠데타에 의한 자체 붕괴를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現 정부의 「햇볕론」에는 부정적인 반응들을 보였다. 정부의 對北 정책이 상호주의로 가지 않고 너무 끌려 다니는 인상을 준다는 불만들이었다. 특히 금강산 관광이나 체육·연예 등 문화 교류에도 불만이 많았다. 선물을 주어야만 이루어지는 이런 교류가 북한의 개방을 돕는 게 아니라 북한의 외화 벌이에 이용되고 있다는 시각들이었다. 북한 정권의 군사력 강화에 이용되고 있다는 우려도 많았다.
 
  공산정권을 직접 체험한 이들이 많기 때문인지 平壤高普 동문들의 북한 정권에 대한 불신은 골이 깊었다. 그들에게 反共과 愛國은 동의어였고, 지금까지 내려오는 그런 신념이 그들을 남한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어쩌면 남한 사회에서 平壤高普 동문회의 자연해체와 그런 신념의 해체가 동시에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단이 지속되는 상태에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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