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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년 1월호

具仁會와 LG

“아따 마, 나는 사람 죽이는 물건 안 만들란다. 장사 안 한다” (무기업 진출을 검토했던 금성사 중역회의에서)

글 : 鄭蕙然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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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개발계획 이전에 사업의 기틀 마련… 이후 전선·정유사업 추가
⊙ 철저한 유교 가풍으로 ‘인화 LG’의 토대 만들어
⊙ ‘잘 생기면 잘생긴 대로, 못 생기면 못 생긴 대로 받아들여라’는 인재관

李憲祖
⊙1932년생. 서울대 철학과 졸업. 1957년 락희화학공업사 입사. 한국콘티넨탈카본 이사,
    국제증권 사장, 금성반도체 사장, 럭키금성상사 사장, 금성사 회장(현 LG전자), LG인화원 회장 역임.
    동탑산업훈장, 금탑산업훈장 수훈.
⊙ 저서 : <일과 말들의 화석> <붉은 신호면 선다> 등.
국내 최초 국산화한 전화기로 시험통화하는 구인회 창업회장(가운데).
  “한국의 ‘선비 경영자’였지요. 한없이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결단력 있고 꼿꼿한 그런 분이었죠.”
 
  이헌조(李憲祖) 전(前) LG전자 회장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얘기했다. 그가 떠올리는 고(故) 구인회(具仁會) LG그룹 창업 회장은 이런 사람이었다. ‘선비 경영자’라는 표현 속에 여러 의미가 함축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인회 LG그룹 창업 회장은 삼성의 이병철(李秉喆), 현대의 정주영(鄭周永) 회장과 함께 폐허가 된 우리나라의 경제를 일으켜 세운 1세대 경영인이다. 하지만 이병철, 정주영 회장보다 일찍 타계(1969년)한 탓인지, 그와 관련된 스토리는 많이 전해지지 않았다. 구인회 회장에 관한 얘기를 듣기 위해 지난 12월 2일, 이헌조 전 회장의 자택을 찾았다.
 
  구 회장의 사돈인 허씨 가문의 고 허정구(許鼎九) 전 삼양통상 명예회장이 이 전 회장의 외삼촌이다. 그는 6ㆍ25 때 부산으로 피란 가서, 또 락희화학(LG화학의 전신)에 입사하기 전부터 종종 구인회 회장을 뵀다고 했다.
 
  이 전 회장은 “구인회 창업 회장은 한국 산업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기업인”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구 회장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나오기 이전에 대다수의 사업에 진출한 상태였다. 럭키(Luckyㆍ행운)에서 이름을 따온 락희(樂喜)화학은 1947년에 설립돼 치약ㆍ크림을 판매하고 있었고, 1958년에 설립된 금성사(LG전자의 전신)는 라디오ㆍ선풍기ㆍ전화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LG그룹은 이후에 전선사업 등을 추가하며 한국의 대표 기업이 됐다. 1960년대에 이미 오늘날 LG그룹의 면모를 갖춘 셈이다.
 
 
  조선시대 높은 관직 지낸 할아버지가 사업 반대
 
  이헌조 전 회장의 얘기에 따르면, 구인회 창업 회장은 철저한 유교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구 회장은 집에서 한학을 익히다 지수보통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일본강점기에 서울로 올라와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 귀향(歸鄕)했다. 이후 <동아일보> 지국장을 하면서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했다. 마을에 상술에 능한 일본인이 잡화를 팔고 있어서, 이에 대응해 주민들을 모아 소비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결국 구인회 회장은 지수협동조합 이사장이 됐고, 1931년에 진주에 ‘구인회 상점’이라는 포목상을 열었다. 사업가로서의 첫걸음이었다.
 
  하지만 워낙 유교 가풍이 철저했던 구씨 집안에서는 이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원칙에 따르자면 ‘장사’는 가장 하위의 일이었던 것이다.
 
  구 회장의 할아버지는 ‘교리’라는 높은 벼슬을 지낸 분이었다. ‘교리’는 조선시대에 집현전·홍문관·승문원·교서관 등에 둔 정5품 관직이다. 구 회장의 할아버지는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서 칩거를 하던 중이었는데, 뼈대 있는 유교 집안의 장손이 장사를 하는 것이 예뻐 보였을 리 없다.
 
  나중에야 구 회장의 할아버지가 “네가 굳이 하고 싶으면 해봐라”고 허락해서 시작하게 된 일이었다. 구 회장은 광복 직전에 화물차 30대로 운송사업을 했고, 광복 직후에는 군정청 승인 제1호 무역업체인 조선흥업사를 설립했다. 사농공상 중 ‘상’을 생업(生業)으로 정했지만, 구인회 회장은 늘 유교적인 원칙에 입각해서 경영을 해왔다.
 
 
  LG에서 하지 말아야 할 사업
 
호남정유 여수공장 준공식에서 기념사하는 구인회 창업회장.

  이헌조 전 회장은 구 회장이 ‘해야 할 사업’과 ‘하지 말아야 할 사업’ 간의 경계를 분명히 했다고 전했다.
 
  1960년대 후반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 정부는 국가가 운영해 온 방위 산업의 일부를 민영화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었다. 이 중 일부를 금성사에 맡기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얘기가 오갔다. ‘금성사가 회사 운영을 잘하고 있으니 병기창 사업을 맡기자’는 제안이었다.
 
  이헌조 전 회장의 얘기다.
 
  “금성사 중역들이 모두 반겼습니다. 정부와 하는 사업은 안정적이니까요. 어떻게 병기창 사업을 할 것이냐에 대해 의견을 활발히 교환하고 있었습니다. 구 회장이 가만히 앉아서 이 사람, 저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었지요. 잠자코 듣던 구 회장이 ‘됐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더니 ‘아따 마, 내는 사람 죽이는 물건 안 만들란다. 장사 안 한다’고 단칼에 잘라 버렸습니다. 중역들이 입도 뻥끗 못하도록 강하게 말씀했지요. 아무리 돈이 된다 해도 사람에게 해(害)를 입히는 물건은 만들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였습니다. 유교에 나오는 인본주의(人本主義)가 뼛속 깊이 새겨져 있다고나 할까요. 해야 할 사업, 하지 말아야 할 사업의 기준을 만든 겁니다. 사업을 하면서 이윤만을 따지지 않는 분이었죠.”
 
  LG그룹은 나중에 유도체를 만드는 고도의 전자 장비 회사인 ‘금성정밀’을 세운다.
 
  이 전 회장은 “유도체가 탄두와 같은 직접 살상 무기가 아니어서 그나마 사업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그나마 구 회장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회사가 세워졌다”고 했다.
 
 
  철저하게 믿고 맡기는 타입
 
  구인회 창업 회장은 회사의 일에 대해 일일이 기획하고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직원들에게 업무를 철저하게 분담시키고 간섭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구 회장의 라디오사업 진출은 락희화학 윤욱현(尹煜鉉) 기획부장의 아이디어를 채택하여 시작됐다. 구 회장은 중역들이 아이디어를 내면 큰 틀에서 결정하는 역할만을 했다고 한다.
 
  LG가 1962년에 경기도 안양에서 한국케이블 공사를 할 때의 일이다.
 
  이 전 회장은 당시에 건설본부장으로서 오전에는 건설 현장에, 오후에는 경리 업무를 맡았다. 하루는 안양 공장에 근무하던 현장 사람들이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로 그를 찾아왔다.
 
  사연은 이랬다. 구 회장이 불시에 공장을 방문했다가 배관 공사 하나에 대해 변경을 지시한 것이다. 배관을 필요 없이 크게 설계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장 뜯어고치고 설계 변경하라’는 구 회장의 지시에 현장 사람들이 기겁을 하고 달려온 것이다.
 
  이 전 회장은 구 회장을 찾았다. 왜 배관을 평소보다 조금 크게 설계했는지에 대해 한참 설명을 하는 동안 구 회장이 잠자코 듣고 있더란다. 잠시 뒤, 그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이랬다.
 
  “그래?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한참을 설명하고 있던 이 전 회장이 오히려 머쓱해질 정도로 명쾌한 답이었다.
 
  실제로 구 회장은 “기업은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사람을 키우는 것이 곧 기업을 키우는 일이다”는 말을 자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구 회장의 사람에 대한 ‘신의(信義)’는 후대 경영자인 구자경(具滋暻) LG그룹 명예회장, 구본무(具本茂) LG그룹 회장에게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호남 출신 등용
 
  이헌조 전 회장은 구 회장의 이 같은 일화가 모두 그의 휴머니즘에서 비롯됐다고 전했다. 이 전 회장이 구 회장 살아생전에 가장 많이 들은 얘기는 ‘사람 함부로 다루는 거 아니다’는 것이었단다.
 
  이 전 회장의 얘기다.
 
  “구 회장은 사람을 많이 아꼈습니다. 회사에 이윤을 많이 가져오고, 일을 잘하는 사람만 총애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잘 생기면 잘 생긴 대로, 못 생기면 못 생긴 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간혹 실적이 부진한 사람에 대해서도 ‘두고 보레이. 언젠가 하지’라고 했습니다. 구 회장 시절에는 사람을 내보내는 일이 극히 적었습니다. 나중에 LG가 국제화 시대를 맞으면서 구조조정 등으로 성과주의 바람이 불기는 했습니다만. 구 회장은 사람 자체를, 목적이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를 그냥 존중하고 아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LG의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의 기초가 됐다고 봅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구 회장은 사람들이 서로를 차별하고, 배격하는 일에 대해서도 몹시 나무랐다고 한다. 경남 진주 출신이면서, 오히려 ‘호남 출신’ 인재 등용에 적극적이었다.
 
  이 전 회장이 1958년 즈음으로 기억하고 있는 일이 있다.
 
  하루는 구 회장이 “이 사람아, 자네 호남 사람으로 유능한 사람 있으면 추천해 봐. 우리 회사도 이제 호남 사람 뽑아야지”라고 하더란다. 이후부터 LG는 호남 출신에 대해서는 별도로 배려했다고 한다. 전적으로 구인회 회장의 아이디어였다.
 
  이 전 회장의 얘기다.
 
  “사람은 전부 같은 사람이지,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구 회장의 생각이었습니다. 구 회장은 사람에 대한 차별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중역들이 그런 발언을 하는 것 자체가 금물이었죠.”
 
 
  1960년대에 정부 보증 없이 차관 도입해 화제
 
  박정희 정부가 기업들에 대해 ‘부정축재 환수’를 명했을 때, LG그룹은 전선 공장을 할당받았다. 하지만 다른 그룹에 비해 정부의 눈치는 비교적 덜 봤다는 것이 이헌조 전 회장의 증언이다. LG는 1960년대에 화학·전자와 같은 사업도식을 마친 상태이고, 정부의 계획에 따라 개발됐던 조선ㆍ자동차ㆍ건설업 등과 LG의 사업군(群)이 딱히 겹치지 않아서다.
 
  구인회 회장은 국민 생활에 편의를 제공하는 제품을 중심으로 사업을 시작해, 1950년대 초에 플라스틱 가공제품과 치약 등 생필품 생산을 하고 있었다. 금성사를 설립한 것이 1958년이었다. 라디오, 선풍기, 자동전화 등을 생산했고, 1960년대 들어서 TV, 에어컨, 세탁기로 품목을 다양화했다. 이후 석유화학산업에까지 진출하며 우리나라 근대 공업화의 기업군을 만들었다.
 
  1960년대 초반에는 정부의 지급 보증 없이 독일에서 차관을 들여와 업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해외에서 차관을 빌려오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런데 구인회 회장과 거래를 해왔던 독일의 한 회사가 500만 마르크를 선뜻 빌려준 것이다. 그것도 정부와 은행의 지급 보증을 요청하지도 않고서 말이다.
 
  이헌조 전 회장의 얘기다.
 
  “나중에는 정부에서 독일에 광부, 간호사를 보내면서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자 애쓰기도 했습니다만, 우리가 거래를 해온 독일의 ‘후에라이스터사’라는 회사에서 LG에 500만 마르크를 빌려줬습니다. 대한민국의 LG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다면서요. 그쪽 회사 대표가 구인회 회장을 참 좋아하고 깊이 신뢰했습니다. 정부의 지급 보증을 요청하지도 않고, 아무런 조건도 없이 우리에게 그 큰돈을 빌려줘서 한동안 화제가 됐습니다.”
 
 
  “저그 할아버지들끼리 돈 때문에 싸웠다 하면 우리를 우째 생각하겠노”
 
구인회 회장이 외부 파트너들과 회의를 하는 모습.

  구인회 회장은 ‘통이 큰 경영인’이었다.
 
  이헌조 전 회장의 얘기다.
 
  “5ㆍ16혁명이 끝나고 1964년에 민간 라디오 방송, 민간 TV 방송이 생겼습니다. 허가 신청을 하라고 해서 사돈지간인 이병철씨와 구인회 회장이 신청을 했습니다.(이병철 삼성 회장의 둘째 딸 숙희씨가 구인회씨의 셋째 며느리다-편집자 주). 그냥 사돈끼리 5대 5로 합작해서 방송을 하자고 합의를 하고 똑같이 투자를 했습니다. 그때 삼성은 라디오 서울을 맡고, LG는 민간TV를 하기로 했는데 시간이 길어지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까.
 
  “라디오는 투자 비용이 적게 들고 라디오 기기 보급률이 높아서 청취자의 반응이 빨랐습니다. 반면 TV는 시설비가 엄청나고, 수상기가 잘 보급되지 않아 수익이 잘 생기지 않았습니다. 합작회사이다 보니 이사회에서 자꾸 TV 쪽을 공격하게 된 겁니다. ‘TV는 왜 이익을 못 내고 자꾸 투자만 하라고 하느냐. 돈 내라는 것도 지겹다’면서요. 결국 LG가 삼성의 지분을 돈을 주고 인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합의를 하고 약속된 날에 우리 측 김주홍 전무가 찾아갔는데, 삼성에서 돈을 받지 않은 겁니다. 차일피일 미뤘는데 가만히 보니 우리의 생각과 좀 달랐습니다. 삼성에서 TV를 경영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죠. 그때 내부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어떻게요.
 
  “삼성이 우리가 그 대금을 내지 못할 정도로 약하다고 무시한 것이 아니냐, 락희가 해보자, 돈이 얼마 들어가더라도 TV만큼은 우리가 하자고 난리가 난 겁니다. 다른 회사 임원들까지 각오가 대단했지요. 다른 곳에서 돈을 벌어서 얼마를 쏟아붓더라도 우리가 해야겠다고 한 겁니다.”
 
  이 전 회장의 얘기에 따르면, 사돈 그룹인 삼성과 LG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을 정도의 상황이었다. 당시 이 전 회장은 교양 TV에서 상무로 파견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던 구인회 회장의 자택으로 가서 매일 보고를 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구인회 회장은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아이고 헌조야. 안 되겄다. 티비 삼성에 넘기자’ 이러는 겁니다. 제가 놀라서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습니다. 중역들도 각오가 대단한데 대체 왜 이러시느냐고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구 회장이 꼼짝도 않는 겁니다. 제 얘기를 한참 들으시더니 이러시데요.
 
  ‘아무리 그래도 안 되겄다. 내한테는 친손주, 이 회장한테는 외손주 아이고. 내 죽고 나서 저그 할아버지들끼리 돈 때문에 싸웠다 하면 우리를 우째 생각하겠노. 손주들 때문에라도 내가 물러날란다’고 했습니다. 돌아가신 다음에 손주들의 평가까지 생각을 한 겁니다. 유교적 사고방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에 나서는 동생 말려
 
  LG의 구씨 가문에는 직접 정치에 나선 사람이 있다. 국회 부의장을 지낸 구태회(具泰會) LS전선 명예회장이다. 구인회 회장의 동생인 구태회씨는 공화당 6ㆍ7ㆍ8대, 유정회 9대, 공화당 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헌조 전 회장은 “구인회 회장이 동생의 국회 진출을 말렸다”고 했다.
 
  “구인회 회장은 정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동생이 정치에 나섰을 때 하지 말라고 말렸지요. 사실 구태회씨가 정치에 나선 것은 당시 공화당에서 요청해서 이뤄진 일이었습니다. 결국 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까지 지냈지만, 구 회장은 기업인이 정치와 가까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구 회장은 정치에 대해서는 데면데면한 태도였지만, 우리나라 국민과 국가를 생각하는 마음만은 남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전쟁이 소용돌이치던 1950년대 초반에 플라스틱 제품을 만들었던 것은 국민들을 생각해서였다고 한다.
 
  구 회장은 “우리나라 국민들의 생필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기업이 생활용품을 제대로 만드는 것도 애국(愛國)하는 길이고, 전쟁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1954년에 국내 최초로 치약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구 회장은 “버터 먹는 미국 사람 치약하고 김치 먹는 한국 사람 치약은 달라야 한다. 우리에게 맞는 물건을 만들자”며 중역들을 독려했단다.
 
 
  한 번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해
 
  LG그룹이 추구하는 가치 중 하나는 인화(人和)다. 이헌조 전 회장은 “그룹을 이끌고 있는 기본 가치를 세운 것은 구인회 창업 회장”이라고 했다.
 
  그의 얘기다.
 
  “사람들이 서로 화합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창업 회장의 생각이었습니다. 창업 당시에는 회사가 작아서 주로 가까운 사람들이 회사 운영을 하다 보니, 서로 신뢰하면서 맡은 책임을 다하자는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구 회장이 강조하는 인화는 어정쩡한 가족주의나 온정주의가 아닙니다. 사전에 충분히 합의를 하고,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책임의식을 말하죠. 서로 합심(合心)해서 최상의 결과를 내자는 것이 그분의 생각이었습니다.”
 
  이헌조 전 회장의 얘기를 듣다 보니, 구인회 창업 회장은 사업보다는 ‘사농공상’ 중 ‘사’에 해당하는 학자의 길이 더 어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전 회장은 “학자적인 재질보다 경영자적 재질이 강했다”고 잘라 말했다.
 
  “구 회장은 현실 감각이 굉장히 강했습니다. 직원들을 믿고 맡겼다는 것이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경영을 맡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결단력이 강하다는 것은 본인이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게다가 창업 회장은 10대(代) 때부터 유달리 모험심이 강했다고 해요. 학교를 다니다 귀향해서 ‘조합체’를 만들어서 일했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죠. 남이 안 하는 것을 해보겠다는 도전 의욕도 유난히 강했고요. 한 번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하고야 마는 고집스러움이 있었습니다. 아마 구인회 회장 시절에 LG가 실패를 모르고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타고난 사업가였습니다.”
 
 
  가족 간에 이해관계 따지는 것 배격
 
구인회 창업회장.

  구씨 가문은 대가족이다. 이헌조 전 회장의 얘기에 따르면, 이들 가족에게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고 한다. 세뱃돈을 주는 경우도 그랬다. 가령 진학 전 아이는 얼마, 초등학생은 얼마, 중학생은 얼마라는 식(式)이었다. 이렇게 합리적으로 정해둬야 모든 가족의 불만이 없고 협조가 잘된다는 것이 창업 회장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구인회 회장은 자식들에게 ‘돈’에 대해 깐깐하게 가르쳤던 것으로 전해진다. 어떤 물건을 사면 사용기간을 정해 그때까지 아껴쓰도록 했고, 한푼의 돈도 헤프게 쓰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단다.
 
  LG가의 이런 가풍은 ‘장자우선주의’를 만들었다.
 
  이헌조 전 회장은 “구 회장이 작고한 다음에 동생들이 조카인 구자경 명예회장을 회장에 추대했다”며 “가족끼리 재산싸움이나 경영권을 둔 싸움을 하지 않는 것은 구인회 회장 시절부터 시작된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설명했다.
 
  구인회 회장은 집안 내부에서 서로 이윤을 더 챙기고자 싸우는 것을 철저하게 배격했다. 유교적인 사고에서 볼 때, 가까운 사람끼리 이해관계를 가지고 다투는 모양새가 좋지 않아서다.
 
  이 전 회장은 “구인회 회장이 돌아가실 때 가까운 친척만 100명 정도였다. 단 한 번도 트러블 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철저하게 유교적인 베이스가 있어서다”고 했다. 수십 년 동안 사돈기업으로서 회사를 함께 경영해 온 LG의 구씨 가문과 GS 허씨 가문이 그룹의 경영을 분리할 때에도 밖으로 잡음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대중교통 이용해 모임 참석
 
  구인회 회장 스스로도 자신에게 굉장히 엄격했다고 한다.
 
  본사가 있는 부산에 주로 거주했던 구 회장은 종종 서울의 반도호텔에 위치한 서울사무소에 오기 위해 서울역에 도착하면 늘 혼자였다. 다른 그룹은 회장들을 위해 몇몇 대형차가 준비됐다.
 
  이헌조 전 회장의 얘기다.
 
  “구 회장은 서울에 오실 때 직원들이 차편을 물으면 ‘너그들은 나오지 마라’고 했습니다. 예전에 마이크로패스라고 여러 사람이 같이 타는 택시가 있었어요. 큰 버스보다는 작고 택시보다는 큰 봉고 같은 거였죠. 그 차편을 이용해서 모임 장소까지 가곤 했습니다. 그때 금성사가 워낙 잘나갔고, 다른 회장들과 재력은 비슷했거든요. 누가 봤으면 회장이라는 생각을 못 할 정도로 소탈했습니다.”
 
  구 회장이 가장 즐겨 먹었던 음식 중 하나는 보신탕이었다.
 
  이헌조 전 회장은 과장 시절 을지로 3가 판매사무소에서 박승찬 당시 상무와 함께 라디오 판매 일을 했다. 구인회 회장은 서울에 오면 이곳을 곧장 찾곤 했다. 구 회장은 으레 박승찬 사장, 이 전 회장과 함께 청계천가에 있는 보신탕 집에서 한 끼를 해결했단다.
 
  이렇게 소탈한 모습 때문인지, 구 회장이 회사 업무에 한창이던 때에는 그 앞에서 토론이 벌어지기가 일쑤였단다. 구 회장이 직원들에게 권위적이지 않아서, 중역들은 회사의 중대 사항을 구 회장 앞에서 목소리 높여서 설명하고 간혹 다투기도 했다.
 
  이헌조 전 회장은 “구인회 회장은 결단력이 유달리 강했다. 중역들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도 무언가 결정할 일이 생길 때 우유부단한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연암 구인회. 그는 사농공상적 직업관이 투철한 시대에 어려운 공상의 길로 투신할 만큼 도전정신이 강한, 그래서 대한민국의 효시가 되는 사업을 개척한 대한민국 경제의 거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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