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별책부록
  1. 2011년 1월호

경부고속도로 건설 참여자의 증언

“도로혁명 없이 산업혁명 없다”(박정희)

글 : 尹永浩 신영기술개발주식회사 회장  
정리 : 徐喆仁 월간조선 기자  

  • 기사목록
  • 프린트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 첫 삽을 뜬 후 2년5개월 만인 1970년 7월 7일 완공됐다. 서울 양재동에서 부산 금정구 구서동까지 428km에 이르는 대역사(大役事)였다. 고속도로 개통 후 서울-부산 간의 거리가 15시간대에서 5시간대로 단축됐고, 자동차 산업 발전, 제철 수요 증대, 인접 도시 발전, 지방 공업단지 연결, 국토 균형 발전 등 다양한 시너지 효과가 창출됐다.

⊙ 군인 신분으로 국토 대동맥 건설에 참여할 수 있었던 건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준 행운
⊙ 박정희 대통령, 1·21 사태 불구하고 기공식 예정대로 진행
⊙ 육군 현역 장교 64명 현장 감독관으로 활약, 하도급자들 “감독관 지독하다”며 삽자루 내던지기도

尹永浩
⊙1925년생. 육군대 졸업. 한양대 토목공학과 졸업.
⊙제1102 야전공병단장, 제6군단 공병 여단장, 국방부 조달본부 건설국장, 제2군 사령부 공병부장,
    군수기지 사령부 종합보급창장 역임. 육군 준장으로 예편.
⊙상훈 : 보국훈장 천수장, 보국포장, 무공훈장 등 다수 수훈.
1969년 12월 부산-대구 간 고속도로 개통식에서 축하의 샴페인을 뿌리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역사적(歷史的)인 고속도로(高速道路) 공사(工事)에 나와서 훌륭한 업적(業績)을 남기고 원대복귀(原隊復歸)하는 것을 축하(祝賀)합니다. 앞으로도 군(軍)의 발전(發展)을 위하여 더욱 정진(精進) 있기를 빌며 성공(成功)을 기원(祈願)합니다.’
 
  1969년 2월 12일, 경부고속도로 건설 서울-수원 구간이 완료된 직후 박정희 대통령이 내게 써준 친필 서한이다. 이제 그만 군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일종의 귀대(歸隊) 허가서였다.
 
  육군본부 조달감실 검사과장(대령)이었던 나는 1967년 11월부터 1년 3개월 동안 경부고속도로 노선 선정 및 건설 현장 감독으로 복무했다. 돌이켜보면 군인 신분이었던 내가 국토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준 행운이었다.
 
  내가 경부고속도로 건설 준비를 위한 ‘청와대 파견단’으로 차출된 것은 1967년 11월 23일이었다. 그날 오후 공병감이던 박병순 장군이 급히 나를 호출했다. 그는 “윤 대령, 내일 아침 청와대에 들어가 봐야겠소”라고 말하곤 의아해하는 내게 그동안의 경위를 설명해 줬다.
 
  그 무렵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건설에 투입할 예산을 놓고 고심 중이었다. “먹고살 것도 없는 마당에 고속도로가 웬 말이냐”며 여야 정치인은 물론 언론의 반대가 극심한 가운데 추진된 단군 이래 최대 프로젝트였기 때문. 대통령은 가능하면 예산을 줄일 목적으로 5개 유관 기관에 고속도로 건설 추정 예산을 산출하도록 했다.
 
  그런데 건설부(650억원), 서울시(180억원), 재무부(280억원), 육본 공병감실(490억원), 현대건설(289억원) 등 추정액이 제각각인데다 격차가 많이 났다. 대통령은 추정 예산 보고서를 마지막으로 제출한 박병순 장군을 앞에 두고 “유관 부처에서 올린 추정 예산안이 모두 달라 내가 직접 재검토를 해야 할 것 같다”며 “재검토 작업을 도와줄 보좌관이 필요하니 감실(監室)로 돌아가거든 우수한 공병대령 한 사람과 중령 한 사람을 차출해 보내달라”고 했다. 박병순 장군은 귀대한 직후 과장들을 불러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을지’ 회의를 했고, 만장일치로 내가 적임자로 추천됐다는 내용이었다.
 
 
  군인 신분으로 청와대 파견
 
1968년 2월 1일 서울 원지동에서 거행된 경부 간 고속도로 기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이 발파 버튼을 누르고 있다.

  다음 날 청와대로 향하는 내 마음은 복잡했다. 대통령을 도와 민족 대역사(大役事)에 참여한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지만 여론의 반대를 무시하고 밀어붙여야 하는 상황이라 부담스러운 점도 없지 않았다.
 
  솔직히 당시 한국의 경제 사정이나 여건 등을 감안해 볼 때 고속도로를 건설할 상황은 아니라는 것에 나 역시 동조하는 바였다. 1967년 한국의 경제지표는 1인당 국민총생산(GNP) 142달러, 수출 3억2000만 달러로 낙후돼 있었다. 국민소득이 북한의 절반 수준일 정도로 경제 기반이 열악했다. 고속도로보다는 벼농사 기술 개발이 시급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청와대에 도착, 김학렬(金鶴烈) 비서관과 함께 대통령을 영접하러 갔다. 마침 비서실에서는 그해 3월 27일에 착공한 경인고속도로 공사의 문제점들을 검토하는 회의 준비가 한창이었다. 김 비서관은 “관계 부처의 장차관이 참석하는 대통령 주재 회의이니 함께 참석해 경청해 보자”고 했다. 내가 지정석에 앉으려 할 때 대통령이 입장했다. 대통령은 내 명찰을 보곤 “윤 대령 잘 왔시다, 같이 잘해 봅시다”라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회의가 끝난 후 대통령을 따라 집무실로 갔다. 집무실에 도착한 나는 두 번 놀랐다. 한 번은 대통령 집무실이 너무 초라해서 놀랐고, 또 한 번은 집무실 벽이 한반도 지도로 도배돼 있다시피 해서 놀랐다. 대통령은 “여보, 당장 급한 것이 두 가지”라며 “하나는 각 기관이 제출한 추정 예산안을 분석해 적정가를 산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어디로 도로를 낼지 노선을 정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우선 육군본부에 가서 서울-수원 간 지도를 100만분의 1에서부터 1200분의 1까지 각각 1부씩 구해 오라고 지시했다. 그것이 청와대 입성 후 내 첫 임무였다.
 
  그날 오후 지프에 단 트레일러 가득 지도를 싣고 청와대로 돌아왔다. 지도를 본 대통령은 “윤 대령, 육군대학 나왔지? 가지고 온 그 지도에 육군대학에서 배운 대로 색칠을 해다 주게” 라고 말했다. 나는 함께 차출된 박찬표 중령과 늦은 밤까지 색칠 작업을 했다. 다음 날 아침 완성된 지도를 본 대통령은 “바로 이거야”라면서 “이래야 정확한 도상 연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100만분의 1 지도로 시작해 작은 단위로 내려오면서 보면 확실히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대통령은 100만분의 1 지도를 내밀며 “이 지도에 그려져 있는 것을 참고로 해서 채색된 지도에 그려 넣어주게”라고 말했다. 펼쳐진 지도를 보니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예정 노선이 연필로 그려져 있었는데, 얼마나 그리고 지우고를 반복했는지 지도상에 인쇄된 글자들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다. 지도의 귀퉁이는 아예 닳아 없어진 상태였다. 선 한 줄 긋는 데 얼마나 고심했는지 그 흔적이 지도 곳곳에 역력했다.
 
  이날 건설부 소속의 박종생 기좌가 합류했고, 얼마 후 육군본부 공병감실 소속의 방동식 소령이 합류해 청와대 파견 요원은 4명이 됐다. 우리는 편의상 ‘청와대 파견단’으로 불렸지만 공식 명칭은 아니었다.
 
 
  1964년 訪獨 후 싹튼 고속도로 건설
 
완공된 직후의 경부고속도로.

  고속도로 건설 구상은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방문이 계기였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그 시절 대통령은 전용기가 없어 극동지역에 취항하고 있던 서독의 민항기 루프트한자를 일반 여행객들과 함께 타고 본에 도착했다. 박 대통령은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서독의 경제 발전 상황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중 가장 관심 있고 주의 깊게 관찰한 것은 독일 나치 정부 시절 건설된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이었다. 뤼프케 대통령은 당시 아우토반을 “독일 부흥의 상징”이라고 자랑했다.
 
  박 대통령은 수도 본에서 라인강을 따라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쾰른시(市)를 자동차로 방문했다. 당시 자동차는 시속 160km로 달렸다. 한국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였다. 박 대통령은 쾰른시를 왕복하는 동안 두 차례나 차에서 내려 노면 상태와 중앙분리대, 교차로 시설 등을 꼼꼼히 살폈다. 또한 안내를 담당했던 뤼프케 대통령의 의전실장에게 독일이 고속도로를 건설하게 된 동기부터, 건설비용, 관리 방법 등을 쉴 새 없이 질문했고, 수첩에 기록했다.
 
  서독 방문 중 박 대통령은 에르하르트 서독 수상의 말 중 두 가지를 가슴에 깊이 새기고 왔다. “국가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도로, 항만 등과 같은 기간시설의 정비가 선행돼야 한다”는 말과 “분단된 국가로서는 경제 번영만이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길”이라는 말이었다.
 
  가슴에 품었던 이때의 구상을 구체화하고 밖으로 표출한 것은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 때였다. 박 대통령은 그해 4월 29일 장충단 공원에서 가진 유세에서 선거 공약으로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5월에는 합동 기자회견을 통해 더욱 구체적인 복안까지 발표했다.
 
  고속도로 계획이 발표되자 정국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요동쳤다. 당시 김대중(金大中) 후보는 “전국의 도로 상태가 말이 아닌데, 지금 국가에서 외국 차관도 얻고 갖은 재원을 총동원해서 경부고속도로에 투입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비판했고, 김대중 후보 지원 유세를 했던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좁은 국토에 무슨 넓은 길이냐”며 반대했다. “국내 보유 자동차 수가 4만 대에 불과한데 무슨 고속도로냐, 부자들을 위한 도로가 될 것이다”며 목청을 높이는 지식인도 상당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했다. 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결심해 온 일인 듯했다.
 
 
  극비리에 노선 정찰 지시
 
  5개 관계 기관이 낸 예산안을 분석한 결과 내가 공사비의 적정선이라고 산출한 금액은 360억원이었다. 이 내용을 보고 대통령은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육군 공병대를 투입하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공사비가 많이 절감될 것이고 공사 진척도 빨라질 것 같은데 말이야”라고 말했다.
 
  마침 공병들의 교육장소가 마땅치 않아 고심하고 있던 터라 고속도로 공사장에서 우리 공병이 훈련 실습을 겸한다면 일석이조(一石二鳥)가 따로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주 좋은 생각이십니다”라고 답했다.
 
  대통령은 곧바로 이후락(李厚洛) 비서실장을 불러 “여보, 이거(고속도로 건설) 예산이 많이 드는데 공병을 투입하면 많이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렇게 추진해 봐”라고 지시했다. 이후락 비서실장은 “알았다”면서 “군 병력과 장비는 미국 고문관들이 권한을 쥐고 있어서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병력과 장비 차출을 협조해 주는 대가로 고속도로가 완공되면 미 군용 차량의 고속도로 사용료는 받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 그러면 될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 말이 계기가 되어 미 군용 차량은 현재까지도 고속도로 통행료를 면제받고 있다.
 
  공병부대 차출과 고속도로 추정 공사비가 결정된 어느 날 아침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집무실로 호출했다. 대통령은 “지난 일요일에 혼자 말죽거리까지 다녀왔는데, 사람들이 알아보고 몰려들어서 더 이상 가지 못했다”며 “윤 대령이 나 대신 수원까지 노선 정찰을 다녀와 어디로 길을 내면 좋을지 보고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날 박찬표 중령과 건설부 박종생 기좌를 지프에 태우고 박정희 대통령이 그린 노선을 따라 정찰에 나섰다. 출발하기 전 박 대통령은 두 가지 약속을 지켜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하나는 노선이 노출되면 주변 땅값이 오르니 정찰 중에는 아무도 만나지 말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좀 늦더라도 오늘 중으로 보고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수원까지 다녀오려면 시간이 많지 않았다. 서둘러 차를 몰아 한남동 부근의 한강변에 도착했다. 제3한강교가 놓이기 전이라 사공에게 “지프를 배에 실어 건널 수 있느냐”고 물으니 “처음이지만 한번 해보겠다”고 했다. 지프를 겨우 실어 한강을 건넜다. 한강 이남은 도로도 없는 황량한 모래벌판이었다. 구불구불 우마(牛馬)차가 다니는 농로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가급적 높은 곳에 올라가 머릿속에 조감도를 그리고, 장차 공사를 진행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사항을 빠짐없이 지도에 표기했다. 경사도와 토질, 골재를 채취할 만한 위치, 개천의 수량과 폭, 교량 건설 위치 등이었다.
 
  그렇게 수원 부근의 신갈 저수지에 도착하니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왼쪽은 신갈로, 오른쪽은 수원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우리는 고속도로가 복잡한 수원 시내를 관통하는 것보다는 신갈로 빠지는 것이 낫겠다 싶어 왼쪽 길을 택했다.
 
  점심도 거른 채 답사를 했지만 수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서둘러 국도를 타고 청와대에 도착하니 저녁 7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대통령은 이미 퇴청할 시간인데도 집무실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지도를 펼친 뒤 정찰한 곳의 이모저모를 보고했다. 대통령은 “내 생각도 그래, 내가 지도상으로 판단하고 구상했던 것과 비슷하군”이라고 말한 후 이후락 비서실장을 불렀다. 그러곤 “내일 건설부 장관, 서울시장, 경기도지사, 경제수석비서, 이후락 비서실장, 행정관리비서관들을 모두 소집해 주게”라고 지시했다. 이 비서실장이 “그럼, 내일 10시경으로 할까요?”라고 묻자 대통령은 “아니 10시라니, 한 시간이 아쉬운 이때 그렇게 늦으면 안 되지, 더 빨리 9시로 해”라고 말했다. 또한 내게도 참석하라고 했다.
 
 
  용지 매입 일주일 만에 끝내
 
  다음 날인 11월 28일 오전 9시 정각, 예정대로 대통령 주재하의 회의가 시작됐다. 대통령은 미리 준비해 놓은 5만분의 1 지도판 앞으로 다가서더니 서울-수원 간 고속도로 건설 예정 노선을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나서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에게 용지 매입을 서두르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경기도지사가 “땅이 얼마나 소요될지, 땅값이 얼마가 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구입을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대통령은 독도법(讀圖法)을 통해 면적 구하는 법을 쉽고 간결하게 설명한 후 나를 보면서 “윤 대령, 내가 설명한 것 중 틀린 것이 있으면 지적해 주게”라고 말했다. 단 한 군데도 틀린 곳이 없었을뿐더러 복잡한 계산법을 간결하게 설명해 내는 대통령의 숨은 실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으로 나온 질문은 용지 매입 시 평균지가를 얼마로 하느냐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내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고 미리 지가 조사를 해놓았다”며 캐비닛에서 서류철 한 권을 뽑아냈다. 시중의 두 개 은행이 고속도로 예정 노선의 지가를 비밀리에 조사한 자료였다. 이 자료에 따르면 고속도로 건설 예정지의 평균지가는 논이 평당 150~200원 내외이고, 임야는 100원 이하였다.
 
  자료를 면밀히 검토한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가 사전에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 이 시세로는 땅을 매입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 “나는 자료에 나온 가격대로 땅을 사려는 것이 아니오, 전답과 임야를 모두 합쳐서 평당 300원으로 예산을 배정해 줄 테니 평균 300원 이하로 매입하도록 하고, 남으면 농지구역 정리와 고속도로 진입로 건설에 쓰도록 하시오”라고 답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땅값이 춤을 출 것이기 때문에 용지 매입은 일주일 만에 끝내야 한다는 것이 대통령의 당부 사항이었다.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가 “일정이 너무 짧다”며 난감해 하자 이번에도 대통령이 해법을 내놓았다. 해당 군수와 면장, 이장들에게 얘기해 주민들을 설득시킨 후 동의를 받아내면 된다는 것이었다.
 
  용지 매입에 대한 논의가 끝나자 대통령은 건설부 장관에게 “예산은 부족하나 공사는 서둘러야 하니 설계상의 묘(妙)를 기해 예산을 최대한으로 절약하는 방법을 모색해 보라”고 했다. 개통 후 완공 보수를 하는 식으로 공기를 단축시키는 방법을 고안해 보라는 것이었다.
 
  회의 다음 날인 12월 14일 고속도로 공사를 효율적으로 추진할 조직이 발족됐다. 안경모(安京模) 전 교통부 장관을 단장으로 한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계획조사단(이하 계획조사단)이다. 기술반원 임명장을 받은 나 역시 이 조직에서 일을 하게 됐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고속도로 노선 선정’이었다. 서울-수원 구간은 이미 결정된 터라 수원-대전 구간 노선 선정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이한림 건설부장관이 1970년 7월 7일 아침 대전 인터체인지에서 준공테이프를 끊었다.

 
  유사시 군사적 목적에 부합되도록 설계
 
  이듬해인 1968년 1월 초 수원-대전 구간 역시 철저한 보안 속에 노선 선정 작업이 이뤄졌다. 선정에 앞서 우선 건설부가 제시한 안부터 검토해 봤다. 이 안은 기존 국도를 따라 고속도로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공사도 수월하고 공사비도 절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농토가 지나치게 많이 소요되고 국도와 고속도로가 인접하게 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었다. 북한의 충동적인 침투와 파괴 공작 등으로 국도와 고속도로가 동시에 파괴된다면 안보상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요소였다. 이 점은 박 대통령이 수시로 강조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대통령은 고속도로는 교통 기능뿐만 아니라 유사시 군사적 목적에도 부합할 수 있도록 건설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부고속도로 2개소를 비상 활주로로 겸용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이 같은 의지에서였다.
 
  서울-수원 구간과 마찬가지로 농로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며 수원-대전 구간 노선 정찰을 마치고 결과를 보고했다. 다음 날 대통령은 내가 답사한 구간을 직접 보겠다며 헬기 2대를 동원했다. 대통령은 책임자들을 분승시킨 후 “윤 대령, 자네는 선두 헬기에 타고 안내하게”라고 말했다.
 
  헬기가 평택 평야에 도달했을 즈음 뒤에 따라오던 헬기에서 착륙하라는 신호가 왔다. 헬기에서 내린 박 대통령은 “이 지역은 모두 농토인데, 고속도로가 이곳을 지나가면 농민들이 얼마나 싫어하겠는가.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라고 물었다. 안경모 단장이 “평택은 평야 지대라 어디로 가든 농토라 어쩔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자 금세 수긍했다 한다.
 
  헬기 답사를 마친 일행은 대전 비행장에 착륙해 유성온천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안경모 단장과 예비역 허필연 장군(후에 도로공사 사장)에게 “서울로 바로 가지 말고 왔던 길을 다시 한 번 훑어 보면서 가되 영동까지 갔다가 거기서부터 가자”고 했다. 대통령의 답사는 이렇듯 치밀하고 꼼꼼했다.
 
  그렇게 수원-대전 구간 노선이 확정되자 곧바로 대전-부산 구간 노선 선정에 들어갔다. 대통령은 험준한 산악지대인 대전-추풍령 구간 답사에 신경을 많이 썼다. 나는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L-19 경비행기를 타고 두 번이나 정찰을 했다. 그 과정에 급변하는 겨울철 기상 관계로 추락 직전까지 가는 일도 있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노선 선정은 고속도로 건설만큼이나 험난하면서도 빠르게 진행됐다. 전 구간 노선 선정이 확정되자 대통령은 고속도로 기공식을 1968년 2월 1일에 하기로 결정했다.
 
 
  기공식 9일 앞두고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
 
  이후 기공식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1·21사태로 불리는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 발생했다. 1·21사태는 북한의 124 군부대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정부 요인을 암살하라는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휴전선을 넘어 서울에 침투한 사건이다.
 
  기공식이 불과 9일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발생한 사건인데다 토벌 작전이 한창인데도 박 대통령은 일정을 바꾸지 않았다. 시공 일정이 결정된 이상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한 정해진 날에 차질 없이 진행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결국 계획했던 2월 1일 서울 영등포구 원지동(현 서초구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부근)에서 박 대통령을 비롯한 각 부처 정부 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이 거행됐다.
 
  식장에는 공사에 투입되는 공병부대의 각종 토건 장비가 도열돼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국내 건설회사에는 이렇다 할 장비가 없어 군 장비를 동원한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기공식에서 “고속도로 건설이 1970년대를 향한 한국 경제의 위대한 전진을 상징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기공식이 끝나자 육군 제1201 건설공병단 220공병대대가 차출돼 건설 현장에 투입됐다. 공병부대의 활약상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대통령은 이들 공병대원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수원-대전 구간에는 1202공병단에서 건설공병 1개 대대를, 대전-부산 구간에는 1203 건설공병단에서 1개 대대를 차출하여 현장에 투입했다. 이들 공병단은 어려운 공사 구간을 성공적으로 완성하고 원대 복귀했다.
 
  1980년 2월 15일 한국도로공사는 공병단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길이 남기기 위해 서울 한남대교에서 12.2km 떨어져 있는 곳에 20톤이 넘는 자연석으로 기념비를 세워주었다.
 
  서울-수원 구간 구역별 감독관은 64명의 현역 장교들이 맡았다. 고속도로 계획 단계 때부터 나는 대통령께 감독 임무를 현역 장교에게 맡길 것을 건의했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육군본부에 병력지원을 정식으로 요청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젊은 위관(尉官)급 장교들이 공사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현역 장교 출신의 감독관 선발 기준은 미혼이어야 하고, 월남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으며, 책임감이 강할 것 등 세 가지였다. 솔직히 까다로운 이 조건들을 모두 충족시킬 장교들이 과연 있을까 걱정됐다. 그런데 육군총장이나 공병감을 비롯해 군 수뇌부가 “국가백년대계를 위해 보람된 일에 참여하는 것이며, 전선에서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며 최선을 다해 병력을 차출해 준 덕분에 한숨 덜게 됐다.
 
  내가 현장감독으로 현역장교를 추천한 것은 열악한 업무 환경을 이겨내고 임무를 완주할 사람은 젊고 패기 있는 군인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의 활약상은 눈부셨다. 이들은 원리 원칙을 준수하려 노력했다. 시방서를 들고 다니며 조금이라도 시방서에 어긋나거나 차질이 발생하면 가차없이 재시공 내지는 공사를 중단시킬 정도로 철저히 관리 감독했다. 그 정도가 지나쳐 하도급자가 “내가 공사판 노동생활 30년에 이렇게 지독한 감독관은 처음 본다”며 삽자루를 내던지고 가버린 일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현장에 수시로 방문했다. 그때마다 내가 직접 공사 현황을 브리핑 했다. 박 대통령은 건의사항을 얘기하면 현장에서 바로바로 해결해 주곤 했다.
 
 
  현장에서 만난 정주영과 이명박
 
완공 40년이 흐른 2010년 경부고속도로 신갈 인터체인지 모습.

  1단계 구간 시공을 담당한 현대건설과 얽힌 일화가 많다. 한번은 현대건설이 달래내 고개에서 아스팔트 포장공사를 진행 중인데 감독관과 시비가 붙었다. 시공사 측은 완공이 눈앞이어서 밀어붙이려 했고, 감독관은 시방서대로 공사를 하지 않았으니 시정하기 전에는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며 가로막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 마침 정주영(鄭周永) 사장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 정 사장은 포장된 아스팔트 표면을 손바닥으로 쓸어보면서 “왜 이렇게 까다로운가”라며 짜증을 냈다. 그러곤 감독관의 지시대로 할 것을 직원들에게 당부하고 현장을 떠났다.
 
  내 기억에 정주영 사장은 박정희 대통령 못지않게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새벽 공사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현장에 나갔더니 정 사장의 검은색 지프가 세워져 있었다. 차 안을 들여다보니 밥그릇 하나가 놓여 있었다. 운전기사에게 “밥그릇은 뭐고, 정 사장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 “정 사장이 몸이 불편해서 죽을 먹고 있으며, 지금 중장비 정비소에 있다”고 답했다.
 
  잠시 후 현장에서 만난 정 사장에게 “사장님, 몸이 불편하시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침 새벽같이 나오셨네요”라고 인사말을 건넸다. 정 사장은 “나보다 더 일찍 나와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요, 뭘”이라고 답했다. “그분이 누군데요?”라고 묻자 그는 “이병철(삼성 창업주) 사장은 운전기사를 옆에 재우며 새벽 2, 3시에도 출동한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내가 “한 분(대통령) 더 계시는데요”라고 했더니 금방 알아차린 듯 “그분이야 더할 나위 없고요”라고 받아쳤다.
 
  당시 현대건설에는 정 사장 못지않게 부지런한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었다. 중장비 정비과장을 맡고 있던 이명박(李明博) 현 대통령이다. 그는 고장 난 중장비를 밤새 분해하고 조립하는 방법으로 연구해 정비 요령을 깨쳐 갔다. 외국에서 임차한 중고 중장비가 많아 고장이 잦은데 정비 전문가가 없어서 그가 직접 팔을 걷어붙인 것이었다. 그는 정 사장보다 현장에 먼저 나와 있는 유일한 직원이었다.
 
  이후 1단계 서울-수원 구간 공사가 마무리되어 갈 즈음 정주영 사장을 만났다. 그에게 “정 사장님, 이 공사에서 재미 보기는 틀린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했더니 “재미는 무슨 재미요”라고 말했다. 내가 “그런데 돈도 안되는 일에 왜 그토록 정성을 쏟아붓지요?”라고 물으니 그는 “장사란 게 그렇게 항상 남을 수야 있나요? 이익이 날 때도 있고 밑질 때도 있는 게지요. 아마 다음에는 좋은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고속도로 건설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얘기였다.
 
  투자 성과는 몇 년 후 엄청난 결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부고속도로가 세계적으로 가장 저렴한 공사비를 들여서 가장 빠르게 건설됐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현대건설이 해외 건설 프로젝트를 수없이 수주한 것이다.
 
  수많은 우여곡절과 시행착오 끝에 1968년 12월 21일 마침내 서울-수원 구간(31.3km) 공사가 마무리됐다. 시공 10개월21일 만이었다. 이와 별도로 1967년 3월 24일 착공한 서울-인천 간 고속도로(23.4km)도 같은 날 준공돼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있는 당중초등학교 교정에서 성대한 개통식이 거행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축하연설에서 “근대 산업국가에 있어 도로의 혁명 없이 산업의 혁명은 이루어질 수 없으며, 도로의 근대화 없이 산업의 근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며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는 1970년 7월경에는 서울-부산 간의 거리가 4시간대로 단축돼 우리나라 산업이 무한한 발전을 이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 연설이 끝난 후 유공자에 대한 훈장 표창이 있었다. 나는 4등 보국훈장을 받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30년 군 생활은 물론 80평생 중 가장 영광스러운 일로 남았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2206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북스토어
프리미엄결제
프리미엄 정보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