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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년 7월호

「2007 만점논술」통합 교과서 속 논제 읽기 - 민족주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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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제 예상 포인트]
● 민족이란 무엇이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가?
● 현대의 민족 개념을 고대사에 적용시킬 때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은 없는가?
●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민족주의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 여러 민족주의의 모습 중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방향은?
● 세계사적 보편성에 비추어 나타나는 우리나라의 특수성은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민족 문화의 이해
 
고려불상

  우리 조상들은 유구한 역사를 거치면서 슬기를 발휘하고 노력을 기울여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우리 문화는 다른 어느 민족의 그것과도 구별되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보편적 가치를 추구해 온 문화이다.
 
  선사 시대에는 아시아의 북방 문화와 연계되는 문화를 이룩하였고, 그 후 중국 문화와 깊은 연관을 맺으면서 독자적인 고대 문화를 발전시켰다. 고려 시대에는 불교를 정신적 이념으로 채택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유교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문화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와 유교는 외래 사상을 그대로 들여온 것이 아니라, 이를 한국화, 토착화시킴으로써 한국 사상으로서의 개성을 확립하였다. 즉, 우리 조상들은 불교와 유교를 소화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튼튼한 전통 문화의 기반 위에서 선진적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민족 문화 발전의 열쇠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민족 문화는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민족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민족 문화를 보존함과 아울러 이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려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다.
 
  흔히 현대를 세계화 시대라고 한다. 이는 정보 통신 기술과 교통의 발달로 점점 세계는 긴밀해지고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세계화 시대의 역사 의식은 안으로 민족 주체성을 견지하되, 밖으로는 외부 세계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개방적 민족주의에 기초하여야 한다. 내 것만이 최고라는 배타적 민족주의도, 내 것을 버리고 무조건 외래의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도 모두 세계화 시대에는 버려야 할 닫힌 사고이다.
 
  아울러 세계화 시대의 시대적 요청은 인류 사회의 평화와 복리 증진 등 인류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려는 진취적 역사 정신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 고등 학교 『윤리와 사상』(교육 인적 자원부)
 
 
  한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
 
  민족이란, 일정한 특징을 지닌 하나의 집합체이다. 어느 민족이건 민족으로서의 기본적인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모든 민족은 선후의 차이가 있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가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쌓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것은 민족에 작용하는 힘이나 압력,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노력이 공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록 모든 민족들이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의 역사는 각 민족에 따라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즉, 모든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에 하나의 일관된 법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사의 연구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각 민족과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일반화할 수 있는 법칙을 추론할 수 있어야 한다.
 
  - 고등 학교 『국사』(교육 인적 자원부)
 
 
  민족주의
 
프랑스 혁명

  역사적으로 볼 때, 민족주의를 뜻하는 내셔널리즘(nationalism)은 그 중심 개념인 ‘nation’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내용이 일정하지 않았다. 근대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내셔널리즘은 자유주의 시대에는 ‘국민주의’의 성격이 강했고, 제국주의 시대에는 ‘국가주의’적 성격이 짙었으며, 반식민지 시대에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성격이 짙었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주의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민 국가의 형성과 자본주의의 발전을 배경으로 성장한 서구의 민족주의는 프랑스 혁명을 통하여 국민주의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1870년대 이후에는 영토 확장과 경제적인 팽창 욕구에서 비롯된 제국주의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서구 열강들은, 국가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한다는 국가주의에 탐닉하여, 치열한 각축을 벌이면서 식민지 침탈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팽창 정책은 식민지 국가의 주민들에게 민족적 저항 의식을 크게 일깨워 주었고, 무엇보다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자결이라는 근대 민족주의적 과제를 새롭게 인식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유럽의 제국주의적 국가주의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저항적 민족주의가 형성될 수 있는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무솔리니(왼쪽)와 히틀러

  1930년대에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인종주의적 색채가 강한 나치즘이나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레닌 이후에 많은 공산주의자들도 공산화를 위해 민족주의를 전략적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넓은 지역에서 많은 민족들이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으며, 이들 국가들은 제3 세계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이들 신생 독립 국가들은 사회, 경제적으로 크게 낙후된 처지에서 대내적인 근대화와 대외적인 자주 독립을 성취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들 나라에서는 사회적 잠재력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기 위하여 또다시 민족주의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전후(戰後) 제3 세계의 집요한 근대화 노력이나, 이들 나라에서 한때 표방하였던 비동맹 정책 내지 중립 노선은 모두 민족주의의 표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민족주의는 시대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세계사 무대에 등장하였다. 즉, 민족주의는 역사적으로 자유 민주주의와 결합하기도 하고, 전체주의와 야합하기도 하며, 또 사회주의를 수용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민족주의는 역사 과정에서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결합함으로써 거대한 역사적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 고등 학교 『윤리와 사상』(교육 인적 자원부)
 
 
  ▣ 교과서 속 숨은 주제 이해하기
 
 
  국가주의와 결합한 민족주의
 
신채호

  우리 사회에는 ‘국가’ 혹은 ‘민족’에 대해 신성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혹시라도 부모님에게 “저는 대한민국이 싫어요, 나라가 나한테 해 준 게 뭐 있다고!, 아, 대한민국을 떠나 입시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고 해 보자. 일부 동의하시는 부모님이 계시겠지만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그래도 열심히 공부해서 나라를 빛내는(?)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타이르실 것이다. 이렇듯 지금까지 우리는 국가와 민족을 동일시하고 ‘반만 년을 이어 온 단군의 자손’임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국가는 개인보다 먼저 생겨난 것이 아니며, 절대 선(善)도 아니다. 잘 알고 있듯‘사회 계약’에 의해, 개인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또한 여러 인류학적 분석에서 보듯이 우리는 단군의 한 자손, 한 민족이 아니라 북방계 민족과 남방계 민족이 섞여 있는 나라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허위적인 국가와 민족 의식을 가지고 있을까? 이는 일제 강점기의 경험과 그 후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한 박정희 시대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일본에 의해 주권을 박탈당하고 식민 지배를 받는 시기에 ‘민족주의’는 식민지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다. 특히 신채호와 박은식은 한국의 저항적 민족주의를 만들어 낸 대표적인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제국주의의 질서 안에 편입되고 민족의 자치권을 잃게 된 상황을 비판하면서, 이것이 민족이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게 된 가장 기본적인 요인이라고 판단했고, 민족의 독립을 다른 어떤 조건보다도 우선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따라서 독립 운동은 이데올로기적인 지향을 떠나서 민족의 독립을 최고의 과제로 삼게 되었다.
 
박은식

  이후 우리나라는 독립이 되었지만 민족 자체의 희망과는 상관 없이 외세에 의해 분단되었다. 이것은 민족주의적 가치관이 독립 운동과는 또다른 내용과 성격을 가지면서 계승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식민지 시기의 민족주의가 국가의 ‘독립’을 최고의 목표로 상정했다면, 해방 이후의 민족주의는 ‘통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계속되고 있다.
 
  또한 박정희 정권 시절 경제 개발이 가속화되면서 또 하나의 민족주의가 자리잡았다. 이 시대의 정권은 부족한 내수 시장으로 인해 수출 주도 산업화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우리 ‘민족’ 모두가 잘살기 위해서는 한 마음으로 한 가족처럼(단군의 같은 자손으로서), 저임금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유포하게 된다. 이는 소위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의 모든 부분을 파고들었다. 최근 우리 사회를 혼란으로 빠지게 한 ‘황우석 사건’도 이러한 입장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민족주의를 좀 더 살펴보자!
 
  ‘민족주의(民族主義, nationalism)’라는 것은 단순하게 표현하면 민족을 다른 어떠한 가치관보다도 더 우선하는 것을 말한다. ‘민족’이라는 가치관은 개인이나 가족을 넘어서 절대적인 ‘선’이 되는 것이다. 민족은 같은 피를 갖고, 같은 인종이며, 같은 말을 사용하는 문화권과 경제권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나 수천 년 인류 역사를 거치면서 피와 인종은 섞이기 마련이며, 문화권과 경제권 역시 절대적인 순수성을 지키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민족이라는 것은 그 실체를 논리적으로 논하기 어렵기 때문에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을 말하기도 하며, ‘상상’속에서 만들어지는 관념적인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 민족주의는 근대 국가의 탄생과 함께 나타난다. 서양의 역사에서 근대 이전에는 민족이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근대 이전 서양에서는 강한 계급과 신분제로 인해 한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공통적인 의식을 만들어 내기 어려웠고, 정치적인 지배 역시 계급과 신분제, 그리고 종교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 이후 국가 간에 경계선이 생기고, 경계선 안의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의 민족에 속해 있다는 의식이 생겨나면서 민족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통일’이나 ‘독립’같은 말들이 생겨났다.
 
  우리나라에서는 위에서 보듯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민족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여러 변화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상태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광개토대왕비

  동북공정이란 ‘중국 동북 변강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연속적인 연구 프로젝트’를 말한다. 이것은 중국이 현재 자신의 영토인 만주 지역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말한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에서는 민족주의적 사관에 의해 고구려는 우리의 역사이고 이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는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며 중국의 패권주의를 나타내는 것이라 비판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동북공정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지금까지의 중국과 우리나라와의 입장과는 다르게 고구려사를 바라보자는 입장이 있다. 민족주의를 벗어나 고구려의 역사를 바라보자는 입장이다. 아래는 이러한 입장을 대표하는 한양대 사학과 임지현 교수의 글이다.
 
  지도 위에 컴퍼스와 연필로 확실한 선을 그어 결정되는 근대 국민 국가의 ‘국경’과는 달리 역사의 ‘변경’은 단일한 선을 가로질러 넘나드는 복수의 점들로 산포되어 있다. 변경은 이질적인 언어와 문화, 풍습 등을 지닌 다양한 종족들이 만나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서로 다른 문화의 가교가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다양한 문화가 혼합된 다이내믹한 독자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공간이다. 고구려의 역사가 가지는 의미도 한반도와 만주, 대륙의 서로 다른 문화와 종족 등이 혼합되어 만들어 간 다양성과 역동성 그리고 그것이 대륙과 한반도에 미친 영향력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사나 한국사 어느 한쪽에 귀속시킬 것이 아니라,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고구려인들을 역사적으로 복권시켜 그들에게 돌려 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쿠카와막부의 가신이자 조선 왕의 신하였던 쓰시마 영주와 그 섬의 과거를 일본사에서 구출하여, 동아시아의 문화를 풍요롭게 했던 ‘변경’의 역사로 복원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한국사로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오해하지는 마시기를!) 자신에게 익숙한 지역의 과거가 자기 민족만의 독점적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야말로 동아시아의 역사 인식이 갖는 큰 문제인 것이다. ‘과거는 외국’인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새 역사 교과서’가 함축하는 그들의 민족주의에 대한 한국의 주류 학계나 시민 사회의 대응은 우리의 민족주의였다. 19세기 독일의 문헌학적 전통이나 랑케류의 실증사학이 이미 독일의 역사를 발명하고 모든 나라의 국사를 창조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임에도, 한국의 역사학계가 반론으로 제시한 역사적 실체나 진실은 아무리 객관성이나 과학성으로 포장해도 한국의 민족주의적 역사 해석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중략)
 
  한국, 북한, 중국, 대만, 일본 등 동아시아 5개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국사’를 해체하고 국가의 멍에로부터 역사학을 민주화할 때, 동아시아 민중 연대와 평화 체제가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시민 사회의 역사 의식이 민족주의적으로 규율화되어 있는 한, 역사 전쟁은 소재와 형식을 달리하면서 끊임없이 지속되고 그것은 다시 동아시아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범 관계를 강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3의 입장은 민족주의를 벗어나 고구려사를 누구의 것도 아닌 고구려의 것으로 하자는 주장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현재의 영토를 유지하고 동북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패권적 측면이 강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에 대한 한국의 대응도 민족주의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제3의 입장의 경우도 역사는 단순한 학문이 아닌 정치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실현 가능성이 있을 것인가라는 비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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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東北工程)
동북공정은 한 마디로 ‘중국의 만주 및 동북아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동북공정은 중국 사회 과학원 산하 ‘중국변강사지구중심’의 주도하에 2002년 2월부터 추진되고 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개혁·개방 정책이 실시된 이후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회의감이 확산되고, 지역 간·계층 간·부문 간 빈부 격차로 인한 사회적 이완 현상도 심화되고 있다. 특히 잘사는 동남연해(沿海) 지역과 낙후된 내륙 지역 사이의 빈부 격차로 인해 내륙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소수 민족은 불만과 박탈감을 지니게 되었고, 신강 위구르 자치구, 서장 자치구(티베트)에서는 분리 독립 운동마저 일어나고 있다. 중국 동북 지구의 중국 동포(조선족)도 한중 수교 이래 한국인과 빈번하게 접촉하면서 중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을 빚기도 한다. 급기야 그들은 재외 동포 특별법의 제정을 통한 차별 철폐를 요구하거나 국적 회복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인 중에서도 백두산이나 고구려 문화 유적지를 방문하면 ‘만주=우리 땅’이라고 선전하는 사람도 있었다.
  ‘국민적·영토적 통합’을 강화해서 중국의 사회 안정을 도모하려는 중국 정부는 중국 동포를 비롯한 소수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시키는 일이 시급함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것은 역사 인식에도 반영되어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의 강화로 나타났다. 한편 1990년대 중반부터는 북한의 탈북자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이는 중국인에게 북한 정권의 붕괴 조짐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중국 당국에서는 탈북자 문제를 계기로 향후 한반도의 정세 변화가 중국 동북 지구 사회 안정에 미칠 영향이나 충격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동북아 질서가 한국과 미국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더욱이 한반도 형세 변화 과정에서 북한 사람들의 탈북 현상이 심화되고 이들이 ‘국제 난민’으로 변질될 경우 중국 동북지구는 ‘한민족의 근거지’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한국에 가서 돈을 벌려는 중국 동포들도 한반도 정세 변화의 과도기를 틈타 대규모로 한반도로 유입될 가능성도 높다.
  만일 그들이 기존의 불법 체류 중국 동포들 및 한국인과 섞여 살게 될 경우, 이들의 한국인화 현상은 점점 심해질 것이고 중국 국민으로서의 조선족의 정체성도 흔들릴 것이다. 이처럼 한반도와 중국 동북 지구에서 탈북자·조선족·북한인·한국인이 어울리게 될 경우 중국 동북지구와 한반도의 국경선은 모호해질 것이고 조선족 사회 및 중국 동북 지구에 대한 한반도의 영향력은 배가될 것이다. 이는 중국 조선족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흔들어 놓을 것이고 자칫 조선족의 분리 독립 운동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으며, 결국에는 중국 내 다른 소수 민족 지구에도 악영향을 미쳐 중국 사회의 안정을 해칠 수 있다.
  상술한 상황의 도래를 우려한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한국사’라는 종래의 관점을 뒤집고 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 새롭게 왜곡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관점의 변화는 한반도와 중국 동북 지구의 역사적·지정학적·민족적 관련성을 부정해야 한다는 중국 정부의 고육지책에서 파생된 것이다.
  - 고구려사 연구 재단


 
  세계화 시대의 민족주의
 
  바야흐로 세계화 시대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라고 하면 경제적 영역에서의 통합만을 생각한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해 생산 요소의 이동이 자유로워지고 이로 인해 국제적 분업이 일어나, 보다 효율적인 경제 생활이 가능해 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세계가 ‘분열’되는 양상도 함께 벌어지고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북미 자유 무역 협정(NAFTA)이 맺어지고, 유럽은 유럽 연합(EU)으로 통합되어 가고 있다. 아시아 지역은 일본을 중심으로 공동 화폐나 자유 무역 지대가 논의되고 있다. 세계 전체가 통합될 줄 알았던 세계화가, 실은 서너 개의 축으로 ‘각자’ 통합되고 있는 것이다.
 
  개별 국가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생산 요소의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기업들은 보다 저렴한 노동력, 자본 조달 및 운영을 찾아 세계를 떠돈다. 따라서 국가 간의 경쟁은 치열해 지며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선 국가 내부의 경쟁도 치열하게 될 수밖에 없다. 20대 80의 사회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개별 국가에서 ‘분열’이 생겨나게 된다. 즉 세계화는 단순한 통합이 아닌, 통합과 분열이 함께 일어나는 현상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세계화의 양상에서 민족주의는 어떠한 역할을 할까? 경쟁이 격화된 시대 민족주의는 대외적인 배타성과 대내적 획일성이란 면에서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국익’을 강조하면서 내부적인 통일성을 강화하고(이는 민주주의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국제적으로 적대적 관계를 조성시켜 평화를 위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문화, 학문, 예술 등에 경제 논리가 적용된 결과 획일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 - 미 FTA를 맺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축소한 스크린 쿼터다. 하지만, 바람직한 세계화는 ‘다양성의 공존으로 이루는 융합’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스스로 ‘차이’를 확보하는 것이다. 우리만의 문화와 학문을 현대화하여 세계로 들고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 다양성을 위해서도 먼저 차이를 마련해야 한다. 민족주의는 이러한 차이를 현실화하기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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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대 민족주의의 출발 (1)
신채호:독립 운동가이자 사학자, 언론인. 호는 단재. 충남 대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으며, 1901년 문동 학원의 강사로서 신규식 등과 함께 계몽 운동을 벌였다. 20세 때 성균관 박사가 되어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으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민족의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기자 <황성 신문> <대한 매일 신보> 등에 글을 실어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였다. 또한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등의 영웅전을 써서 민족 의식과 독립 정신을 북돋웠다.
  1907년에는 신민회에 들어가 국채 보상 운동에 참가하였고, 민족 중심의 역사관을 심어 주기 위해 옛 고구려 땅을 답사하는 한편,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상하이·베이징 등지에서 독립 투쟁을 전개하였다. 저서에 『조선 상고사』, 『조선사 연구초』 등이 있다. 1962년에 건국 훈장 대통령상이 주어졌다.



우리나라 근대 민족주의의 출발 (2)
박은식:독립 운동가이자 역사 학자, 언론인. 호는 겸곡, 백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898년에 장지연·신채호 등과 <황성 신문>을 창간하였고, 이어 <대한 매일 신보>의 주필로서 애국 사상을 고취하였다. 1908년 서북 학회의 활동을 주도하였고, 1911년 만주로 가서 역사서의 집필에 몰두하였다. 3·1운동 때에는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애국 노인단을 조직하고 항일 운동을 펴는 한편, 우리 나라 고대사와 고구려 위인전을 저술하였다. 1924년에 임시 정부의 국무 총리가 되고, 이듬해에 대통령에 뽑혔다가 물러나 병으로 일생을 마쳤다. 저서에 『안중근전』, 『조선 반도사』, 『조선사』, 『동명성왕실기』, 『한국 독립 운동 지혈사』, 『조선 고대사고』, 『한국 통사』, 『대동 민족사』 등이 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상이 주어졌다.



국민 국가(민족 국가)란 무엇인가?
중세 말기에 자연 경제의 붕괴, 상업의 발달,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과 더불어 출현하였다. 서유럽 제국의 왕권은 14∼15세기 무렵부터 급속히 세력을 신장하여, 생산과 교환의 자유를 바라던 신흥 상공업자와 손을 잡고 봉건 귀족의 세력을 눌러, 민족의 국가적 ·정치적 통일을 성취하였다. 당시에 자주 발생한 대외 전쟁도 국민 의식을 성장시켰고, 또 신분제 의회 역시 국내의 각 세력 사이에서 국민적 단결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중앙 집권적 통일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근대 국민 국가의 형식이 마련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봉건적 사회 질서를 기반으로 하는 것(절대주의)이어서, 귀족은 문벌적 특권에 의하여 국가의 중요 위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평민은 조세의 부담자로서 국가의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으면서도 정치적으로는 거의 권리를 가지지 못하는 위치에 머물렀다.
  자본주의가 한층 성숙하여 시민 계급이 성장하자, 그들은 노동자·농민과 함께 정치적 자유의 획득과 봉건적 사회 질서의 변혁을 외치면서 보수적 세력에 도전하였다. 이것이 시민 혁명이었고, 이어서 참다운 근대 사회가 성립하여 입헌정치·의회제·내각 책임제가 실현되었다. 이것이 민족 국가의 더욱 발전된 모습인데 영국에서는 17세기, 프랑스에서는 18세기 말기 이후가 이에 해당한다.



중국 내 조선족 인구
약 216만 명 정도로, 중국 조선족은 당의 민족 정책의 지도하에서 월경 민족으로부터 점차 자치 권리를 행사하는 중국 소수 민족으로 되었다. 하지만 중국 조선족은 발전 사상에서 홀시할 수 없는 사회 문제 즉 인구 문제가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개혁 개방과 사회주의 시장 경제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인구 문제는 더욱 두드러지게 제기되어 많은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조선족 인구가 하강됨에 따라 조선족 집거구의 파괴와 축소, 민족 학교 운영과 민족 교육의 이기, 농촌 총각들이 장가들기 힘든 사회 등 사회 역사적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자유 무역 협정(FTA)
둘 이상의 국가가 상호 무역 증진을 위해 물자나 서비스 이동을 자유화시키는 협정으로 시장 통합 성격의 특혜 무역 협정. 협정 발효와 동시에 모든 품목을 무관세화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국방 등 특수 분야 및 품목의 예외를 인정하기도 한다. 미국, 유럽 연합(EU), 동남 아시아 국가 연합(ASEAN), 멕시코는 10개국 이상과 FTA를 맺고 있다.


 
  ◎ 생각 정리하기
 
 
  [01] <보기>를 읽고, 우리나라 민족주의의 특징에 대해 서술하시오.
 
  [보 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넓은 지역에서 많은 민족들이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으며, 이들 국가들은 제3 세계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들 신생 독립 국가들은 사회, 경제적으로 크게 낙후된 처지에서 대내적인 근대화와 대외적인 자주 독립을 성취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들 나라에서는 사회적 잠재력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기 위하여 또다시 민족주의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전후(戰後) 제3 세계의 집요한 근대화 노력이나, 이들 나라에서 한때 표방하였던 비동맹 정책 내지 중립 노선은 모두 민족주의의 표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시답안]
  서양의 민족주의와는 다르게 우리나라의 민족주의는 외세의 침입에 대항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가지고 있는 ‘소중화’ 사상에서 보듯, 독자적인 민족 개념이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구한말 외세의 침입이 본격화되면서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의미의 민족주의가 출현하게 되고 우리나라 민족주의의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다.
 
문제해결 TIP
우리나라의 과거와 현재의 민족주의 개념을 생각해 보고, 그것이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어떻게 변해 갔는지 알아본다.

 
  [02] <보기>를 읽고, 공격적·팽창적 민족주의의 문제점을 역사적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하시오.
 
  [보 기]
  민족주의는 일반적으로 민족의 생활·전통·문화를 보존하여 국민 국가를 형성하고, 국가의 성립 후에는 그 독립성·통일성을 유지, 발전시킬 것을 추구하는 사상이나 움직임을 일컫는다. 역사적으로는 자기 민족을 다른 민족이나 국가와 구별하고 그 통일·독립·발전을 지향하는 사상 혹은 운동이며, 정치적으로는 민족을 사회 공동체의 기본 단위로 보고 그 자유 의지에 의하여 국가적 소속을 결정하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민족주의는 공격적·팽창적 민족주의와 방어적·저항적 민족주의로 나누어지게 된다. 강대국들은 공격적·팽창적 민족주의를 통하여 약소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으려 하고, 이에 대하여 약소국들은 스스로를 보존하고 민족 국가를 형성하기 위하여 강대국의 공격과 침략에 맞서 투쟁하였다.
 
  [예시답안]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며 통합적 측면에서 세계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공격적·팽창적 민족주의는 그 배타성으로 인해 세계의 평화를 위협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같은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민족주의는 수많은 인명 피해를 가져온 세계 대전을 유발하였다. 따라서 세계화 시대 ‘우리’ 민족만을 강조하는 공격적·팽창적 민족주의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성숙된 모습의 개방적 민족주의를 가져야겠다.
 
문제해결 TIP
공격적·팽창적 민족주의의 대표적 사례로는 식민 지배와 제1, 2차 세계 대전, 중동 지방의 갈등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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