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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77)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平壤市民衆大會에 나타난 ‘金日成 장군’

글 : 손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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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의 北韓占領政策의 기본방침은 1945년 9월 20일에 스탈린의 암호지령을 통해서 하달되었다. 그것은 소련군 점령 아래 있는 북한지역에 부르주아民主主義政權을 수립하라는 것이었다.
 
  滿洲에서 유격대 활동을 하다가 1940년 9월에 소련으로 피신하여 소련군 88독립보병여단의 대위로 있던 金日成은 1945년 9월에 일행 60여명과 함께 元山港에 상륙했다. 10월 3일에 ‘로마넨코司令部’가 설치됨에 따라 소련군의 점령정책이 본격적으로 가동했다.
 
  10월들어 북한의 독자적인 政權수립을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열린 北朝鮮五道人民委員會연합회의에서는 ‘北朝鮮自治機關組織의 基本原則’이 채택되고, 10월 초부터 몇 차례의 예비회의를 거쳐 10월 13일에 열린 西北五道黨責任者 및 熱誠者연합대회에서는 朝鮮共産黨北朝鮮分局을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회의 도중에 金日成은 開城 인근의 여현으로 가서 서울에서 간 朴憲永과 담판했다.
 
  金日成은 10월 14일에 열린 붉은 軍隊歡迎 평양시 민중대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그가 예상외로 젊은 것을 보고 술렁거렸다.
 

  1. ‘友好的인 政權’ 수립 위한 스탈린의 示必密指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1945년 8월 말까지 배치를 완료했다. 소련군 총수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미국정부는 4만명가량으로 추산했다.1) 소련군이 진주한 도(道), 시(市), 군(郡) 단위마다 경무사령부(警務司令部)가 설치되었다. 그것은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경무사령부는 처음에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나 무기와 재산의 보존과 같은 임무를 수행했으나, 해당 지역의 치안과 사회질서의 확립, 주민들의 경제 및 문화생활의 정상화, 소련군에 필요한 식량, 생활필수품, 연료의 확보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그에 따라 경무사령관은 법률의 효력을 지니는 명령과 지시를 발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을 때에는 소련군에 대한 적대행위로 처벌할 수 있었다.2)
 
 
  온건한 共産主義者 玄俊赫이 암살돼
 
   그러나 사회 혼란은 좀처럼 정돈되지 않았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과 마찬가지로 소련군도 구체적인 점령정책이 준비돼 있지 않았다. 일본의 붕괴 이후에 북한 각지에 출현한 자치기관 가운데에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민족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도(道) 단위로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동수로 행정기관을 구성하게 함에 따라 갈등을 빚게 된 것은 당연했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주도권 경쟁으로 내분이 심화되었다. 1945년 10월 중순까지 평양에서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1,090명이 체포된 사실만 보더라도 혼란상태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3) 소련군의 약탈과 부녀자 폭행 등도 계속되었다.
 
  혼란 속에서 9월 4일에 발생한 평남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이자 조선공산당 평남지구 책임자인 현준혁(玄俊赫)의 암살사건은 북한에서뿐만 아니라 서울 정계에도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해방정국 최초의 정치테러사건이었다.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이론적 바탕을 갖춘 온건한 공산주의자였던 현준혁은 조만식(曺晩植)과도 신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범인은 조만식과 현준혁이 같이 타고 있던 트럭이 도청 근처의 커브길에서 서행하는 틈을 타서 차에 뛰어올라 현준혁임을 확인한 뒤에 권총 1발을 발사했고, 현준혁은 즉사했다. 범인은 17~18세쯤 된 청년으로서 적위대(赤衛隊) 복장을 하고 있었다. 장례식은 이틀 뒤에 거행되었고, 유해는 평양진자(神社)가 있었던 장소에 매장되었다.4)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먼저 의심을 받은 것은 우익진영이었다. 거리마다 “백색테러에 의해 현준혁이 죽었다”라는 구호가 내걸렸고, 많은 우익 인사들에게 협박장이 날아들었다. 서울의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도 ‘조사(弔辭)’를 통하여 암살의 성격을 ‘백색테러’라고 주장했다.5)
 
평양의 ‘혁명열사능’에 있는 玄俊赫의 묘(중앙일보특별취재반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현준혁의 암살이 백색테러였다고 의심하는 근거의 하나로, 해방 직전에 박고봉(朴古峰)이 평양에서 조직한 우익단체 대동단(大同團)이 현준혁을 암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동단에 가입한 백관옥(白寬玉), 선우봉(鮮于鳳), 박진양(朴珍陽)은 현준혁이 8월 25일에 조선은 장차 소련과 같은 강한 나라의 연방이 되어야 한다는 방송을 한 것에 분격해서 암살을 결행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월남한 뒤에 서울에서 염응택(廉應澤, 일명 廉東振)과 함께 우익테러단체 백의사(白衣社)를 조직했다고 한다.6) 그러나 현준혁이 이러한 내용의 방송을 실제로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좌익 내부에서도 상호불신이 싹텄다.7) 범인이 또 한 사람의 공산주의 실력자인 장시우(張時雨)가 이끄는 적위대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 평남지부 안에는 현준혁과 장시우 사이에 알력이 심했다. 우익진영과의 합작을 중시하며 민족 독립의 완수를 사회주의의 실현보다 앞세운 현준혁과 소련군의 후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김용범(金鎔範), 박정애(朴正愛), 장시우 그룹 사이에 노선갈등이 있었던 것이다.8) 소련군은 범인 수사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고 보도도 통제했다. 그리하여 현준혁은 북한에서나 남한에서나 이내 잊히고 말았다. 현재 평양의 ‘혁명열사능’에 있는 현준혁의 묘비에는 그가 죽은 날짜가 9월 3일로 새겨져 있다.
 
 
  스탈린은 北韓에 부르주아民主主義정권 수립 指令
 
  소련의 북한점령정책이 명확해진 것은 9월 20일에 스탈린과 소련군 참모총장 안토노프(Aleksei I. Antonov)의 공동명의로 극동전선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Alexandr M. Vasileveskii)와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 및 제25군 군사회의 앞으로 보낸 암호지령을 통해서였다. 이 지령은 한반도 분단을 고착시키는 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현대사의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붉은 군대에 의한 북한점령과 관련하여 소련군최고사령부는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고 한 이 비밀지령은 7개항으로 되어 있다. 핵심은 (1)항 “북한 영토 안에 소비에트(의회) 및 그 밖의 소비에트정권의 기관을 수립하지 않으며, 또한 소비에트 질서를 도입하지 말 것”이라는 것과 (2)항 “북한에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및 조직의 광범한 블록(연합)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을 확립할 것”이었다.9) 분명히 소련군의 점령 아래 있는 북한지역에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라는 지시였다. 이 두 항목은 이 지령이 비밀해제된 1981년 이후에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가 1993년에야 공개되었다. 그때까지 이 문서가 비밀해제되지 않았던 이유는 소련이 한반도 분단의 책임을 져야 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10)
 
  지령은 이어 (3)항에서는 붉은 군대의 점령지역에 반일적인 민주주의 조직 및 정당이 결성되는 것을 방해하지 말고 그 활동을 원조하라고 했다. (4)항은 북한 주민들에게 붉은 군대가 북한에 진입한 것은 일본침략자의 분쇄가 목적이지 소비에트질서의 도입이나 한국영토의 획득이 목적이 아니며, 북한의 사유재산 및 공공재산은 소련군당국의 보호아래 둔다는 점을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지령에는 소련군의 만행과 관련된 항목도 있었다. “북한주둔부대에 대하여 기율을 지키고 주민의 감정을 해치지 말며, 예의바르게 행동하도록 지시할 것”이라고 한 (6)항이 그것이다. 그것은 소련군의 만행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지령은 마지막 (7)항에서 북한의 민간행정의 지시는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가 수행하라고 지시했는데, 이 (7)항도 1993년까지 공개되지 않았다.11)
 
  스탈린이 북한에 수립할 것을 촉구한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이란 서유럽의 역사에서 보는 부르주아 혁명에 따른 정권은 물론 아니었다. 그것은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1926년 8월에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명령하면서 제시한 부르주아 혁명단계의 권력형태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박헌영(朴憲永)의 ‘8월테제’도 한국혁명의 현 단계를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이라고 규정했다. 스탈린이 이 시점에서 북한에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심한 것은 9월 11일부터 10월 2일까지 열렸던 런던외상회의의 결렬을 계기로 미국과의 대결방침을 굳혔기 때문이었다.
 
 
  2. 붉은 軍隊 제88獨立步兵旅團의 金日成 대위
 
  제25군 군사위원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는 평양에 도착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슈티코프(T. F. Shtykov)로부터 긴급 전화를 받았다. 중간에서 도청을 할 수 없는 군전용의 무선전화였다. 한 달쯤 뒤에 제88독립보병여단의 김일성(金日成) 대위를 평양으로 들여보내겠으니까 그에게 주택과 자동차, 생필품 등을 지급하라는 지시였다. 뒷날 레베데프는 “순간 나는 일개 대위에게 주택과 자동차를 지급하라는 이 지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라고 술회했는데,12) 이 말은 이때까지도 레베데프가 김일성에 대하여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레베데프는 1주일 뒤인 9월 초의 어느 날 슈티코프로부터 다시 전통을 받았다. 김일성이 평양에 도착하면 그를 공산당에 입당시키고, 소련군 장교로 구성된 경호원들을 붙여 비밀리에 지방순회를 시키라는 지시였다.13)
 
 
  金日成은 누구인가?
 
하바로프스크 브야츠크촌에 남아 있는 소련군 제88독립보병여단본부 건물(김국후 『비록·평양의 소련군정』에서).
  이때에 김일성은 33세의 소련군 대위였다.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1912년에 평양 교외의 대동군(大同郡)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형직(金亨稷)은 소작농의 아들이었고, 어머니 강반석(康盤石)은 이웃마을 교회 장로의 딸이었다. 김일성은 열다섯살에 만주의 길림(吉林)으로 가서 육문중학(毓文中學)이라는 중국인 학교에 입학했다. 1932년에 안도(安圖)에서 조선인 무장대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김일성은 1936년에 중국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2군이 결성된 때에 제3사의 사장(師長)으로 임명되었다. 만주에서의 그의 유격대 활동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36년 10월 4일에 있었던 십육도구(十六道溝) 습격사건을 『조선일보(朝鮮日報)』가 보도한 것이 처음이었다.14) 그리고 이듬해 6월 4일에 압록강을 건너 혜산진(惠山鎭) 근처의 보천보(普天堡)를 습격함으로써 그의 이름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5) 보천보는 308호(한국인 280호, 일본인 26호, 중국인 2호)에 1,383명(한국인 1,323명, 일본인 50명, 중국인 10명)이 살고 경찰 5명이 상주하는 시골도시였다.16) 1936년의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정간되었다가 막 복간된 『동아일보(東亞日報)』는 1937년 6월5일자 호외에 이어 6일자, 7일자, 9일자 사회면 머리기사로 이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17) ‘김일성 장군’에 대한 대중의 막연한 설화(說話)가 실감 있게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런데 ‘김일성 장군’의 설화가 널리 유포된 것은 설화의 모호성 때문이기도 했다. 김성주 자신도 그랬던 것처럼 상당수의 항일유격대 지도자들이 여러 가지의 ‘김일성’(金日星, 金一星, 金一成, 金日成 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 모호성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모호성은 북한정권의 수립과정에서 그대로 김성주에게 유리한 카리스마로 이용되었다.18)
 
  김일성 부대의 가장 두드러진 전과는 1940년 3월 25일에 일본의 토벌부대인 마에다(前田) 부대를 화룡현 홍기하(和龍縣紅旗河)에서 전멸시킨 일이었다. 마에다 부대는 총원 140명가량의 병력 가운데 대장 마에다(前田武市)를 비롯한 120명이 몰살당했다. 비극적인 것은 마에다 부대의 구성원은 거의가 한국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19)
 
  1939년부터 유격대 활동에 대한 일본의 대규모 토벌작전이 시작되자 김일성 부대는 1940년 9월에 몇 명씩 소규모 인원으로 나뉘어 소련영내로 피신했다. 소련으로 피신하기 직전에 김일성은 같은 빨치산 유격대원인 김정숙(金貞淑)과 결혼했고, 김정숙은 1942년 2월에 보로시로프(Boroshirov) 근처의 야영(野營)에서 장남 김정일(金正日)을 낳았다.20)
 
  동북항일연군 부대는 1942년 8월에 소련국적의 나나이(Nanai)족 부대와 함께 붉은 군대 제88독립보병여단으로 편성되었다. 여단장은 동북항일연군 사령관 주보중(周保中), 부여단장은 치린스키(Silinskii) 소령, 정치부여단장은 이조린(李兆麟)이었고 한국인으로는 부참모장 최석천(崔石泉: 崔庸健)이 최고위직이었다. 88여단에는 소련공산당위원회와 중국공산당기관이 함께 설치되었는데, 중국공산당기관의 서기에 최용건, 부서기에 김일성이 선임되었다. 최용건과 김일성, 그리고 1944년 1월에 만주에서 야영지로 온 김책(金策) 세 사람이 88여단의 한국인 지도자였다. 최용건은 김일성보다 열두살, 김책은 아홉살 위였다. 그러나 국내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김일성뿐이었다.
 
 
  특수임무부대와 88여단
 
제88독립보병여단 간부들.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金日成이고 세 번째가 여단장인 중국인 周保中. 그 옆은 周保中의 부인(김국후 『비록·평양의 소련군정』에서).
  88독립보병여단의 창설지시는 스탈린이 직접 내린 것이었고, 이들에 대한 활용방안은 소련정부 차원에서 논의되었다.21) 소련은 이들을 대일전을 위한 단순정찰임무뿐만 아니라 전쟁 종결 뒤 정치적으로 활용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22)
 
  88독립보병여단은 소련이 대독전과 대일전에 대비하여 국경지대에 설치한 특수임무부대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소련의 국가비밀경찰기구인 내무인민위원회〔NKVD: 1946년에 국가보안부(MGB)로, 1954년에는 국가보안위원회(KGB)로 바뀜〕에서 내무인민위원장 베리아(Lavrenti P. Beria)를 보좌하면서 전선 후방의 첩보활동과 파괴공작활동을 하기 위한‘특수임무부대(Special Tasks)’의 기획과 실행을 담당했던 수도플라토프(Pavel A. Sudoplatov)의 회고는 꼼꼼히 톺아 볼 만하다.
 
  ‘특수임무부대’는 베리아의 직접 지휘 아래 운영되었다. 수도플라토프는 1941년 5월에 독-소전이 발발한 뒤에 자신이 내무인민위원회 첩보국 부책임자로서 특별 자동차 저격여단(Special-Purpose Motorized Brigade)을 창설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즉시 특수임무수행 기구로서 특별 자동차 저격여단을 창설했다. 중앙인민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소련 안의 모든 정치적 망명자들이 여단의 적극적 임무에 동원되었다. 우리는 독일인, 오스트리아인, 스페인인, 미국인, 중국인, 베트남인, 폴란드인, 체코인, 불가리아인, 루마니아인 등으로 이루어진 2천명의 외국인을 포함하는 2만명의 부대를 우리의 지휘 아래 두고 있었다.”23)
 
  소련안의 모든 정치적 망명자들이 동원되었고 그 가운데에는 중국인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다. 소련은 이미 대일전을 염두에 두고 특수임무를 수행할 부대의 편성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도플라토프는 1942년 2월에 내무인민위원회 제4국의 책임자로 승진했는데, 제4국의 6개과 가운데 2개과는 극동과 중국의 정세를 살피는 임무를 수행했다.24) 중국인 주보중이 이끄는 88독립보병여단이 창설된 것은 그해 6월이었는데, 88독립보병여단도 제4국의 지도 아래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스탈린에게 김일성을 천거한 것이 베리아였다는 이야기도25) 그러한 사정을 짐작하게 한다.
 
 
  韓國人 4명에 赤旗勳章
 
  1945년 7월이 되자 소련은 대일전쟁이 가까웠다면서 만주와 한국에 파견할 정보요원을 차출해 줄 것을 88여단에 요청했다. 주보중과 최용건은 상의하여 항일연군을 만주로 보낼 부대와 한국으로 보낼 부대로 나누기로 했다. 한국으로 갈 조선공작단 구성원으로는 김일성, 최용건, 김책, 안길(安吉), 서철(徐哲), 김일(金一), 최현(崔賢) 등이 선발되고, 단장은 김일성, 당위원회 서기에는 최용건이 선정되었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여 북한에서 공작을 벌이기로 한 것은 이때 결정된 것이었다.26)
 
  그러나 8월 9일에 소련의 대일전이 개시된 뒤에도 김일성을 비롯한 항일연군 소속 부대원들은 전쟁에 참가하지 못하고, 8월 15일까지 아무르(Amur) 강가에서 발이 묶여 있었다. 그것은 스탈린이 중국국민당정부를 의식하여 취한 조치였다. 스탈린은 이때에 얄타회담에서 확보한 중국이권을 국민당정부가 인정하도록 국민당정부의 행정원장 겸 외교부장 송자문(宋子文)과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8월 14일에 체결된 일련의 소-중협정 가운데에는 만주에 진입한 소련군은 국민당정부의 대표와 협력하여 중국의 기구와 군대를 창출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27)
 
  대일전이 종결되자 88여단은 8월 17일에 군사회의를 열어 항일연군에 소속되었던 부대를 57개의 접수소조로 나누어 소련군이 점령한 57개 지점 경무사령부의 고문격인 부사령관 직책으로 들여보내기로 결정했다.28) 8월 25일에는 한국에서의 공작이 예정된 88여단 제1대대 대원 60명의 명부가 확정되었는데, 김일성은 평양 주둔 소련군 경무사령부 부사령관으로 내정되었다.
 
  60명의 명부에는 계급, 직책,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해, 교육정도 등이 적혀 있었다. 이들 가운데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김일성을 포함하여 5명뿐이었고, 41명은 3년 이하의 초등 교육밖에 받지 못했다.29) 이들은 낮은 교육 수준 때문에 북한에 들어와서 대부분 당무나 정무를 맡지 못하고 보안경찰과 군사 방면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항일연군 그룹과 함께 88독립보병여단에서 활동하던 이동화(李東華), 유성철(兪成哲), 문에리(文日), 김봉률(金鳳律) 등 소련국적의 한국인 14명이 동행하게 되었다.
 
  8월 28일에는 제2극동방면군사령관 푸르카예프(Maksim A. Purkaev)의 명령으로 88독립보병여단 관계자들에게 적기훈장이 수여되었다. 적기훈장을 수여받은 사람은 부여단장 이조린 등 중국인 4명, 정치부장 셀레긴과 참모장 치린스키의 소련인 2명, 그리고 한국인은 김일성, 김책, 안길, 강건(姜健: 姜信泰) 4명이었다. 이상하게도 최용건의 이름은 빠져 있다.30)
 
  88독립보병여단 안에서의 김일성의 활동은 여단장 주보중과 여단에 배치된 소련군 지휘관들의 보고를 통하여 소련 극동군 사령부의 주목을 받았다. 실제로 레베데프는 소련 극동군사령부가 김일성을 장차 북한의 군부 지도자로 내정하고 입국시켰다고 증언했다.31)
 
 
  李承晩 귀국소식 듣고 金日成 귀국 서둘러
 
  스탈린이 9월 초에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호출하여 직접 면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극동군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의 일본어 통역관이었고 뒤에 소련공산당 국제부 일본과장이 된 코바렌코(I. I. Kovarenko)는 김일성이 귀국을 15일쯤 앞둔 9월 초에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의 면접을 받았다고 말했다. 코바렌코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9월 초에 극동군사령부에는 “극동군이 추천한 88여단의 김일성 대위를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보내라”는 스탈린의 긴급지시가 내려왔고, 김일성은 NKVD 극동본부 요원 2명의 호위를 받으며 군수송기편으로 모스크바로 갔다. 스탈린은 자신의 전용별장에서 4시간 동안 김일성을 면접했고, 면접을 마치면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다. 소련군은 이 사람에게 적극 협력하라”고 말했다. 스탈린을 만나고 돌아온 김일성은 코바렌코의 안내로 바실레프스키를 만났는데, 바실레프스키는 김일성에게 “평양에 들어가서 상관들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32) 스탈린이 소련에 망명했던 각국의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이 귀국할 때에 면접했던 것으로 보아, 이 증언은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33)
 
  김일성은 9월 19일에 원산(元山)항을 통하여 귀국했는데, 그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고 한다. 레베데프에 따르면 김일성의 귀국날짜가 빨라진 것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이 곧 귀국할 예정”이라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반소적인 이승만을 한국의 지도자로 내세울 것을 우려한 소련은 김일성을 서둘러 귀국시켰다는 것이다.34)
 
  귀국을 위한 이승만의 여권발급을 국무장관이 재가한 것은 9월 5일이었다.35) 샌프란시스코회의 이후로 소련이 이승만의 동정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은 런던외상회의의 준비를 위한 각종 정책문서에도 기술되어 있다.
 
  김일성이 귀국하기에 앞서 슈티코프는 레베데프에게 세 번째 전통을 보냈다. 김일성의 귀국사실을 당분간 절대 비밀에 부치고 초창기에는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당원을 전면에 내세우지 말고 민족진영의 조만식을 앞세우면서 김일성을 정치적으로 부상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라는 지시였다.36) 레베데프는 9월 18일에 원산시 경무사령관 쿠추모프(Vladimir Kuchumov)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임무’를 띤 동지들을 정중히 마중할 것을 지시했다.37)
 
 
  秋夕 전날 元山港에 上陸
 
1945년 9월 30일 저녁에 메클레르 중령(中)의 소개로 처음 만난 曺晩植과 金日成(『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9월 19일은 추석 전날이었다. 김일성 일행을 태운 푸카조프(Pukajov)호는 이날 오전에 원산항에 도착했다. 일행은 60명가량이었다.38) 마중 나온 사람은 경무사령부의 소련군 장교 2명을 비롯하여 원산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태성수(太成洙), 당조직부장 한일무(韓一武), 상공부장 박병섭(朴秉燮), 교육부 차장 정률(鄭律: 鄭尙進) 등이었다. 환영군중은 없었다.39)
 
  제일 먼저 배에서 내린 사람은 반백의 머리에 단정한 용모를 한 소련군 소령이었다. 정률은 그에게 다가가 “김일성 장군이시냐”고 물었다. 그는 뒷날 김일성의 주치의가 된 이동화였다. 이동화는 정률에게 김일성이 누구인지 알려주었다.40)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 복장을 하고 있었고 마중 나온 사람들에게 악수를 하면서 “김성주입니다”하고 인사했다. 그의 왼쪽 가슴에는 적기훈장이 달려 있었다.41)
 
  김일성은 원산에 도착한 날 밤에 이주하(李舟河)를 비롯한 그곳의 공산주의자들과 만났다고 한다.42) 이주하는 일본점령기부터 원산에서 노동운동을 주도해 온 인물이었다. 다른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원산에 도착하자마자 김동환(金東煥)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공산당을 합네하고 돌아다녀서 이주하는 부하들을 시켜 김일성을 잡아 가두었는데, 그러자 소련군으로부터 곧 그를 풀어주라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43) 이주하는 치스차코프(Ivan H. Chistiakov) 사령관이 원산을 방문했을 때에도 당원증 문제로 그와 말다툼을 벌였다고 한다.44) 이주하와 소련군 당국 및 그들이 지원하는 김일성과의 악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김일성은 같이 귀국한 부대원 간부들을 지방사정을 파악하도록 연고지로 내려보냈다. 김일은 평안북도로, 박성철(朴成哲)과 최충국(崔忠國)은 함경북도로, 김책은 함흥으로, 오진우(吳振宇)는 회령으로, 최현은 혜산으로 파견되었다.45) 김일성 자신은 원산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그곳을 출발하여 22일 오전에 평양에 도착했다.46) 그는 부관 문에리(文日)를 통역으로 대동하고 레베데프를 찾아갔다. 김일성은 원산항에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련 군복을 입고 적기훈장을 달고 있었다.47)
 
  레베데프는 김일성과 최용건 등에게 해방산 기슭의 벽돌집 한 채를 숙소로, 그곳에서 50미터쯤 떨어져 있는 2층 건물을 사무소로 제공하고 경비원을 배치했다. 일본의 고위관리가 사용하던 자동차도 제공했다. 그리고 김일성은 바로 평안남도 경무사령부의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48) 슈티코프는 김일성이 귀국한 뒤에 자신의 지시가 제대로 실행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전화를 레베데프에게 자주 했다.
 
 
  曺晩植과 金日成의 첫 대면
 
  김일성 일행을 귀국시키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연해주군관구 사령부는 정치국 차장 바빌로프(Vavylrov) 대령, 한국담당인 정치국 제7부장 메클레르(Gregory K. Mekler) 중령, 소련군 총정치국 차장 사포주니코프(V. G. Savoznikov) 소장, 25군 정치부장 그로모프(Alexander G. Gromov) 대령을 위원으로 하는 위원회를 조직하여 평양에 파견했다. 한국공산주의자들의 활동상황을 조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위원회는 국내 공산주의자들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메클레르가 박헌영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조직한 사실과 관련하여 박헌영과 서울중앙의 실제 활동을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月刊朝鮮』 2010년7월호, 「朝鮮人民共和國의 主席과 內務部長」참조). 위원회는 또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의 산만성과 사상적 미숙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로했다. 그들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격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49)
 
  메클레르는 9월 중순께 상부로부터 김일성이 평양에 도착하면 그를 데리고 각 지방에 다니며 주요인사들에게 소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술회했다.50) 메클레르는 9월 30일 저녁에 평양시내의 한 일본식 요정에서 조만식과 김일성의 첫 대면을 주선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김일성은 조만식에게 “선생님, 김일성입니다”하고 인사하면서 한국식으로 큰절을 했고, 조만식은 앉은 채로 약간 고개를 숙여 김일성의 절을 받았다고 한다.51) 조만식은 김일성보다 스물아홉살 연장이었다. 만찬이 세 시간가량 계속되는 동안 김일성은 겸손한 태도로 예의를 차렸고, 조만식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젊은 김일성을 상대로 말을 아끼면서 고개만 끄덕였다는 것이다.52)
 
 
  共産黨平南地區擴大會議가 人民共和國 부인
 
  스탈린의 비밀지령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지령이 하달된 지 사흘 만인 9월 25일에 조선공산당 평남지구확대위원회 명의로 발표된 “정치노선에 관하야”라는 제목의 문서이다. 조선공산당 평남지구확대위원회는 당이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자기 정치노선상에 부분적으로 편향을 범한 사실을 자기비판하고 다음 세 가지를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첫째로 국제문제의 이해부족으로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의 현재의 역사적 진보성을 모호하게 다루었다는 것이었다. 둘째로는 한국혁명의 현 단계는 자본혁명(부르주아혁명) 단계이므로 당면해서는 반일을 목적으로 하는 각 당파, 각 단체, 각 계급을 총망라한 대동단결로 단일의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잔재요소를 철저히 숙청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및 조직의 광범한 블록(연합)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을 북한에 확립하라는 스탈린의 지령 (2)항과 같은 맥락의 결정이었다. 그러므로 이 결정은 소련군 정치장교들을 통하여 스탈린의 지령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로는 현실적으로 가장 뜨거운 감자인 사유재산과 사유토지의 소유권 승인문제였다. 비친일적 민족대동단결을 위해서는 비친일가의 사유재산과 사유토지도 인정되어야 하며, 따라서 대지주의 토지는 제한 몰수한다고 한 이전의 강령은 취소한다고 선언했다.
 
  조선공산당 평남지구확대위원회는 이러한 결정과 함께 23개 항목의 「강령」을 발표했는데, 그것은 인민공화국의 시정방침이나 앞에서 본 박헌영의 「8월테제」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령」의 제1항에서 “인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라고 규정한 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것은 박헌영의 「8월테제」와 일치하는 결의를 하면서도 박헌영의 주도로 서울에 수립된 조선인민공화국과는 다른 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주장함으로써 사실상 서울의 인민공화국을 부인한 것이었다.53)
 
 
  政策집행기관으로 ‘로마넨코 司令部’ 설치
 
  소련군의 북한점령정책은 10월 3일 민정담당 부사령관직이 설치됨에 따라 본격적으로 가동됐다. 이 기구의 설치목적은 “일제에 의해 파괴된 경제를 복구하고, 정상적인 생활기반을 조성하며, 조선인민 자신의 국가권력 수립을 방조하는 문제 등을 담당하는”것이었다.54)
 
  소련군의 북한 진주가 끝나자 치스차코프 제25군사령관은 민간업무를 전담할 특별기관을 창설할 것을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메레츠코프(Kirill A. Meretskov)에게 건의했고, 이에 따라 메레츠코프는 연해주군관구에 소속된 제35군 군사위원 로마넨코(Andrei A. Romanenko) 소장을 제25군의 민정담당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극동러시아에서 태어난 로마넨코는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뒤로 오랫동안 정보와 정치공작계통에서 경력을 쌓은 인물이었다. 치스차코프는 로마넨코가 “훌륭한 조직활동가이며 경험있는 정치일꾼”이고 “선량하고 공명정대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55)
 
  로마넨코는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슈티코프가 군관구 산하의 다른 부대에서 직접 선발한 각 분야의 전문가 장교들과 함께 9월 중순 평양에 도착했다. 민정담당 부사령관 휘하에 행정정치부, 사법검찰부, 산업부, 재정부, 상업조달부, 농림부, 통신부, 교통부, 보건부, 보안검열지도부가 설치되었다. 이 부서들을 통틀어 민정청, 민정부, 민정국, 민정사령부 등으로 불렀다. 이전의 평양세무서 건물에 간판도 없이 설치된 이 기관을 일반사람들은 흔히 ‘로마넨코 사령부’라고 불렀다.56)
 
  제35군 정치부장 출신인 이그나치예프(Aleksandr M. Ignat′ev) 대령이 부장을 맡은 행정정치부는 북한정권의 뼈대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이그나치예프는 인민위원회나 정당 및 사회단체 지도자들의 관리를 책임졌고, 특히 북한의 간부 양성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했다. 사법검찰부는 법률과 사법체계의 정비사업을, 검열보안지도부는 무력과 경찰분야 및 행정기관의 해당부서를 지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민정사령부는 북한의 행정 및 경제기구의 규모와 사업이 확대됨에 따라 1947년 5월에 주조선소련민정국으로 확대 개편되었다.57)
 
  민정사령부의 점령정책 수행은 각 지방에 설치된 경무사령부가 지방별 인민위원회를 지도하는 방식으로 실행되었다. 레베데프는 각 지방의 인민위원회는 행정경험이나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경무사령부의 경험있고 정치적으로 훈련된 지휘관들이 매일 인민위원회 사람들과 만났고, “소련군인들은 인민위원회 사람들로 하여금 조선에 지주와 자본가가 없는 국가, 즉 사회(주의)체제를 건설하려는 의욕을 갖도록 고취시켰으며”, “소련군경무사령부의 존재는 민주적인 사회조직 사업과 민주적인 사회개혁을 방해하는 반인민적인 세력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적었다.58)
 
  민정기관의 개설과 때를 같이하여 도쿄의 소련대사관 관원이던 발라사노프(Gerasim M. Balasanov)가 치스차코프 사령관의 정치고문으로 부임했다. 발라사노프는 민정사령부와 별도로 사령부 직속의 정보참모팀을 만들어 핵심 역할을 했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소련 외무성 소속의 외교관이었으나, 실제로는 베리아 휘하의 NKVD 소속 현역 대령이었다.59)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북한의 소련군은 정권을 한국인들에게 이양하고 간접통치를 한다고 인식하고, 미군정부에도 그렇게 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3. 北韓의 독자적인 共産黨 조직 主導
 
  로마넨코 민정담당부사령관 휘하의 기관 설립이 끝나자 소련군사령부는 스탈린이 지시한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 수립 작업에 착수했다. 도(道)별로 산만하게 운영되던 행정기관들의 중앙연합체를 결성하고 북한의 독자적인 공산당을 조직하는 일이었다. 그 작업을 위해 레베데프를 비롯하여 민정담당 부사령관 로마넨코 소장, 정치고문 발라사노프 대령, 25군 정치부장 그로모프 대령, 민정사령부 정치부장 이그나치예프 대령 등 정치장교들은 긴급회의를 열었다.60)
 
 
  各道 人民委員會의 聯合體 구성
 
  치스차코프는 먼저 각 도 인민위원회 책임자들을 평양으로 불러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북조선 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를 개최했다. 회의는 북조선 5도연합회의, 5도대표자협의회, 북조선 5도대회라고도 불렸다. 소련군 장교클럽이 되어 있는 옛 공회당의 태극기와 소련국기가 걸린 연단 왼쪽에는 치스차코프, 레베데프, 로마넨코, 이그나치예프 등 소련군 수뇌들이 앉고 오른쪽에는 조만식을 비롯한 각 도 대표 인사들이 앉았다. 회의에는 170명(소련군 대표 20명, 지방인민위원회 대표 111명, 평양의 각계 인사 39명)이 참석했다.61) 회의참석자들은 북한 지역 대표들만의 회의가 소집된 데 대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62) 김영환(金永煥)이라는 가명으로 북한의 독자적인 공산당 조직 활동을 벌이고 있던 김일성은 이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치스차코프는 개회사에서 소련군은 한국에 소비에트질서를 도입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지 않고, 반일적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의 광범한 동맹에 기초한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의 수립을 원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스탈린의 비밀지령의 (1)항과 (2)항을 공언한 것이다. 치스차코프는 이어 아직 전국적으로 중앙정부가 조직되어 있지 않고 지방에도 정권기관이 조직되지 않았다면서, 먼저 민주적인 방법으로 지방정권기관을 수립할 것을 촉구하고, 북한 5개도의 행정을 총괄적으로 수행할 중앙기관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63) 그러나 북한지역 인민위원회 대표들만의 회의소집에 불길한 예감을 느낀 조만식은 회의 진행 동안 한마디도 발언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조만식의 비서 오영진(吳泳鎭)은 “치스차코프는 머지않아 5도에서는 철도가 개통되어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으리라고 약속을 했으나, 38선 철폐와 통일조선에 대하여서는 일언반구도 개구하지 않았다”고 적었다.64)
 
  참석자들은 행정, 산업, 농업-상업-조달, 재정, 철도-교통의 5개 분과로 나뉘어 분과회의를 열었다. 분과회의는 레베데프, 로마넨코, 프루소프 등 소련군 군사회의 위원들이 각각 맡아서 진행시켰다.65)
 
  분과위원회에서 토의된 안건은 농산물 확충과 소련군을 위한 식량공출 문제, 군수공장을 민수공장으로 개편하는 문제, 금융재정문제, 지방기구의 정비 및 통일문제였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심각한 토의안건은 농산물 확충과 소련군을 위한 양곡공출문제였다. 양곡공출은 소련군이 각도별로 할당했는데, 참석자들은 “도별로 붉은 군대의 엄청난 숫자의 양곡공출을 할당받고도 아무런 불평과 반대를 표명하지 못했다”고 한다.66) 그러나 곡물수매 사업은 부진하여 1945년 연말 현재 목표량의 20퍼센트밖에 달성하지 못했다.67) 평안북도인민위원회의 대표로 이 회의에 참석했던 함석헌(咸錫憲)은 “한마디로 해서 모든 것이 우리 생각과는 어긋나는 것뿐이었다”고 회고했다.68) 10월11일의 전체회의에서는 소련군사령부가 제출한 「북조선자치기관 조직의 기본원칙」이 채택되고, 북한에 중앙집중적인 경제관리기구를 설치하기 위한 결의들도 채택되었다.
 
  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가 끝나자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이튿날로 「북조선주둔 소련군제25군사령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69) 그것은 스탈린 비밀지령의 골자를 일반주민들에게 재천명하고, 구체적인 조치들을 명령한 것이었다. 「성명서」는 모든 반일 민주주의 정당 및 단체들의 결성과 활동을 허가한다고 천명하면서, 그러나 그러한 정당이나 단체들은 자신들의 강령 및 규약과 함께 지도기관의 인원명부를 인민위원회와 군경무사령관에게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제2항 제1조, 제3조). 그리고 모든 무장대는 해산하고 모든 무기와 탄약과 군용물자는 군경무사령관에게 바치라고 명령했다. 그 대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도임시인민위원회들은 소련군 사령부와의 협의 아래 “평민 중에서”일정한 수의 보안대를 조직하는 것을 허가한다고 했다(제2항 4조). 이 명령에 따라 10월 12일을 기하여 모든 무장부대는 해산되고, 지방치안 목적으로 새로 조직되는 보안대에는 소련군 사령부가 ‘평민’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70)
 
 
  金日成과 朴憲永의 첫 만남
 
  북한지역에 독자적인 공산당을 조직하는 작업은 10월 들어 비밀히 시작되었다. 레베데프에 따르면 이 작업도 “소련군 정치사령부의 기획과 연출로”추진되었다.71) 레베데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이북에 공산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조직위원회를 만들려고 생각했다. 소비에트화의 첫 코스였을 뿐만 아니라 남쪽의 당은 의식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서울에 당중앙이 있다는 어려움 때문에 여러 번 논의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 나중에 합치는 한이 있더라도 이북에 조직위원회를 두자고 제안했다. 그러다가 국내파의 강력한 반발과 (소련군 사령부의) 지도부 일부의 주장에 따라 분국(分局)으로 낙착되었다.”72)
 
  그러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창설문제는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함남지역 공산주의운동의 중심인물들인 오기섭(吳琪燮), 정달헌(鄭達憲), 이주하 등 박헌영을 지지하는 국내파가 레닌의 ‘일국일당(一國一黨)’원칙을 내세워 북한에 별도의 공산당 중앙부를 창설하는 구상에 강력히 반발했기 때문이다.
 
  각 지방의 공산당 비서들과 간부들이 소집되어 김일성의 사무실 건물에서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연합대회의 예비회의가 열렸다. 회의에는 이북5도당 대표들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박헌영의 재건파 대표는 물론 이영(李英), 최익한(崔益翰), 정백(鄭栢) 등 장안파공산당 인사들도 참석했다. 서로가 자신들의 정통성을 이 대회가 인정해 주기를 기대해서였다.
 
  10월 1일, 6일, 7~8일에 걸쳐 자유토론형식으로 진행된 예비회의에서는 별도의 당중앙부 설치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10일에서 12일 사이에는 예비회의가 없었다.73) 이 기간은 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가 열렸는데, 지방공산당 간부들 가운데에는 연합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비회의가 열리고 있는 10월 8일에 김일성은 개성 북쪽 여현(礪峴)에 있는 소련군 38선경비사령부로 가서 로마넨코가 지켜보는 가운데 서울에서 온 박헌영과 비밀회동을 가졌다. 그것은 두 사람의 운명적인 첫 대면이었다. 당중앙의 위치와 북조선분국 설치문제를 두고 두 사람의 의견은 대립했다. 로마넨코는 박헌영에게 공산당중앙을 북한에 두고 박헌영도 북한으로 올라와서 활동하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이튿날 아침까지 계속된 승강이 끝에 “중앙당에 속하되 북부지역 공산당조직을 지도할 수 있는 중간기구”로 북부조선분국을 설치하는 것으로 박헌영은 양보했다.74) 그 대신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연합대회가 자신들을 지원해 줄 것을 기대하고 참가한 장안파공산당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배격할 것을 약속한 것 같다.
 
 
  蘇聯軍將校가 國際情勢 강연
 
  10월 13일 오전 11시에 서울과 평양의 대표를 포함한 북한5도당대표 69명과 방청자를 합하여 180여명이 모여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연합대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로마넨코, 이그나치예프 등 소련군 민정부의 지도자들이 참석했다.75) 이 대회는 비밀리에 개최되었다. 김용범의 사회로 진행된76) 대회는, 11월에 서울에서 발행된 회의록에 따르면, 임시집행부 선거, 조선공산당책 박헌영 동무에게 축전 결의, 국제정세에 대한 강연, 당 및 공산주의자의 정치적 과업 보고, 당조직문제 보고, 지방정권 및 도당사업강화문제 보고, 조선공산당 북조선지방위원회 선거, 임시집행부 선거의 순서로 진행되었다.77)
 
  「박헌영 동무에게 보내는 전문」은 “스탈린 원수의 세계평화와 해방을 위한 참되고 위대한 정책 밑에 지도되는 붉은 군대의 영웅적 투쟁에 의하야 그 모든 유리한 조건이 실현되는 조선에서, 더욱이 북부조선에서 박헌영 동지의 정당한 노선을 밟아서 5도연합회의가 열리게 됨에 대하야 전 세계 무산계급의 조국인 소연방 스탈린 대원수께 감사를 드리는 동시에 조선무산계급의 영도자인 박헌영 동지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78)라고 박헌영의 권위를 스탈린의 권위와 병렬적으로 인정함으로써 국내파들의 분국창설반대 분위기를 무마했다.
 
  「국제정세에 대한 강연」을 한 사람은 뒷날 소련군 민정부의 상업 및 조달의 책임을 맡은 네우메이코프(I. S. Neumeikov) 대위였다.79) 네우메이코프는 소련군이 진주한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핀란드에서는 11월 18일에 독립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가 예정되어 있으나 영-미군이 진주한 나라들에서는 인민이 어떤 국가를 세울지도 모르는 형편이라고 말하고, 런던외상회의가 결렬된 사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어 「당 및 공산주의자의 정치적 과업 보고」는 함경남도 공산당의 중심인물 오기섭이 했다. 그는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박헌영을 중심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전시고압 밑에서도 “지하에서, 감옥에서, 광산과 공장에서”투쟁해 왔다고 말하고 “박동무의 강안(康安)과 우리 운동의 볼셰비키화를 위하여 기립하자”하고 회의참석자들의 기립을 유도함으로써 한국공산주의운동의 정통성이 국내파에 있음을 강조했다. 김일성 그룹 등에 대해서는 “조공(朝共) 운동의 확대강화를 위하여 해외에서 들어온 형제당원들에게 많은 기대를 한다”라고 간단히 언급했고, 장안파에 대해서는 트로츠키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이들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오기섭의 보고가 끝나자 토지문제에 관한 질의가 있고, 토론 끝에 현 단계에 적합한 전략을 쓰자는 데 의견이 일치되어 「토지문제 결정서」가 채택되었다. 내용은 앞에서 본 9월 25일의 조선공산당 평남지구확대위원회의 결의에서 표명된 토지문제에 관한 사항과 거의 같았다.80)
 
 
  基調演說이 된 金日成의 「黨組織問題報告」
 
  이 대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조직문제보고」였다. 보고자는 김일성이었다.81) 그것은 당조직 문제에 관한 보고이기는 했으나, 이 시점의 한국공산주의운동의 현황과 과제에 관한 광범위한 문제를 제기한 기조연설이었다. 김일성은 한국은 소련과 미국이 함께 들어와 해방시켜 주었다고 말하고, 현 단계는 노동자나 자본가나 모두가 참여하는 자본민주주의(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을 수립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과거 공산주의 운동은 비조직적이고 산만하고 자연발생적이었고, 게다가 국제조건도 불리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단정하고, 우리 민족을 해방시킨 연합군이 들어오자 “우리의 동무 박헌영은 모든 자유주의적 분파를 물리치고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일단 평가했다.82) 반면에 현 시점의 혁명단계를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규정한 이영, 최익한 등 장안파의 극좌적인 이론은 “스탈린 동무의 국제정책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83) 김일성은 또 공산당이 아직도 인텔리를 토대로 하고 있고 노동자, 농민을 토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각 도마다 공산당의 계급구성은 노동자가 30퍼센트밖에 되지 않으므로 노동자, 농민을 당에 많이 들어오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이어 당의 기율문제, 의무금 납부문제 등에 대해 언급하고 나서 (1)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위원회 설치문제 (2) 당규약기초문제 (3) 당원증발행문제 (4) 전당대회소집문제를 제의하여 전원 찬성으로 의결되었다.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 설치의 필요성을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 조선에 소-미군이 지역적으로 진주함에 따라 국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특수성을 띠고 있다. 따라서 남북부조선지역에서 양쪽의 지역적 특수성이 있다. 그러므로 조선에서 지리상 또는 정치적으로나 중심지인 서울에 당중앙이 있어서 남부조선의 사업을 치중함은 정치적 의의에서 정당하다고 인정한다. 우리는 북부조선의 모든 행정 기타 당의 정책을 실현시키는 데 더욱 당중앙과의 밀접한 지도와 연락이 요구되는 동시에 5도의 행정상 통제가 필요함에 따라 북부조선에 당북부분국 설치의 필요에서 당중앙에 직속된 분국을 설치할 것이다.…”84)
 
  그러면서 김일성은 이 분국은 중앙에서 필요를 인정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든지 “중앙에서 처리할 권리가 있고 분국은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덧붙였다. 요컨대 북한지역에서의 행정의 통제와 당정책의 효율적인 추진을 위하여 당중앙과 분립된 독자적인 공산당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朴憲永에게 全黨大會召集 촉구
 
  김일성의 「당조직문제보고」의 문제제기에 근거하여 「정치노선확립 조직확대강화에 관한 결정서」가 작성되었다. 조선공산당의 국제정세 인식과 토지문제 등 당면과제를 30개항목으로 정리하여 천명한 이 「결정서」는 (16)항에서 “북조선각도당부는 북부조선의 특수성을 보아 당의 볼셰비키화의 활동의 민활과 사업의 확대강화를 위하야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을 설치할 것을 결정한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마지막 (30)항은 “회의는 이영, 최익한, 정백 일파는 그 강령과 전술에서 좌경적 트로츠키적 오류일 뿐 아니라 조직문제에서 계급진영을 분열시키며 당규를 파괴하는 분파라고 규정한다”라고 하여 장안파를 공식으로 비판했다.85) 장안파에 대해서는 또 「좌익적 경향과 그 분파행동에 대한 비판」이라는 별도의 「결정서」로 그들의 “사회주의혁명 운운의 결정적 과오는 … 문제를 전체적으로 관찰 파악하지 못하고 고립적, 독선적으로 파악함으로써 현실을 무시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규정하고, 한국공산주의운동의 전통적 경향의 하나인 이러한 “무원칙한 조직활동의 혼란과 무정견한 이론의 창조”는 볼셰비키의 강력한 당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난날의 한국공산주의운동의 분파투쟁을 통틀어 비판했다.86) 이러한 결정에 따라 대회는 장안파에게 그들의 조직을 즉시 해산하고, 그들 조직의 소속 인원은 즉시 조선공산당기관에 일임하여 재편성케 하고, 당의 모든 규율에 복종하라는 지령을 내렸고, 장안파도 그것을 실행할 것을 약속하고 귀경했다.87)
 
  대회에서는 박헌영의 재건파공산당에 대해서도 심각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김일성은 「당조직문제보고」에서 “당 전국대표대회〔전당대회〕를 중앙에서 불러서 우리의 행동강령, 당원증, 당규(문제를 확정하고), 당내 민주주의로 선출한 간부를 강화하는 데 전국대표대회를 부르는 것이 필요”하고, “당대회는 국제형제당의 지지를 받는 당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8) 이 말에는 박헌영 일파에 의한 중앙당 운영의 무원칙성, 비조직성에 대한 심각한 비판이 내포되어 있었다.
 
 
  서울의 朝鮮人民共和國을 否認해
 
  전당대회 소집문제보다도 박헌영에게 더 치명적인 것은 9월 6일에 서울에서 선포된 조선인민공화국을 이 대회가 사실상 부인한 것이었다. 「정치노선확립 조직확대강화에 관한 결정서」는 (9)항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조선자본민주혁명의 기본과업은 토지문제이다. 외래의 ‘힘’에 의하야 민족해방은 획득하였으나 통일된 주권은 아직 수립치 못하였다. 통일된 유일한 인민의 의사를 대표한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함에서만 우리의 과업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89)
 
  조선공산당 평남지구확대위원회에 이어 5도당원 및 열성당원연합대회가 박헌영의 정치노선의 상징적 존재인 인민공화국의 권위를 부인한 것은 이 대회에서 창설하기로 결의한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의 위상이 출범과 동시에 사실상 서울 중앙의 위에 있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대회의 ‘기획과 연출’을 맡았던 소련군 정치사령부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대회의 마지막 순서는 새로 창설되는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의 집행위원 선거였다. 선거권 문제와 투표방법 문제는 도당 책임자들에게 일임하기로 하여 김일성, 김용범, 오기섭, 장시우, 박정애, 정달헌, 주영하, 안길 등 17명이 선출되었다. 북조선 분국의 상임위원은 5, 6명을 두기로 하고 이 인선은 집행부에 일임했다. 대회는 6시30분에 박수 속에 폐막했다.
 
  10월 20일에 집행부의 간부로 김일성과 긴밀한 협력관계에 있던 평양의 김용범이 제1비서에, 오기섭은 제2비서에 선출되고, 조직부장은 김일성과 같이 귀국한 소련파의 군의관 이동화, 선전부장과 산업부장에는 국내파의 윤상남(尹相南)과 정재달(鄭在達)이 각각 선임되었다. 그리고 11월 1일자로 창간된 분국 기관지 『정로(正路)』의 편집인은 소련파의 중등학교 교장 출신 태성수가 맡았다.90)
 
  박헌영은 열흘 뒤인 10월 23일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45년 10월 13일에 평양에서 열린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연합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설립에 대한 결정을 옳다고 보고 이를 승인함”이라는 문서를 발표했고, 이튿날 김용범은 박헌영의 승인내용을 전하는 편지를 지방의 각도당부로 발송했다.91) 이렇게 하여 마침내 북한에 독립적인 공산당이 조직되었다. 그런데 뒷날 북한에서는 이 대회가 10월 10일부터 13일까지 나흘동안 열렸다고 말하고, 10월 10일을 당창건일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의 대회결정서들과 “조선공산당의 주장”이라는 10월 30일자의 박헌영의 글이 발표된 11월 5일자 『해방일보』에는 처음으로 “조선의 청년영웅 김일성 장군 환영”이라는 박스 기사가 실렸다.
 
 
  平壤市民衆大會에 모습 드러낸 ‘金日成 장군’
 
平壤市民衆大會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金日成. 赤旗勳章을 달고 있다(Scalapino & Lee, Communism in Korea, Ⅰ.에서).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연합대회가 끝나자 김일성은 그날 저녁에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가 주최하는 환영간담회에 참석했다. 조만식 이외의 민족진영 위원들과는 첫 대면이었다. 평양시내 평화회관에서 열린 이 간담회에는 로마넨코 소장이 참석하여 김일성을 소개했다.92) 평양 시내에는 며칠 전부터 이튿날 붉은 군대 환영 평양시 민중대회가 열리고 이 자리에 ‘김일성 장군’이 참석한다는 소문이 널리 전해지고 있었다.
 
  10월 14일 오후 1시. 이날은 일요일이었다. 맑게 갠 가을 하늘이었다. 기림리(箕林里) 공설운동장에는 5만내지 6만명가량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김일성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단상에는 태극기와 연합국기가 촘촘히 게양되고, 치스차코프, 레베데프, 로마넨코 등 소련군사령부 간부들과 함께 조만식과 김일성이 자리했다. 레닌과 스탈린의 대형 초상화도 걸렸다. 대회는 김용범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소련국가와 ‘올드 랭 사인’곡의 애국가 연주에 이어 레베데프, 조만식, 김일성의 순으로 연설이 이어졌다.93)
 
  조만식은 열정적으로 30분 동안 연설을 했는데, 얼마나 흥분했는지 연설 도중에 안경이 떨어지기도 했다.94) 다음은 김일성 차례였다. 그는 왼쪽 가슴에 적기훈장을 달고 있었다. 로마넨코가 앞에 나와 김일성을 소개하며 군중의 박수를 유도했다.95) 그러나 군중은 3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이 원고를 들고 마이크 앞으로 다가서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날의 민중대회에 참석했던 오영진은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 대신에 30대 초반으로밖에 안 보이는 젊은 청년이 원고를 들고 마이크 앞으로 다가서자” 군중 사이에서는 “순식간에 불신과 실망과 불만과 분노의 감정이 전류처럼 전파되었다”고 적고 있다.96) 군중의 소란에 당황한 소련군은 공포를 쏘았고, 소란은 이내 가라앉았다.97) 김일성은 먼저 “우리의 해방과 자유를 위하여 싸운 붉은 군대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고 말하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했다.
 
  “36년간 우리를 압박하던 일본제국주의는 소련군의 영웅적 투쟁으로 멸망을 당하였다. … 조선민족은 이제부터 새 민주조선 건설에 힘을 합하여 나가야 하겠다. 어떠한 당파나 개인만으로 이 위대한 사명을 완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노력(勞力)을 가진 자는 노력을, 지식 있는 자는 지식으로, 돈 있는 자는 돈으로,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주를 사랑하고, 전 민족이 완전히 대동단결하여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자! 조선독립 만세! 소련군대와 스탈린 대원수 만세! 조선민족의 굳은 단결 만세!”98)
 
  레베데프는 이날의 김일성의 연설문은 소련군 장교가 소련어로 작성한 것을 고려인이 번역한 것이라고 말했다.99) 그러나 “노력을 가진 자는 노력을 …”이라는 구절은 중국공산당이 1935년 8월 1일에 발표한 이른바 「8·1선언」, 곧 「항일구국을 위하여 전 동포에게 고하는 글」가운데 유명한 “돈 있는 자는 돈을 내고, 총 있는 자는 총을 내고, 식량 있는 자는 식량을 내고, 힘 있는 자는 힘을 내고, 전문기술 있는 자는 전문기술을 바쳐 우리 전 동포를 총동원하여 …”100)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었다. 그것은 김일성이 항일연군의 정치학습을 통하여 모택동(毛澤東)전략이론을 숙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 Department of State, North Korea: A Case Study in The Techniques of Takeover,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1, p. 12. 2) 전현수, 「소련군의 북한진주와 대북한정책」,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9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5, pp. 356~357. 3) 김광운, 『북한정치사연구Ⅰ ─ 건당·건국·건군의 역사』, 선인, 2003, p. 86 주 139).
 
  4) 劉基善 證言,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中央日報社, 1992, p. 130; 森田芳夫, 『朝鮮終戰の記錄』, 巖南堂書店, 1967, p. 188. 5) 『해방일보』 1945년 10월 3일자, 「玄俊赫동무를弔함」. 6) 이영신, 『비밀결사 白衣社 ─ 이영신의 현대사 발굴』, 알림문, 1993, pp. 82~86, pp. 103~117; 정병준, 『몽양여운형평전』, 한울, 1995, pp. 484~485. 7) 森田芳夫, 앞의 책, p. 187. 8) 吳泳鎭, 『하나의 證言 ─ 作家의 手記』, 中央文化社, 1952, pp. 121~122; 韓載德, 『金日成을 告發한다 ─ 朝鮮勞動黨治下의 北韓回顧錄』, 內外文化社, 1965, p. 53; 劉基善 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133. 9) 『每日新聞』(東京) 1993년 2월16일자, 「ブルジョア民主政權を確立せよ」. 10) 和田春樹, 「分斷の“起源”示す」, 위와 같음; 이정식, 「스탈린의 한반도정책, 1945」,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pp. 178~205참조. 11) 國土統一院, 『蘇聯과 北韓과의 관계 ─ 1945~1980 ─』, 國土統一院, 1988, p. 39.
 
  12) 레베데프 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290. 13) 위와 같음, pp. 291~292. 14) 『朝鮮日報』1936년 10월 7일자, 서대숙 지음, 서주석 옮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9, p. 33. 15) 와다 하루끼 지음, 이종석 옮김,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작과비평사, 1992, pp. 157~160. 16) 위의 책, pp. 157~159. 17) 『東亞日報』 1937년 6월 5일자 號外, 6월 6일자 「普天堡被襲事件續報」, 6월 7일자 「普天堡事件被害判明」, 6월 9일자 「被襲된 普天堡」. 18) Dae-Sook Suh,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1948,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7, pp. 256~258. 19) 和田春樹, 『北朝鮮 ─ 遊擊隊國家の現在』, 岩波書店, 1998, pp. 40~41. 20) 위의 책, pp. 40~47.
 
  21) 기광서, 「1940년대 전반 소련군 88독립보병여단내 김일성그룹의 동향」, 『역사와 현실』28집, 1998. 6, pp. 262~264; 김국후, 『비록·평양의 소련군정 ─ 기록과 증언으로 본 북한정권 탄생비화』, 한울, 2008, pp. 55~56. 22) 김국후, 위의 책, p. 56. 23) Pavel Sudoplatov, Anatoli Sudoplatov with Jerrold L. and Leona P. Schecter, Special Tasks ─ The Memoirs of An Unwanted Witness ─ A Soviet Spy Master, Warenr Books, 1995, p. 126. 24) Ibid., p. 127. 25) 金昌順 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71. 26) 和田春樹, 앞의 책, p. 53. 27) 와다 하루끼 지음, 이종석 옮김, 앞의 책, p. 286. 28) 위의 책, p. 287.
 
  29) 和田春樹, 앞의 책, pp. 54~55; 김국후, 앞의 책, pp. 61~63. 30) 和田春樹, 위의 책, p. 56. 31) 레베데프 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p. 295~296. 32) 코바렌코 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하)』, 中央日報社, 1993, pp. 202~204; 김국후, 앞의 책, pp. 72~73. 33) 메클레르 證言, 김국후, 위의 책, p. 80. 34) 레베데프 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297. 35)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 The Man Behind The Myth, Greenwood Press, 1973, p. 210. 36) 레베데프 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p. 294~295. 37) 가브릴 코로트코프 지음, 어건주 옮김, 『스탈린과 김일성(Ⅰ)』, 東亞日報社, 1992, pp. 187~188. 38) 와다 하루끼 지음, 이종석 옮김, 앞의 책, p. 289; 김광운, 앞의 책, p. 114. 39) 정상진, 『아무르만에서 부르는 백조의 노래』, 지식산업사, 2005, p. 33. 40) 鄭尙進 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73. 41) 정상진, 앞의 책, p. 34. 42) 姜尙昊 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80; 『김일성동지회고록 ─ 세기와 더불어(계승본) (8)』, p. 476.
 
  43) 박갑동, 『박헌영 ─ 그 일대기를 통한 현대사의 재조명』, 인간사, 1983, p. 145; 심지연 지음, 『이주하연구』, 백산서당, 207, pp. 50~51; 姜尙昊 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81. 44) 정률 證言, 김국후, 앞의 책, p. 34. 45)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80. 46) 『김일성동지회고록 ─ 세기와 더불어(계승본) (8)』, p. 479. 47) 레베데프 證言, 김국후, 앞의 책, pp. 76~77. 48) 레베데프 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296; 김국후, 앞의 책, p. 77. 49) 전현수, 앞의 글, pp. 364~366. 50) 메클레르 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81. 51) 위의 책, pp. 48~51. 52) 같은 책, p. 55.
 
  53) 李圭泰, 『米ソの朝鮮占領政策と南北分斷體制の形成過程』, 信山社, 1997, pp. 176~177. 54) 기광서, 「소련의 대한반도-북한정책 관련기구 및 인물 분석: 해방~1948. 12」, 『현대북한연구』창간호,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1998, p. 134. 55) I. M. 치스차코프,「第25軍의 戰鬪行路」, 蘇聯科學아카데미東洋學硏究所(1976年版), 『朝鮮의 解放』, 國土統一院, 1988, p. 71. 56) 金昌順, 『北韓十五年史』, 知文閣, 1961, p. 52. 57) 기광서, 앞의 글, p. 135. 58) N. G. 레베데프, 「遂行하여야 할 義務를 自覺하며」, 『朝鮮의 解放』, p. 119, p. 125. 59) 김국후, 앞의 책, p. 86. 60) 레베데프 證言, 위의 책, p. 121.
 
  61) Erik van Ree, Socialism in One Zone ─ Stalin’s Policy in Korea, 1945-1947, Berg, 1989, p. 108. 62) 吳泳鎭, 앞의 책, p. 133. 63) 전현수, 앞의 글, pp. 360~361. 64) 吳泳鎭, 앞의 책, p. 134. 65) 전현수, 앞의 글, p. 363. 66) 吳泳鎭, 앞의 책, p. 135. 67) 朝鮮共産黨平南道委員會, 「朝鮮共産黨平南道第一次代表大會報告演說」, 『朝鮮共産黨文件資料集(1945~46)』, p. 68. 68) 咸錫憲, 「내가 겪은 新義州學生事件」, 『씨알의 소리』 제6호, 씨알의소리사, 1971년 11월, p. 38. 69) 『朝鮮中央年鑑 1949年版』, 朝鮮中央通信社, pp. 58~59. 70) 金昌順, 앞의 책, p. 51. 71) 레베데프 證言, 김국후, 앞의 책, p. 117. 72) 레베데프 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113.
 
  73) 전현수, 앞의 글, p. 366 주95); 김국후, 앞의 책, p. 116. 74) 徐容奎 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p. 108~111; 기광서, 「해방 후 김일성의 정치적 부상과 집권과정」, 『역사와 현실』 제48호, 한국역사연구회, 2003. 6, pp. 263~264. 75) 韓載德, 앞의 책, p. 136. 76) 和田春樹, 「朝鮮共産黨北部朝鮮分局の創設」, 『社會科學硏究』第42-3?, 東京大學, 1990, p. 17, p. 25. 77) 「五道黨員及熱誠者聯合大會會議錄」, 朝鮮産業勞動調査所 編, 『옳은 路線을 위하야』, 우리文化社, 1945, pp. 35~36. 78) 『옳은 路線을 위하야』, p. 36. 79) 전현수, 앞의 글, p. 366, 주95). 80) 「土地問題決定書」, 『옳은 路線을 위하야』, pp. 32~34. 81)전현수, 앞의 글, p. 366; 김광운, 앞의 책, p. 159;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 선인, 2005, p. 69. 82) 金○○, 「黨組織問題報告」, 『옳은 路線을 위하야』, pp. 47~48. 83) 위의 책, pp. 50~51.
 
  84) 같은 책, p. 53. 85) 「政治路線確立組織擴大强化에 관한 決定書」, 『옳은 路線을 위하야』, p. 61, p. 64. 86) 「左傾的傾向과 그 分派行動에 對한 批判」, 『옳은 路線을 위하야』. 87) 朝鮮共産黨當面政治對策協議會, 「反對派에 對한 聲明書」, 『옳은 路線을 위하야』, pp. 10~11. 88) 위의 글, p 29. 89) 「政治路線確立組織擴大强化에 관한 決定書」, 『옳은 路線을 위하야』, p. 60.
 
  90) 和田春樹, 앞의 책, p. 65; 서동만, 앞의 책, pp. 72~73. 91) 『解放日報』 1945년 11월 15일자, 「朝鮮共産黨北部朝鮮分局設置」. 92) 『平壤民報』 1945년 10월 15일자, 16일자, 「朝鮮解放 爲하여 血鬪二十年 民主建國말하는 金日成將軍」, 國史編纂委員會 編, 『北韓關係史料集 XII (1946~1951)』, 國史編纂委員會, 1991, p. 332; 森田芳夫, 앞의 책, p. 194. 93) 吳泳鎭, 앞의 책, p. 140; 『平壤民報』 1945년 10월 15일자(創刊號), 「錦繡江山을 震動시킨 十萬의 歡呼, 偉大한 愛國者金日成將軍도 參席, 平壤市民衆大會盛況」, 『北韓關係史料集 XII (1946~1951)』, p. 335; 韓載德, 앞의 책, pp. 61~63. 94) 메클레르 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89. 95) 韓載德, 앞의 책, p. 65. 96) 吳泳鎭, 앞의 책, pp. 141~142. 97) 徐容奎 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86. 98) 『平壤民報』 1945년 10월 15일자(創刊號), 「金日成將軍의 演說要旨」, 『北韓關係史料集 XII (1946~1951)』, p. 336; 『朝鮮中央年鑑 1949年版』, p. 63. 99) 레베데프 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88. 100) 西順藏 編, 『原典中國近代思想史(第六冊) ─ 國共分裂から解放戰爭まで』, 岩波書店, 1977, p.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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