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한국사 인물 탐험] 사회진화론에 함몰된 개화론자 尹致昊

독립협회 이끌며 입헌군주제 길 터
日帝를「황인종 대표」로 간주해 협력

신동준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황제(고종)가 말했기 때문에 朴泳孝를 반역자로 생각하는 인민은, 지금 寶位에 앉아 있는 허수아비보다 더 나은 통치자를 가질 자격이 없다』 (尹致昊 일기)

申東埈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高·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 박사(管仲 연구). 일본 東京大 객원연구원,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역임. 現 고려大 강사. 저서 「관중과 제환공」, 「통치학원론」, 「삼국지통치학」, 「조조통치론」, 「논어론」, 「공자의 군자학」, 「실록 열국지」, 「순자론」 등 20여 권.
부친 尹雄烈, 金弘集과 수신사로 訪日
尹致昊
  尹致昊(윤치호)는 高宗(고종) 2년(1865) 1월 충남 아산군에서 尹雄烈(윤웅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선조 때 정승판서를 여러 명 배출했으나, 高祖父(고조부) 이래 祖父(조부)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관직을 갖지 못한 鄕班(향반)이었다. 그의 부친 尹雄烈이 武科(무과)에 급제한 뒤 승승장구해 마침내 法部(법부)·軍部(군부)大臣이 되면서 일거에 일어났다. 尹致昊 자신은 學部(학부)·外部(외부)의 協辦(협판: 차관)을 역임했다.
 
  그의 조부 尹取東(윤취동)은 수원에서 살다가 아산으로 이주한 뒤 근면히 일해 富(부)를 축적했다. 그의 집안은 서서히 충남 아산의 부호로 자리 잡았다. 이런 가세에 힘입어 기골이 장대했던 尹雄烈은 약관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해 公州中軍(공주중군)을 시작으로 班家(반가)의 위세를 되찾기 시작했다.
 
  5세 때부터 글공부를 시작한 尹致昊는 워낙 총명해 집안의 큰 기대를 모았다. 그는 9세가 되는 高宗 10년(1873)에 서울 勝洞(승동)으로 이사와 魚允中(어윤중) 문하의 명망 있는 선생 밑에서 체계적으로 유학을 공부했다.
 
  15세 때인 高宗 16년(1879)에 貞洞(정동)의 姜氏(강씨) 집안과 정혼했다. 日帝(일제) 때 나온 「尹致昊선생약전」에 따르면, 소년 尹致昊는 과거에 급제해 충청감사나 전라감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은 高宗 13년(1976)에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 체결을 계기로 급격한 개항의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조약을 체결한 뒤 곧바로 예조참판 金紀秀(김기수)를 대표로 한 제1차 修信使(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해 양국의 修好(수호)를 다졌다. 4년 뒤에 다시 예조참의 金弘集(김홍집)을 대표로 한 제2차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했다. 이때 공교롭게도 尹雄烈이 別軍官(별군관)이 되어 金弘集을 수행했다. 이것이 尹致昊의 앞날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한 閔泳煥 일행. 앞줄 가운데가 閔泳煥, 그 왼쪽이 尹致昊.
 
  2차 수신사가 가져온 朝鮮策略의 파장
 
尹雄烈 일가의 사진.
  제2차 수신사는 제1차 때와 달리 일본 國情(국정)의 탐색과 인천 개항의 거절, 米穀(미곡) 수출의 금지, 海關稅則(해관세칙) 개정 등 현안 타결을 임무로 한 실무 외교사절이었다. 이들은 한 달간 도쿄에 머물며 협상을 벌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사절단은 일본 朝野(조야)의 명망가들과 접촉하며 국제정세에 관한 새로운 안목을 갖게 되었다.
 
  수신사 일행 모두 일본의 발전상에 크게 감명을 받고 조선의 조속한 개화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들은 귀국할 때 駐日(주일) 청국 참찬관 黃遵憲(황준헌)이 쓴 「朝鮮策略(조선책략)」을 가져왔다. 이 책은 국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조선책략」의 내용이 알려지자 곧바로 「衛正斥邪(위정척사)」를 기치로 내건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嶺南萬人疏(영남만인소)」를 呈納(정납)하는 등 개화반대운동을 격렬히 전개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크게 개화파와 위정척사파로 갈려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도쿄 체류 당시 일본 신식군대의 조직과 훈련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尹雄烈은 일본 朝野의 여러 인사들과 두루 접촉했다. 그는 도쿄에 머물고 있던 개화승 李東仁(이동인)의 소개로 駐日 영국공사관의 어네스트 사토 서기관과 점심을 같이 했다. 수신사 일행 58명 중 尹雄烈만이 유일하게 자리에 초대됐다.
 
  尹雄烈은 이런 인연을 계기로 귀국한 이듬해인 高宗 18년(1881) 4월에 신식군대인 「別技軍(별기군)」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면서 左副領官(좌부령관: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7세 때 朝士視察團으로 渡日
 
  얼마 후 尹致昊는 부친의 주선으로 「朝士視察團(조사시찰단)」의 일원이 되어 日本에 갔다. 「조사시찰단」은 흔히 「紳士遊覽團(신사유람단)」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정식 명칭이 아니라 일본 측이 임의로 붙인 것이다. 이들의 渡日(도일)은 결코 「유람」이 될 수 없었다.
 
  「조사시찰단」의 임무는 개화를 위한 근대 문물제도의 본격적인 시찰이었다. 「조사시찰단」이 파견될 때 淸나라에는 「領選使(영선사)」가 파견되었다. 당시만 해도 전래의 전통 위에 서양의 기예를 배우자는 소위 「中體西用(중체서용)」을 기치로 내건 淸나라의 「洋務運動(양무운동)」이 바람직한 개화의 한 유형으로 인식됐다.
 
  「조사시찰단」은 魚允中을 대표로 朴定陽(박정양)과 洪英植(홍영식) 등 閥門(벌문) 자제 12명의 朝士로 구성되어 있었다. 50명으로 구성된 수행원의 일원이 된 尹致昊는 兪吉濬(유길준)과 柳定秀(유정수), 金亮漢(김양한) 등과 함께 경제재정 부문을 담당하게 된 魚允中을 수행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일행 중 최연소였다.
 
  「조사시찰단」이 渡日하기까지는 적잖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조선책략」을 둘러싼 소요가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부득불 「東萊暗行御史(동래암행어사)」라는 이름으로 각자 동래에 집결한 뒤 비밀리에 일본으로 떠났다.
 
  魚允中을 대표로 한 시찰단은 석 달 동안 일본에 머물며 일본의 산업시설 등을 두루 살펴보면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비롯한 일본 朝野의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후쿠자와는 게이오의숙(慶應義塾)을 세운 당대의 대표적인 개화사상가로 「西洋事情(서양사정)」과 「文明論之槪略(문명론지개략)」 등을 저술해 일본의 문명개화를 촉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시찰단 일행은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조선의 조속한 개화 필요성을 절감했다. 魚允中이 귀국 직후 軍務通商(군무통상)과 富國强兵을 강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同人社 입교
 
尹致昊의 일본 유학을 격려한 魚允中.
  尹致昊를 비롯한 魚允中의 수행원들은 시찰단이 귀국한 뒤 모두 일본에 남아 新학문을 공부함으로써 최초의 일본유학생이 되었다. 兪吉濬과 柳定秀는 시찰단이 도쿄에 도착한 지 2주 만에 후쿠자와가 세운 게이오의숙에 입학했고, 尹致昊와 金亮漢은 각각 「도진샤(同人社)」와 造船所(조선소)에 들어갔다.
 
  도진샤는 후쿠자와와 더불어 가장 명망 높은 개화지식인인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가 1873년에 세운 학교였다. 당시 나카무라는 「西國立志編(서국입지편)」과 「自由之理(자유지리)」 등을 저술하며 도쿄大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尹致昊가 도진샤에 입학하게 된 것은 나카무라 등과 절친했던 일본의 외무경 이노우에 카우로(井上馨)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尹致昊가 입학할 당시 도진샤는 게이오의숙에 필적하는 명문사학으로 교세를 떨치며 한학과 수학, 영어 등을 가르치고 있었다.
 
  尹致昊는 도진샤에 다니며 高宗 20년(1883) 4월까지 약 2년 동안 서양학문을 익혔다. 훗날 尹致昊는 東亞日報 1930년 1월11일자에 게재된 인터뷰 기사 「풍우 20년: 韓末(한말) 政客(정객)의 회고담」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같이 술회했다.
 
  『나는 도진샤에 입학해 일본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우선 일본말부터 배워야 新문명을 가장 가까운 일본에서 수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도쿄에 도착한 지 17일째 되는 날 부친의 소개장을 들고 사토 서기관을 찾아갔다. 이때 사토는 尹致昊가 영어학습에 남다른 관심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직접 교습할 의향을 내비쳤으나, 尹致昊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숙소에 돌아와 주변사람들과 이 문제를 상의했다. 그러자 朝士인 洪英植이 격렬히 반대했다.
 
  『영어를 배우다니, 그것은 國禁(국금)을 범하는 것이다. 절대 안 될 일이다』
 
  그러나 魚允中은 尹致昊를 조용히 불러 영어를 열심히 배울 것을 격려했다. 이에 고무된 尹致昊는 이듬해 봄에 사토의 소개로 알게 된 도쿄大 철학과 교수 부인인 밀레트 여사로부터 알파벳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이해 5월의 일시 귀국으로 영어공부를 잠시 중단했다가 7월부터 다시 도쿄大 영어강사인 가나다노다케(神田乃武)를 소개받아 영어를 배웠다. 그러나 壬午軍亂(임오군란)의 발발로 이내 중단되고 말았다.
 
 
  임오군란時 일본의 개입 요청
 
  尹致昊는 軍亂의 소식을 듣자마자 게이오의숙의 유길준과 함께 사태의 수습책을 모색했다. 두 사람은 閔씨 척족이 추진하고 있는 개화정책이 수포로 돌아갈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일본 정부에 연명으로 上書(상서)해 軍亂에 적극 개입해 줄 것을 요청했다. 상서의 요지는 「일본이 조선에 병력을 파견할 경우 부작용이 크니 우선 군함을 보내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高宗을 구하고 軍亂의 책임자인 대원군 세력을 진압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귀국을 준비하던 중 시모노세키(下關)에서 金玉均 및 徐光範(서광범)과 만나 향후 대책을 협의했다. 이때 金玉均은 尹致昊에게 영어를 열심히 배워 후일을 대비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에 尹致昊는 귀국을 미룬 채 요코하마 주재 네덜란드영사관의 폴데르 서기관 등으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당시 淸國(청국)에 머물고 있던 金允植 등이 淸國 정부에 속히 군란을 진압해줄 것을 요구하자 淸軍이 먼저 서울로 진입해 대원군을 保定府(보정부)로 압송해 閔씨정권을 복원시켰다. 얼마 후 韓·日 양국 간에 濟物浦條約(제물포조약)이 체결되어 임오군란은 종식되었다.
 
  이를 계기로 조선의 개화세력은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모델로 하는 金玉均과 朴泳孝(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와 淸國의 洋務運動(양무운동)을 추종하는 金允植 및 魚允中 등의 온건개화파로 나뉘었다.
 
  尹致昊는 金玉均이 차관교섭차 재차 渡日하자 그와 행동을 같이했다. 그는 金玉均을 수행하며 일본의 朝野 인사들과 두루 접촉하는 중에 사토 서기관의 소개로 알게 된 도쿄大의 체임벌린 교수와 모스 교수, 駐日 영국공사 해리 파크스, 駐日 미국공사 빙엄 등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尹致昊는 이들 이외에 후쿠자와와 나카무라 등 일본 朝野의 인사들과 광범위한 접촉을 가지면서 조선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는 일본이 英·佛·獨 등 유럽 선진국의 장점을 취해 독자적인 일본식 軍制(군제)를 확립해 부국강병을 꾀하고 있는 사실에 감명을 받은 데 따른 것이었다.
 
 
  駐韓 미국공사 푸트와의 친분
 
   尹致昊는 高宗 19년(1882)의 韓美수호통상조약 체결을 계기로 이듬해 4월에 L.H. 푸트 초대 駐韓 미국공사가 조선에 부임하자 2년 동안의 일본 유학을 접고 통역 자격으로 푸트와 함께 귀국했다. 이는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등의 권유를 받아들인 데 따른 것이었다. 그는 귀국 직후 高宗에게 革古效新(혁고효신: 옛것을 고쳐 새로운 것을 배움)을 촉구하는 奏文(주문)을 올렸다.
 
  『일본은 30년 내외에 更張振作(경장진작)하여 文明富强(문명부강)해졌습니다. 일본이 60년에 걸쳐 외국과 통상한 淸나라보다 100배나 뛰어나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淸國은 옛것에 얽매여 있고, 일본은 능히 革古效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거울로 삼아 현명하게 대처해야만 합니다』
 
  일본 유학 동안의 체험이 尹致昊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는 귀국 직후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임명되어 미국공사관과 高宗 사이를 오가며 교량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高宗을 알현하거나 外衙門(외아문)을 방문하는 외국사절의 통역은 물론, 국서와 기타 중요한 외교문서의 번역을 담당했다. 귀국 후 1년 8개월 동안 그는 이런 역할을 수행하며 개화파 인사들과 수시로 회합해 국정개혁 방안을 모색했다.
 
  푸트 공사와 尹致昊는 師弟(사제)관계에 가까웠다. 尹致昊는 귀국 직후 푸트 공사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우리 군주는 사대당을 꺼리고 공사가 온 것을 대단히 환영합니다. 이런 사정이 나타난 것을 주목해 공사는 개화파를 위해 최선의 자문을 해주기 바랍니다』
 
  푸트는 尹致昊를 매개로 개화당 인사들과 부단히 접촉했고, 高宗의 자문에 응할 때마다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한 개화를 역설했다. 高宗은 이를 적극 수용했다. 중요사안이 있을 때마다 高宗은 푸트 공사에게 자문했다. 한때 高宗은 푸트와의 친분을 매개로 유사시 미국의 원조를 받아 淸나라의 간섭을 배제하려고 했었다.
 
공사관으로 출근하는 푸트 駐韓 미국공사.
 
  2~3일에 한 번 高宗과 만나
 
  尹致昊는 高宗 20년(1883) 10월부터 이듬해인 高宗 21년(1884) 12월까지 400여 일 동안 무려 170회에 걸쳐 高宗을 拜見(배견)했다. 2~3일에 한 번꼴로 高宗과 만난 셈이다. 이는 尹致昊에 대한 高宗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高宗에 대한 尹致昊의 평가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군주 자질은 있으나 우유부단하여 과감한 실천력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尹致昊는 민비와 관련해서는 「天品(천품)은 총명하나 私心(사심)이 가득 찬 나머지 公害(공해)를 헤아리지 않고 있다」고 탄식했다. 다만 尹致昊는 高宗과 민비가 문명개화와 자주독립의 의지를 지닌 점만큼은 높이 평가했다.
 
  高宗과 민비 등이 개화를 통한 자주독립의 의지를 굳건히 한 데에는 淸國의 조선 정부에 대한 지나친 내정간섭이 중요 배경으로 작용했다. 조선주둔군 사령관인 廣東水師提督(광동수사제독) 우창칭(吳長慶)은 高宗을 이같이 위협한 바 있다.
 
  『내가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기에 와서 조선을 돕고 있으니 매사에 皇朝(황조)를 배반해서는 안 되오. 내년 봄에는 淸軍이 더욱 증파될 것이오』
 
  통상사무 담당관인 천수탕(陳樹棠)은 「조선은 淸國의 속국이다」는 내용의 방문을 남대문에 붙여 놓아 물의를 빚었다. 심지어 리훙장의 막료 중 일부 소장파는 차제에 조선을 東三省(동삼성)에 편입시키자는 소위 「조선병합론」을 전개했다.
 
  임오군란 이후 두 나라 관계는 전통적인 「事大字小(사대자소)」 관계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淸國의 특권을 주장하는 제국주의적 관계로 변질되고 있었다. 당시 개화파 인사들 내에서 淸國의 일방적인 내정간섭을 어떻게 벗어나느냐 하는 문제가 최대현안이었다.
 
 
  金玉均 등의 급진개화 노선에 반대
 
尹致昊의 사상적 기반인「사회적 진화론」의 창시자 허버트 스펜서.
  尹致昊가 金玉均 등 개화당 동지들과 정변을 모의하게 된 것은 高宗 21년(1884) 후반기 때부터이다. 그러나 정작 尹致昊는 구체적인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尹致昊는 정변을 반대했다. 「尹致昊 일기」에 따르면, 그는 부친을 찾아가 급진적인 정변을 반대하는 뜻을 밝힌 뒤 귀로에 金玉均의 정신적 代父(대부)인 劉大致(유대치)를 찾아가 이같이 만류했다.
 
  『개화당은 마땅히 시간을 갖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이는 金玉均이 쓴 「甲申日錄」의 해당 기록과 부합한다. 실제로 그는 金玉均을 찾아가 간곡히 만류했다. 푸트 공사도 尹致昊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 또한 개화당의 급진적인 행동을 제지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朴泳孝와 洪英植 등이 그를 찾아와 정변의 불가피성을 역설할 때 푸트 역시 이같이 만류했다.
 
  『마땅히 먼저 志士(지사)를 모으고 스스로 上寵(상총)을 견고히 한 뒤 때를 기다려 움직여야 하오. 만일 성사되지 않으면 역적의 이름으로 國暴(국폭)의 오명을 얻게 될 것이오』
 
  金玉均 등이 마지막 순간까지 푸트 공사와 尹씨 父子에게 거사계획을 비밀에 부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결국 尹致昊는 1884년 12월4일 저녁에 푸트 공사와 함께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 참석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유혈정변을 목도한 尹致昊는 아연실색했다. 그럼에도 정변 다음날인 12월5일 오전에 개화당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그의 부친 尹雄烈은 형조판서, 尹致昊는 외아문 參議(참의: 차관보)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尹씨 父子는 정변이 이내 실패로 끝날 것을 예감했다.
 
  『金玉均 등이 한 일은 무식한 처사이다. 이들은 이치를 몰라 무지하고 시세에 어두우니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이다』 (尹致昊 일기)
 
  과연 이들의 예언대로 淸軍이 대궐에 진입하는 것을 계기로 정변은 3일 만에 끝나고 말았다. 정변을 진압한 淸軍이 더욱 노골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갑신정변의 사후처리로 맺어진 淸·日 양국 간의 天津條約(천진조약)에 따라 양국 모두 군사를 철수하기로 약속했으나, 淸軍은 조선 정부의 요청을 이유로 계속 조선에 주둔했고, 내정간섭을 더욱 강화했다. 정변은 오히려 화를 더 키운 셈이 되었다.
 
  尹致昊는 「일기」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같이 개탄했다.
 
  『무릇 모든 정치는 木也(목야: 묄렌도르프)와 金左閤(김좌합: 좌의정 金弘集)이 호령하여 시행하지 않음이 없다. 木씨는 할아비, 김씨는 손자, 淸軍은 머리, 간사한 소인배는 수족이 되었다. 亡國(망국)의 조짐이 완연하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변 직후 尹씨 父子는 거사를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개화당 정부의 閣員(각원)으로 지명된 사실로 인해 적잖이 곤욕을 치렀다. 尹致昊가 푸트 공사와 함께 유엔스카이(袁世凱)의 군영에 머물고 있는 高宗을 알현해 자초지종을 고하자 高宗이 이같이 위로했다.
 
  『나는 너희 父子가 죄 없음을 알고 있다. 걱정하지 말라』
 
 
  『조선을 문명국의 손에 맡겨 인민을 惡政으로부터 구해야』
 
  그러나 尹致昊는 얼마 후 푸트 공사가 귀국하자 국내에 더 이상 머물러 있기 어렵다고 판단해 이내 淸國의 上海(상해)로 유학 갈 결심을 했다. 당초 尹致昊는 서양문명을 동경하며 미국 유학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왜 적대감까지 가지고 있던 淸國으로 유학을 떠난 것일까? 미국 유학에 따른 막대한 경비 때문이었다. 차선책인 일본 유학 역시 세인들이 그를 소위 「일본당」으로 의심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의치 않았다. 그의 淸國 유학은 부득이한 상황에서 취해진 일종의 苦肉之策(고육지책)이었다.
 
  尹致昊는 정변 직후인 高宗 22년(1885) 1월 초에 푸트의 소개장을 갖고 일본의 나가사키를 경유해 보름 만에 上海에 도착한 뒤 미국총영사 스탈의 알선으로 中西書院(중서서원)에 입학했다. 중서서원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알렌이 설립한 미션스쿨로 尹致昊가 입학할 당시 대학으로 승격해 있었다.
 
  尹致昊는 여기서 3년 반 동안 수학했다. 이때 그는 많은 기독교 서적을 접하면서 기독교도가 되었다. 이는 이후 그로 하여금 개화된 일본과 그렇지 못한 중국 및 조선을 극단적으로 대비하는 전기로 작용했다. 당시 그가 「일기」에서 밝힌 동양 3국에 대한 평가가 그 증거이다.
 
  『일본은 동양의 桃園(도원)이다. 淸國은 더러운 물로 가득 채워진 연못이다. 조선은 淸國보다 더 못한 「똥 뒷간」이다. 청국인은 외국인이 업신여기기를 마치 개나 돼지처럼 하는데도 스스로를 중화인민이라고 뻐기며 외국인을 오랑캐라고 한다.
 
  조선은 눈 멀고 귀 먹은 어리석은 노인의 고함소리에 놀라는 소년에 불과하다. 조선을 淸國과 같은 야만국의 손에 맡기느니 차라리 다른 문명국에 맡겨 重稅(중세)와 惡政(악정)에 신음하는 조선인민을 구하느니만 못하다』
 
 
  美國서 5년간 유학
 
  尹致昊는 上海 유학 중인 高宗 24년(1887)에 세례를 받아 한국 최초의 미국 南감리회 신자가 되었다. 이는 그의 미국 유학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그는 「중서서원」을 수료한 뒤 감리교 교단의 후원으로 미국 테네시州 소재 밴더빌트大에 입학했다. 그는 이곳의 신학대학에서 3년 동안 수학한 뒤 다시 조지아州 소재 에모리大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2년 동안 수학했다. 그는 別科生(별과생)으로 입학했으나 뛰어난 성적으로 인해 졸업할 때에는 정규생 자격으로 졸업했다.
 
  그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은 에모리大의 캔들러 학장이었다. 독실한 감리교 신자인 캔들러는 역사와 헌법, 정치 등을 가르쳤다. 尹致昊의 정치관 및 역사의식은 이때 형성되었다. 尹致昊는 5년간에 걸친 미국 유학 과정에서 미국을 최상의 민주주의와 기독교 윤리 위에 세워진 당대 최고의 문명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인종차별이 자행되는 미국의 모습에서 백인국가의 흉포한 모습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훗날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나 尹致昊는 「황인종과 백인종 간의 대립」으로 간주하면서 황인종을 대표하는 일본의 승리를 기원했다.
 
  『이 세계를 현실적으로 지배하는 원리는 正義가 아니라 힘이다. 힘으로 나타나는 정의는 인종 사이에서도 적용된다』 (일기)
 
  이는 다윈이 말한 「弱肉强食(약육강식)」과 「適者生存(적자생존)」의 논리를 사회에 그대로 도입한 허버트 스펜서의 소위 「社會進化論(사회진화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다.
 
  尹致昊는 하나의 민족이 독립국가로 존속하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 强者(강자)가 되는 길밖에 없고, 조선이 스스로 문명개화하여 强者가 되지 못한다면 他國의 지배下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조선의 자주독립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는 조선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기독교에 있다고 확신했다. 이는 기독교가 서구의 문명과 자유민주주의를 창출시킨 근원이었다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리나라 교육을 도와주고 인민의 기상을 회복시킬 유일한 기제는 기독교밖에 없다. 기독교는 조선의 구원이고 희망이다. 「기독교化」 다음에 「日本化」가 조선에 가장 큰 축복이 될 것이다』 (일기)
 
  그는 훗날 일제의 조선통치를 용인하면서 독립운동보다는 기독교 보급과 국민계몽에 치중했다. 근대적인 지식과 기독교적 인격을 지닌 개화국민만이 자주독립 국가를 영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國民改造論(국민개조론)」이다.
 
 
  淸日전쟁 발발하자 일본 승리 기원
 
  尹致昊는 한발 더 나아가 儒敎(유교)를 비롯한 전래의 전통을 무시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는 유교를 이같이 비판했다.
 
  『유교 사상 내에서의 「忠」은 「孝」의 확대 개념이다. 이는 전제군주에 대한 절대적 「忠」에 불과하다. 유교사회에는 진정한 의미의 애국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기)
 
  일본의 문명개화론자 후쿠자와도 이와 유사한 이유로 유교를 전면 비판한 바 있다. 중국의 梁啓超(양계초)는 인민의 공덕심이 부족한 데서 중국 쇠망의 원인을 찾으면서 公民(공민)의 육성을 계몽운동의 핵심과제로 삼았다.
 
  유교개혁론자인 朴殷植(박은식)은 「儒敎求新論(유교구신론)」에서 유교의 정신이 君王에게 치우쳐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동양 전래의 전통사상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당시 동양 3국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尹致昊만을 탓할 일은 아니다.
 
  尹致昊는 5년간에 걸친 미국 유학을 마친 뒤 곧바로 上海로 건너가 母校인 중서서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얼마 후 淸日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일기」에서 당시의 심경을 이같이 피력했다.
 
  『全동양을 위해 일본이 승리하기를!』
 
  그가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기본적으로 淸日전쟁을 문명국과 야만국의 충돌로 이해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의 두 번째 귀국은 東學革命(동학혁명) 이후 소위 「甲午改革(갑오개혁)」이 한창 진행되는 高宗 32년(1895) 2월에 이뤄졌다. 당시 조선 정부는 金弘集과 金允植 등 온건개혁파와 朴泳孝 및 徐光範 등 급진개혁파의 연립내각으로 구성돼 있었다.
 
  尹致昊가 귀국하자 兩派(양파) 모두 그를 포섭하려 했다. 일본과 미국, 중국 등을 두루 유학한 그의 경력을 높이 산 것이다. 그는 金弘集 총리대신의 요청을 받아들여 학부의 參議(참의)로 입각했다. 얼마 후 朴泳孝가 득세하자 곧 協辦(학부협판)으로 승진했다. 다시 이해 7월에 朴泳孝가 「반역음모」 혐의로 일본으로 망명하고 金弘集의 제3차 내각이 구성되면서 尹致昊는 外部協辦(외부협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해 9월에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이노우에 후임으로 부임하자 「金弘集 제거설」과 「대원군 옹립설」 등이 항간에 나돌며 민심이 크게 흉흉해졌다. 이해 10월에 민비가 일본의 낭인들에 시해되는 「乙未事變(을미사변)」이 터져 나왔다.
 
  尹致昊는 을미사변 직후 金弘集의 親日(친일)내각을 타도하기 위해, 勤王派(근왕파)와 歐美派(구미파) 요인들이 친위대를 움직여 高宗을 궐 밖으로 옮기려다가 실패로 끝난 11월의 소위 「春生門事件(춘생문사건)」에 연루되어 일시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했다.
 
 
  『독립협회는 광대극』
 
   高宗 33년(1896) 2월 소위 「俄館播遷(아관파천)」이 벌어졌고, 이해 4월에 들어와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徐載弼이 11년 만에 귀국해 「독립신문」을 창간하며 정국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신문의 성공에 고무된 徐載弼은 곧 인민의 힘으로 자유민주주의 개화사상을 널리 홍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결사체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이해 7월2일에 독립협회를 발족시켰다. 창립 당시 고문에 徐載弼, 회장 安壽, 위원장 李完用 등이 피선되었다.
 
  독립협회는 갑오개혁을 주도한 집권관료의 잔여세력과 아관파천 이후 정계에서 큰 세력을 형성한 구미파의 원류인 소위 「貞洞俱樂部(정동구락부)」 세력이 뒤섞여 있어 출범 때부터 적잖은 내부갈등 요인을 안고 있었다.
 
  尹致昊는 정동구락부의 주요 멤버였으나 독립협회의 창립멤버로 참여하지 못했다. 그는 「독립신문」이 발간될 당시부터 이듬해 1월 말까지 閔泳煥(민영환)을 수행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키 위해 외유 중이었고, 이후 6월 중순까지 석 달가량 上海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독립협회의 이질적인 구성에 매우 회의적이었다.
 
  『독립협회는 廣大劇(광대극)으로 서로 용납될 수 없는 요소들의 집합체이다. 이완용파와 대원군파, 러시아파, 일본파, 근왕파 등이 섞여 있다. 각 정파는 이리저리 무리를 지어 나 같은 국외자는 발붙일 곳이 없다』 (일기)
 
  尹致昊가 독립협회에 가입한 것은 高宗 34년(1897) 후반기였다. 尹致昊는 徐載弼에게 독립협회를 강의실과 도서관, 박물관 등을 갖춘 일종의 學會(학회) 형태로 개조해 운영할 것을 건의했다. 徐載弼이 이를 받아들여 개조문제를 민중들이 참여하는 토론회에 붙인 끝에 마침내 高宗 35년(1898) 2월에 임원진 개편안이 통과되었다. 회장에 李完用, 부회장에 尹致昊, 서기에 南宮檍, 회계에 李商在 등이 선출되었다.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絶影島(절영도)의 석탄창고기지 租借(조차) 요구를 무산시키기 위해 이해 3월10일에 종로 네거리에서 「제1차 萬民共同會(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결국 러시아 정부는 조선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군사교관과 재정고문 등을 철수시켰다. 이는 독립협회가 주도한 근대 민중운동 최초의 성공사례에 해당한다. 이를 계기로 독립협회는 민중계몽운동 단체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이제 한국이 다시 한 번 독립이 된 것이 확실하다. 모든 것은 한국인의 의사와 행동에 달려 있다』 (일기)
 
 
  徐載弼 渡美 후 독립협회 회장으로 활약
 
「尹致昊 대통령 추대설」을 유포한 趙秉式.
  이 사건은 친러정권의 독립협회 와해공작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결국 얼마 후 독립협회 전임회장 안경수와 회장 李完用이 각각 수원유수와 전북관찰사로 발령 났다. 이에 尹致昊는 회장대리 자격으로 독립협회를 이끌게 되었다. 徐載弼마저 미국으로 추방되자 尹致昊는 「독립신문」의 주필까지 맡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34세였다.
 
  이후 尹致昊가 이끄는 독립협회의 활약은 눈부셨다. 러시아 공사 마투닌의 목포지역 조차 및 프랑스공사 플랑시의 광산채굴권 요구를 좌절시킨 데 이어 미국인 법무고문 그레이트하우스가 불러들인 황실경호 외인용병을 추방시키는 개가를 올렸다. 국권과 국토, 국익수호를 기치로 내건 尹致昊의 탁월한 지도력이 약여하게 드러난 대목이다.
 
  독립협회는 이해 8월에 임원진을 개선해 尹致昊를 정식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에 고무된 尹致昊는 自主國權(자주국권)운동과 自由民權(자유민권)운동을 동시에 전개했다. 그는 각종 강연에서 소위 「天賦人權說(천부인권설)」을 강조하며 정부의 존재의미를 民權수호에서 찾았다.
 
  이때 마침 高宗을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러시아語 통역관 金鴻陸(김홍륙)의 소위 「毒茶事件(독다사건)」이 일어났다. 유생들은 連坐律(연좌율) 부활을 요구하며 金鴻陸에 대한 극형을 요구했다. 그러나 尹致昊를 비롯한 독립협회는 공개재판을 요구하며 연좌율 부활 책동에 관여한 관련자 처벌과 부패·무능의 상징으로 지목된 「7大臣의 퇴진」을 강력 요구했다.
 
  학생과 시전상인들이 등교 거부와 철시로 이에 호응해 야간시위를 벌이자 결국 朴定陽을 중심으로 한 새 내각이 구성되었다. 미국공사는 본국에 보낸 보고문에서 이 사건을 「평화적 혁명」으로 규정했다. 독립협회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尹致昊와 독립협회는 여세를 몰아 이내 「의회설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서구식 의회를 주장하는 徐載弼과 달리 우선 자문기관인 中樞院(중추원)에 의회의 기능을 부여해 활동하게 한 뒤 점차 국민에게 參政權(참정권)을 줌으로써 立憲君主制(입헌군주제)로 나아가고자 했다. 「일기」에 그의 입장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내가 만일 한국에서 代議國民會議(대의국민회의)가 가능하다고 잠시라도 생각했다면―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지만―나는 당장 그런 생각을 포기하겠다』
 
  그는 과도적인 의회 형태로 중추원을 개편해 의회의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는 게 최선의 방안으로 생각했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代案(대안)을 찾는 「상황론자」의 면모가 약여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결국 정부의 호응으로 南宮檍(남궁억) 등을 비롯한 독립협회 대표 5명과 朴定陽과 閔泳煥 등 정부대표가 모여 의회설립 및 내정개혁 문제를 놓고 정식 협상에 들어갔다. 그러나 高宗은 의회개설운동을 장차 共和制(공화제)로의 國體(국체) 변경을 겨냥한 음모의 일환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高宗은 곧 친러파인 趙秉式(조병식)을 비롯한 保皇(보황)세력을 강화한 뒤 이해 10월20일에 전격적으로 의회설립을 반대하는 취지의 조칙을 발표했다.
 
  『國會(국회)도 할 수 없는 일을 民會(민회: 독립협회를 지칭)가 남용하므로 언론과 집회를 엄격히 통제한다』
 
 
  官民공동회로 高宗 압박
 
  高宗은 독립협회를 위시한 민권단체와 시민, 학생 등이 강력 반발하자 이내 조칙을 철회하고 韓圭卨(한규설)과 尹致昊를 각각 중추원 의장과 부의장에 임명하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이때 高宗은 중추원 議官(의관) 50명 중 民選(민선)을 25명으로 하되 그중 17명을 독립협회에 배정토록 하는 조칙을 내렸다.
 
  그러나 尹致昊는 민선의관 25명 전원을 독립협회에 배정할 것을 요구해 마침내 이를 관철시켰다. 득의양양한 尹致昊는 곧 국정개혁의 기본방향을 논의하기 위한 「官民共同會(관민공동회)」 개최를 정부에 요구해 이를 허락받았다.
 
  종로 대회장에서 「관민공동회」 대회장으로 선출된 尹致昊는 이내 高宗을 설득해 정부 대신과 1만여 명의 민중이 참여하는 「官民大共同會(관민대공동회)」 개최를 승낙받았다.
 
  「관민대공동회」에서 自主國權 수호와 自由民權 보장 등을 골자로 하는 소위 「獻議六條(헌의육조)」가 채택되자 高宗은 이를 재가한 뒤 민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5개조의 조칙을 별도로 반포했다. 尹致昊는 「독립신문」 논설에서 당시의 감격을 이같이 표현해 놓았다.
 
  『관민이 합심해 국가정치를 바로잡자고 한 것은 우리나라에 처음 있는 큰일이었다』
 
  당시 민선의관 선출 등을 규정한 「中樞院官制(중추원관제)」의 반포는 비록 제한적인 것이기는 했으나 국민들의 참정권을 최초로 승인한 사례에 해당한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민선의관을 선출하기로 한 하루 전날인 이해 11월4일 밤에 독립협회를 무함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벽서가 장안의 사방에 내걸렸다.
 
  『李氏왕조는 천명이 다했다. 民天共應(민천공응)하고 萬民共同(만민공동)하여 尹致昊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자』
 
  이는 趙秉式 등의 保皇派(보황파)들이 꾸며낸 자작극이었다. 이들은 『독립협회가 장차 대회를 열고 朴定陽을 대통령, 尹致昊를 부통령, 이상재를 내부대신으로 삼는 「대한공화국」을 수립하려 한다』는 말로 高宗의 위기감을 자극했다.
 
 
  『이런 것이 국왕이라니!』
 
사망 전 尹致昊가 적은 애국가 가사. 尹致昊는 애국가의 작사자로 알려져 있다.
  高宗은 이 말을 사실로 믿고 즉각 이들에 대한 체포를 허락했다. 이날 밤 독립협회 지도자 17인이 전격 체포되는 가운데 尹致昊는 극적으로 몸을 빼내 培材學堂(배재학당) 운영자인 감리교 목사 아펜젤러의 私邸(사저)로 피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독립협회는 물론 독립협회에 우호적이었던 朴定陽 내각이붕괴되고, 의회의 기능을 가미한 중추원의 발족도 무산되고 말았다. 이는 기본적으로 高宗을 설득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의회개설을 밀어붙인 데 따른 후과였다. 이로써 관민이 합동하여 자주적으로 개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물거품되고 말았다.
 
  尹致昊는 격분했다.
 
  『오늘 관보는 독립협회의 혁파와 헌의육조에 서명한 대신들의 파면을 공포했다. 이것이 국왕이라니! 어떠한 거짓말 잘하는 배신적인 겁쟁이라도 이 나라의 황제보다 더 비열한 짓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일기)
 
  이때 제국신문 편집인 李承晩과 배재학당 교사 梁弘默(양홍묵)이 아펜젤러 집에 은신하고 있는 尹致昊를 찾아와 대책을 숙의한 끝에 속히 민중을 동원해 투쟁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얼마 후 警務廳(경무청) 앞에 운집한 시민과 학생들이 대규모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구속인사 석방 등을 요구하며 정부를 강력히 성토하자 이에 굴복한 정부는 독립협회 인사 17인을 사흘 만에 모두 석방했다.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 해산 이후 50여 일 동안 趙秉式 등 소위 「五凶(5흉)」의 처벌과 「독립협회 復設(복설)」을 주장하는 등 과감한 정치투쟁을 전개해 일종의 상설단체로 발전해 나갔다. 尹致昊가 배후에서 이를 지도했다.
 
  이로 인해 高宗을 비롯한 保皇派의 尹致昊에 대한 의구심은 더욱 커져 갔다. 마침내 이해 11월21일에 洪鍾宇(홍종우) 등이 지휘하는 2000여 명의 褓負商(보부상)이 덕수궁의 정문이었던 仁化門(인화문: 서울시청 별관 앞) 앞에 있는 만민공동회를 공격하는 일이 빚어졌다.
 
 
  高宗을 「허수아비」라고 비난
 
  흥분한 시민 수만 명이 다음날 종로에 모여 대규모 집회를 열자 이에 놀란 高宗은 곧 「5흉」의 재판회부와 독립협회 復設을 약속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는 집회를 계속하면서 조속한 약속이행을 거듭 촉구하며 高宗을 압박했다.
 
  高宗은 내심 시간을 번 뒤 서울 주재 외교사절들의 양해를 얻어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려고 했다. 이를 눈치 챈 尹致昊가 민중을 설득해 2일간의 시한부로 이들을 해산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정부가 무성의로 일관하자 다시 수만 명의 시민이 참가하는 대규모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高宗은 이내 인화문 앞으로 나아가 만민공동회 대표 200명과 보부상 대표 200명을 초치한 가운데 요구사항의 조속한 이행을 다짐하는 내용의 勅諭(칙유)를 내렸다.
 
  尹致昊는 만민공동회 의장 高永根(고영근) 및 독립협회 부회장 李商在(이상재) 등과 함께 민중대표 자격으로 高宗 앞으로 나아가 「헌의6조」의 조속한 실시 등을 약속받았다. 민중들이 환호하며 만세를 외친 뒤 산회했다.
 
  그러나 관보에 실린 개각 내용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이에 12월6일부터 李承晩 등의 강경파가 주도하는 만민공동회 투쟁이 재연되었다.
 
  얼마 후 새 관제 반포로 소집된 李承晩을 비롯한 만민공동회 측 議官들은 민중의 여망에 맞는 閣員 후보로 閔泳煥과 朴定陽, 韓圭卨, 尹致昊, 徐載弼, 朴泳孝 등을 무기명 투표로 선출한 뒤 이를 정부 측에 통보했다. 이때 만민공동회는 중추원 결의를 추인하면서 高宗 살해 혐의로 일본에 망명 중인 朴泳孝에 대한 재심을 法部에 요구했다.
 
  당시 尹致昊는 이를 크게 우려했다. 이런 움직임이 소위 「공화제 추진설」 및 「朴泳孝 대통령설」로 인해 과민해진 高宗을 극도로 자극할 공산이 크다고 본 것이다. 불길한 예감은 이내 현실로 나타났다. 당시 연일 계속되는 시위로 인해 많은 시민들이 염증을 내고 있었다. 이들은 만민공동회가 逆徒로 낙인찍힌 朴泳孝를 천거한 사실에 크게 반발했다.
 
  高宗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는 마침내 외교사절의 양해를 얻은 뒤 보황세력을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하는 수순을 밟았다. 이해 12월25일에 내려진 11개조의 勅語(칙어)는 한마디로 「民會禁壓(민회금압)」으로 요약될 만한 것이었다. 이로써 독립협회는 물론 만민공동회 등 모든 민회활동은 종말을 고했다. 갑신정변 전후로부터 시작된 尹致昊의 개화운동은 사실 이를 계기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만민공동회가 해산될 당시 尹致昊의 절망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는 실패의 가장 큰 요인을 일반 민중의 개화의식 결여에서 찾았다.
 
  『황제가 말했기 때문에 朴泳孝를 반역자로 생각하는 인민은 지금 寶位(보위)에 앉아 있는 허수아비보다 더 나은 통치자를 가질 자격이 없다』 (일기)
 
  당시 尹致昊는 해외망명을 고려했으나 결국 이듬해인 高宗 36년(1899) 초에 법부대신으로 있던 부친의 권유를 받아들여 지방관장의 자리를 수락했다.
 
  지방관으로 내려간 尹致昊는 러일전쟁이 일어나는 高宗 42년(1905)까지 약 5년 동안 지방관을 역임하며 비교적 조용한 생활을 영위했다. 그는 지방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시종 민중의 편에 서서 외국인과 정부고관의 불법해동을 견제하고 이들의 비호 아래 날뛰는 無賴輩(무뢰배)들을 진압하는 데 진력했다.
 
  「尹致昊약전」에 따르면 당시 그는 지방민들로부터 「硬骨監理(경골감리)」 내지 「愛民郡守(애민군수)」의 칭송을 받았다고 하나 이를 확인할 길이 없다.
 
 
  『황인종으로서는 일본 존경, 한국인으로는 증오』
 
  러일전쟁이 일어날 당시 외부협판으로 있던 尹致昊는 백인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을 보였다. 「일기」에서 백인의 나라를 「지구상의 약탈자」로 기술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러일전쟁을 동양의 2大 문명국가 사이에서 벌어진 약육강식 및 패권정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高宗 42년(1905) 5월 당시 러시아 발틱 함대의 궤멸소식을 접하고 당시의 심경을 「일기」에 이같이 기술해 놓았다.
 
  『황인종으로서 한국은―정확히 말해 나는―일본의 영광스런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일본은 황인종의 명예를 옹호했다. 나는 황인종의 일원으로 일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는 한국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있는 일본을 증오한다』
 
  尹致昊는 러일전쟁 종전 직후 乙巳勒約(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내 외부협판직을 사퇴했다. 정부에서 그를 외부대신 서리에 임명했으나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外部는 이제 내게는 굴욕감, 동포에게는 증오감을 줄 뿐이다. 본연의 임무는 이미 사라졌다. 나는 내각에서보다 개인 자격으로 조국을 더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일기)
 
1915년 기독교계 학교인 영신학교 제1회 졸업식에 참석한 尹致昊(원 안).
 
  「105人 사건」으로 獄苦, 출감 후 親日로
 
  이후 그는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했다. 高宗 43년(1906)에 張志淵(장지연) 등이 교육 및 산업개발을 통한 自彊獨立(자강독립)을 기치로 내걸고 설립한 「大韓自强會(대한자강회)」 회장에 추대되자 의무교육의 실시와 부동산매매법 제정 등을 정부에 건의하면서 각종 강연회를 통해 국민계몽에 앞장섰다.
 
  대한자강회는 이듬해에 일어난 소위 「헤이그 밀사 사건」의 여파로 高宗이 統監府(통감부)의 강압에 의해 퇴위할 때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강제 해산되었다.
 
  이후 尹致昊는 安昌浩(안창호)와 梁起鐸(양기탁), 李東輝(이동휘) 등이 같은 해에 설립한 「新民會(신민회)」에 가입한 뒤 곧 安昌浩가 세운 大成學校(대성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그는 安昌浩 등과 함께 각종 강연회에 참석해 新사상과 新지식, 新산업, 실력양성 등을 역설하며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당시 그가 가장 열정을 쏟은 것은 미국의 南감리교 선교부가 1906년 개성에 세운 韓英書院(한영서원)을 중심으로 한 교육사업이었다. 그가 독립투쟁과 같은 직접적인 국권회복운동 대신 교육계몽운동에 발 벗고 나선 것은 「현 상태로는 자주독립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의 종교활동 역시 교육사업 못지않게 활발히 전개되었다. 1908년에 들어와 그는 YMCA 이사회의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그는 한국 YMCA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YMCA를 중심으로 한 각종 종교활동과 교육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는 합방 직후 소위 「105인 사건」의 최고 주모자로 지목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獄苦(옥고)를 치르다가 특사형식으로 3년 만에 출감했다. 이때 그는 이미 親日(친일)로 선회해 있었다. 그는 출감 직후 총독부기관지 「每日申報(매일신보)」의 사장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후부터는 일본의 여러 유지 및 신사와 교제해 日鮮(일선) 두 민족의 행복과 同化(동화)에 관한 계획에 참여해 힘이 미치는 대로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할 생각이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尹致昊의 차이
 
조선일보·동아일보의 폐간 소식에 대한 소회를 적은 1940년 8월11일자 尹致昊의 英文 일기.
  그는 왜 이런 사상 전환을 했을까. 日帝의 가혹한 고문과 강요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있으나, 그보다는 그의 의식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대세순응주의」, 제국주의자들이 내세운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 「일기」에 이같이 기술한 바 있다.
 
  『나는 인도가 그 어느 통치下에서보다 영국의 통치下에서 분명히 더 나아졌다고 확신한다. 한 국가가 자신을 통치하기에 부적당할 때는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더 개명되고 더 강한 국민에 의해 보호되고 가르침을 받는 게 낫다』
 
  그는 李東輝 등이 추구한 무장투쟁론은 말할 것도 없고 李承晩 등이 추구한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과 3·1운동과 같은 非저항운동을 모두 백안시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곧 「외교운동무용론」 및 「독립운동무용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독립불능론」으로까지 연결되었다. 「민중들이 자주독립 국가를 영위할 만한 정치적인 능력과 수준을 갖추지 못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는 日帝가 선전한 조선인의 「독립능력결여론」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극단적인 문명지상주의가 빚어낸 極論(극론)이 아닐 수 없다. 日帝가 조선 지배에 이를 적극 활용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민족개조론」과 「독립능력결여론」 등은 일본의 대표적인 문명개화론자인 후쿠자와의 주장과 상치되는 것이었다. 후쿠자와는 일찍이 「文明論之槪略(문명론지개략)」에서 이같이 역설했다.
 
  『인간의 목적은 오직 문명에 이른다는 단 한 가지 일에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의 국민이 존립하고 나서야 문명이란 이야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라가 없고 국민이 없는 이상 그 문명을 일본의 문명이라고 말할 수 없다』
 
  후쿠자와는 尹致昊와 마찬가지로 문명개화의 필연성을 강조하기는 했으나 문명개화는 나라의 독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尹致昊는 「국가독립과 민족번영이 문명개화론의 요체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제국주의 침탈을 호도하는 「사회진화론」에 함몰된 후과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일제 치하에서 일본을 동양의 유일한 문명국가로 간주하며 일제에 의한 아시아 지배를 정당화하는 「황인종 패권론」을 전개한 것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1937년에 中日전쟁이 발발하자 곧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가 되어 「決戰報國(결전보국)」을 역설하며 「반도청년」의 자원입대를 호소했다. 1943년 7월23일자 「每日新報(매일신보)」에 실린 호소문을 보자.
 
  『파격적인 光榮(광영)인데 어찌 주저할 것인가. 개인과 가정, 일본과 세계인류를 위해 총출진하라』
 
  그는 이런 공을 인정받아 終戰 직전인 1945년 초에 7명 정원의 조선인 勅選(칙선) 貴族院(귀족원) 의원 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그는 조국이 광복되던 1945년, 李承晩 등에게 새로운 조국 건설에 매진해 줄 것을 당부하는 서신을 보낸 지 얼마 안 돼 노환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식민지 지식인의 일그러진 自畵像
 
   尹致昊의 삶은 합방 이전까지는 「自主」와 「民權」 등을 기치로 내걸고 치열한 문명개화운동을 전개한 선각자의 삶이었다. 그러나 합방 이후 본인의 신념이야 여하튼 親日노선으로 일관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그의 부친 尹雄烈은 합방 이후 日帝로부터 男爵(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초대 내무부 장관·5選 의원·서울시장·민주공화당 의장 등을 지낸 尹致暎(윤치영)은 그의 4촌이고, 제4代 대통령을 지낸 尹潽善(윤보선)은 구한말에 참판을 지낸 4촌 尹致昭(윤치소)의 아들이다. 日帝 때 尹致昊 일족에 버금하는 명족은 그리 많지 않았다.
 
  尹致昊가 日帝 치하를 거치면서 굴절된 삶을 살게 된 데에는 「사회진화론」과 같은 잘못된 역사관에서 그 根因(근인)을 찾을 수 있다.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사회진화론」 위에 백인들의 차별적인 인종주의에 대한 증오가 겹쳐진 결과가 바로 일본을 황인종의 대표주자로 간주해 숭배하는 오류를 낳은 셈이다.
 
  그를 「역사의 법정」 앞에 세운다면 그는 「그 어떤 亡國民(망국민)에게도 인권보장과 자아실현은 물론 인간다운 삶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했거나 전혀 몰랐다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그의 삶은 식민지下 지식인의 일그러진 自畵像(자화상)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림 : 이우범
조회 : 13349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201905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마음건강 길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