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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 정무제1장관 金德龍

“우선 인재풀을 만들고 큰 그림을 그려라”

글 : 서철인  월간조선 기자  ironin@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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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위는 기본적으로 대통령의 철학을 이해하고, 그 정부가 지향하는 이상과 목표를 제대로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정치적인 판단 능력도 있어야 하고, 시대의 큰 흐름이 뭔지, 이 정부에 맡겨진 소임이 뭔지 제대로 아는 이들과 각계 전문가가 결합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요”

김덕룡
72세. 서울대 사회학과 4년 중퇴. 신민당·민주당 총재비서실장, 정무제1장관,
민자당 사무총장, 청와대 국민통합특별보좌관, 국회의원(13~17대) 역임.
現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이사장,
세계한민족공동체재단 총재,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집사업회 후원회장.
  “저는 평생 정치를 업(業)으로 삼아 왔습니다. 대선(大選)은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행사인데, 저는 이번 대선의 경우 어느 캠프에도 참여하지 않고 있지요. 그 때문인지 대선 정국에서 소외된 느낌입니다. 마음이 즐겁지 않아요.”
 
  지난 12월 4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난 김덕룡(金德龍) 민족화해협 대표상임의장은 근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는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양당의 후보는 개인적으로 잘못 선택되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1주일도 지나지 않은 12월 10일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결국 둘 중 하나를 찍어야 하는데, 덜 나쁜 후보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저 같은 생각을 하는 이가 상당수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번의 경우 투표율이 생각보다 높을 것 같지 않습니다.”
 
  —두 후보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가 뭔가요.
 
  “지금까지 우리 정치는 속된 말로 죽기 살기로 싸우는 정쟁(政爭)의 정치를 해 왔는데, 둘 중 하나가 당선되면 또 다시 그런 정치가 시작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저는 지역 분할 정치, 대결 구도 정치를 타파하고 국민이 통합하는 정치를 하리라 마음먹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정치 활동을 마감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언가 정치판이 바뀌기를 기대했는데, 지금의 두 후보 구도로 가면 패배한 팀이 국민의 선택을 존중해 국정에 협조할 것 같지 않고, 승리한 팀 역시 상대 팀을 포용하는 통합의 정치를 펼칠 것 같지도 않아요. 대선 정국을 보는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여러 개의 秘線조직이 실제 인수위 역할
 
  호남 출신인 김 의장은 1970년 김영삼(金泳三·YS) 의원 수행 비서로 정치에 입문했고, 이후 공보비서와 비서실장을 거치며 곁눈질 한번 하지 않고 YS 곁을 지켜 왔다. 김동영(金東英)·최형우(崔炯佑) 전 장관과 더불어 YS를 대통령으로 만든 최측근 중 한 사람이다. YS 집권 당시 정무제1장관, 민자당 사무총장을 지냈고, 김대중(金大中)·노무현(盧武鉉) 정권 때는 한나라당 부총재와 원내대표를 역임했다.
 
  17대 대선 당시 이명박(李明博) 후보 캠프에서 핵심 6인회(이명박, 이상득, 최시중, 김덕룡, 박희태, 이재오) 멤버로 활약했고, 정권 창출 후 2011년 말까지 청와대 국민통합특별보좌관으로 활동했다.
 
  김영삼 정권은 물론 이명박 정권에서도 그는 인수위에 소속된 적이 없다. 하지만 정권 창출에 기여한 공로로 인수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 실세였다는 점에서 이번 인터뷰 대상에 그를 포함시켰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이 김영삼 대통령 당선 직후였죠.
 
  “당시에는 ‘대통령직 인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기 전이어서 지금처럼 법적 지위를 갖는 인수위는 아니었습니다. 형식적인 조직이었죠. 당시 인수위 위원들 면면을 보면 김영삼 당선자의 철학이나 문민정부의 의미를 담아낼 인물은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참여하지 않았죠.”
 
  —그럼 어떤 분들이 참여한 겁니까.
 
  “김영삼 정권은 3당 통합으로 탄생한 만큼 전 정권 사람들까지 포용해서 안정적으로 끌고 가고자 했습니다. 3당 통합정당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허주(虛舟) 김윤환(金潤煥)씨의 역할이 컸어요. 당시 인수위는 허주를 배려한 조직이었지 새 정부가 나가야 할 철학과 방향을 결정하는 기구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인수위가 한 일은 뭔가요.
 
  “행정상 취임식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취임 후 100일 동안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사람들을 만날 것인가 등 스케줄 짜는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이를 ‘효자동 프로젝트’라 불렀지요. 안가(安家)를 철거하고 청와대를 개방하는 일, 공직자 재산 공개 등이 인수위의 대표적인 프로젝트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실제 인수위 역할은 비선(秘線)조직이 담당한 것으로 압니다.
 
  “당시 인수위 역할을 하는 참모라인이 안팎으로 여러 개 있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일부 특정인에게 임무를 전담시키지 않고, 여러 참모라인에 업무를 분산시킨 후 개별적으로 보고를 받았지요.
 
  가령 외곽 조직으로는 전병민(田炳旼)씨가 팀장을 맡고 있던 동숭동팀이 있었고, 내부 조직으로는 제가 중심인 비서실팀이 있었지요. 비서실팀은 저를 비롯해 YS의 비서를 지낸 이원종(李源宗)·이성헌(李性憲)·박종웅(朴鍾雄)·김무성(金武星)씨 등이 팀원이었죠. 그 외에도 여러 팀이 존재했습니다. 여러 라인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듣는 것이 김영삼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이었어요.”
 
  —참모라인이 복수(複數)일 경우 혼선이 생길 가능성이 많지 않나요.
 
  “참모라인이 많을 경우 다양한 의견을 폭넓게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리더 입장에서는 관리상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지요.”
 
 
  ‘배은망덕’ 이회창을 등용하려 했던 배경
 
  김영삼 정부의 캐치프레이즈는 ‘작고 강하고 깨끗한 정부’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특히 ‘부패척결’을 제1과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초대 감사원장에 대법관 출신인 이회창(李會昌)씨를 임명했다. YS와 이씨는 정치적으로 연고가 없는 사이여서 당시 파격 인사로 화제가 됐었다.
 
  —이회창 전 선진당 대표를 당시 감사원장에 발탁한 배경은 뭔가요.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 직후 중요하게 내세운 것 중 하나가 민주화이고, 그다음이 부패척결이었습니다. 김 대통령은 부패척결 실무를 감사원에 일임하며, 그 일을 책임지고 진두지휘할 적임자가 누구인지 참모라인을 통해 찾았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참모라인이 이회창씨를 추천했지요.”
 
  이회창씨는 그동안 금기시되어 온 청와대·안기부 등에 대한 감사와 ‘평화의 댐·’ 율곡사업 비리 감사 등을 단행했다. 성역 없는 감사로 국민들 사이에 이씨는 ‘대쪽’으로 불렸고,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해 12월 그는 국무총리 자리에 올랐으나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놓고 대통령과 자주 충돌해 4개월여 만에 해임됐다. 이후 국민들 사이에 그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김덕룡 의장은 “당시 이회창씨는 국가안보와 관련해 대통령에게 저항하고 불충(不忠)해 해임당한 것인데 스스로 사표를 던지고 나온 것처럼 행동했다”며 “정치적으로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국무총리 해임 이후에도 이씨의 인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방자치단체 선거일(1995년 6월 27일)이 다가왔다. 김덕룡 의장은 “이건 비화(秘話)인데…”라며 당시 이야기를 들려줬다.
 
  “1995년 저는 지방자치단체를 총괄하는 민자당 사무총장으로 있었습니다. 그 무렵 이회창씨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인기가 보통이 아니어서 그냥 두었다가는 나중에 큰 적으로 등장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장고(長考) 끝에 화근이 될 수 있는 사람은 포용해서 수하에 두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 서울시장 후보로 천거했습니다. 당내 분위기는 ‘배은망덕한 사람인데 어떻게 서울시장을 시키느냐’는 쪽이어서 설득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죠.”
 
  —이회창씨 반응은 어땠습니까.
 
  “처음에는 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대통령이 나를 싫어하는데 후보로 만들어 키워 줄 수 있느냐’며 반신반의하더군요.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반쯤 승낙하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 야심이 있구나’ 느꼈지요.”
 
  김 의장은 이회창씨를 설득하기 위해 이씨의 경기고 동기동창인 이홍구(李洪九) 당시 총리까지 동원했다. 하지만 YS와 감정의 골이 점점 깊어져 서로 신뢰할 수 없는 사이가 되면서 후보가 되지 못했다. 김 의장은 “만약 그때 이회창씨가 서울시장이 되었다면 정치 인생은 물론 한국의 정치판 자체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능력 있는 사람 과감하게 기용
 
1999년 5월에 열린 한나라당 당무회의에서 서울 송파갑 재선거 후보로 확정된 이회창 총재가 인사를 하자 김덕룡 부총재와 박관용 부총재가 박수를 치고 있다.
  —초기 내각은 어떤 방식으로 구성했습니까.
 
  “김영삼 대통령은 인사를 할 때 측근을 기용하기도 했지만 자신과 인연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도 전문성을 가지고 잘할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면 과감하게 등용했습니다. 오병문(吳炳文) 교육부 장관의 경우 제가 천거한 사람인데, 김 대통령은 물론 저 또한 당시 그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장관 후보로 천거하게 된 것이죠.
 
  “집권에 성공한 후 좀 쉬어야겠다 싶어 1주일 일정으로 산에서 극기훈련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대통령으로부터 갑자기 호출이 와서 달려가 보니 ‘극비리에 호남 사람 중 교육부 장관 적임자를 하나 천거해 보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교육계 쪽에는 문외한이어서 지인들을 통해 수소문한 결과 전남대 총장을 지낸 오병문씨를 천거하게 되었죠.”
 
  천용택(千容宅)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 상근위원 겸 비상기획위원장도 비슷한 방법으로 기용되었다고 한다. 김 의장의 말이다.
 
  “천용택씨는 처음에 국방부 차관 후보로 천거했던 사람입니다. 당시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던 군(軍) 장성급 인사로부터 장문(長文)의 편
 
  지 한 통을 받았어요. ‘대대적인 군 쇄신 작업이 필요한 시기인데, 군에서 동료 후배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현직 군단장이 하나 있으니 국방부 차관으로 등용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 편지의 골자였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었지만 군 개혁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대통령께 그대로 보고했지요.
 
  그랬더니 ‘군 개혁을 위해서는 우선 경제관념이 분명한 경제통이 필요하다’며 이수휴(李秀烋) 당시 재무부 차관을 국방부 차관에 기용하고, 천용택씨는 장관급인 국가안전보장회의 상근위원 겸 비상기획위원장에 등용했지요. 천용택씨는 이를 발판으로 DJ 정권 시절 국방부장관과 국정원장까지 지내지 않았습니까.”
 
  초대 내각의 경우 잘 아는 정치 분야를 제외한 모든 부처 인사를 이런 방식으로 했다고 한다. 반면 정권 창출에 기여한 사람이라 해도 대중의 평가가 나쁘면 가차없이 쳐냈다고 한다. 정권 초기 ‘문민개혁 프로그램의 설계자’로 알려진 동숭동팀의 전병민씨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기획의 달인’으로 불렸던 그는 YS의 사랑을 받아 대통령 정책수석 비서관에 내정되었으나 언론에 친인척의 친일 행각이 밝혀지면서 여론이 나빠지자 곧바로 교체되었다.
 
 
  인사검증 절차 없어 사고 잦아
 
김덕룡 의원이 1997년 8월 22일 오후 신라호텔에서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와 회동, 악수를 나누고 있다.
  정권 초기 김영삼 대통령은 군부 출신 통치 시절과의 차별화를 위해 ‘부패방지를 위해 개혁정치를 해야 한다’는 큰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공직자 재산 공개 일환으로 가장 먼저 본인 재산부터 공개했다. 또한 공직자 재산 공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금융실명제를 도입했다.
 
  —금융실명제 도입을 주도한 분은 누구인가요.
 
  “그 부분은 저 역시 아직까지 모르고 있습니다. 김 대통령은 인사건 정책이건 극비리에 진행했는데, 금융실명제 도입 역시 철저한 보안 속에 이뤄졌지요. 정무장관이었던 저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말 다했죠. 금융실명제가 전격 시행된 것이 1993년 8월 12일이었습니다. 그 이틀 전 저는 대통령 특사로 남미를 방문하게 돼 대통령께 인사를 하러 갔지요. 대통령께서 그날 밑도 끝도 없이 ‘김 장관은 해외에서 소식을 듣겠구먼’이라고 하시길래 고개를 갸웃했는데, 며칠 후 금융실명제 시행령이 떨어지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김 대통령은 주요 사안들을 그렇게 비밀리에 진행했습니다. 초기 내각 구성 때도 각 부처 인사 추천을 의뢰하며 ‘부인도 모르게 하라’고 할 정도로 보안 유지를 강조했지요.”
 
  —인선 작업을 그렇게 극비리에 진행하면 검증은 누가 하지요.
 
  “김 대통령의 인사 비밀주의 때문에 사람에 대한 공개적인 평가나 검증 과정이 생략된 경우가 많았지요. 그러다 보니 인사로 인한 사고가 많이 터졌습니다. 김상철 서울시장은 그린벨트 지역 무단 형질변경 의혹으로, 박양실(朴孃實) 보건사회부장관은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취임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물러났지요. 또 박희태(朴熺太) 법무부장관 역시 이중국적을 가진 딸이 명문대에 특례입학한 것 때문에 논란이 되자 취임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사퇴했고요.”
 
  —초기 내각 구성 당시 김 의장은 대통령비서실장 후보 물망에 오른 것으로 압니다.
 
  “대통령께서 직접 제안을 하셨지요. 아내도 하라고 했는데, 저는 거절했습니다. 의회와 정당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였지요. 대통령께 ‘저는 당과 국회를 지키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5대 총선(1996년 4월 11일) 준비도 해야 한다고 했지요. 정중히 거절하면서 저 대신 천거한 분이 한완상(韓完相)씨와 박관용(朴寬用)씨입니다. 이 중 박관용씨가 발탁되었고, 한완상씨는 통일원장관으로 입각했지요.”
 
 
  전광석화처럼 ‘하나회’ 해체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7월 11일 청와대에서 김덕룡 국민통합특보에게 위촉장 수여 후 악수하고 있다.
  —김영삼 정권을 평가할 때 흔히 ‘인사가 만사(萬事)’인데 ‘망사(亡事)가 된 대표적 케이스’라고 합니다.
 
  “‘부패척결’을 제1의 국정과제로 내세웠던 정부이기에 대통령 아들과 장학로(張學魯) 대통령제1부속실장·홍인길(洪仁吉) 청와대총무수석 등의 측근 비리가 연이어 터지자 강도 높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김영삼 정권은 인사에서 크게 실패했다고 보지 않아요. 이후 정권의 인사와 비교했을 때 김영삼 정권은 인사에서만큼은 과감했습니다. 마음먹은 일은 망설임 없이 전광석화처럼 단행했지요. ‘하나회’ 숙청을 통한 군 개혁이 단적인 예입니다.”
 
  하나회는 1963년 육군사관학교 11기생인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정호용(鄭鎬溶)·김복동(金復東) 등 대한민국의 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이 중심이 돼 비밀리에 결성한 군내 사조직이다. 12·12 사태와 5·17 사태를 주도한 이들은 신군부로 불리며 군사정권 내내 막강한 세(勢)를 과시해 왔다. 김 대통령은 취임 열흘 만인 3월 8일 하나회 회원이던 김진영(金振永)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徐完秀) 기무사령관을 전격 교체했다. 이후 100일 동안 국방부·합참본부·고위장성·군단장·사단장·해군 수뇌부·공군 수뇌부를 구성하고 있던 고위 간부 87명 중 무려 50명을 교체했다. 이를 진두지휘한 이는 권영해(權寧海) 당시 국방장관이었다.
 
  —‘하나회’ 숙청도 비밀리에 단행한 것인가요.
 
  “혁명하듯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이뤄졌지요. 취임 후 어느 날 권영해 장관을 불러 식사를 하면서 ‘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해임하라’고 지시한 후 몇 단계에 걸쳐 제거 작업을 시행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쿠데타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청와대 경호실이 비상체제에 들어갔을 정도로 긴장감이 고조되었죠. 대대적인 숙청 후 권영해 장관은 협박을 많이 받아 목욕탕도 드나들지 않았다고 해요.”
 
  그는 “군사 쿠데타로 점철된 이 나라에 민주주의가 순항하고, 온 국민이 쿠데타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된 데는 하나회 숙청을 통해 군 개혁을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청와대에 ‘쓴소리 비서관’ 두어야
 
  김덕룡 의장은 김영삼 정권의 인수위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권의 인수위 활동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이명박 대선 후보 시절 6인회 멤버로 선거를 도운 그는 “이명박 정부의 실패 요인은 정권의 출발점이었던 인수위 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MB(이명박)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1월 1일 6인회 멤버가 모여 저녁을 먹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6인회 멤버 외에 임태희(任太熙)씨가 유일하게 배석했지요. 그날 인수위 이야기가 나오길래 저는 ‘인수위는 큰 그림만 그리고 빠져야지 너무 디테일한 것까지 하겠다고 욕심부리면 혼란만 가중시킨다’며 인수위가 해야 할 5가지 사항을 제시했습니다.”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첫째, 임기 5년 동안 함께할 각 분야 전문가를 모으는, 다시 말해 인재 풀을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새로 출범할 정부와 비서실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했고, 셋째는 임기 5년 동안 해야 할 목표를 세우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전 정권부터 시행돼 온 정책이나 사업 중 지속해야 할 것과 중단하거나 보완·변경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평가해야 한다고 했지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 농담처럼 ‘청와대 비서관 중 하나는 시중에서 정권 욕하는 소리를 듣고 전달하는 임무를 맡겨야 한다’고 했더니 MB가 ‘그 비서관의 생명이 몇 달이나 갈까요’라고 재치있게 되받아치더군요.”
 
  그가 제안한 이 5가지 사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정권 초기 인수위가 인재풀을 만들지 못해 ‘대통령이 인사 하나 제대로 못하는 사람’으로 비쳤다”고 말했다.
 
  —인수위는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봅니까.
 
  “기본적으로 대통령의 철학을 이해하고, 그 정부가 지향하는 이상과 목표를 제대로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정치적인 판단 능력도 있어야 하고, 시대의 큰 흐름이 뭔지, 이 정부에 맡겨진 소임이 뭔지 제대로 아는 이들과 각계 전문가가 결합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요.”
 
  —이명박 정권은 인수위 덕을 크게 보지 못했다고 했는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적으로 대통령에게 있지요. MB의 한계인데, 제가 보기에 MB는 자기 성공의 우물에 빠진 사람입니다. 성공한 CEO(최고경영자)라는 자만감과 자신감이 지나쳐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지요. 국정운영과 기업운영은 차원이 다른데, 초기부터 정치와 거리를 둔 채 CEO 마인드로 일관한 것이 실패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차기 정권이나 인수위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국정운영에 필요한 인재풀을 만들고, 우선 급하게 시행해야 할 정책과 원대하게 끌고 갈 정책을 정하는 일이 인수위가 할 일이라는 것을 한 번 더 강조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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