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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ot 〈2〉 샤토브리앙의 그랑베 섬과 문무대왕의 대왕암

그는 절대고독을, 또 다른 이는 호국의 용이 되길 바랐다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gsmoon@chosun.com

사진 :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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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유명 관광지 생말로의 개척자는 웨일스 출신 수도사 세인트 맥로
⊙ 우리 문무왕의 대왕암은 호국의 상징… 비슷하지만 다른 두 사람의 행로
생말로의 해변은 이제 세계에서 유명한 관광지가 됐다.
  프랑스 브르타뉴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두 군데 있다. 여행서에 ‘죽기 전에 봐야 할 세계 100경(景)’ 에 반드시 포함되는 몽생미셸(Mont Saint Michel)과 생말로(Saint Malo)다. 몽생미셸이 밀물, 썰물에 따라 섬과 육지로 변하는 곳에 건설된 수도원으로 유명하다면 생말로는 1976년 작(作) 영화로 이름을 떨쳤다.
 
  생말로는 루이지 코지 감독의 영화 〈라스트 콘서트〉의 무대로 유명하지만 프랑스인들은 문호(文豪) 프랑수아 르네드 샤토브리앙을 떠올린다. 브르타뉴는 잉글랜드와 관련이 있다. 실제로 생말로라는 이름 자체가 AD 6세기에 활동했던 영국 웨일스 출신의 수도사 세인트 맥로(Saint Maclow)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맥로는 유빙(流氷)으로 덮인 북국(北國)을 7년간 돌다 여기 도착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푸른 하늘이 연출하는 생말로의 풍광에 반한 그는 이 도시를 건설하는 데 삶을 바쳤다. 생말로의 상징은 거대한 성벽이다. 12세기 건축된 성벽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도시를 감싸고 있으며 성곽을 따라 마을이 좁은 도로로 연결돼 있다.
 
 
  해적을 막으려던 성이 해적 차지가 됐다
 
생말로의 성벽은 원래 해적을 막기 위해 쌓았는데 결국 해적들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도시 한가운데 높은 첨탑이 솟아 있는데 성곽 입구 앞에는 해적선이 정박해 있다. 이것은 생말로가 북에서 온 켈트족 출신 해적들의 본거지임을 보여준다. 프랑스 정부는 이들을 소탕하려 했지만 워낙 해적들의 세력이 강해 토벌 대신 그들을 용인하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해적을 막으려 쌓은 성벽이 해적의 차지가 됐다.
 
  성곽의 출입구인 생뱅상 성은 호텔로 변했다. 그곳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대서양과 뒤로는 생말로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성곽은 역사와 문학의 출발점이다. 성곽에서는 두 개의 작은 섬이 보인다. 오른쪽 섬은 옛 요새로, 썰물 때 모래가 곱기로 유명한 모래밭을 걸어서 건너면 5분도 안 돼 요새에 접근할 수 있다.
 
  주변 암초에 걸터앉아 맞은편 생말로 성곽을 바라보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밀물 때면 다시 요새는 섬이 된다. 생말로는 이 굳건한 성곽과 함께 1년 내내 안개가 끼는 것으로 유명하다. 거기에 암초처럼, 전위병처럼 앞에 버티고 선 요새의 대포가 불을 뿜는 것을 상상하면 이곳이 얼마나 공략하기 힘든 곳인지 알 수 있다.
 
  다시 눈을 왼쪽으로 돌리면 그랑베 섬(Ile de Grand-Be)이 보인다. 여기에 샤토브리앙의 묘가 있다. 그랑베 섬 역시 썰물 때면 걸어갈 수 있다. 밀물 때면 성곽에 서서 작은 회색 돌로 만든 십자가가 세워진 섬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감상하는 것도 좋겠다. 그곳에 바로 샤토브리앙이 잠들어 있다.
 
 
  그는 왜 이 외딴 섬에 묻힌 걸까
 
오른쪽 끝이 샤토브리앙이 잠든 섬이다. 자세히 보면 십자가가 보인다.
  그는 대체 왜 이 외딴 섬에 누워 있을까.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 그 외엔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 이런 묘비명을 남긴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Francois-Rene de Chateaubriand)은 1768년 태어나 1848년 사망했다. 한국에서 그는 스테이크의 종류처럼 알려졌지만 프랑스 문학사에선 유명인이다.
 
  오죽했으면 《레미제라블》을 쓴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문학에 열정을 불태우던 열네 살 때인 1816년 7월 10일 일기에 이렇게 썼을까? ‘샤토브리앙처럼 되고싶다.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닮고 싶지 않다.’ 나중에 자작 작위를 받은 샤토브리앙은 생말로의 유대인 거리에서 10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샤토브리앙이 태어나기 전, 곤궁에 헤매던 그의 가문을 일으켜 세운 사람은 아버지였다. 인생은 묘하게도 샤토브리앙에게 있어 아버지는 고마운 존재가 아닌 평생을 괴롭힌 원수와 같았다. 아버지가 가문을 되살리려 노예매매까지 서슴지 않았을 만큼 나쁜 짓을 많이 한 데다 최후까지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작까지 된 아버지 묘는 프랑스 대혁명 후 혁명군에 의해 파헤쳐졌으며 형 역시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가 돈에 눈멀어 부도덕한 짓을 자행하는 동안 샤토브리앙은 생말로의 바닷가에 방치돼 낮에는 황야를 쏘다니고 저녁엔 아버지가 사들인 숲과 늪으로 둘러싸인 콩부르(Combourg) 저택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자신을 학대하는 부모와 종탑의 우울한 종소리뿐이었다. 이 외로운 영혼을 달래 준 인물은 누나 뤼실(Lucile)이지만 그녀 역시 젊어서 죽고 만다. 샤토브리앙은 스스로의 기록에서 자기 가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오늘의 내가 이루어진 것도, 내 일생 동안 이끌고 다녀온 이 권태에 처음으로 전염된 것도, 나의 고통이요 나의 쾌락인 이 슬픔에 물든 것도 콩부르의 숲에서였다. 그곳에서 나는 내 가슴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다른 가슴을 찾아 헤맸다. 그곳에서 나는 내 가족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그곳에 그의 이름이 복권되고 집안의 재산이 쌓이기를 바랐다. 시간과 혁명이 씻어 간 또 하나의 악몽. 여섯 형제 중 남은 사람은 셋. 형과 쥘리와 뤼실은 이제 없고 어머니는 고통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의 재는 무덤 속에서 파헤쳐졌다.〉
 
  우울이라는 단어 외에 설명할 길 없는 소년기를 거쳐 스무 살이 됐을 때 샤토브리앙은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나바르연대의 육군 소위가 된다. 현대판 기사가 된 것이다. 샤토브리앙은 군인으로서 꿈에 그리던 파리 궁정에서 왕의 사냥을 수행하는 한편 《문예연감(Almanach des Muses)》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모험의 연속, 그 경험을 문학으로 꽃피우다
 
문무왕처럼 외딴 섬에서 영면하고 있는 프랑스의 문호 샤토브리앙의 동상이다.
  그런 행복한 시기는 혁명으로 끝난다. 그것은 샤토브리앙이 거리낌 없이 모험 속으로 인생을 던지는 신호탄이 됐다. 그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서북 항로를 찾겠다면서 아무 준비 없이 아메리카행 배에 올랐다. 거기서 몇 달을 보내며 바닷가에도 가 보고 오지에도 들어가면서 미개하지만 웅대한 자연에 매혹된다.
 
  루이 16세가 죽자 그는 유럽으로 돌아와 다시 군대에 들어가 전쟁의 포화 속으로 빠져든다. 그는 1792년 9월 5일부터 이틀간 벌어진 티옹빌 전투에 참여했다. 티옹빌은 프랑스 로렌주 메스에서 28km 떨어진 룩셈부르크 국경 근처로 프랑스 왕당파와 혁명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샤토브리앙은 왕당파 편에 섰다.
 
  티옹빌 전투에서 부상당한 그는 브뤼셀을 거쳐 영국으로 도주하지만 굶주림에 시달린다. 그는 겨우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번역하며 질풍노도와 같았던 자기 삶을 반성하게 된다. 그는 이 시기에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을 되돌아보며 기독교로 회귀했다. 그때의 그를 상징하는 말이 ‘나는 울었고 믿었다’이다.
 
  스스로를 재무장한 뒤 그는 글쓰기에 몰두했다. 마침 프랑스에선 혁명의 열기도 가라앉았다. 그가 1801년 아메리카에서의 인상을 담은 책 《아탈라(Atala)》는 대성공했다. 1802년 쓴 산문모음집 《기독교의 진리》는 대중뿐 아니라 나폴레옹마저 감동시켰다. 샤토브리앙이 쓴 책의 내용이 나폴레옹의 계획과 일치했던 것이다.
 
  황제는 그를 로마대사관 일등 서기관에 임명하고 이어 스위스연방 공사로 임명했다. 샤토브리앙과 나폴레옹의 밀월은 1804년 앙기앵 공작의 죽음으로 끝난다. 나폴레옹이 공작을 총살하자 사표를 낸 뒤 평소 구상했던 ‘순교자들(Martyrs)’을 쓰려 그리스-예루살렘-카르타고-그라나다로 여행을 떠난 것이다.
 
 
  나폴레옹과 협력과 경쟁의 관계를 맺다
 
  샤토브리앙은 1809년 《순교자들》, 1811년 《파리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출간했지만 이 시기 그는 문학가라기보다 정치인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이것은 사촌형 아르망 드 샤토브리앙 때문이었다. 왕당파로 몰린 사촌형이 샤토브리앙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총살당하자 그는 나폴레옹을 용납할 수 없다고 결심한다.
 
  그는 나폴레옹을 비판했지만 정치상황의 변동에 따라 대사와 장관을 지내는가 하면 다시 논평가로서 권력을 비판하기도 했다. 1848년 사망하기 전부터 샤토브리앙은 생말로 근처의 그랑베 섬 바위 끝에 묻히기를 바랐다. 장엄한 고독이자 태어났던 곳이며 자기를 재워 주던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원한 안식처로 믿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글로 자신의 심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혹 나의 작품들이 내가 죽은 뒤에 남게 되고 내가 이름을 남기게 된다면 어느 날 ‘회고록’의 인도를 받아 어떤 여행자는 내가 그린 장소들을 찾아오리라. 그는 성을 알아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 거대한 숲은 찾아도 없을 것이다. 내 꿈의 요람은 사라져 버렸다. 바위 위에 홀로 서 있는 성탑만이 그 종탑과 사귀고 폭풍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던 옛 친구들인 거대한 참나무 숲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으리라. 그 성탑처럼 홀로 남은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아름답게 해 주고 나를 보호해 주던 내 가문이 내 곁에서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인생은, 내가 젊은 시절을 보낸 성탑들처럼 견고하게 땅 위에 지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그의 손으로 세운 성만큼 폭풍에 견디지 못한다.〉
 
 
  우리 경주 대왕암은 국가를 지키려는 의지의 발현
 
경주 앞바다에 있는 문무대왕 수중릉은 새들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샤토브리앙처럼 바위투성이 섬(밀물 때면 육지로 연결되지만)에 묻힌 비슷한 사례가 또 있다. 바로 우리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 바위섬에 자신의 유골을 뿌려 달라고 유언한 문무왕(626~681)이다. 그가 묻힌 바위섬은 대왕암(大王岩)이라 불린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은 삼국통일 후에도 국가의 안위를 걱정했다.
 
  고민 끝에 그는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시신(屍身)을 불교방식에 따라 화장해 동해에 묻으면 자신이 용(護國大龍)이 돼 나라를 지키겠노라고 했다. 이 대왕암은 육지에서 불과 200여m 거리다. 큰 바위가 주변을 둘러싸고 중앙에 약간의 공간이 있는데 자세히 보면 네 방향으로 물길이 나 있어 주변 바위가 네 개로 구분돼 있다.
 
수중릉 근처에 있는 감은사지 3층 석탑에도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방비하려는 문무왕의 염원이 담겨 있다.
  대왕암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낭산’이라는 언덕이 있으며 거기에 ‘능지탑’이라고 불리는 탑이 있다. 또 대왕암 근처에는 감은사지가 있고 3층 석탑 두 기가 서 있다. 감은사는 문무왕이 왜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하다 미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자 그의 아들인 신문왕이 나라를 지키는 호국사찰로 완성시켰다.
 
  어떤가, 비슷한 바위섬에 잠들어 있지만 샤토브리앙이 절대 고독의 안식처로 그곳을 택했다면 문무왕은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한 첨병(尖兵)을 자처한 것이니 그 숭고함이 더 돋보인다. 무덤 건축양식의 뿌리(Root)는 비슷하지만 그 뿌리에서 뻗어 나온 줄기는 영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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