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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에 물들다 〈14〉 “나와 남을 나눌 필요가 없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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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남을 자기처럼 사랑하려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자기를 아낄 줄 알아야
⊙ 질투하는 대신 선망하라. 타인의 성취를 인정하라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하지 마라”는 공자의 말은 천주께서 말씀하신 “남을 자기처럼 사랑하라”는 것과 같다. 일러스트=조선DB
  옛 성현은 “남을 나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쉽지 않고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반대로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상대의 마음을 돌려놓고 싶은데, 쉽지 않다. 용서하는 마음과 용서받고 싶은 마음의 중간에 엉거주춤 우리는 서 있다. 그러나 남을 사랑하는 일과 나를 사랑하는 일은 샴쌍둥이처럼 서로 붙어 있다. 어쩌면 한 마음일지 모른다.
 
  스페인 선교사이자 예수회 신부 판토하(Diego de Pantoja)는 1601년 명나라 말기 중국에 도착했다. 그리스도교를 설파하기 위해 그는 성경만이 아니라 동서양의 고전까지 섭렵해 중국의 유학 지식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양대 정민 교수가 번역한 판토하의 《칠극》(2021).
  그가 쓴 한문 교양서 《칠극》은 대중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고 18세기 조선의 젊은 지식인도 처음 만난 ‘세상 밖’ 서양인의 지혜에 감탄했다. 판토하는 “남을 사랑하는 것은 용서뿐”이라고 말한다. 용서는 자신을 무작정 낮추거나 자신의 귀중한 마음을 버리는 게 아니다. 나를 사랑하는 일과 남을 사랑하는 일이 다르지 않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먼저 자기를 사랑할 줄 알아야 남을 자기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된다”고. “자기를 사랑할 줄 몰라 남을 자기처럼 망가뜨릴까 염려된다”고.
 
  〈남을 사랑하는 것은 용서뿐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하지 마라”는 공자의 말은 천주께서 말씀하신 “남을 자기처럼 사랑하라”는 것과 같다. 남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먼저 하고 남에게는 나중에 한다. 네가 자기를 바로 할 수 없으면서 남을 바로잡고자 한다면 남을 잘못 사랑하는 것이다. 탐욕과 질투, 교만과 음란 같은 여러 감정을 자기는 지닌 채로 남에게 없게 하려 한다면, 어찌 남은 사랑하고 자기는 미워하며, 남은 끌어당기면서 자기는 가라앉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네가 남을 자기처럼 사랑하려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자기를 아낄 줄 알아야 한다.
  (人也. 愛人者, 恕而已. “己所不欲, 勿施於人.” 即天主所謂 “愛人如 己.” 是也, 愛人如己者, 則先己而後人. 爾不能正己, 而欲正人, 過愛人矣. 貪妬 傲淫諸情, 不能無諸己, 而欲無諸人, 豈非愛人惡己, 援人沈己哉? 爾欲愛人如 己, 須先知愛己.)〉 [판토하의 《칠극》(2021, 번역 정민) 중에서]

 
 
  나와 남은 하나
 
장영희 선생이 쓴 《내 생애 단 한 번》(2010).
  장영희 선생이 쓴 〈나와 남〉(2010)이라는 에세이를 읽는다. 영문학 과목을 듣는 1학년 학생들에게 문학 작품 분석법을 가르칠 때 그는 ‘역할 바꾸기’를 시켰다. 한 번은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에게 장미를〉이라는 작품을 읽게 했다.
 
  남부 귀족 가문의 마지막 혈통인 에밀리 그리어슨은 빠르게 변하는 현대의 도시 속에서 완전히 고립된 삶을 사는 인물이다. 그러다가 북부에서 온 십장 호머 배론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떠나려는 그를 붙잡기 위해 그에게 극약을 먹여 살해하고는 죽을 때까지 그 시체와 40년을 동침한다는 기괴한 이야기이다.
 
  학생들은 처음엔 “에밀리라는 여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작품 속 인물이 그저 ‘남’이고, 그의 행위는 괴팍스러운 성향을 가진 ‘남’의 일이라 단정하면 문학 토론이고 분석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장영희 선생은 ‘역할 바꾸기’를 통해 학생들에게 에밀리의 입장이 되어보라고 권했다. 그러자, 학생들의 관점도 달라졌다.
 

  〈“에밀리도 가문의 전통을 지키는 귀족이기 이전에,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하나의 인간이지요”라든가 “에밀리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과잉보호를 받으며 자랐고, 바깥세상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습니다”라든가 “에밀리의 고립된 삶은 지독한 자기와의 투쟁이었고, 그래서 포크너가 장미를 바치는 거지요”라는 등 에밀리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꽤 그럴듯하게 비평적 접근을 한다.
 
  ‘남’이기 때문에 안 되고 ‘나’이기 때문에 괜찮다는 논리는 어쩌면 인간의 본능일지 모른다. 많은 학생들 앞에서 강의할 때 나는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한다. 누구나 다 똑같이 얼굴에 눈 두 개, 코 한 개, 입 한 개가 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조합으로 50명이면 50명, 100명이면 100명의 얼굴이 제각각 다를 수 있는가. 100명은 고사하고 그 똑같은 조합으로 크로마뇽인 이후 완벽하게 두 얼굴이 정확하게 똑같이 겹치는 예는 없었으리라.〉(장영희의 《내 생애 단 한 번》 중에서)

 
100세 스승 김형석 교수의 《백년을 살아보니》(2019).
  우리 시대의 100세 스승 김형석 교수는 “나와 남을 나눌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내가 지닌 것은 모두 남에게 받은 것이 아닌가” 하고 묻는다. 그가 쓴 《백년을 살아보니》(2019)를 읽다가 이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날 치과 치료를 받고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모든 물건은 전부 다른 사람이 준 것이다. 모자도, 양복도, 신발도 그렇다. 어떤 것은 호주의 나와는 전연 상관이 없는 사람이 양을 쳐서 보내준 것이고, 미국 텍사스의 어떤 사람이 목축을 해 보내준 가죽도 있다. 또 모자와 옷을 만들기 위해 수고해준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살고 있다. 안경을 만들어준 기술자, 치과에서 도움을 베풀어준 의사와 간호사, 병들었을 때 사랑을 베풀어준 여러분들, 나로 하여금 나 되게 했고 이렇게 살게 해준 모든 사람들의 혜택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다. 내가 갖고 있는 지식과 학문도 모두가 스승과 다른 학자들로부터 받은 것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내 생명과 인생 자체가 부모, 가족과 더불어 주어진 것이다.〉(김형석의 《백년을 살아보니》 중에서)
 
  김 교수는 “나는 그 많은 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가르치는 일 한 가지만 하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 한 가지를 열심히 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고맙다고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그는 “얼마나 아름답고 착한 세상인가. 그 한 가지만이라도 정성껏 보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우리 모두의 인생”이라고 말한다.
 
 
  “남을 선망하라”
 
김난도 교수가 쓴 《아프니까 청춘이다》(2010).
  한국 사회는 경쟁의 연속이다. 피 튀기는 경쟁에서 밀리면 끝이다. 자존심을 버린 지 오래지만 경쟁이 자신을 다그친다. 남의 성공을 부럽게 바라보지만 이내 증오로 바뀐다. 증오는 질투의 심리와 다르지 않다.
 
  질투는 왜 하는가? 상대의 성공요인을 운(運)이나 부정처럼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돌려 성취를 깎아내리면서 생기는 자기방어의 기제다. 그러면 마음이 편할지 모른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아프니까 청춘이다》(2010)에서 “문제는 이번에 이겼느냐 졌느냐가 아니다. 이번 경험을 통해 내가 얼마나 성장했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경쟁에서 밀렸다고 졌다고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질투한다면 그다음 경쟁에서도 결과는 뻔하다. 가만히 살펴보면 항상 이기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조금씩 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대개의 사람은 자신의 실패 내지 열등감을 감추려고 노력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잊거나 부정하며, 소수의 의지 강한 사람들은 그것을 극복하려 애쓴다.
 
  〈그대는 어느 쪽인가? 같은 조건이라면 가벼운 배일수록 더 빠를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뱃사람들은 배 밑바닥에 ‘밑짐’이라 부르는 일정 무게의 짐을 항상 실어둔다. 밑짐 든든한 배는 풍랑이 거센 때라도 큰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열등감을 인생의 밑짐으로 삼고 살아가면 어떻겠는가? 감추거나 부정하려 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성취의 동력으로 인정하고 살아가면 어떨까? 그럴 때, 열등감은 인생의 풍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중에서)
 
  김난도 교수는 말한다. “질투하는 대신 선망하라” “타인의 성취를 인정하라”고. 설령 그의 성공에 문제가 많아 보일지라도 존중할 만한 점을 애써 찾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한껏 부러워해라. 그래야 이길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성취를 보고도 부러워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지는 것이다.〉(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중에서)
 
  윤영수의 단편소설 〈착한 사람 문성현〉(1997)을 읽는다. 소설 속 주인공인 문성현은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1957년 7월 태어난 그의 집은 종로구 동숭동 130번지. 사대문 안에서 남부럽지 않은 남평 문씨 집안의 장손으로 자랐으나 손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동생들은 그런 문성현을 무시하거나 없는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 학교에 갈 때나 돌아올 때 등 언제나 그에게 인사를 하고 맛있는 군것질거리들도 사다 준다.
 
  대소변을 치워주던 파출부 상주댁이 지나가는 말로 ‘아버지가 암에 걸린 건 성현이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을 듣고 성현은 사이다병을 깨서 손목을 긋지만 실패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0평 아파트로 이사 갔으나 점점 형편이 나빠져 14평 아파트로 이사 간다.
 
  그사이 문성현은 누운 채로 성장했다. 사춘기를 맞아 얼굴에는 여드름이 났으며 때로는 몽정을 하기도 했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말을 걸었다.
 
  “문성현, 이만하면 자네도 미남이야.”
 
 
  소설 〈착한 사람 문성현〉을 읽으며
 
당신이 남을 자기처럼 사랑하려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자기를 아낄 줄 알아야 한다. 일러스트=조선DB
  그러다 문득 버르적대며 방을 기어 다니는 자신은 달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이제 알에서 갓 깨어난 누에라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부터 자신의 버르적거리는 행동을 다른 이들에게 감추기 시작했다. 용변을 볼 때, 주위를 치울 때, 라디오를 켜고 끌 때조차 그는 혼자이기를 원했다. 문성현 자신도 없어야 했다.
 
  문성현을 돌봐주는 파출부 상주댁은 자신의 아들 때문에 속상하다. 다른 친구들의 물건에 손을 대 소년원을 들락날락한 것이다. 그 아들을 생각하며 이렇게 속엣말을 내뱉었다.
 
  “자식이 웬수라 카더니. 어디 시궁창에라도 쿡 박히가 죽으뿌리마 핀켔데이.”
 

  그 말을 듣고 문성현은 이런 말을 했다.
 
  “아줌마, 그래도 아줌마는 우리 어머니보다 나아요. 우리 어머니는, 내가 멀쩡한 몸만 된다면 평생 감옥에 들어가 계시라 해도 그렇게 하실 거예요.”
 
윤영수 소설집 《착한 사람 문성현》(1997).
  상주댁이 걸레질을 하다가 그를 물끄러미 보며 이렇게 말했다.
 
  “겉으로는 빙신이라도 속은 말짱하데이. 마이 걱정을 해주는 걸 보이. 빙신 아들이 낭종에는 효자 노릇 한다이께네.”
 
  그날, 상주댁은 처음으로 그가 신문지로 싸놓은 대변을 낯 찡그리지 않고 치워주었다. 성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효자, 효자가 된다…. 그렇고 말고.’ 앉고 서고 걷기만 하면 그는 세상에 다시없는 효자가 될 예정이었다. 그의 가슴이 하루 종일 뿌듯했다.
 
  그러나 문성현은 얼마 후 배신을 당한다. 집안 식구들이 건네주어서 한 푼 두 푼 모은 돈이 송두리째 없어진 것이다. 이튿날부터 상주댁이 오지 않았다. 성현은 기다렸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사실 그에게는 딱히 돈을 쓸 데도 없었다.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다음 날 다른 파출부가 왔다. 그러고 넉 달 후 상주댁이 찾아왔다. 어머니는 상주댁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주댁이 눈물을 글썽이며 성현이에게 말했다.
 
  “기특데이. 우예 그리 속이 깊노.”
 
  〈성현은 그날 밤 오랜만에 후련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어쩌면 우울하고 힘들기만 한 건 아닐지 모른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듯이 고통이 있으면 보람도 있는 법이다. 지금은 괴롭지만….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렇다. 그의 가슴속에는 희망이 있었다. 다른 이에 비하자면 자신의 출발은 너무나 더디고 몇 백 배 힘이 들었지만, 그에게도 장래에 대한 부푼 희망이 있었다.〉(윤영수의 〈착한 사람 문성현〉 중에서)
 
  문성현은 장애인이다. 남의 도움 없인 스스로 먹을 수도 대소변을 처리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는 혼자 앉는 것도 많은 시행착오 끝에 성공할 수 있었다. 재빨리 상체를 들어 올리면서 반동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제대로 앉는 데 적어도 5분 이상이 걸렸다. 그러나 혼자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환호했다. 앉는 연습을 하느라 방 도배지가 2, 3일이면 떨어져 나갔다. 흙벽 외얽이가 허옇게 드러났다. 어머니가 환히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래 성현아. 그깟 흙벽 뻥 뚫어버려라.”
 
  남에겐 가치 없는 것이 때로 나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귀하다. 성현이의 앉는 연습이, 성현이의 희망이 남들에겐 아무런 가치를 주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소설 〈착한 사람 문성현〉을 읽으며 그의 삶을, 우리의 삶을 돌아본다. 넘어진 사람, 엎어진 사람이 곁에 있으면 손을 내밀리라 다짐한다.
 
송찬호 시인의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2009).
  이 책은 소인국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을 땐 쪼그려 앉아야 한다.
  책 속 소인국으로 건너가는 배는 오로지 버려진 구두 한 짝
  깨진 조각 거울이 그곳의 가장 큰 호수
  고양이는 고양이 수염으로 알록달록 포도씨만 한 주석을 달고
  비둘기는 비둘기 똥으로 헌사를 남겼다.
  물뿌리개 하나로 뜨락과 울타리
  모두 적실 수 있는 작은 영토
  나의 책에 채송화가 피어 있다.
 
  -송찬호의 시 ‘채송화’ 전문

 
  오늘 남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까. 남의 입장에서 나를 버릴 수 있을까. 소인국 이야기를 읽을 때는 키 작은 사람처럼 쪼그려 앉아 읽을 수 있을까. 소인국보다 작은 우리 마음에 채송화 한 송이 피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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