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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지금을 읽는 ‘新당의통략’ 〈19〉

소년왕 숙종, 大老 송시열을 제압하다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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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 13세의 나이로 즉위해 바로 親政 들어가
⊙ 西人이면서도 反송시열-親남인 성향의 김석주 중용
⊙ 이단하가 현종의 行狀 서술 시, 송시열의 잘못 적시하기를 회피하자 “스승만 알고 君命이 있음은 알지 못한다”며 격노
⊙ 숙종, “송시열은 효종의 예우를 입었는데도 도리어 庶子라는 폄칭을 가하였으니,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숙종의 정치적 동지 김석주
  1674년 숙종(肅宗)이 즉위했을 때 나이 13세였다. 이런 경우 통상적으로 20세 정도 될 때까지는 대비(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곧바로 친정(親政)을 했다. 숙종의 친정은 곧바로 정국(政局)에 직접적인 영향을 가져왔다. 그것은 곧 당파의 세력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숙종의 아버지 현종(顯宗·1641~ 1674년)은 비교적 무난하고 반듯한 인물이었다. 정치를 함에 있어서도 크게 무리수를 두지 않았고 재위 15년 3개월 동안 커다란 업적도 없었지만 이렇다 할 큰 실정(失政)도 없었다. 특이하게도 현종은 조선 국왕 중에 유일하게 정실 왕후 한 사람만을 아내로 두었다. 그가 바로 명성왕후 김씨다. 두 사람 사이에는 1남 3녀가 있었다. 그 1남이 숙종이고 3녀는 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였다. 현종이 승하하자 어린 숙종이 의지할 데라고는 어머니 명성왕후와 그 집안밖에 없었다. 명성왕후는 김우명(金佑明·1619~1675년)의 딸로 1642년 한양에서 태어났다. 김우명은 영의정을 지낸 김육(金堉·1580~1658년)의 아들이다. 송시열과 충돌했던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에 대한 졸기(卒記)는 “성품이 어리석고 지나치게 거만하였다”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김육의 큰아들 김좌명(金佐明·1616~1671년)은 병조판서를 지냈고 작은아들 김우명은 딸이 왕비가 되는 덕에 청풍부원군에 봉해져 현종 시대의 막강한 실력자로 부상(浮上)했다. 그는 집안 배경상 서인이면서도 송시열과 틀어지는 바람에 남인(南人) 계열의 허적(許積)과 가깝게 지냈다. 현종 말기에서 숙종 초기까지 남인 세력이 득세한 데는 김우명과 함께 그의 조카이기도 한 김좌명의 아들 김석주(金錫胄·1634~1684년)의 역할도 크게 작용했다.
 
 
  비운의 왕비 자의대비
 
  명성왕후 김씨(이때는 이미 대비였지만 편의상 명성왕후라고 칭하겠다)는 수렴청정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13세는 너무 어렸다. 성종(成宗)의 경우를 보더라도 정희왕대비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수렴청정을 했던 전례가 있다. 명종(明宗)의 경우에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있었다. 그런데도 숙종이 즉위할 당시 원상(院相)들이 국정을 사실상 대행하는 체제는 세우면서도 대비의 수렴청정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수렴청정할 생각이 애당초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고 수렴청정을 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의대왕대비의 존재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면 우선순위는 명성왕후 김씨가 아니라 자의대왕대비에게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두 차례에 걸쳐 상복(喪服) 문제로 조선의 조정을 뒤흔들어 놓았던 자의대왕대비는 어떤 인물이었는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자의대비, 즉 장렬왕후 조씨는 말 그대로 비운의 왕비였다. 1624년생으로 열다섯 살 때인 1638년(인조 16년) 3년 전 세상을 떠난 인렬왕후 한씨의 뒤를 이어 인조 계비(繼妃)가 되었다. 그러나 피부병이 있는데다가 후궁 중에서 소용(귀인) 조씨가 인조의 총애를 받는 바람에 이궁(離宮)으로 쫓겨나 사실상 별거에 들어갔다. 게다가 장렬왕후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石女)였다.
 
  소현세자가 죽고 세자위에 오른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은 장렬왕후에 대해 친어머니 대하듯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 실제로 경덕궁으로 쫓겨나 있던 장렬왕후가 왕실 어른으로 제대로 대접을 받게 된 것은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한 뒤부터였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계모(繼母)인 장렬왕후를 창덕궁으로 모셔왔고 효종 2년에는 자의(慈懿)라는 존호까지 올렸다. 그 유명한 ‘자의대비’라는 칭호는 이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수렴청정의 걸림돌 자의대왕대비
 
  이런 자의대비였기에 왕실 내에서 별다른 파워가 있을 리 없었다. 정작 자신의 상복을 둘러싼 당쟁(黨爭)이 격화될 때에도 그와 관련된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실은 말할 처지도 되지 않았고, 말을 한다고 해도 귀 기울여 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니 손주며느리인 명성왕후 김씨가 그를 진심으로 챙겨줄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의대왕대비의 존재 자체가 명성왕후의 입장에서 보자면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수렴청정을 할 경우 절차가 대단히 복잡해지고 특히 시간이 지나면서 적대 세력이 자의대왕대비에게 접근하지 말란 법도 없었다. 결국 수렴청정보다는 숙종의 친정을 자기 집안이 음양으로 돕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겠다는 쪽으로 의견이 수렴된 것으로 보인다. 마침 자신의 뜻을 정확히 대변해 아들 국왕의 곁에서 보좌할 수 있는 사촌 김석주가 있었다.
 
  명성왕후 김씨의 종형(從兄), 즉 사촌오빠인 김석주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명성왕후는 수렴청정 포기라는 결단을 못 내렸을지 모른다. 김육의 후손답게 서인이면서도 ‘친(親)남인 반(反)송시열’ 성향을 갖고 있던 김석주는 특히 서인과의 일전불사(一戰不辭) 및 남인으로의 정권 교체를 추진했던 현종 말년에 주목을 끌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현종이 급사했을 때 현종의 그 같은 유지(遺志)를 고스란히 이어서 관철할 수 있는 유일한 적임자였다. 게다가 숙종과 혈육지간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흔들리는 집권 초의 혼란을 극복하고 어리고 미숙한 숙종을 권력의 반석 위에 올려놓은 1등공신이 다름 아닌 김석주였다.
 
 
  漢黨과 山黨
 
김석주의 조부 김육.
  김석주는 어려서부터 문무(文武)에 뛰어났다. 남아 있는 영정(影幀)에서 보듯이 어릴 때부터 그의 모습은 호랑이를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현종 3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사헌부·사간원 등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한당(漢黨)이라 하여 서인 중에서도 핵심인 송시열의 산당(山黨)에는 들지 못했다.
 
  전통적으로 김육 집안과 송시열은 같은 서인이면서도 대동법(大同法) 논쟁에서 촉발된 현실주의 노선(한당)과 명분주의 노선(산당)의 대립으로 인해 갈등을 빚어왔다. 여기에는 약간의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김석주의 조부 김육은 일찍이 대동법을 힘써 주장하였고 반면 김장생(金長生)의 아들 김집(金集)은 철저한 반대파였다.
 
  그런데 한당과 산당의 대립은 김육이 죽자 더욱 격화되며 대를 이어가게 된다. 김육을 장례 지내면서 김좌명 등이 ‘참람하게’ 수도(隧道)를 파서 산당의 비난을 자초했다. 수도란 평지에서 묘소까지 난 길을 말하는 것으로 왕실에서만 할 수 있었다. ‘참람하게’란 분수를 넘어서 왕실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뜻이다. 서인 계통의 대신(臺臣) 민유중(閔維重) 등이 법에 의거하여 김좌명 등을 죄주기를 청하였다. 이때 이조판서 송시열이 민유중의 편을 들어 김좌명을 몰아세웠다. 이로 인해 김석주 집안에서는 산당에 대해 깊은 원망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현종 때 김석주는 중궁의 사촌이라는 이유로 인사상의 불이익까지 받아야 했다. 그러나 현종이 말년에 제2차 예송(禮訟)을 주도하면서 김석주는 핵심 참모로 떠오른다. 도신징의 상소가 올라왔을 때 현종이 은밀하게 부른 이가 바로 좌부승지였던 처사촌 김석주였다. 당시 현종은 제1차 예송을 재검토하기 위해 김석주로 하여금 당시의 주요 문건들을 정리해 보고할 것을 명했는데 김석주는 남인 허목(許穆)의 상소를 비롯해 주로 남인의 입장을 옹호하는 문건들을 중심으로 보고를 함으로써 현종의 서인 제거 결심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이후 그가 숙종 10년 51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의 노선이 곧 숙종의 노선이었다고 할 만큼 두 사람은 정확하게 같은 노선을 걸었다. 숙종은 처사촌 김석주의 길을 따랐고 김석주는 숙종의 의중을 미리 따랐다. ‘표범의 정치’ 숙종과 ‘범의 정치’ 김석주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은 길을 걸어갔다.
 
 
  김석주, 숙종 즉위 후 승승장구
 
  우선 숙종 즉위년 한 해 4개월여 동안의 김석주의 특진(特進) 과정을 추적해본다. 8월 23일 숙종이 즉위했을 때 김석주는 우승지로 있었다. 그러고 한 달 후인 9월 20일 김석주는 수어사(守禦使)로 임명된다. 수어사란 정묘호란 이후 북방의 경계를 강화하면서 남한산성에 설치됐던 중앙 군영인 수어청의 으뜸 벼슬로 굳이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수도방위사령관에 해당하는 요직이었다. 원래 이조와 병조에서 올린 인사 후보군에는 들어 있지 않았으나, 숙종의 특명(特命)으로 품계가 다소 낮음에도 불구하고 김석주가 발탁된 것이다. 그리고 수어사의 경우 비변사(備邊司)의 일원으로 국가 중대사를 논의할 때 직접 참여하여 발언할 수 있었다.
 
  10월 10일에는 숙종이 송시열에게 현종의 묘지문을 지으라고 명했으나 끝까지 사양하자, 신하들은 이단하와 김석주 두 사람을 추천했다. 결국 숙종은 김석주로 하여금 묘지문을 쓰도록 한다. 이 또한 김석주에 대한 총애를 만천하에 확인해주는 결정이었다. 또 열흘 후인 10월 20일 이조참판 남구만(南九萬)이 사직서를 내자 통상 만류하는 관례를 뿌리치고 단번에 수리해버렸다. 이조참판은 사람을 뽑는 자리이므로 서인 세력을 물리치고 그 자리에 김석주를 박아놓기 위함이었다. 실록의 평이다.
 
  “당시 임금은 서인들을 미워했는데 김석주는 (서인임에도 불구하고) 취향이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여 김석주를 인사 책임자로 끌어다 두었다.”
 
  실제로 이날 김석주는 이조참판에 오른다. 그러면서도 수어사를 겸직했다. 문무의 핵심 요직을 동시에 장악한 것이다. 서인들은 반발했다. 혈육을 중용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그게 부담스러웠는지 11월 13일 김석주는 이조참판에서 물러나겠다는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숙종은 일언지하에 사직서를 물린다.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하라!”
 
  오히려 숙종은 불과 22일 후인 12월 5일 김석주를 도승지로 제수하여 최측근에 놓는다. 서인 제거 작전을 보다 긴밀하게 협의하기 위한 조처였다. 서인들은 분노와 원망 속에서도 김석주의 일거수일투족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과 행동이 곧 숙종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김석주는 숙종의 주석지신(柱石之臣)이었다.
 
 
  소년왕과 大老의 한판 대결
 
  1674년(숙종 즉위년) 8월 21일 아버지 현종이 세상을 떠난 지 사흘밖에 안 되었고 자신은 아직 왕위에도 오르지 않은 13세 세자는 송시열을 원상으로 삼기로 했다. 원상이란 어린 임금이 즉위했을 때 주요 정무를 3정승과 공신들이 함께 처결하는 제도로 조선에서는 세조(世祖) 말기에 처음 생겨 성종의 경우처럼 어린 임금이 즉위하면 국왕이 친정을 펼치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운용되던 제도였다.
 
  이미 현종이 승하한 다음 날인 8월 19일 영의정 허적, 좌의정 김수항(金壽恒), 우의정 정지화(鄭知和) 등 3상(相)이 원상을 맡기로 했는데 이틀 후 원상인 허적 등이 전임 대신들 중에서 덕망이 있는 인물을 원상으로 삼는 사례가 있었으니 송시열도 원상에 명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세자는 기꺼이 승낙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 한양도성 밖에 머물고 있던 송시열은 거부의 의사를 보내왔다.
 
  “범죄(犯罪)를 한 것이 지극히 중하여 한양 가까운 곳에서 대죄(待罪)한 지가 이미 한 달이 되었습니다. 선침(仙寢·현종의 능)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어찌 차마 갑자기 무죄(無罪)로 자처하면서 임금 계신 곳에 드나들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가운데 원상을 비롯한 신하들의 즉위 요청은 이어졌고 마침내 8월 22일 대비전의 강청(强請)을 수용하는 형식으로 세자는 왕위에 오르게 된다. 즉위식이 있던 날 성균관 유생 이심 등은 송시열이 도성 밖에 머물러 있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며 신정(新政) 초기에 송시열을 중용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숙종은 바로 다음 날 사람을 보내어 송시열에게 당장 한양으로 들어오라 명했으나 송시열은 수원으로 내려가 버렸다. 어린 숙종의 호의(好意)에 대한 두 번째 거부였다.
 
  숙종이 내민 세 번째 손길은 능지(陵誌), 즉 현종의 묘지문을 지어 올리라는 명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상소문을 올려 간곡하게 거절했다. 숙종의 반응은 “경의 상소를 보고 내가 매우 놀랐다”였다. 송시열은 9월 8일 재차 상소를 올려 능지를 지을 수 없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숙종의 독촉이 이어지자 송시열은 한강을 건너와 도성에는 들어오지 않고 다시 자신을 처벌해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송시열로서는 남인이 득세하고 있는 정국에서 현종과의 사이에 있었던 ‘애매한 문제’가 명료하게 풀리기를 기대했는지 모른다. 사실 그 문제가 모호하게 남아 있는 가운데 조정에 복귀한다는 것은 남인들의 덫에 걸리는 죽음의 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송시열이 몰랐을 리 없다.
 
  9월 17일 숙종은 정치화(鄭致和)를 중추부영사로 임명하면서 송시열에게도 중추부판사라는 관직을 제수했다. 숙종의 네 번째 손길이었다.
 
 
  유생 곽세건의 상소
 
  송시열의 중추부판사 임명은 남인들을 위기감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남인들이 정국을 장악한 것은 아직 두 달도 되지 않았다. 서인의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이 예론(禮論)을 잘못 쓴 책임을 지고 귀양을 떠나야 했던 것이 현종 15년(1674년) 7월 16일이었다.
 
  이때부터 현종은 송시열의 문인들을 제거하려고 결심을 했고 막 실행에 옮기려던 참에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남인의 허적이 김수흥의 뒤를 이어 영의정이 되긴 했으나 김수흥의 동생인 좌의정 김수항, 전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사촌동생인 우의정 정지화 등은 모두 서인의 핵심인 데서 알 수 있듯이 남인의 세상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이런 상황에서 송시열의 복귀는 곧 남인의 몰락이었다.
 
  9월 25일 남인 전통이 강한 진주 유생 곽세건이라는 인물이 총대를 멨다.
 
  〈기해복제(1차 예송) 때 효종(孝宗)이 서자(庶子)라는 말을 주창한 이가 송시열인데 이 사론(邪論)에 동조한 김수흥은 유배를 갔거늘 송시열이 무사하다는 것은 법에 어긋난다. 게다가 이런 조정의 죄인으로 하여금 능지를 짓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적통(嫡統)을 바로잡은 것은 현종의 최대 업적 중 하나인데 만일 송시열이 사실대로 기록한다면 그것은 서자를 주장한 자신의 잘못을 자복하는 것이 되고, 또 선왕(先王)의 미덕을 은폐하려 한다면 그 업적을 인멸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송시열은 능지를 쓰는 붓을 잡기가 어려울 것이다.〉
 
 
  ‘호모 폴리티쿠스’ 숙종
 
  일언가파(一言可破), 단칼에 정곡(正鵠)을 찔렀다. 일개 유생의 상소에 조정 대신들이 보인 반응을 보면 곽세건이 올린 소(疏)의 파괴력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곽세건의 소는 도신징의 소에 버금가는 폭발력을 갖고 있었다.
 
  다음 날 대사헌 민시중과 지평 신완이 곽세건에 대한 엄한 국문(鞠問)을 요청한 것을 시발로 사간 이무도 곽세건을 단죄할 것을 주청했다. 이어 좌의정 김수항은 곽세건의 소가 자신의 형 김수흥을 배척한 것이라는 이유로 사직을 청했고 우의정 정지화도 사직 의사를 밝혔다. 조정 내 서인들이 모두 들고일어났다.
 
  이 정도 되면 아무리 대담한 국왕이라도 섬뜩할 수밖에 없다. 사실 조선 국왕의 왕권은 세조를 끝으로 쇠락의 길에 들어섰고 신하들이 이렇게 나오면 십중팔구 없었던 일로 하면서 덮어버렸다. 더욱이 서인들에게는 송시열이라고 하는 태산과도 같은 인물이 버티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오판(誤判)이었다. 숙종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권력왕(權力王),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였다. 날 때부터 임금이 될 사람이었다. 조선에서 날 때부터 임금이 될 사람이 실제 왕위에 오른 경우는 연산군(燕山君)·인종(仁宗)에 이어 숙종이 세 번째였다.
 
  이들은 무엇보다, 또 누구보다 강한 왕권을 추구하는 성향을 보이기 마련이다. 게다가 정변(政變)을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세를 진 공신(功臣)들이 없었다. 군주로서 본인의 능력만 탁월하다면 왕권 강화를 추구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 바로 ‘날 때부터 임금이 될 사람의 즉위’였다. 연산군은 문란했고 인종은 즉위해 1년도 안 돼 죽었지만 숙종은 달랐다. 뒤에 보게 되겠지만 숙종은 태종(太宗)에 버금갈 정도의 정치력을 갖춘 인물이다.
 
 
  西人의 完敗
 
  곽세건의 소가 올라온 지 이틀 후 숙종은 영의정 허적, 중추부영사 정치화, 좌의정 김수항, 승지 김석주를 불러 각자의 의견을 들어본다. 허적의 입장이 가장 애매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당파가 다른 김수항과 함께 원만한 국정 운영을 위해 힘쓰고 있는데 그 같은 괴이한 소가 올라와 당혹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생이 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중벌을 가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유생 자격을 박탈하는 선에서 처벌이 이뤄지면 좋겠다고 말한다.
 
  김수항도 자신은 당파를 떠나 허적과의 협력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자기 형이 연루되는 이 같은 일이 터져 입장이 곤란하다고 했다. 정치화, 김석주는 강력한 처벌을 주장했다. 결국 곽세건 문제는 그의 과거시험 자격을 박탈하는 ‘정거(停擧)’ 조치를 취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처벌이 너무 약했다. 서인의 완패(完敗)였다. 대신 송시열이 능지를 쓰는 일은 계속 추진하기로 했다.
 
  다음 날 다시 서인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대사헌 민시중과 대사간 윤심 등이 곽세건을 먼 곳으로 유배 보내야 한다고 주청했다. 10월 2일에는 성균관 유생 한석우를 비롯한 180명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곽세건을 처벌하고 송시열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간청했다. 이에 대한 숙종의 반응은 “이들을 벌주고자 하는데 어떤가?”였다. 허적과 김수항의 만류로 그냥 넘어갔지만 이미 눈 밝은 조정 대신들은 머리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남인과 서인에 대한 어린 임금의 태도가 확연히 다르지 않은가?
 
 
  “先王에 대해 논하는 자는 逆律로 다스리겠다”
 
  이런 상황에서 송시열에게 계속 능지를 쓰도록 한다는 것은 송시열의 입장에서 보자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치였다. 자신을 모욕하는 자는 봐주고 자신을 옹호하는 자는 처벌하려 하면서 또 자신에게는 능지를 맡기려 한다? 주상 혼자의 뜻인가? 아니면 뒤에 누가 있는가? 있다면 허적인가 아니면 주상의 모친인 대비인가? 일단 송시열은 다시 한양을 떠났다. 10월 6일 숙종은 능지를 짓는 일을 송시열이 아닌 김석주에게 맡긴다.
 
  숙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연이어 송시열을 옹호하고 곽세건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헌부 지평 이수언(10월 5일), 예조정랑 김광진(10월 6일), 홍문관 수찬 강석창(10월 7일) 등에 대해 10월 7일 파직(罷職)을 명하고 “앞으로 상소를 올려 예(禮)를 논하고 선왕에 대해 말하는 자는 역률(逆律)로 다스리겠다”고 선포했다.
 
  원상 허적조차 깜짝 놀라 “역률이란 말은 함부로 써서는 안 되니 중률(重律)로 고쳐줄 것”을 청하였으나 숙종은 비망기를 통해 ‘일죄(一罪)’로 고쳐서 답했다. 일죄란 사형으로 사실상 역률로 다스리겠다는 뜻이었다. 허적이 재차 글을 올리자 숙종은 마지못해 ‘역(逆)’자를 ‘중(重)’자로 바꿔주었다.
 
  실제로 경기도 유생 이필익이라는 인물은 10월 29일 곽세건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그 즉시 함경도 경흥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이때도 영의정 허적의 중재로 유배지가 강원도 안변으로 조정되기는 했지만,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 세력에 대한 숙종의 태도는 점점 강경해지고 있었다.
 
 
  숙종이 놓은 덫에 걸린 대제학 이단하
 
  11월 1일 대제학 이단하(李端夏· 1625~1689년)가 대행대왕(大行大王·현종)의 행장(行狀)을 지어 올렸다. 실은 송시열의 핵심 제자인 이단하로 하여금 능지 못지않게 중요한 행장을 지어 올리게 한 것은 대단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 행위였다. ‘너는 과연 스승 송시열의 행적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보겠다는 숙종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숙종과 이단하의 논쟁은 불과 몇 개월 전 현종과 영의정 김수흥의 논쟁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단하가 지은 행장을 꼼꼼하게 읽어본 숙종은 먼저 얼핏 보기에 ‘사소한’ 문제부터 시비를 걸었다. 현종이 복제(服制)를 바로잡은 후에 복제 문제에 책임이 있는 대신과 예관을 처벌하였는데 이단하의 글은 ‘대신과 예관을 처벌한 후 국가 전례(典禮)가 바로잡혔다’고 거꾸로 서술해놓았다는 것이다. 이단하는 곧바로 이 부분을 바로잡아 다시 행장을 올렸다.
 
  이에 대한 숙종의 반응은 더욱 싸늘했다. 이단하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명을 받아 고치라고 해서 고쳤는데 오히려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는 것이 아닌가? 추고란 조선 시대 때 벼슬아치의 죄과를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단하의 불길한 예감은 이어지는 숙종의 말을 들으면서 조금씩 분명해져 갔다.
 
  “선왕(현종)께서는 친히 예경(禮經)의 본의(本意)를 상고하셔서 한결같이 예경에 따라 복제를 바로잡으셨다. 그런데 지금 이 행장에서 ‘특별히’ 바로잡았다고 말한 것은 마치 선왕께서 예경에 의거하지 아니하고 억지로 정한 것처럼 되었으니, 속히 고쳐서 다시 들이라.”
 
  이미 어린 임금이 지향하는 바를 알아차린 대신들도 많았다. 걱정은 과연 이 어린 임금이 어디까지 이 문제를 몰아갈 것인가였다. 무엇보다 서인 계열 신하들은 극도의 공포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이단하의 딜레마
 
  제3라운드, 어렵사리 고쳐서 다시 들고 간 이단하의 행장에 대해 숙종은 이번에는 영의정 김수흥을 처벌한 이유를 두고 다시 문제를 제기했다. 행장에 김수흥이 벌을 받게 된 이유를 ‘실대(失對)’라고 적어놓았는데 잘못 대답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의논을 냈기 때문에 처벌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아버지 현종이 영의정의 실수를 이유로 처벌을 할 만큼 옹졸한 인간이라는 말이냐는 질책과 함께 김수흥을 포함한 누군가, 즉 송시열이 주도한 ‘다른 의논’에 대해 책임을 물으려 했던 현종의 본뜻을 왜 왜곡하고 있는가라는 정면 추궁이었다.
 
  그러나 행장에 ‘송시열’ 이름 석 자를 자신의 손으로 쓰는 순간 이단하는 그 자리에서 목숨은 부지하겠지만 이미 사림(士林) 세계에서는 송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이단하는 애초에 행장 작성을 명 받을 때 자신이 김석주와 함께 ‘다른 의논을 부탁했다’는 대목은 도로 거두어 달라고 청했더니 전하께서도 그르다고 하지 않으셨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숙종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실대(失對)라고 한 것은 온당치 못하니 속히 다시 적어 올리라!”
 
  이렇게 해서 이단하가 드디어 ‘예경(禮經)을 잘못 인용하였으므로 대사(大事)를 당하여 대신(大臣)이 직임을 잘못 행했다’는 뜻으로 고쳐서 올렸다. 그나마 이단하로서는 스승 ‘송시열’ 이름 석 자를 행장에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으로 위안을 삼으려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단 한마디로 정곡을 찌르는 일언가파의 숙종은 제4라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단하의 수정본을 읽은 숙종은 “(영의정 김수흥이) 선왕의 은혜를 망각하고 (송시열이 제기한) 다른 의논을 부탁했다는 말이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실려 있는데 지금 이 행장에는 끝내 싣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뜻이냐?”고 몰아세웠다. 마침내 이단하로서는 더 이상 피하려야 피할 데가 없었다.
 
 
  다시 살아난 불씨
 
  숙종은 《승정원일기》를 근거로 ‘다른 의논을 부탁했다’는 말을 추가할 것을 명했고 이단하는 그것만은 절대로 할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사태를 불안하게 지켜보던 영의정 허적이 중재에 나섰다.
 
  허적의 오랜 설득 끝에 결국 이단하는 ‘不從禮經而從他人之議罪首相[예경을 따르지 아니하고 타인의 예론을 따랐다 하여 수상(영의정)을 죄주었다]’는 13자를 첨입하고 일단 ‘사지(死地)’에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문제는 ‘타인(他人)’이라는 대목이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타인은 바로 송시열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타인’이라고 적은 것만으로도 이미 이단하는 스승에게 큰 죄를 지은 셈이었다.
 
  숙종이나 이단하나 일단 이 정도로 행장 문제는 일단락된 줄 알았다. 그런데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1월 29일 박봉상이라는 진사가 “타인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라며 정곡을 찌르는 소를 올렸다. 이 점을 분명히 하고 나서 행장을 완성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단하의 반격
 
  실은 숙종 자신이 원하던 바였다. 일개 진사의 소였음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해당 문장을 즉각 고치겠다고 반응한 데서 그의 의중이 드러난다. 숙종은 바로 그날 이단하에게 문제의 대목을 개정할 것을 지시했다. 박봉상이 던진 불씨로 인해 거의 꺼져가던 짚단에 다시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이단하로서도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다음 날 이단하는 개정된 행장 대신 상소를 올렸다. 이에 숙종은 즉시 이단하를 불러들였다. 직접 말해보라는 취지였다. 역시 송시열 문제였다.
 
  “선조(先朝·현종)께서 수상을 죄주라는 전지(傳旨) 가운데에 다만 다른 예론[他論]에 붙었다는 하교만 있었고, 당초에 사람 이름은 지적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지금 신(臣)이 만약 모인(某人)을 가리켜서 말한다면, 이는 신 스스로 내리는 말이 되고 선왕의 전지가 아닌 것입니다. 어떻게 감히 이렇게 하겠습니까?”
 
  타론(他論)이 아니라 타인지의(他人之議)로 고쳐야 했던 대목이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래서 이단하는 더 이상 고쳐 쓰는 것은 불가(不可)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제4라운드는 이단하가 먼저 시작하고 있었다. 숙종도 “선왕의 뜻은 판부사(判府事)가 예경(禮經)을 그릇되게 논했다고 여기셨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고치지 않느냐?”며 맞받아쳤다. 이제 숙종이 ‘판부사(중추부판사)’라고 특칭을 함으로써 ‘타인’이 누구인지가 보다 분명해졌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이단하 입에서도 ‘송시열’이란 이름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선왕(현종)께서는 그 사람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명하시지 아니하신 것은, 양조(兩朝·효종과 현종)에서 빈사(賓師·스승)로 예대(禮待)하시던 신하인지라 차마 갑자기 그 이름을 지적하여 현저하게 배척하시는 뜻을 나타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 이름을 쓰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후인(後人)이 어찌 이 일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선왕의 포용하시는 덕(德)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신이 끝내 봉명(奉命)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현종도 알면서 지나간 일을 굳이 자신이 이름을 거론한다는 것은 현종의 뜻과도 배치되는 것 아니냐며 숙종의 약점을 넌지시 건드려보는 논법이었다. 사실 이단하로서 펼칠 수 있는 논리도 어쩌면 이것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송시열’ 이름 석 자
 
송시열
  천성이 그런지 어려서 그런지 몰라도 아직 우회(迂廻)의 묘(妙)를 모르는 숙종이었다.
 
  “장자(長子)를 위하여 응당 3년을 입어야 할 것인데 기년(朞年·1년)으로 내렸기 때문에, 선왕께서 그 잘못을 아시고 고치신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거론하며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이에 이단하는 자신은 더 이상 고쳐 쓸 수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행장 개수(改修) 책임을 맡기는 게 좋다며 배수의 진을 쳤다. 급기야 숙종의 입에서도 ‘송시열’ 이름 석 자가 튀어나온다.
 
  “송시열이 나라의 전례(典禮)를 그릇되게 논했기 때문에 선왕께서 특별히 바로 고치시고, 그 뒤에 수상이 송시열의 뜻에 따랐다는 이유로 죄주신 것이니, 이러한 뜻으로 고쳐서 들이거라.”
 
  일단 탑전(榻前·어전)을 물러나온 이단하는 아무리 생각해도 숙종의 명을 받들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그는 다시 소를 올려 다른 사람에게 개수 책임을 맡겨달라고 청했다. 숙종은 진노했다.
 
  “내가 어린 임금이라고 하여 무시하는 소치이니 중률로 다스리겠다.”
 
  이에 놀란 승정원에서 중재에 들어갔고 오랜 설득 끝에 이단하도 나름의 방법을 찾아내 이런 대목을 추가시켰다. ‘宋時烈所引禮(송시열 소인례)’, 즉 송시열이 예론을 이끌었다는 뜻이다. 이단하로서는 스승의 이름을 노출은 시켰지만 ‘예를 이끌었다’는 말은 적어도 송시열이 기년복을 주장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스승에 대한 도리는 지킬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이 점을 숙종이 모를 리 없었다. ‘잘못 이끌었다’로 고쳐 넣으라는 엄명(嚴命)이 떨어졌다. 소(所)를 오(誤)로 바꾸라고 명한 것이다. 이단하로서는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단하로서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렸다. 이단하의 고민은 깊었다. 12월 18일 그사이 이조참판으로 승진해 있던 이단하는 장문(長文)의 소를 올렸다. 그중에 이런 대목이 포함돼 있었다.
 
  〈신은 송시열에게 스승과 제자의 의(義)가 있습니다. 행장을 고쳐 올릴 때 엄명에 핍박되어 이미 그의 성명(姓名)을 썼으며, 또 성교(聖敎)를 받고 오(誤)자를 그 이름 아래에 썼습니다. 신이 마땅히 문생의 의리로 인피(引避)하고, 다시 다른 사람에게 명하시도록 청했어야 할 것인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후회막급일 뿐입니다.〉
 
  이를 읽어본 숙종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한갓 사표(師表·스승)만 알고 군명(君命)이 있음은 알지 못한 것이니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은가?”
 
 
  西人 숙청
 
  곧바로 이단하는 삭탈관작(削奪官爵) 문외출송(門外出送)을 당하였다. 송시열을 정점으로 하는 서인 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선전포고를 날린 셈이었다. 당시 분위기에 대해 이건창은 《당의통략》에서 “이때 숙종의 나이는 14세였는데 온 조정에서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비록 현종의 급서로 중단되기는 했지만 현종의 입에서 “임금에게 박하게 하고 누구에게는 후하게 하는가”라는 말이 나온 직후 영의정 김수흥은 귀양길에 올라야 했다. 그리고 그때 중단된 서인 숙청 작업은 불과 몇 달 후 숙종의 입에서 “한갓 사표만 알고 군명이 있음은 알지 못한 것이니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은가?”라는 말이 나온 직후 급속하게 재개되었다.
 
  이단하에 대한 삭탈관작 문외출송 명이 떨어진 12월 18일 사헌부와 사간원에 포진해 있던 남인 계통의 장령 남천한, 지평 이옥, 헌납 이우정, 정언 목창명이 합동으로 계(啓)를 올려 송시열의 파직을 청하자 숙종은 그 자리에서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한다. 당시 송시열은 중추부영사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 대사간 이합은 구차스럽게 송시열 파직 합동 상소에 참여할 수 없다며 하명을 기다리겠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한 숙종의 불같은 반응이다.
 
  “당을 비호하면서 공갈 협박하는 작태가 아닌 것이 없으니 진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이미 송시열의 파직을 둘러싼 논쟁 과정에서 남인과 서인의 치열한 정치투쟁이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숙종은 서인들이 송시열의 파직을 반대하는 족족 삭탈관직을 명했다. 이합은 그 첫 번째 희생물에 불과했다. 그리고 서인이 떠난 자리에는 속속 남인이나 김석주와 가까운 인물들로 채워졌다.
 
 
  “士禍가 박두하고 있다”
 
  송시열의 파직이 정해지자 서인들의 반격은 점점 더 거세졌다. 12월 20일 중추부판사 정지화가 나서 16년 전의 일로 구신(舊臣)들을 조정에서 내쫓는다면 현재의 조정을 위해 좋을 일이 없다고 말했고 22일에는 사간 이헌이 “사화(士禍)가 박두하고 있다”며 자신을 교체해줄 것을 청했다. 이미 칼을 뽑은 숙종은 바로 다음 날 이헌을 사간에서 체직(遞職)시켜버렸다.
 
  “이헌이 감히 (내가) 사론(邪論)을 주워 모았다느니 갑자기 참소 무함하는 말을 따른다느니 한 말은 극히 참람하며, 예(禮)를 그르친 잘못을 완전히 엄폐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면서 방자하게 당(黨)을 비호하는 모습을 보이니 극히 놀랍다.”
 
  숙종의 서인 숙청 의지가 워낙 강해 김석주의 주선으로 대사간에 오른 이지익조차 12월 25일 사직 상소를 올렸다. 송시열의 예론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처벌하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취지였다. 이미 이지익은 서인과 남인 모두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었다. 당파의 시대에 자기의 길을 걷는 것은 그만큼 험난했다.
 
  송시열의 파직을 이끌어냈던 남인의 장령 남천한, 지평 이옥, 헌납 이우정, 정언 목창명 등은 다시 12월 26일 송시열의 삭탈관작과 문외출송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숙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자리에서 “아뢴 대로 하라”고 답했다. 문외출송이란 한양 밖으로 추방하는 벌이다. 점점 처벌의 수위가 강해지고 있었다.
 
  다음 날 야대(夜對)에서 《논어》를 진강한 다음 시독관 윤지완이 나서 송시열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숙종은 그 자리에서 윤지완의 체직을 명한다. 그 자리에 있던 동지사 남구만도 나서 송시열을 옹호하려 하자 말을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숙종은 말허리를 끊으며 “본분에 넘치는 말은 하지 마라”고 호통을 쳤다.
 
 
  송시열, “청풍 김씨의 참소가 드디어 실행되는구나”
 
윤휴
  해가 바뀌어 숙종 1년(1674년) 1월 2일 장령 남천한과 정언 이수경이 합계하여 이번에는 송시열뿐만 아니라 송준길, 이유태 등을 모두 벌할 것을 청하였다. 그런데 송준길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송시열과 이유태는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자는 것이었고 송준길의 경우에는 생전의 관직을 삭탈하자는 것이었다. 예송이 말 그대로 남인과 서인의 대결로 본격화하는 순간이었다.
 
  여기서는 숙종도 일단 숨 고르기를 한다. 그리고 마침 이날 숙종은 남인의 양대 이론가인 허목과 윤휴(尹鑴·1617~1680년)의 경연출입을 특명으로 내렸다.
 
  당시 송시열에 대한 숙종의 인식은 단순명료했다.
 
  “송시열은 효종의 예우를 입었는데도 보답하려고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서자(庶子)라는 폄칭(貶稱)을 가하였으니,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분명한 사실(史實)이자 사실(事實)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인조(仁祖) 이래 조선은, 아니 조선 왕실은 뜻있는 신하들이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정통성을 크게 상실하고 있었다. 이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史實)이자 사실(事實)이었다. 14세 소년왕의 권력이 68세 대로(大老) 권력을 제압하고 있었다.
 
  1월 5일 우의정 김수항이 사직서를 제출했고 다음 날에는 남구만이 사직서를 올렸다. 1월 9일에는 좌의정 정치화가 열한 번째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허적을 제외하고 좌·우의정 모두 사직하겠다는 일종의 스트라이크를 벌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마침내 1월 12일 숙종은 “송시열을 멀리 귀양 보내라”는 명을 내린다.
 
  당시 충청도 진천 길상사에 머물고 있던 송시열은 유배 소식에 “청풍 김씨의 참소가 드디어 실행되는구나. 지금까지 더뎌진 것은 임금께서 많이 참으신 것이다”며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청풍 김씨는 김육의 집안을 말한다. 결국 68세의 대로 송시열은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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