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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지금을 읽는 ‘新당의통략’ 〈16〉

西人의 분열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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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붕당, 집권하면 예외 없이 분열
⊙ 인조반정 후 西人은 勳西와 淸西 등으로 분열
⊙ 斥和 주장한 淸西 김상헌, 노론-벽파 및 안동 김씨 세도의 길 열어
⊙ 主和 주장한 최명길, ‘진회’ ‘小人’으로 비난받아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최명길
  붕당(朋黨) 정치의 분화(分化)는 철저하게 권력 장악 여부와 연결돼 있다. 처음에는 하나의 사림(士林)이었다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분열된 것도 선조(宣祖) 때 사림이 권력을 장악하면서부터였다. 모두 주자학(朱子學)을 신봉했지만 그래도 왕권(王權) 입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동인이었고 보다 급진적으로 주자학 고수를 고집한 사람들이 서인이었다.
 
  선조 초기 일부를 제외하면 서인은 권력에서 소외됐다. 그래서 서인은 인조반정(仁祖反正) 때까지는 하나의 당(黨)으로 뭉쳐 있었지만 집권당이었던 동인은 정여립(鄭汝立)의 난과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갈라섰다. 남인은 서인에 대한 온건파, 북인은 강경파였다.
 
  선조 후반기 북인이 권력을 잡자 다시 소북(小北)과 대북(大北)으로 나뉘었고 광해군(光海君)을 밀었던 대북이 광해군 시대를 독점했다. 이에 서인과 남인이 손을 잡고 대북정권과 대립했다.
 
  한편 광해군 때 집권 세력 대북은 다시 골북(骨北), 육북(肉北), 중북(中北)으로 분열 양상을 보였다. 이런 와중에 반정이 일어나 마침내 서인이 권력을 장악했다.
 
 
  勳西와 淸西
 
  훈서(勳西) 혹은 공서(功西)의 경우 노장층은 김유(金瑬·1571~1648년)가 영수였고 소장층은 이귀(李貴·1557~1633년)가 영수였다. 훈서는 대체로 선조 때 동인, 광해군 때 대북처럼 왕권을 옹호하는 세력이었다. 대체로 반정에 참여한 공신들이 주력이었다.
 
  반면에 서인이긴 하지만 반정에는 참여하지 못했던 세력이 청서(淸西)로 김상헌(金尙憲·1570~1652년)이 영수였다.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외손자이자 김상용(金尙容)의 동생으로 임진왜란 중이던 1596년 문과에 급제한 김상헌은 무난히 관리 생활을 지냈고 광해군 4년(1611년)에는 동부승지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대북 정인홍(鄭仁弘)이 이황(李滉)을 거세게 비판하자 그를 탄핵했다가 광주부사로 좌천당했다. 1613년 인목대비 아버지 김제남이 죽을 때 김상헌의 아들이 김제남의 손자사위였기에 파직당하자 반정이 일어나던 1623년까지 10년 동안 안동에서 은거하며 지냈다.
 

  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남인과 북인을 품어 안으려는 인조와 훈서파의 보합(保合) 정치에 맞서 시비(是非) 선악(善惡)을 명확히 할 것을 주창하며 단번에 청서파 영수가 되었다. 이에 참여한 인물이 신흠(申欽), 오윤겸(吳允謙), 나만갑(羅萬甲), 강석기(姜碩期) 등이었다.
 
  이들이 정면으로 붙게 된 사건은 인조 3년(1625년) 김유가 소북 영수였던 남이공(南以恭·1565~1640년)을 핵심 요직인 대사헌에 추천하면서 일어났다. 남이공은 소북임에도 남인 이원익(李元翼)과 더불어 1615년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가 파직된 경력을 갖고 있었다.
 
 
  老西와 少西
 
  그럼에도 김상헌이 이끄는 청서파는 남인과 북인 모두를 조정에서 내몰아야 한다며 김유는 물론 심지어 인조에 대해서까지 비판의 화살을 날렸다. 이에 청서는 공서를 ‘보합’, 공서는 청서를 ‘편당’으로 몰아세우며 강대강(强對强) 충돌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청서의 이 같은 주장에는 자신들이 차지해야 할 많은 자리를 같은 당도 아닌 남인과 북인이 차지하는 것에 대한 반발 성격이 담겨 있었다.
 
  이 와중에 반정 1등 공신 이귀가 이 싸움에 뛰어들어 청서를 편들고 나서면서 정국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결국 인조는 남이공을 함경도 관찰사로 내보내고 대신에 이귀는 파직, 청서 나만갑과 박정(朴炡)은 유배 보내는 선에서 일단락 지었다. 사실상 청서의 완패였다. 이 사건 이후 훈서와 청서는 각기 노서(老西)와 소서(少西)로 바뀌었는데 약간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건창의 《당의통략》이다.
 
  〈노서는 신흠, 오윤겸, 김상용이었는데 이들은 서인과 남인을 함께 등용하려고 애썼다. 이 때문에 삼사(三司)의 박정, 나만갑, 이기조(李基祚·1595~1653년), 강석기 등은 다 김상헌의 기풍을 흠모하여 스스로를 소서라고 이름 했다.〉
 
  《당의통략》에는 당시 양측을 화해시키려 했던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의 소(疏)가 실려 있다. 당시 상황을 그 속으로 들어가 살필 수 있는 귀한 글이다.
 
  〈당이 나뉜 이래 지금까지 주축이 된 자는 전조(銓曹·이조)를 근본으로 삼고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를 손톱과 발톱으로 삼았습니다. 또 그중에 덕망이 있는 한 사람을 추대해 감주(監主:영수·당수)로 삼았습니다.
 
  (그렇기에) 무릇 인재를 쓰는 것과 막는 것, 정사의 옮고 그름이 하나같이 감주의 사사로운 밀실에서 결정됨으로써 삼사의 의견이 마치 한입에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인사권 있는 사람에게는 탄핵이나 논박을 하지 못하고 감주의 집에는 안장을 맨 말들이 문 앞에 가득하고 당당했던 공적 조정은 드디어 사당(私黨)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반정한 뒤에는 이쪽이나 저쪽의 인재들이 일시에 등용되었는데 이는 다 자기들의 명망으로 인한 것으로 다른 사람이 이끌어주어 오른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조 권한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국사를 논의하는데도 부서 상관의 지시를 받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비록 다른 의견이 간혹 나오기는 했지만 진실로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들은 해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몇몇 신하가 지나치게 고상한 의견을 갖고서 남을 너무 가혹하게 책망해 유언비어들이 떠돌아다니다 들려서 그 실마리가 함께 발동해 서로 따라서 함정 속으로 들어가게 되니 이는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남이공이 비록 유희분(柳希奮), 박승종(朴承宗)과 친한 사이이기는 하지만 폐모론을 주장한 자들과는 원수가 되어 여러 해 동안이나 유배를 갔으며 국사 경험도 이미 오래되어 계책이나 사려가 넉넉해 진실로 가히 함께 국사를 도모할 만합니다.
 
  신이 이조를 맡고 있을 때 그를 쓰고자 했으나 쓰지 못했기에 김유와 토의해 비로소 청백하고 뛰어난 관리로 통했는데 젊은 관리들이 용납하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이 같은 풍파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신이 이제 와서 남이공을 버리고 젊은 관리들을 구제하려는 것은 신의 소견이 변해서가 아닙니다. 뛰어난 여러 신하가 남이공을 공격하는 것은 남이공을 아주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맑은 신망이 다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정에서 여러 신하를 박절하게 교대시키고 남이공을 억지로 등용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主和派와 斥和派
 
  인조 말년에는 원두표(元斗杓)와 김자점(金自點)이 각각 영수였던 원당(原黨)과 낙당(洛黨)이 충돌하기도 하고 김육(金堉)이 이끄는 한당(漢黨)과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이 이끄는 산당(山黨)이 충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조 때 가장 큰 당쟁은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전후에 일어난 최명길의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의 척화파(斥和派) 간 충돌이다.
 
  먼저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 때다. 이해 1월 누르하치에 이어 황제에 오른 홍타이지가 군사 3만을 이끌고 평안도 일대를 침략, 가도에 진을 치고 있던 모문룡(毛文龍)을 공격했다. 그 후 후금(後金) 군대는 남하를 계속해 황해도 황주에 이르자 조선 조정에 화의를 제안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누구도 강화를 주창하는 이가 없었는데 최명길 홀로 화의를 주창했다. 이에 사헌부 사간원에서는 최명길의 유배를 청했다. 죄목은 강화를 청했다는 것이다. 같은 해 2월 13일 자 《인조실록》이다.
 
  〈완성군 최명길이 군국(軍國)의 정사를 마음대로 천단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일을 낭패시킨 죄가 한둘이 아닙니다. 서울을 떠나는 계책을 일찍 정한 것과 임진강을 지킬 것이 없다는 의견도 이를 시종 주장한 사람은 명길입니다. 자기 견해를 실행하기 위해 공의를 억제함으로써 국사를 이렇게 막바지에 이르게 만들었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에 이르러서도 또 화의를 자기의 책임으로 삼아 이에 교활한 오랑캐를 믿을 만하다 하고 항복한 장수를 충절이라 하는가 하면 온 나라의 힘을 다 기울여 끝없는 욕심을 채워주고 천승(千乘)의 존엄함을 굽혀 견양(犬羊)의 무리를 친히 접견하게 하였으니, 이는 다 명길이 한 짓입니다. 무릇 혈기가 있는 사람이면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속히 찬출하도록 명하여 대중의 분노를 통쾌하게 해주소서.〉
 
 
  “화친하지 않으면 망한다”(이귀)
 
이귀
  인조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최명길이 앞장서서 2월 20일 강화 교섭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는 시작일 뿐이었다. 우선 후금의 강화 조건이 무리했고 그중에서도 명나라를 돕지 말라는 요구는 조선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보다는 사대주의에 물든 조선 조정 관리들은 받아들일 생각 자체가 없었다. 이들은 주희를 따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정 안에서 최명길을 도와 강화론에 힘을 보탠 이는 뜻밖에도 이귀였다. 2월 10일 자에 보면 당시 인조는 후금 사신을 만나보려 했고 이에 주요 신하들을 불러 토의를 한다. 이때 이귀는 “화친하지 않으면 망한다”며 사신을 만나볼 것을 청했다. 이에 사간 윤황(尹煌·1571~1639년)은 이귀를 향해 “진회(秦檜·1090~1155년)가 화친을 주장했지만 반드시 이귀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정면 비판했다. 그리고 윤황은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이귀와 최명길의 죄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조정 신하 대부분의 의견을 대변한 윤황은 그 후에도 주화에 반대하며 이귀·최명길 등 주화론자의 유배를 청하고, 항장(降將)은 참할 것을 주장하였다. 윤황은 주화는 항복이라고 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삭탈관직되어 유배의 명을 받았으나 삼사의 구원으로 화를 면했다.
 
 
  ‘조선의 진회’로 지탄받은 최명길
 
  이듬해 다시 사간이 되었고 길주목사·안변부사·사성·승지·대사성 등을 거쳐 1635년 대사간에 이르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정묘호란 때와 같이 척화를 주장하다가, 집의 채유후(蔡裕後), 부제학 전식(全湜)의 탄핵을 받았다. 특히 전식이 쓸데없는 논의로 나라를 그르친 죄를 청하자, 인조 또한 “부박(浮薄)한 풍습은 통렬히 징계해 다스리지 않을 수 없어 이에 죄를 정한다”라며 윤황을 영동군으로 유배 보낸다.
 
  이때부터 시작된 “최명길=진회”라는 등식은 이후 병자호란을 거쳐 그가 죽은 한참 이후까지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병자호란이 터지려 하자 최명길은 다시 강화를 주장했고 이에 척화론자 홍문관 부교리 윤집(尹集·1606~1637년)은 소를 올려 최명길을 비판했다. 여기에도 최명길=진회 등식이 나온다.
 
  〈국정을 도모하는 것은 귓속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군신 간에는 밀어(密語)하는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의로운 일이라면 천만 명이 참석하여 듣더라도 무엇이 해로울 것이 있으며 만일 의롭지 못한 것이라면 아무리 은밀한 곳에서 하더라도 부끄러운 것이니 비밀로 한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아, 옛날 화의를 주장한 자 중에 진회보다 더한 사람이 없는데 당시에 그가 한 언어와 사적(事迹)이 사관(史官)의 필주(筆誅·비판)를 피할 수 없었으니, 비록 크게 간악한 진회로서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한 것은 명확합니다. 대체로 진회로서도 감히 하지 못한 짓을 최명길이 차마 하였으니 전하의 죄인이 될 뿐 아니라 진회의 죄인이기도 합니다.〉
 
  최명길이 인조와의 독대(獨對)를 통해 주화론을 밀어붙인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진회는 누구인가
 
진회
  진회는 남송(南宋) 사람으로 휘종(徽宗) 정화(政和) 5년(1115년)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정강(靖康) 2년(1127년) 금나라 군대가 장방창(張邦昌)을 괴뢰 황제로 세우는 것을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가 휘종과 흠종 두 황제와 함께 포로로 금나라에 갔다. 나중에 금나라 임금의 동생 달라(撻懶)를 신뢰하게 되었다. 고종(高宗) 건염(建炎) 4년(1130년) 배를 빼앗아 돌아왔다. 소흥(紹興) 원년(1131년)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다가 곧 재상(宰相)이 되었다. 다음 해 탄핵을 받아 낙직(落職)했다가 8년(1138년) 복귀했다. 이후 19년을 집정하면서 장준(張浚)과 조정(趙鼎)을 유배 보내고, 한세충(韓世忠)과 악비(岳飛), 장준 세 장수의 병권(兵權)을 회수하고, 악비를 살해했다. 사사롭게 당을 만들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은 배척하고, 여러 차례 대옥(大獄)을 일으켜 한때 충신양장(忠臣良將)의 씨가 말라버렸다. 12년(1142년) 회하(淮河)와 진령산맥(秦嶺山脈)을 잇는 선을 국경으로 하여, 금나라와 남송이 중국을 남북으로 나누어 점유하기로 합의했다. 그 조건으로 송나라는 금나라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취하고, 세폐(歲幣)를 바쳤다. 이를 소흥화의(紹興和議)라 부른다. 유능한 관리였지만 정권 유지를 위해 ‘문자옥(文字獄)’을 일으켜 반대파를 억압했기 때문에 민족주의와 이상주의를 내세운 후세의 주자학파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그의 손에 옥사(獄死)한 악비가 민족의 영웅으로 존경받는 데 반해 그에게는 간신(奸臣)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사항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오랑캐의 칩입에 대처함에 진회는 주화론을 통해 나라를 보전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스란히 후금, 그리고 청(淸)나라와 조선 관계에 그대로 대입된다.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양면적 평가가 가능할 수 있는 진회의 대처에 대해 다름 아닌 주희(朱熹)를 통한 일방적 평가가 이뤄졌고 그것이 조선에도 그대로 유입돼 주전파의 핵심 논거가 됐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이 연결고리를 소홀히 했다. 그 바람에 주전-주화 논쟁에 담긴 주자학적 함의를 전혀 비판적으로 읽어내지 못했다.
 
  실제로 최명길의 학문 수련을 살펴보면 조선 내 정통 주자학자들과는 딴 길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최명길은 스승 신흠에게 학문을 배웠다. 신흠은 주자학자이면서도 폭넓은 공부를 했다. 무엇보다 신흠은 《주역》에 정통했는데 그는 주희의 상수역학(象數易學)을 버리고 정이천(程伊川)의 의리(義理)역학을 따랐다. 최명길은 스스로 젊어서 《주역》을 수천 번 반복해서 읽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게다가 최명길은 한때 양명학에도 관심을 쏟았다.
 
  이런 학력을 감안할 때 최명길은 애초부터 명분에 사로잡히는 주자학도가 아니었고 실용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진회에 대한 평가도 시대에 따라 바뀌어왔다. 예를 들면 진회의 노력이 있었기에 왕조가 망하지 않고 150년 동안 존속될 수 있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오히려 남송을 유린했던 금나라가 남송보다 50년 먼저 망했다. 특히 오늘날 도광양회(韜光養晦), 즉 실력이 모자랄 때는 예리함을 숨기고 남몰래 실력을 기른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진회나 최명길은 재평가되지 않을 수 없다.
 
 
  元宗 추존 반대한 김상헌
 
  김상헌은 반정으로 발탁된 이후 청서파 영수로서 이조참의·도승지·판서 등을 두루 지냈고 1632년(인조 10년)에는 인조가 생부를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는 데 반대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래서 정묘호란 때는 딱히 최명길과 충돌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예조판서로 있던 1636년(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서 주화론을 배척하고 주전론을 주창하는 선봉에 선다. 이해 12월 17일 자 《인조실록》이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청대해 화의(和議)의 부당함을 극언하니 상이 용모를 바르게 했다.〉
 
  이듬해 남한산성에서 버티던 인조는 마침내 청나라에 항복을 결심하고 글을 지어 올리게 했다. 1637년(인조 15년) 1월 18일 자다. 유명한 장면이 나오는 바로 그날이다. 조선 최대 굴욕의 날이기도 하다.
 
  〈대신이 문서(文書)를 품정(稟定)하였다. 상이 대신들을 인견하고 하교해 말했다.
 
  “문서를 제술(製述)한 사람도 들어오게 하라.”
 

  상이 문서 열람을 마치고 최명길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한 뒤 온당하지 않은 곳을 감정(勘定)하게 했다. 이경증(李景曾)이 아뢰어 말했다.
 
  “군부(君父)를 모시고 외로운 성에 들어와 이토록 위급하게 되었으니, 오늘날의 일에 누가 다른 의견을 내겠습니까. 다만 이 일은 바로 국가의 막중한 조치인데 어떻게 비밀스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 대간 및 2품 이상을 불러 분명하게 유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상이 일러 말했다.
 
  “사람들의 마음은 성실성이 부족하여 속마음과 말이 다르다. 나랏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니, 이 점이 염려스럽다.”
 
  김유가 아뢰었다.
 
  “설령 다른 의논이 있더라도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상이 일러 말했다.
 
  “그렇다.”
 
  최명길이 마침내 국서(國書)를 가지고 비국(備局・비변사)에 물러가 앉아 다시 수정을 가했는데, 예조판서 김상헌이 밖에서 들어와 그 글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버리고, 이어 입대(入對)하기를 청해 아뢰었다.
 
  “명분이 일단 정해진 뒤에는 적이 반드시 우리에게 군신(君臣)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성문을 나서게 되면 또한 북쪽으로 행차하게 되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군신(羣臣)이 전하를 위하는 계책이 잘못되었습니다. 진실로 의논하는 자의 말과 같이 이성(二聖·인조와 소현세자)이 마침내 겹겹이 포위된 곳에서 빠져나가게만 된다면, 신 또한 어찌 감히 망령되게 소견을 진달하겠습니까? 국서를 찢어 이미 사죄(死罪)를 범하였으니, 먼저 신을 주벌하고 다시 더 깊이 생각하소서.”
 
  상이 한참 동안이나 탄식하다가 일러 말했다.
 
  “위로는 종사(宗社)를 위하고 아래로는 부형과 백관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는 것이다. 경의 말이 정대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실로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한스러운 것은 일찍 죽지 못하고 오늘날의 일을 보게 된 것뿐이다.”
 
 
  김상헌, ‘靖康의 일’을 말하다
 
  김상헌이 대답했다.
 
  “신이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는 압니다. 그러나 한번 허락한 뒤에는 모두 저들이 조종하게 될 테니, 아무리 성에서 나가려 하지 않더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부터 군사가 성 밑에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진무제(晋武帝)나 송태조(宋太祖)도 제국(諸國)을 후하게 대우하였으나 마침내는 사로잡거나 멸망시켰는데, 정강(靖康)의 일[송나라 흠종 때 금나라 태종이 휘종과 흠종 부자를 비롯해 황족들을 변경(汴京)에서 붙잡아 금나라로 데려간 변란]에 이르러서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당시의 제신(諸臣)들도 나가서 금나라 왕을 보면 생령을 보전하고 종사를 편안하게 한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지만, 급기야 사막(沙漠)에 잡혀가게 되자 변경에서 죽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면 전하께서 아무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때 김상헌의 말뜻이 간절하고 측은하였으며 말하면서 눈물이 줄을 이었으므로 입시한 제신들 중에 울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세자가 상의 곁에 있으면서 목놓아 우는 소리가 문 밖에까지 들렸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인조의 항복
 
  조선 국왕은 삼가 대청국 관온 인성 황제에게 글을 올립니다.[이 밑에 폐하(陛下)라는 두 글자가 있었는데 제신이 간쟁하여 지웠다.] 삼가 명지(明旨)를 받들건대 거듭 유시해주셨으니, 간절히 책망하신 것은 바로 지극하게 가르쳐주신 것으로서 추상과 같이 엄한 말 속에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의 기운이 같이 들어 있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대국이 위덕(威德)을 멀리 가해주시니 여러 번국(藩國)이 사례해야 마땅하고, 천명과 인심이 돌아갔으니 크나큰 명을 새롭게 가다듬을 때입니다. 소방은 10년 동안 형제의 나라로 있으면서 오히려 거꾸로 운세(運勢)가 일어나는 초기에 죄를 얻었으니, 마음에 돌이켜 생각해볼 때 후회해도 소용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원하는 것은 단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구습(舊習)을 말끔히 씻고 온 나라가 명을 받들어 여러 번국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진실로 위태로운 심정을 굽어 살피시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허락한다면, 문서(文書)와 예절(禮節)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의식(儀式)이 저절로 있으니, 강구하여 시행하는 것이 오늘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에서 나오라고 하신 명이 실로 인자하게 감싸주는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합니다만, 생각해보건대 겹겹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고 황제께서 한창 노여워하고 계시는 때이니 이곳에 있으나 성을 나가거나 간에 죽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용정(龍旌)을 우러러보며 반드시 죽고자 하여 자결하려 하니 그 심정이 또한 서글픕니다. 옛날 사람이 성 위에서 천자에게 절했던 것은 대체로 예절도 폐할 수 없지만 군사의 위엄 또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방의 진정한 소원이 이미 위에서 진달한 것과 같고 보면, 이는 변명도 궁하게 된 것이고 경계할 줄 알게 된 것이며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것입니다. 황제께서 바야흐로 만물을 살리는 천지의 마음을 갖고 계신다면, 소방이 어찌 온전히 살려주고 관대하게 길러주는 대상에 포함되지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황제의 덕이 하늘과 같아 반드시 불쌍하게 여겨 용서하실 것이기에, 감히 실정을 토로하며 공손히 은혜로운 분부를 기다립니다.〉
 
 
  노론-벽파의 뿌리
 
  끝내 인조가 삼전도 굴욕을 당하자 김상헌은 안동으로 은퇴했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나 귀국하였다.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효종(孝宗)이 즉위해 북벌(北伐)을 추진할 때 김상헌은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다. 그는 김육(金堉)이 추진하던 대동법(大同法)에는 반대하고 김집 등 서인계 산림(山林)의 등용을 권고하였다.
 
  이를 계기로 김상헌의 집안은 노론(老論)-벽파(辟派)로 이어지는 정통 주자학 계통 신하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훗날 순조비를 배출해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밑거름을 마련하게 된다. 김상헌은 효종 3년(1652년) 세상을 떠났는데 졸기(卒記) 일부다
 
  〈인조반정이 있자, 대사간으로서 차자를 올려 ‘여덟 조짐[八漸]’에 대하여 논한 것이 수천 마디였는데, 말이 매우 강개하고 절실하였다. 대사헌으로서, 추숭(追崇)이 예에 어긋난다고 논하여, 엄한 교지를 받고 바로 시골로 돌아갔는데, 오래지 않아 총재(冢宰)와 문형(文衡)에 제수되었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또 물러나 돌아갔다.
 
  병자년 난리에 남한산성에 호종해 들어가, 죽음으로 지켜야 된다는 계책을 힘써 진계하였는데, 여러 신료들이, 세자를 보내 청나라와 화해를 이루기를 청하니, 상헌이 통렬히 배척하였다. 출성(出城)의 의논이 결정되자, 최명길이 항복하는 글을 지었는데, 김상헌이 울며 찢어버리고, 들어가 상을 보고 아뢰었다.
 
  “군신은 마땅히 맹세하고 죽음으로 성을 지켜야 합니다. 만에 하나 이루지 못하더라도 돌아가 선왕을 뵙기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물러나 엿새 동안 음식을 먹지 아니했다. 또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구하여 죽지 않았다. 상이 산성을 내려간 뒤 상헌은 바로 안동 학가산(鶴駕山) 아래로 돌아가 깊은 골짜기에 몇 칸 초옥을 지어놓고 숨어 목석헌(木石軒)이라 편액을 달아놓고 지냈다. 늘 절실히 개탄스러워하는 마음으로 한밤중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최명길에 대한 야박한 평가
 
  청군이 물러간 뒤 최명길은 우의정으로서 흩어진 정사를 수습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에 국내가 점점 안정되었으며, 가을에 좌의정이 되고 다음 해 영의정에 올랐는데, 그사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세폐(歲幣·해마다 바치는 공물)를 줄이고 명나라를 치기 위한 징병 요구를 막았다. 1640년 사임했다가 1642년 가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이때 임경업(林慶業) 등이 명나라와 내통하고 조선의 반청적(反淸的) 움직임이 청나라에 알려져 다시 청나라에 불려 가 김상헌 등과 함께 갇혀 수상으로서 책임을 스스로 당했다. 이후 1645년에 귀국하여 계속 인조를 보필하다가 인조 25년(1647년)에 죽었다. 그의 졸기 일부다.
 
  〈추숭(追崇)과 화의론을 힘써 주장함으로써 청의(淸議)에 버림을 받았다. 남한산성의 변란 때에는 척화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하여 보냄으로써 사감(私感)을 풀었고 환도한 뒤에는 그른 사람들을 등용하여 사류(士類)와 알력이 생겼는데 모두들 소인(小人)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 졸하자 상이 조회에 나와 탄식하기를 “최상(崔相)은 재주가 많고 진심으로 국사를 보필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애석하다”라고 하였다.〉
 
  《인조실록》은 효종 때 편찬됐다. 김상헌과 달리 분량도 매우 짧고 내용도 야박한 것은 효종 때 권력과 붓을 잡은 신하들이 모두 김상헌 계열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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