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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지금을 읽는 ‘新당의통략’ 〈14〉

仁祖反正으로 ‘신하의 나라’ 조선이 탄생하다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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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人, 집권 후 功西와 淸西로 분열… 功西는 他당파에 대한 포용 주장
⊙ “黨이 나눠진 이래 지금까지 주축이 된 자는 전조(銓曹·이조)를 근본으로 삼고 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를 조아(爪牙·손톱과 발톱)로 삼았다”
⊙ 김유에게 밀린 이귀, 功西면서도 淸西 지원
⊙ 功西 對 淸西의 다툼은 老西 對 少西, 斥和 對 主和의 다툼으로 이어져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功西의 영수 김유.
  1623년 3월 13일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진행된 거사로 임금은 광해에서 인조로 바뀌었다. 흔히들 반정(反正)이라 부르지만 사실상 찬탈이었다. 정권이 대북(大北)에서 서인(西人)으로 옮아가는 순간이었다.
 
  조선에는 모두 네 차례 정변(政變)이 있었다. 정변 이후 임금과 공신(功臣)들 간의 역학(力學) 관계는 거사 준비 과정에서 임금이 관여한 정도에 정확히 비례했다. 태종은 70%, 세조는 50%, 인조는 20%, 중종은 0%였다.
 
  ‘인조반정’은 따라서 공신 세상이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해야만 인조는 왕권(王權)을 어느 정도라도 회복할 수 있는 처지에 놓였다. 인조 시대 당쟁(黨爭)을 살필 때는 마땅히 이 점을 고려하면서 접근해야 한다.
 
 
  공신책봉
 
  같은 해 윤 10월 공신 책봉이 이뤄졌다.
 
  1등 공신은 김유(金瑬)·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심기원(沈器遠)·신경진(申景禛)·이서(李曙)·최명길(崔鳴吉)·이흥립(李興立)·구굉(具宏)·심명세(沈命世) 등 10명이었다. 하나 이흥립은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에 투항해 난의 평정 후 옥에 수감됐고 책임을 느껴 자살하는 바람에 삭탈되어 1등 공신은 9명이 된다. 이들은 훗날 흔히 ‘반정 9공신’으로 불리게 된다. 그런데 좌의정에 올랐던 심기원도 회은군 이덕인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에 걸려들어 능지처참과 함께 삭탈되었고 김자점 또한 삭탈됐다.
 
  2등 공신은 이괄(李适)·김경징(金慶徵)·신경인(申景禋)·이중로(李重老)·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장유(張維)·원두표(元斗杓)·이해(李澥)·신경유(申景裕)·박호립(朴好立)·장돈(張暾)·구인후(具仁垕)·장신(張紳)·심기성(沈器成) 등 15명이었는데 이괄은 반란으로 삭탈됐다.
 

  3등 공신은 박유명(朴惟明)·한교(韓嶠)·송영망(宋英望)·이항(李沆)·최내길(崔來吉)·신경식(申景植)·구인기(具仁墍)·조흡(趙潝)·이후원(李厚源)·홍진도(洪振道)·원우남(元祐男)·김원량(金元亮)·신준(申埈)·노수원(盧守元)·유백증(兪伯曾)·박정(朴炡)·홍서봉(洪瑞鳳)·이의배(李義培)·이기축(李起築)·이원영(李元榮)·송시범(宋時范)·김득(金得)·홍효손(洪孝孫)·김련(金鍊)·유순익(柳舜翼)·한여복(韓汝復)·홍진문(洪振文)·유구(柳玽) 등 28명이었다.
 
  1등은 대부분 거사 당일 홍제원에 모인 사람들이고 2등과 3등은 거의 뒤에 합세한 경우인데 주로 1등 공신들의 자식이나 형제들이었다. 이귀·이시백 부자가 그랬고 신경진·신경인·신경식 형제들이 그랬으며 최명길·최내길 형제 또한 같은 경우였다.
 
  그런데 홍제원에 적극 집결했던 이괄이 1등이 아닌 2등에 포함됐다. 김유 때문이었다.
 
 
  이괄과 김유
 
  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에는 거사에 성공한 3월 14일 자로 중요한 사실 하나를 기록하고 있다.
 
  〈반정 이튿날 반정에 참여했던 여러 장수가 어전에서 일을 의논할 때에 이귀가 아뢰었다.
 
  “어제의 공적은 이괄이 기여한 바가 많았으니 마땅히 그를 병조판서로 삼아야 합니다.”
 
  이괄이 자리를 피하면서 말했다.
 
  “신에게 무슨 공적이 있으리오. 다만 일에 임해 회피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어제 대장인 김유가 약속 시각에 오지 않아서 이귀가 신에게 그를 대신케 했는데 김유가 늦게 왔으므로 그를 베고자 하였으나, 이귀가 극력 말려서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이 실색(失色)했다. 이에 김유가 말했다.
 
  “이경(二更)으로 시각을 정했으니 병법으로 논한다면 미리 온 자가 마땅히 참형을 당하여야 한다.”
 
  한교(韓嶠)가 “병법에는 그런 말이 없다”고 하자 김유가 “《오자(吳子·전국시대의 명장 오기(吳起)가 지은 병서)》에 있다”고 했다. 그러자 이귀가 말했다.
 
  “《오자》에는 병졸이 장수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돌진하여 명령을 어기면 참(斬)한다는 말은 있으나 미리 도착한 자를 참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또 그때 임금이 쇠고기와 술을 많이 준비해 반정에 참여했던 장수와 병졸을 모화관(慕華館)에서 대접했는데, 좌석 서열을 정하는 데 있어 이귀는 호위대장(扈衛大將)으로 북쪽에 앉았고, 김유는 거의대장(擧義大將)으로 이귀 위쪽에 앉았으며, 이괄 이하의 모든 장수들은 동서로 나누어 앉게 되었다. 이괄은 자기 자리가 김유의 아래인 것에 분노하여 물러나 흘겨보았다. 이에 이귀가 좋은 말로 화해시켰더니 이괄이 분노를 참고 자기 자리에 가 앉았다.
 
  뒤에도 이괄은 일마다 김유와 맞섰고 또 아들이 반정에 참여했는데도 등용되지 않았으며 그 아우 수(邃)는 문과에 합격했는데도 벼슬자리를 얻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훈이 도리어 김유 아들 김경징(金慶徵)보다 아래인데다가 이괄이 또한 평안병사로 서쪽 변방에 나가게 되니 앙앙거리며 분노를 품고 갑자년의 변(이괄의 난)을 일으켰다.〉
 
  실제로 병조판서 자리는 나흘 후인 3월 18일 김유에게 돌아갔다. 이괄은 거사 당시 함경도 병마절도사였지만 이때부터 좌포도대장으로 한성부 치안을 맡았다.
 
 
  이괄의 난
 
  이성무 교수의 《단숨에 읽는 당쟁사 이야기》에 따르면 반정 직후 인조와 공신들 관계는 이랬다.
 
  〈목숨을 담보로 한 거사였으므로 정치적 대가도 컸다. 인사권·군사권을 비롯한 핵심 권력이 그들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들 정사공신을 책정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잡음이 일었다. 공신 집단의 친인척들이 설치는 바람에 반정의 명분이나 정당성이 퇴색되었다. 그들은 반정 후에도 여전히 사병(私兵)을 보유한 채 위세를 과시했다. 이에 인조가 사병 해체를 종용하는 전교를 내리기까지 했지만 소용없었다. 오로지 국정을 전단(專斷)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하는 데만 부심했다. 인조는 그런 공신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400년에 태종 이방원이 단행한 사병 혁파(革罷)와 관료 중심 정치문화가 무너지고 공신들 나라로 되돌아간 꼴이었다.
 
  사실 이괄의 난은 인조의 어설픈 인사가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정 두 달 후인 5월 여진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인조는 장만(張晩)을 도원수, 이괄을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했다. 장만은 최명길의 장인이다. 인조는 이괄에 대한 신뢰가 있어 그를 보낸 것이지만 이괄은 이를 좌천(左遷)으로 받아들였다. 이괄은 영변에 주둔하면서 조선 최정예 부대 1만5000여 명을 거느리고 여진 침략에 대비했다. 이것이 어쩌면 훗날 두 차례 호란의 전조(前兆)였는지 모른다.
 
  이듬해 1월 17일 이괄이 반란을 도모한다는 고변이 조정에 올라왔다. 인조는 반신반의했으나 조사를 하지 않을 수도 없어 우선 이괄의 아들 이전(李旃)을 한양으로 압송해 오도록 했다. 이에 이괄은 아들을 압송하러 온 금부도사 고덕률·심대림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진행 과정은 우리가 다루려는 당쟁 문제와는 관련이 없다.
 
  이괄은 무서운 기세로 남하해 2월 11일 한양에 입성했고 선조 아들 흥안군 이제를 왕으로 추대했다. 인조는 공주로 피란했다. 이괄은 입성한 날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에 대패해 경기도 이천 쪽으로 달아났다가 2월 14일 부하 장수 이수백·기익헌에게 살해당했다. 인조는 2월 18일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괄의 난 자체는 당쟁 때문은 아니고 사사로운 원한 때문이지만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인조 시대 국방문제 및 당쟁과 관련해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먼저 인조 공주 몽진을 계기로 수도 방어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국왕 호위를 위해 설치된 어영청이 중앙군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동시에 관서 지방 병력이 대거 반란에 동원되었다는 이유로 관서 지방 방어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功西와 淸西의 분열
 
경기도 남양주 와부읍에 있는 김상헌의 묘. 사진=박종인 《조선일보》 기자
  인조 정권은 절대다수 서인과 극소수 남인(南人)의 참여로 이뤄졌다. 문제는 정사공신 책봉과 더불어 이미 서인 내에 큰 균열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정변에 참여한 서인은 공서, 정변에 참여하지 않은 서인은 청서로 나뉘었다. 공서는 아무래도 인조의 뜻을 받들며 통치 안정을 위해 남인이나 심지어 북인까지도 정권에 참여시키려 했다. 청서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다른 당파가 가져간다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그 중심인물이 김상헌(金尙憲·1570~1652년)이다.
 
  김상헌은 선조 때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외손자로 광해군 때 벼슬에 나와 정인홍을 탄핵한 적이 있다. 1613년 인목대비 아버지 김제남이 죽을 때 아들 김광찬이 김제남의 아들 김래의 사위라는 이유로 파직당해 안동에 내려가 지내다가 인조반정을 맞았다.
 
  이건창의 《당의통략》이 전하는 이 무렵 당쟁 구도다.
 
  〈반정 초에 공신들이 정권을 잡게 되어 선비들이 많이 따랐는데 그중에서도 김상헌은 유독 뛰어난 식견을 가졌다. 이때 훈서(勳西·공서)와 청서로 나뉘었고 또 오래지 않아 노서(老西)와 소서(少西)로 변했다. 훈서 가운데는 김유가 노장층 영수이고 이귀는 소장층 영수였다. 노서는 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김상용(金尙容·1561~1637년)이었는데 이들은 서인과 남인을 함께 등용하려고 힘썼다. 이 때문에 삼사(三司) 박정(朴炡), 나만갑(羅萬甲), 이기조(李基祚), 강석기(姜碩期) 등은 다 김상헌의 기풍을 흠모해 스스로를 소서라고 이름했다.〉
 
 
  김상용과 김상헌
 
  이 중 흥미로운 인물은 김상용이다. 그는 김상헌의 형으로 우의정에 올랐다. 병자호란 때 왕족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란했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될 때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했다. 그런데 동생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동생 김상헌은 초지일관 근본주의자였다. 인조 2년(1624년) 1월 25일 김상헌을 기복(起復)시켜 이조참의 관직을 내려주려 했으나 사양했다. 기복이란 상중에 불러올려 관직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같은 해 8월 28일 김상헌은 대사간(大司諫)이 됐다. 광해군 때 동부승지(정3품 당상관)였으니 같은 품계를 맡은 셈이었다. 당시 실록이 전하는 인사평이다.
 
  〈김상헌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깨끗하며 언동이 절도에 맞고 안팎이 순수하고 발라서 정금(精金)이나 미옥(美玉)과 같았으므로 바라보면 늠연(凛然)하여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뜻으로 범하지 못했고 문장도 굳세고 뛰어나며 고상하고 오묘하여 옛글 짓는 법에 가까웠다. 조정에서 벼슬한 이래로 처신이 구차하지 않고 악(惡)을 원수처럼 미워했기 때문에 여러 번 배척당했으나 이해(利害)와 화복(禍福) 때문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광해 때에는 폐기되어 전야(田野)에 있었는데 반정(反正)한 처음에는 상중이기 때문에 곧 등용되지 못했다가 상을 마치자 맨 먼저 이조참의에 제배(除拜)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간장(諫長·대사간)에 제배되니 사람들이 다 그 풍채를 사모했다.〉
 
  김상헌은 인조와 공신들이 주도하던 남인과 북인 포용정책을 보합위주정치(保合爲主政治)라고 공격하며 공신들과 날을 세웠다. 심지어 이귀를 직접 공박하기도 해 젊은 사대부들의 기대를 모았다.
 
  김유(1571~1648년)는 반정 후 이괄과의 충돌을 이겨내고 병조판서로서 인조를 공주까지 호가했고 이조판서에 올라 다른 당파에 대해서도 열린 태도를 보였다. 거사 바로 다음 날 소북(小北) 원로 김신국(金藎國·1572~1657년)을 추천하며 이렇게 말했다.
 
  “김신국은 재능과 국량(局量)이 상당히 있어 등용할 만합니다. 신이 일찍이 강계부사(江界府使)가 되었을 때 신국이 평안감사였기 때문에 익히 그의 재능을 압니다.”
 
  실제로 김신국은 평안감사로 기용됐고 이괄의 난 때는 연좌되어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으나 무혐의로 밝혀졌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호조판서로 후금(後金) 사신과 조약을 맺었으며 공조·형조판서를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결사항전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더 큰 인사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인조 3년(1625년) 2월 4일 김상헌이 이조참의가 되던 날 소북 영수 남이공(南以恭·1565~1640년)이 대사간에 임명됐다. 남이공은 북인임에도 광해군 때 폐모(廢母)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두 달 후인 4월 5일 남이공은 대사헌(大司憲)으로 옮겼다.
 
  한 달 후인 5월 7일 홍문관에서 직격탄을 날렸다. 김상헌을 따르는 홍문관 응교 박정(1596~1632년)이 앞장섰다. 이에 최명길과 장유는 보합(保合)의 중요함을 역설하며 만류했으나 끝내 홍문관 부응교 유백증, 교리 나만갑·김반, 부수찬 이소한 등과 함께 소(疏)를 올려 남이공 교체를 주장했다.
 
  이에 이조판서 김유는 10일 사직 표명으로 맞섰다. 인조는 사직서를 물렸다. 이번에는 박정 등이 11일 사직서 제출로 맞섰다. 13일 경연에서 《맹자》를 읽은 다음에 정치 현안을 이야기하던 중 김유가 말했다. 남이공을 지지하는 자기 입장을 밝힌 것이다.
 
  “신은 보잘것없는 자질로 욕되게 전석(銓席·이조판서)을 차지했으니 밤낮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직 마음을 치우치지 않게 가지고서 우러러 상의 뜻에 보답하려 할 뿐입니다. 요즘 신이 남이공을 쓴 일은 사심을 둔 것이 아닙니다. 신의 생각에도 남이공이 소싯적에는 경박해 일 벌이기를 좋아한다는 비방이 없지 않았으니 그의 처신을 점검하면 인망에 차지 못한 점이야 있겠지만, 현명한 군주가 반정하여 재주와 기량이 있는 신하를 버리지 않는 중이고 또 편당(偏黨)의 화(禍)는 나라를 망치기에 족한 것이라서 신이 항상 경계하여 왔습니다. 때문에 이공을 대각에 의망(擬望)함에 있어 삼공(三公)에게 문의해보았더니 모두 가합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옥당(홍문관) 논의가 갑자기 경각간에 나왔으니, 신은 모르겠습니다마는 동배들 중에 청질(淸秩)을 지낸 자가 과연 모두 남이공보다 낫습니까? 옥당이 삼공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또 장관에게 청하지도 않고서 경솔하게 발론했으니 참으로 좋지 못한 일입니다.”
 
  김유는 “편당의 화”를 언급했다. 당파가 형성될 우려가 있다는 말이었다. 결국 남이공이 함경도관찰사로 나가는 선에서 이 문제는 마무리됐다.
 
  이 논란이 한창일 때 김상헌은 도승지로 인조의 지근거리에 있었다. 5월 17일 인조는 박정 등을 지방으로 좌천시켜버린다. 인조는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은 편들고 뜻을 달리하는 사람은 배척하는 조짐을 자라나게 할 수는 없다. 내가 이를 걱정해 그 병폐를 경계시켰더니 저들이 다시 장황한 말로 공론을 가탁하고 허위를 꾸미어 군상(君上)을 속이고 있다. 그런데도 대각(臺閣)은 조용하기만 한 채 바로잡는 사람이 없으니 오늘날의 국사는 한심하다 할 만하다. 박정 등 다섯 사람을 논사(論思)하는 시종(侍從)의 지위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아울러 체직(遞職)시키고 해당 조(曹)로 하여금 궐원에 따라 외방에 보직시키게 함으로써 그 버릇을 징계케 하라.”
 
  인조는 분노하고 있었다. 이에 도승지 김상헌이 나섰다.
 
  “박정 등을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은 신들이 즉시 전지(傳旨)를 받들어 해사(該司)에 분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남이공이 헌장(憲長·대사헌)에 합당치 않다는 논의 또한 박정 등이 갑자기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이를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은 편들고 뜻을 달리하는 사람은 배척한다’고 하는 것은 실로 실정이 아닙니다. 더구나 박정 등의 상소에 외람한 말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또한 어찌 감히 공론을 가탁하고 허위를 꾸며 군상을 속일 마음이 있겠습니까. 박정 등은 오래도록 경연에서 상을 모시었으니 진실로 다른 뜻은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상의 아량은 하늘처럼 넓으시니 필시 재차 생각하실 것이기에 신들은 삼가 붓을 쥐고 기다립니다.”
 
 
  黨爭의 구조
 
  완곡하지만 박정 등을 구원하려는 뜻이 분명했다. 이 무렵 최명길도 소를 올려 양측을 화해시키려 했다. 그런데 그 소 중에 조선 시대 당쟁 때 흔히 말하는 당파의 구조와 영수(領袖)가 어떻게 정해지는지를 서술한 대목이 있다. 이는 우리가 당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당이 나눠진 이래 지금까지 주축이 된 자는 전조(銓曹·이조)를 근본으로 삼고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를 조아(爪牙·손톱과 발톱)로 삼았습니다. 또 그중에서 덕망이 있는 한 사람을 추대해 감주(監主·영수)로 삼았습니다.
 
  무릇 인재를 등용하는 것과 막는 것, 정사의 옳고 그른 것들이 한결같이 감주의 사사로운 방에서 결정됨으로써 삼사 의논이 한 입에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인사권이 있는 사람에게는 탄핵이나 논박을 하지 못해 감주의 입에는 안장을 멘 말들이 문 앞에 가득하고 당당하던 조정은 드디어 사당의 와굴(窩窟·소굴)이 되었습니다.
 
  반정한 뒤에는 이쪽이나 저쪽의 인재들이 일시에 등용되었는데 이는 다 자기들의 명망으로 인한 것으로 다른 사람이 이끌어주어 오른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조 권한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사헌부·사간원에서 국사를 논의하는데도 상관 지시를 받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남이공은 비록 유희분·박승종과 친했기는 하지만 폐모론을 주장한 자들과는 원수가 되어 여러 해 동안이나 귀양 갔었으며 국사의 경험도 이미 오래되어 계획이나 사려가 넉넉하여 진실로 함께 나라의 일을 도모할 만합니다.〉
 
  이는 곧 박정 등의 감주가 김상헌임을 간접적으로 밝힌 글이다. 인조 또한 그래서 이들을 ‘편당’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에 김상헌이 이끄는 청서는 인조, 김유, 최명길 등을 ‘보합’이라고 비판했다.
 
 
  김유와 이귀의 대립
 
김유와 대립했던 이귀.
  흥미로운 것은 이 싸움에서 김유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공신이었으면서도 반걸음 뒤처져 있던 이귀(1557~1633년)가 보여준 입장이다. 이귀는 이후에도 입장을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당쟁노선보다는 개인의 정치적 입지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논쟁이 한창이던 5월 13일 이귀는 경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박정 등의 논의가 경솔하다고는 하지만 만일 공론을 가탁하여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배척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본의가 아닙니다. 예부터 사류(士類)는 자기 의견을 고집하는 것을 직절(直截·곧은 처신)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김상헌의 의견과 거의 같았다. 5월 20일 두 사람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날 실록이다.
 
  〈상이 조강에 《맹자》를 강했다. 특진관 이귀가 박정 등이 무죄함을 극력 진언하고 또 나만갑의 재주와 기국(碁局)을 칭찬했으며 또 김유가 때를 타서 사람을 모함한 잘못을 공박했다. 좌상 윤방도·박정 등을 외직에 보임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유가 더욱 화를 내어 이귀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양사(兩司)의 논박이 이미 극심하여 두렵기 그지없는데 또 상신(相臣)의 큰 힘이 가세하니 외로운 이 사람은 아, 어디로 가야 합니까? 바라건대 대감은 제가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시오.”
 
  이는 이귀에 대해 불평하는 뜻을 품은 것이었다. 박정은 한때의 청류(淸流)로 또 과감하게 직언하는 풍도가 있었는데 당시 재상에게 미움을 사서 끝내 외직에 보임되기에 이르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마지막 문장은 실록 사관의 평이다. 이들은 이미 청류 혹은 청서 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귀는 왜 김유에게 반기를 든 것일까? 이성무 교수의 풀이다.
 
  〈이런 상황에 공신 이귀가 갑작스럽게 개입해 정국은 더욱 혼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공신 세력의 핵심인 그가 청서를 두둔하고 나선 것이다. 반정의 원훈이었지만 김유에게 밀려 2인자로 처져 있었고 인사권까지 김유가 독차지하고 있는 것에 불만이 컸다. 따라서 그가 청서를 두둔한 것은 김유를 견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렇게 왕과 공서, 공서와 청서, 공서와 공서가 서로를 견제하는 분쟁의 양상에 견디다 못한 인조는 특단의 조처를 강구했다. 일단 당사자인 남이공을 외직인 함경감사로 발령했다. 그런 다음 이귀를 파직(罷職)하고 박정, 나만갑을 귀양 보냈다. 결과는 청서의 참패였다.
 
  공서와 청서의 대립은 인조 7년을 전후해서 노서와 소서의 대립으로 바뀌었다가 병자호란의 와중에 척화(斥和)와 주화(主和)로 나뉘어 다시금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귀, ‘인조 조정의 조헌’을 자처
 
  박정·나만갑 등을 외방으로 내쫓고 두 달이 지난 7월 12일 이귀가 인조에게 아뢰었다.
 
  “옛날에 조헌(趙憲)을 괴귀(怪鬼)라 했으나 그 뒤에 사람들은 과연 조헌의 말을 생각하게 되었으니 신은 곧 오늘날의 조헌입니다. 신의 말이 들어맞은 것이 또한 많으니 멀리 내다보는 사람이라 할 만합니다.
 
  신 이귀가 전하를 보좌함에 만일 (김유처럼) 아부했다면 반드시 부귀를 이루어 이미 정승 자리에 이르렀을 것이고, 신 또한 (김유처럼) 조정을 핑계하여 무죄한 학사(學士)를 물리쳤다면 작위도 얻을 수 있고 임금의 총애도 굳힐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세 학사가 외직에 보임된 것은 참으로 불행인 것입니다. 근일 이것 때문에 사대부들 사이에 기상이 수참(愁慘)합니다. 나만갑 같은 자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벌할 만한 죄가 없고, 재능이 많고 천성이 곧으니 버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신이 김유에게 묻기를 ‘나만갑이 무슨 죄가 있는가?’ 했더니 김유 또한 ‘그가 무죄하나 다만 그 마음씨가 험함을 죄준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논함에 어찌 마음을 주벌하는 법을 쓸 수 있겠습니까. 나만갑의 죄는 정엽(鄭曄·1563~1625년)의 사위가 된 데에 불과합니다. 정엽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박정과 함께 김유의 아들 김경징이 살인한 죄를 논했는데 오늘날 나만갑이 외직에 보임된 것은 여기에서 싹튼 것입니다.”
 
  이에 대한 인조의 답이다.
 
  “찬성 이귀가 조정을 업신여기고 공로를 믿고 교만 방자하니 극히 놀랍다.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推考)해 훈신(勳臣)이 제멋대로 하는 버릇을 징계토록 하라.”
 
 
  黨爭 시대를 사는 관리들의 초상
 
  정엽은 송익필의 제자로 정통 서인이다. 그러면 ‘세 학사’ 박정·유백증·나만갑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함평현감으로 쫓겨갔던 박정은 이듬해 문과 중시에 급제해 동부승지가 되었고 그 후 병조참의에 있다가 붕당을 지어 자기 당파만 천거했다는 탄핵을 받아 남원부사로 좌천됐고 홍문관 부제학에까지 올라 소서파 핵심인물로 활약했다.
 
  이천현감으로 나갔던 유백증(1587~1646년)은 정묘호란 때 중앙관직으로 복귀했으나 1629년 공서를 공격하다가 가평군수로 좌천됐다. 그러나 1634년 인조 생부 정원군 추숭(追崇) 논의 때는 입장을 바꿔 적극 찬성해 2년 후 이조참판에 올랐다. 그 후 대사헌에 이르렀다.
 
  강동현감으로 쫓겨갔던 나만갑(1592~1642년)은 이귀의 도움으로 중앙으로 복귀했고 그 후 김유 등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갔다. 고향에서 은거생활을 하던 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단신으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공조참의 병조참지로서 군량 공급에 큰 공을 세웠다.
 
  이들 세 사람 이력은 당쟁이 격화된 시절을 살아야 했던 인조 초 관리들의 전형적인 프로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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